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그리스인은 자신들이 라틴인이라 부르던 유럽인을 문명이뒤떨어졌다며 멸시했다. 하지만 라틴인들 역시 십자군 원정을 통해그들과 접촉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그리스인을 혐오하게 된다. 그 - P61

시작이 은자 피에르의 십자군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였다. 어쨌든형식적으로는 친절한 배웅을 받고 떠난 민중 십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발칸 지역에서 만났던 것처럼 공포에 떠는 그리스도교가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셀주크투르크의 병사들이었다. - P62

공작 고드프루아가 도착하기 전에,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미 일이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르만족이 정복한 영국에서 도망쳐온 색슨족을 용병으로 쓰는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러나 황제 알렉시우스는 작전을 바꾸지 않았다.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한 것이다.
제후들이 오리엔트 땅에서 하려는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찬동한다.
오리엔트에 자신들과 같은 강력한 그리스도교도의 나라가 생기는 것도 찬성했는데, 그것은 이슬람 세계와 비잔틴제국 사이의 완충지대가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지원은 약속하지만, 그 대신 제후들은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후의 신분은 비잔틴제국 황제의 신하가 된다. 그렇다면 나중에 제후들이 그들의 군사력으로 정복한 땅의 모든 최고영유권도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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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카노사 성은 이탈리아 중부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으며 개혁파의지지자로 알려진 마틸데 백작부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 성안, 큼직한 난로에서 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따뜻한 거실에서 승리감을만끽하는 쉰일곱 살의 교황. 한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다보는가운데, 눈 속에 홀로 서 있는 스물일곱 살의 황제.
‘카노사의 굴욕‘은 서유럽 전역의 그리스도교도에게 교황의 권위와권력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파문은 풀렸으나 교황의 완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 P15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어제까지 도적이었던 자가 그리스도 전사가 되고, 형제나 친지와 다투던 자가 이교도와의 정당한 싸움터에서 그 분노와 원한을 풀 날이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푼돈을 받고 하찮은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자도, 이제부터는 신이 바라시는 사업에 참가하여 영원한 보수를 받게될 것이다." - P24

그 시대의 공작, 후작, 백작, 남작이란, 자기 힘으로 획득하고 자기힘으로 유지하는 영지의 주인이고, 그것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군사력으로, 핏줄로 이어진 일족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역사에서는 ‘귀족‘이라고 쓰지만 실상은 ‘호족‘이자 ‘부족‘이며, 스코틀랜드로 치면 ‘일가‘라는 뜻의 ‘클랜(Clan)‘이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그들 모두 유래가 있는 문장(章)을 가지고, 행군할 때는 그것을그려넣은 깃발을 앞세웠으며, 전장에서는 그 각양각색의 깃발 아래 분 - P50

투하게 된다.
교황 우르바누스가 십자군 전사는 누구나 가슴이나 등에 붉은 십자를 달라고 한 것도, 가지각색의 표시를 방치하게 되면 십자군으로서의통일성을 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 문장들을 모두 없애는 것도 비현실적이니 최소한 붉은 십자 표시로 통일성을 기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군웅할거 시대에 이러한 ‘영웅‘들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내보내는것은, 서유럽 그리스도교도의 최고 우두머리이기도 한 로마 교황에게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작이나 백작으로 호칭되지만 실상은 ‘클랜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우두머리가 십자군 원정이라는 모험에 나서겠다고 결정한이상 일족 무리는 그에 따라야 했다. 이것이 당시 남자들에게는 당연한 삶의 방식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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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15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치열한 독서의 흔적이군요!!
 

네루와 국민회의당 지도부가 추구하는 종류의 발전을 이루려면, 제3세계 연대와 국가 주권, 행동의 자유가 필수였다. 따라서 새로운 인도는 여러 면에서 국내외적으로 냉전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인도는 1955년 반둥회의를 개최하는 데 중심이 된 국가였고, 1961년 비동맹운동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대외정책에서 인도는 포용적인 국제기구, 그중에서도 특히 유엔의 역할을 강조했다.
유럽이나 초강대국의 긴장완화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네루는 하나의 국제체계로서 냉전이 인도의 이익과 인도가 대표한다고 자부하는가치를 훼손한다고 믿었다. 외국 지도자들은 이따금 네루의 도덕주의적 훈계와 인도를 선례로 내세우는 태도에 싫증을 냈다. 하지만 인도는 아시아의 본보기로서나, 네루가 인도를 냉전의 해독제로 내세운 방식을 통해서나, 그들이 인정해야 하는 강대국이었다. - P594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정권을 찾고자 했는데, 그런 나라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서 민주주의를, 소련은 남예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견했지만, 두 나라모두 이웃 나라를 적대하는 데 몰두한 작은 나라였기에 별로 도움이되지 않았다. 전반적인 전략적 관점에서 보자면, 두 초강대국 모두 부정적인 의미를 제외하고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소련과 미국은 각자 나름의 이유로 또 다른 중동 전쟁을 미연에 방지해야했다. 두 나라는 점점 상대를 중동에서 밀어내 세계 냉전에서 유리한고지를 차지하려고 했다(하지만 중동에서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큰 이득을 얻기는 어려웠다). 두 초강대국이 볼 때 중동은 유동성이 지배하는 지역으로, 지속적인 이점을 얻기가 어려웠다. - P658

