11월말~12월 담아둔 책을 구매했다. 장바구니는 금방 차는데 읽는 속도는 느리다.
배송 상태 때문에 양장은 늘 교보문고를 이용해서 구매 내역 정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지만 책이 찍혀서 오거나 찢어져서 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

1.
근대서지는 꾸준히 주기적으로 구입 중이다. 이전 회차들도 시간이 걸릴 뿐 배송이 되기 때문에 다행이고 이런 양질의 잡지들이 더욱 꾸준히 생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와 근대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관심을 가져도 좋을 잡지다.

2.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 상을 구입한 건 1년 전인데 하는 이제야 구입을 하게 됐다. 읽는 책들이 여러 개라 참 이럴 땐 민망해진다. 연구재단에서 만든 책이기 때문에 믿고 구입할 만하다.

3.
역사의 원전.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띤 책이다. 내용부터 관심이 갔는데 김기협 선생님께서 역자로 참여하셨다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어서 읽어야지.

4.
그리고 장바구니에 이미 들어있던 책들.
페미니즘 관련 책은 어느새 야금야금 읽고 쌓여가고 있다. 요즘 답답한 세태를 보고 있자면 더욱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하며 실천해야한다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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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의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이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과학자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 P551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19세기에는 질병의 보다 용이한 전파와 질병에 대한 보다 성공적인 대응이라는 긴장관계가 발전했다. 한편으로는 교류와 이주의 증가가 전염병의 전 지구적 전파의 편리한 통로가 되었다. - P558

19세기에는 의학적 구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좌절과 난관이 있어도 진보란 이름은 부정될 수 없다. 이 과도기는 세 방면, 혹은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자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 제너가 발명한 백신 접종술이 지구상에서 천연두 발병률을 대폭 낮추어 놓았고, 신코나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가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효과를 극적으로 높여놓았다. 두 번째 단계. 파스퇴르와 코흐로 대표되는 실험의학의 탄생. 실험 의학은 이 시대의 중요한 발명이었으며, 19세기 70년대에 처음 위력을 드러냈고 10년 이내에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했다. - P589

세 번째 단계. 제너와 파스퇴르가 세운 의학사의 두 가지 새로운 이정표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기가 세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승리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 P590

한편으로 많은 중요한 의학적 발견이 식민지에서 탄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배척당하던 의료와 약물 시험이 식민지에서 완성되었다. 식민지에서 의료와 위생 관련 직업의 첫 번째 목표는 식민자의 생존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많은 식민지에서 사람들은 의학적 수단의 도움을 받아 피식민자의 노동 능력을 높임으로써 식민통치의 합법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유럽이 발원지가 아니지만 지구 전체를 감염시킬 수 있는 질병에 맞섰다는 것은 전통적인 봉쇄와 격리 전략의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19세기에 질병에 맞서는 싸움은 국제적인 임무로 인식되었다. - P592

발달된 공업사회와 비교할 때 현대 이전 사회는 문명의 정도에 관계없이 모두가 빈궁한 사회였다. 그러나 경제의 현대화가 빈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이것이 인류가 ‘현대성’의 성취를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 21세기에 진입한 뒤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여전히 기근이 존재하고 기근 때문에 수시로 폭동이 발생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서 여섯에 하나는 상시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세기의 생산력 증가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물질적 생존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바꾸어 놓지 못했다. - P632

근대 초기의 전 지구적 식물 이동현상의 대상은 소수의 희귀 사치식물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농업경제와 조경업 경제를 바꾸어놓았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생산성과 소비행태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 P649

전 지구적 시각에서 19세기를 살펴보면 인류 대부분의 삶의 물질적 조건이 의심의 여지 없이 개선된 시대였다. 계몽시대 이후 대서양 양안 세계의 문화의 기본 이념인 진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말하자면, 이런 막연한 판단은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모든 변화의 추세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변화의 추세가 상호 모순적인 경우가 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8세기를 1840년대까지 이어지는 ‘긴’ 18세기로 본다면 유럽의 18세기는 여전히 기아의 세기였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분명한 기아의 ‘탈지역화’ 현상이 나타났다. - P674

그러나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식량생산 지역의 입장에서는 식량 유통범위의 확대는 오히려 재난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발전의 피해자는 혁신에서 ‘뒤쳐진’ 나라나 혁신이 비켜간 나라만이 아니었다. 쉼없는 ‘현대화’의 침입도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 P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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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획정은 크게는 광범위한 지역의 정치적 재편(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부터 작게는 철도건설을 위한 지역계획과 농촌 토지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미세한 조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에서 진행되었다. 공유지(Allmende)의 해체와 사유화 과정은 때로는 정부의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다른 경우에는 정부의 엄격한 지도와 계획 아래서 진행되었다. 국가가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세금을 징수하자 누가 무엇을 부담해야하는지, 토지 소유자와 점유자 중에서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촌락공동체는 더 이상 과세대상이 아니었다 — 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 P352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이것은 정부활동이 지방에까지 확산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이후 복잡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세기 혹은20세기에 시행된 거의 모든 토지개혁은 이런 부분에 대한 대비책을소홀히 하지 않았다. 토지의 계획적인 운용은 현대사회의 기본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소련, 동유럽, 중국의 대규모 집단화였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기울이지 않았다. 하나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토지등기제도와토지의 자유로운 처분권이 없는 국가는 ‘현대‘ 국가라고 할 수 없다. - P353

