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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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소설 <인생>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고 해야 하겠지. 중국어 오디오북을 들으며 번역본으로 함께 읽었다.


어느 청년이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원어 제목은 活着(활착: 살아간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원어 제목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대략 1940년 후반 무렵부터 1960~1970년대 무렵까지 중국이 배경이므로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국공내전, 문화대혁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비중을 높게 두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사건은 밑밥 역할만 할 뿐이고 그걸 맞닥뜨린 개인의 역경과 감정들을 표현하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겪게 될까. 아직 많은 시간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나름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고 여겼다. 그러다 사회 생활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구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어도 개인의 환경에 따라, 사건을 맞닥뜨리는 태도와 자세, 행동력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젊은 시절 푸구이는 노름과 여자에, 폭력까지 쓰니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그래도 끝까지 캐릭터를 품기는 어려움). 아내인 자전, 딸인 펑샤, 아들인 유칭이 갈수록 안쓰러워 독서하면서 계속 눈물이 나 혼났다. 보통 슬퍼도 눈물 찔끔 흘리고 마는데 펑펑 울고 말았다.


어릴 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많다. 그래서 그 소중함을 잘 몰라 쉬이 지나쳐버리고 뒤늦게 후회를 하곤 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 중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학교 친구는 학교를 떠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 각자 일이 바빠 소원해져서 헤어지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직장을 떠나면 그만이다(한 직장에 오래 붙어 있는 적이 거의 없다보니 더 그런 것 같기도). 결혼 여부도 변수가 된다. 친한 친구들도 각각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아무래도 각자 배우자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그저 주기적으로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이 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부고를 듣는 경우가 참 많아졌다. 


위화의 부모님이 의사 출신이라 죽음을 간접적으로 많이 봐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상으로 특별한 순간보다는 일상과 평범함의 소중함에 대한 강조가 은연 중에 드러나있다. 살면서 대박을 만난 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내 몸 하나 누울 곳이 있고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고, 몸이 아프지 않다면 1차적으로는 다행이라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 먹고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면 더 좋겠지만 이는 부가적인 사항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아무리 힘겨워도 견디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인생>을 통해서 남은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폐 끼치지 않고 죽느냐, 죽을 때 내가 먼저 죽느냐, 나중에 가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자전의 삶을 통해 얻었다. 결국 매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에게 잘 하고 논란 만들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무척 어려울 듯).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원래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는 상황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음표가 생긴다. 내가 먼저 죽는다면 그가 살아야 할 짊도 만만치 않겠구나, 그가 먼저 죽는다면 나도 또한 그리할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살아온 세월만큼 그 그리움이 더해지지 않겠는가.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배가 다 익으면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지.


천천히 들판은 고요 속에 잠기고, 사방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노을빛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평범해서 좋았던 문장들이 꽤나 많아서 필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운명'론자는 아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이 다를 뿐이고 이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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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1 -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 한국 여성문학 선집 1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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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지식과 문화의 유입은 여성들의 삶과 지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학교를 비롯한 근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자각한 여성 주체들의 움직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의 등장, 개화 계몽의 열기로 꽉 찬 공론장의 부상은 여성의 읽기와 쓰기를 이끈 요인들이다. 이 시기 공적 담론은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를 통해 유포되었고, 이와 같은 공론장에 글 쓰는 여자가 출현한 것은 여성문학사의 기원을 이루는 중요한 장면이다. 특히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강제 해산을 반대하며 대중들이 광장에서 연설의 장을 열었던 사건은 집 안의 여성들이 ‘소문’이나 ‘신문’이라는 간접화된 통로로나마 공론장의 열기를 경험하고 광장의 목소리를 내도록 촉발했다. <여자계>(1917), <신여자>(1920), <신여성>(1923) 등 여성 매체는 논설, 독자 투고뿐 아니라 수필, 소설, 시 등 문학적인 글쓰기를 훈련하는 장을 마련했다. 여성의 권리와 각성, 자유연애에 대한 열망을 담은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민족이나 가부장적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개인의 목소리를 근대적 문학 양식에 담은 신여성에 의한, 신여성에 대한 글쓰기다. - P15~16


한국 여성문학 선집 시리즈는 남성 중심의 문학사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한국문학(사)에 여성문학을 여성의 관점으로 서술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다. 그동안 여성문학 선집이 출간된 이력이 있으나 대부분 시기가 1960년대 이전으로 한하고, 장르도 소설로 편중되어 있었다. 이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여성 연구자들이 20년 정도를 투자하여 특정 시기,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근현대 시기 여성 문학 텍스트를 엄선해 골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펀딩하기 전에 어떤 텍스트가 실릴지 감이 오지 않아 고민했었는데 막상 작가의 목록을 보니 아는 작가의 이름도 있지만 알더라도 이름만 아는 경우,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구입하기를 잘했다 생각한다. 시리즈는 총 7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898년 무렵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 넓은 시기를 아우른다.


1권은 한국 여성문학이 탄생한 시점인 독립협회 활동 시기인 1898년부터 1920년대까지를 다룬다. 