데탕트를 무너뜨린 여러 상황 가운데 일부는 초강대국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제3세계에서 잇따라 혁명이 일어나면서 화해 과정이 불안해졌고, 급속한 경제 변화도 긴장완화정책을 훼손했다. 애초에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가 긴장완화를 서로 달리 해석한 것도 분명했다. 소련은 두 초강대국이 진정으로 대등한 위치에 섰다고 믿었다. 반면 미국의 대다수 지도자는 미국이 이끄는 세계 체계에 소련이 협조하기로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은 다른 지역의 혁명을 지원하고, 소련의 힘을 확대하기 위해 워싱턴과 소련의 관계에서 의식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 P697

결국 데탕트를 무너뜨린 것은 미국의 국내 정치였다. 닉슨과 키신저는 대다수 미국인이 받아들이려는 수준을 넘어 소련과 함께 냉전을 관리하려고 했다. 워터게이트사건 이후 자국의 모든 정부를 향한 미국인의 불신은 극을 향했다. 긴장완화정책은 이 과정의 희생양이었다. - P698

1980년대 초 냉전은 굉장히 아슬아슬했다. 어쩌면 1962년 쿠바미사일위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추세도 있었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절 이상으로 추구한 경제 권력의극단적 중앙집중에서 벗어났다. 제3세계 소속임을 내세운 일부 나라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시장 거래에 문호를 개방하는 개혁을실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유럽의 통합과 경제 팽창으로 유럽에서 변화가 시작되자, 점차 철의 장막 동쪽에 있는 나라도 그 매력을견디기 힘들었다. 특히 한 초강대국 소련이 이제 더는 유럽에서 어떤목표를 추구하는지 그 자체도 확신하지 못했기에, 다시 활기를 띤 초강대국 간 냉전조차 이런 인력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었다. - P702

집권 초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안팎의 정치 지도를 다시 그리고자 했다. 그가 볼 때, 냉전은 적어도 전 지구적 대결과 대화의 부재라는 고전적 형태로는 이제 의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의 출발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아니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였다. 그는 유물론적 분석을 믿는 동시에, 결단력 있는 소수가 사회 전체를 대신해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믿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발전하게 하는 데 서방의 관행을 일부 채택해야 함을 깨달았다. 배워서 적용하는 것은 약함의 징표가 아니라 힘의 원천이라는게 그의 판단이었다. - P768

하지만 국제질서 재편을 위한 고르바초프의 계획은 유럽을 넘어 확대되었다. 그가 볼 때, 냉전을 끝내는 것은 냉전이 장악하기 전인 19세기 말에 존재한 국가 이익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였다. 그가 품은 전망은 잘 조직된 세계, 즉 유엔 및 포괄적인국제 협정으로 국제 문제를 규제하는 한편, 냉전 시기에 지역 분쟁에서 양쪽이 모두 너무도 자주 벌인 무차별 학살을 방지하는 세계였다.
세계 전체가 자유와 자유시장이라는 미국식 개념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미국이 확신하는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의 전망은 순진해 보였을수 있다. - P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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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미국은 세계 경제에서 꼬박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1970년에 그 수치는 4분의 1 이하로 계속 떨어졌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주요 경쟁자는 폐허 그 자체였지만, 한 세대 뒤 이 나라들은 재건되었고 따라서 더 효과적으로경쟁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을 정말로 우려하게 만든것은 낮은 국내 성장률과 높은 정부 지출, 특히 방위 지출이 결합되 - P556

었다는 사실이다. … 경쟁자들은생산성에서도 전반적으로 미국을 따라잡았다.
1971년 미국 정부는 자국의 경제 이익을 지키는 행동을 했다.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는 고정환율을 돌연 중단함으로써, 사실 다른화폐에 대한 미국 달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미국의 수출업체와기업을 도왔다. 이로써 미국은 다른 대다수 화폐를 고정환율로 달러에 연동한 브레턴우즈체제를 의도적으로 파괴했다. - P557

닉슨은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소련과 미국의 관계에서 안정된균형을 찾고자 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전쟁 위험을 줄이고, 시간이흐르면서 미국이 창조한 국제체계에 들어오도록 모스크바를 구슬리는 것이었다. 닉슨이 볼 때, 소련은 혁명을 지나온 국가로, 이데올로기보다는 국가 이익이 더 중요했다. 소련이 미국의 세계 권력에 도전하지 않는 한, 대통령은 기꺼이 다른 초강대국으로 소련을 인정하고동유럽에서 패권을 유지하게 내버려둘 것이었다. 소련의 러시아 지도부는 어쨌든 동료 유럽인이라는 게 닉슨의 결론이었다. - P571

리처드 닉슨이 중국과 관계를 트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측면에서 뚜렷한 성과가 있었다. 주적 미국과 데탕트를 이룰 기회를 놓칠수도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무기 제한을 협상해 합의로 밀어붙였다. 닉슨이 베이징방문 3개월 뒤인 1972년 5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이 조인될 준비가 끝났다. 브레즈네프에게 이 정상회담은 정치인 경력에서 최고점이었다. 전략무기제한협정은 소련이전략 핵전력에서 미국과 맞먹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따라서 군사적으로 동등해졌다고 가정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년간 소련이 국제관계에서 내놓은 핵심 개념 일부가 포함된 전체적인 문서를 미국 대통령이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 P579

긴장완화 과정은 무계획적이고, 일부 중요한 쟁점은 모순적이었지만, 1975년에 그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정말로 용기가 필요했다. 노년의 브레즈네프는 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았고, 데탕트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와 동료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에서 세계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에 접어들었고, 따라서소련이 국제문제에서 우위에 선 것이 아닌지 의심했는데도 말이다.
중국 지도자들도 비록 긴장완화 과정에서 얻은 안보를 국내에서 한층 사악한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그래도 과거와 용감히 단절한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든 것은 바로 리처드 닉슨이다. - P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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