상이한 국경 관념이 충돌하는 곳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국경을 획정하는 현장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대부분 현지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쪽이었다. - P362

국경은 부분적으로는 영토로서의 깊은 뿌리가 없는 행정구획이었고, 부분적으로는 (특히 ‘간접통치‘ 상황일 때) 식민지가 되기 전 통치구역의확인 표지였다. 제국 사이의 국경은 온전한 연속선으로 표시되는 기우는 드물었고, 유럽의 국경처럼 면밀하게 지키기도 어려웠다.
모든 제국에는 열려져 있는 측면이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그것은알제리 사하라였고, 영국의 경우는 인도 서북 국경이었고, 제정러시아의 경우는 카프카스였다. 그러므로 국가적 경계의 역사적 순간은식민지가 해체되고 새로운 주권국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945년이후 시기에 찾아왔다. 이때 ‘철의 장막과 함께 유럽과 한국이 분단되었다. 국경은 유사 이래 최고도로 군사화 되었다. 국경의 불가침성을 확인하기 위해 핵무기와 철조망이 동원되었다. 국경에 대한 19세 기적 강박관념이 20세기 60년대에 극치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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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 P294

기독교도라는 종교적 자기인식을 넘어선 보편적인 유럽인의 의식‘은 계몽주의 시대에엘리트들 사이에서 점진적이며 산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유럽 전체에서 보편적인 유럽인의 인식이 완성된 것은 아무리 늦어도 나폴레옹 시대의 일이었다. - P313

공간을 묘사하는 모든 개념은 역사를 통해 자리 잡아야 한다. 근대 사회지리학의 연구 성과는 공간, 자연형태, 지역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학자들의 믿음이 옳은 것임을 증명해준다.54) 역사를 연구하는 (혹은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학술적 저서와 학교 교과서, 세계정치에 관한 언론의 보도, 동시대의 현실이나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지도를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지도는 지리학 개념을 표출하는 효과적인 매체일 뿐만 아니라 공간인식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19세기에 지도의 정확성을 요구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있었다. 오랫동안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실용적 목적 — 교통, 전쟁, 식민통치 —— 이외에 19세기 초부터 지도제작에는 새로운 목적,
즉 지도를 통한 국가영토의 시각화가 추가되었다. 최근까지 국가의식과 지도를 통한 표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고 연구성과물도 풍부하다.55) 영토가 비교적 완전한 민족국가와 비교했을때 영토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방대한 제국은 시각정보를 끊임없이 갱신해야 할 필요가 컸다. 1830년대 이후 제국의 영토를 유명한붉은색으로 표시한 세계지도가 보급되면서 영국 대중에게 제국의식이 생겨났다는 해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 P320

19세기 후반에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역사 발전과정이 병행하여어났다. 첫째, 유럽의 직업적 또는 비직업적 지리학자들이 전례 없대규모 ‘탐험’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가적 후원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 경쟁을 펼쳤다. 세계지도 위에 표된 적이 없거나 측량된 적이 없는 ‘공백지역‘이 하나씩 채워졌다.
행자와 지리학자들도 식민 제국주의가 이용할 수 있는 통치지식을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지역 지도의 정확성도 끊임이 높아졌다. 그러나 1780년대가 되어서야 파리의 모든 건물을 표시한 도시 지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지도의 제작목적은 관광 안나용이 아니라 재산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자료용이었다. 5) 이 지도의 등장으로 인류는 마침내 관찰 각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한 측량 수치를 근거로 하여 세계의 모습을 그린, 관점에 따라서 결정되는 심리적 지도가 아니라 지표면 형태를 과학적으로 묘사한 지도를 갖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일은 1차 대전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고 이 때문에 유럽과 미국 지리학계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지도는 동시에 군사 지휘관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군이 이길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 지휘관들이 갖고 있던 지도가 적이 갖고 있던 지도보다 더 정확했기 때문이다. - P325

둘째, 공간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세계 각지에서 재정비됨에 따라객관화가 크게 확대되었다. 인류의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오래된 중심은 점차 해체되었고 많은 지역이 어느 순간에 자신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새로 발전하고 있는 더 넓은 공간범주 국제적인 국가질서 또는 국제적인 교역망과 금융망의 변두리에 있다는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중심과 좌표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예컨대, 1868년 이후 일본은 자신이 참조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중국이 아니라 군사·경제적으로 더 친근한 ‘서방‘ 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나자 일본은 또 한 번 시각을 바꾸어 아시아대륙을 자신의 제국주의적 확장의 대상 공간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시선을 내륙으로 향하던 국가들은 전대미문의 각종 위험이 대양으로부터 자신에게 밀려오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위험이 찾아오자 같은 방향에서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다. 일부 오래된 제국의 중심은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로부터 서서히 밀려나면서 아라비아에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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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적 변화는 특수한 시간구조, 특수한 속도, 특수한 전환점, 특수한 공간 차이와 일정 정도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이다. - P197

