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한국의 가부장제에 관한 해석적 분석
1. 조선의 가부장제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강한 생활력, 적극적 지탱자로서 여성의 역할의 폭이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경제활동이 없는 남성들을 대신하여 여성의 활동이 넓어졌다는 분석이 흥미로웠다. 단, 정치적 활동이 아닌 경제적 활동 위주였다.
’자궁 가족‘은 번역한 용어가 와 닿지는 않았다.
2. 근현대 가부장제
근대 초기 여성의 권한은 높아졌으나 중심 가치는 신분 의식, 가부장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졌다.
현대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정착되며 여성의 나약화, 한편으로는 자립화가 이어졌다.
남아선호가 일방적으로 여성이 강요받았던 측면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성이 자발적으로 유리함에 의해 선택했다는 측면은 약간 놀랍기는 했다. 하긴 예전에는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고 나조차도 그런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내 어머니조차도 할머니께서 아들을 둘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남성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당연히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공식적인 부자 관계에 대비된 가족적 모자 관계 내지 ‘자궁 가족‘을 통해 여성은 상당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유교 윤리의 실천이 사회적 지위 상승에 중요한 변수로 부각됨에 따라, 여성은 적극적 행위자로서 ‘열녀‘ ‘효녀‘ 등의 공적 인정을 받을 기회가 생겼으며, 또한 ‘선비상‘을 이상으로 하는 사회에서 ‘세정‘을 모르는 남성의 보완자로서 경제 생산적 활동을 포함하여 일상 생활을 꾸려가는데 있어서 여성 역할의 비중은 매우 컸다. 여성은 어려운 단절적인시집살이를 이겨나가야 했던만큼 성취적이고 강한 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성만의 안채 문화는 그들 나름의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기능을 수행하여왔다. 궁극적으로 혈통을 극도로 중시한 당시의 체제에서는 대가족내의연장자이자 혈통 계승자의 어머니로서 여성의 지위와 활동에 상당한권한을 부여한 셈이며 여성들은 이 여자를 십분 활용하여 가부장제의 유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왔던 것이다. 여성이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는 점과 여성 자신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붕괴하여가는 체제를 강한 생활력으로 보완하며 적극적인 지탱자가 되어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현대적 변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P100
한국 사회에서의 가부장제 극복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매우 분명해진다. 첫째는 조선 시대로부터 사회 구성의 이념적 기본이 되어온 엄격한 공공/가정 그리고공/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인식을 토대로 형성되고 재형성되어온 사회적 관계 구조, 특히 성과 부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새롭게 확대되고 있는 산업 자본주의적 여성 통제의 기제즉, 미시적으로는 낭만적 사랑에 근거한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거시적으로는 국가 및 기업 등 조직의 확대에 따라 더욱 강화되는 인간의도구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가 문제가 된다. - P127
울프 Wolf(1972)는 중국 여성의 삶에 성취적· 획득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궁 가족 uterine family‘ 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남편의 집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여성은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이 집안에 더해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구축해간다. 자궁 가족내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며느리가 포함되며 남편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가족은 먼 조상까지를 포함하여 연속성이 중시되는 남성들의 가문과는 별 관계가없는 사적인 가족으로 어떤 뚜렷한 이데올로기나 형식적인 구조도갖고 있지 않다. 가족 유대는 주로 감성과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나, 주목할 점은 그것이 구성원에게 공식적 가족 못지않은 구속성을는다는 점이다. 울프(1972: 37~38)는 여성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으로 보이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있었던 근거는 바로 자궁 가족과 공식적 가족의 목표가 다행스럽게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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