19세기는 파편화된 세기, 무명의 세기,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있는 긴 과도기라고 부를수 있다. 어쩌면 난감한 세기일지도 모른다. - P201

연대의 상대성은 역사 시기를 묘사할 때 채용된 각양각색의 명칭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 시기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3단론 유럽에서는 1680년대 이후 점차적으로 채택되었다은 풍부한 사료를 통해 그 연속성이 증명되는 다른 문명권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이론이다. 다른 문명권에도 이른바 혁신이나 부흥이란 논법은 있었다. 그러나 유럽과 접촉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보다 우월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 P208

여러 가지 증거가 보여주듯이, 앞으로 확장된 ‘긴‘ 18세기와 뒤로 확장된 ‘긴‘ 19세기 사이의 시간적 중첩기에 시대적 특징을 부여하고 이를 ‘안장형 시기‘란 이름을 붙여 개념화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안장형 시기‘ (Sattelzeit, 鞍裝形 時期)는시대구분과는 관련이 많지 않은 맥락에서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Reinhard Kosellek)이 제시한 개념이다.41)이 시기는 대략 1750년에서 1850년 사이(때로는1770-1830년)를가리키는데, 이 시기 이후에 중간기로 진입한다. 오늘날 되돌아보면 이 중간기에 응축되어 나타난 여러 가지의 문화현상은 최소한 유럽의 범주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19세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이 물결‘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래서) 우리는 이 10년 동안을 한 역사시기의 특수한 분파라고 하지 않을 수없다. 우리는 당시에 통용되던 한 개념을 빌려서 이 시기를 세기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세기의 분기점이 아니라 세기의 유일무이한 마지막이었다. - P221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진정한 19세기 또는 ‘빅토리아시대의 19세기를 ‘몸통시기‘ (Rumpfperiode) — 독일사를 논할 때 쓰는 표현인데,
"1830년대와 1890년대 사이의 상대적으로 짧고 역동적인 과도기" 이다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 P230

모든 역사 발전과정은 상이한 시간의 틀 안에서 발생하므로 간단하게 단기·중기 · 장기로 구분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궤적이 연속적인지 비연속적인지, 가역적인지 불가역적인지, 가속적인지 감속적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과정은 반복적으로 나 - P238

타나고(코젤렉이 말한 ‘중복적 구조‘)76) 어떤 과정은 독특한 가변성보인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변화의과정을 근거로 하여) 역사학자들이 나누어 놓은 학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환경요인이 사회구조에 미치는향, 환경요인이 경제행위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 등이 그런 것이다.7)만약 변화의 과정들이 병렬로 일어난다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흔히
‘비동시적‘이다. 우리는 통일된 자연의 시간질서 속에서 시간질서이외의 시대구분 방식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 발전과정의 위치와 의미를 판정하려 한다.78) 미세한 시간구조를 밝혀내야 하는 과제에 비한다면 역사를 세기‘로 나누는 일은 필요악에 불과하다. - P239

역사는 선형적 누진적 궤적을 따라가는 발전이 아니라 끊임없이 - P241

반복되는 ‘원주형(圓周形) 운동이란 사상을 전근대적 사고방식의표현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 또한 전혀 가치 없는 분석도 아니다. 기제사학자들이 연구한 다양한 시간 폭을 가진 생산과 경기순환 모델은 19세기 경제학의 중요한 성과이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패권의긴 물결(long waves) 이론‘은 세계의 군사력 대비에 관한 연구에서계몽적 방식이었다.80) 역사운동의 선형 모델과 주기형 모델은 둘 다서방에 알려져 있었지만 18세기 이후 서방은 점차 미래개방적 역사발전관을 받아들였다( ‘진보‘ 도중에 정체하거나 우연한 후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81)유럽에서 시작된 진보사관은 그 후 점차 다른 문명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어떤 문명(예컨대 이슬람문명)에서는 이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비연속적 선형 역사관 — 역사를 연속적발전과정이 아니라 수많은 단절된 순간의 연속적 배열로 본다을버리지 않았다. 82) 현대 역사과학 영역에서 이처럼 본토화 된 역사관과 시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적 실체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되는지 최소한 고려해볼 가치는 있다. - P242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기울여야 할 문제는, 사회적 시간을 한 시대의 주기로 보았을 때 사회의 집단인식과 부합하는지, 어떤 조건 아래서 그렇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복잡한 외피를 뚫고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은 역사주의 인류학과 사회학의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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