성상 폐하의 외외탕탕하신 덕업으로 임어하옵신 후에 국운이 더욱 성왕하여 이미 대황제 위에 어하옵시고 문명개화할 정치로 만기를 총찰하시니 이제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가 성의를 효순하야 전일 해태한 행습은 영영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준행할 새 사사이 취서되어 일신우일신 함을 사람마다 힘쓸 것이어늘 어찌하야 일향 귀먹고 눈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만 빠져 있나뇨. 이것이 한심한 일이로다. 혹자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야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 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 - 여학교설시통문, 이 소사 김 소사 , P36~37


이 글의 주인공은 두 ‘소사’다. ‘소사’는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 말로 이 소사는 양성당 이씨로 왕가 종신 출신이었고, 김 소사는 양현당 김씨로 순성여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인물이다. 양성당 이씨는 찬양회 회장이었기도 했다. 찬양회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 여기고 순성여학교 설립을 후원하는 역할을 한 모임이었다. 찬양회는 이후 나오게 되는 여성 단체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 글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당시는 대한 제국이 있던 때로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새울 취지를 남긴 글이다. 여자도 남자와 다르지 않는데 남자가 주는 것만 받아 먹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띈다. 


길바닥에, 구을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도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 저주, 김명순, P53




아랫목 벽에 걸린 로댕의 ‘다나이드’를 사진 박은 그림이며 머리맡에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란 영시를 흰 비단에 옥색으로 수놓은 족자며, 또 이름 모를 물새가 방망이에 붙들어 매이어서 그 자유인 오 촌 가량의 범위를 못 벗어나고 애쓰는 그림이 어느 것이나. 자유를 안타깝게 바라는 소련의 취미가 아니랴. 이런 것들을 뒤돌아 보는 소련의 마음이 어찌 대동강의 능라도를 에두른 이류가 합쳐지지 않기를 바라랴. 흐름은 제방을 깨뜨린다! - 도라다볼때, 김명순, P123


1권에 등장하는 작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이가 김명순이다. 일단 생각이 깨어 있다는 것에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글을 정말 유려하게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을 보면 평소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경험하는지 절로 알게 된다. 

그녀는 특히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다. 김명순은 매일신문사 기자로도 활동했고 개인 시집을 내기도 했으며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발간된 조선 시인 선집에 여성 작가로 유일하게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저주>는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얼마나 덧없고 유한한 감정인지 알 것이다. 이를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도라다볼때>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 여자의 감정을 잘 묘사한 소설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박사가 된 여성의 설정은 당시 신여성의 트렌드를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지금 생각하니 내가 생각하는 이성은 그이와 같은 이는 아니었나이다. 남성답지도 못하고 줏대가 없고 여자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인격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이왕 상당한 아내를 둔 이상 절대로 정조를 지켜야 하겠다는 자각이 없는 그이었나이다. 

내가 처음에 그를 사랑한 것은 이성이라고는 도무지 접촉해보지 못하다가 부모의 명령으로 눈감고 시집을 가서 친절하게 구는 이성을 대하니 자연 정다워진 데 지나지 않는 것나이다. - 자각, 김일엽, P223


우리의 조선 여자 사회는 아직도 유치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 이때는 어느 때입니까? 세계는 바야흐로 개조가 되려 하고 새 문명의 서광은 훤-하게 비치옵니다. … 몇 세기를 두고 우리를 냉혹하게도 압박하고 우리를 극심하게도 구속하던 인습적 구각을 깨뜨리고 벗어나서 우리 여자가 인격적으로 각성하여 완전한 자기 발전을 수행코자 함이외다. 남자들은 이를 이르되 파괴라, 반항이라, 배역이라 하겠지요. 고래로 우리 여자를 사람으로 대우치 아니하고 마치 하등 동물같이 여자를 모두 몰아다가 남자의 유린에 맡기지 아니하였습니까? -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김일엽, P232~233


김일엽은 이화학당 출신으로 잡지 <신여자>를 창간한 주인공이다. 이후 입산 후 수계를 받았다. 시나 소설보다는 논설이나 수필을 많이 썼다. 

<자각>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남편이 결국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뒤 여자가 모진 경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게 되는데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지만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은 자각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환경이 바뀌어도 본인이 깨닫지 않으면 결국 변할 수 있는 기회는 없으니까. 

수필이나 논설을 많이 썼다고 하더니 역시 달랐다. 소설보다 아래 논설문의 글이 훨씬 좋았다. 읽고 있으면 절로 손목을 불끈 쥐게 된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 인형의 가 제3막, 나혜석, P240


나혜석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글(이는 그림도 마찬가지)을 발표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작품들이 적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그녀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정신여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했고 매일신보에 만평을 연재하기도 했다. 삼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다른 독립 운동가들을 돕기도 했다. 화가로서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꾸준히 입선하는 등 그녀는 참으로 귀재였다. 

<경희> 등 여러 소설을 남겼다. <인형의 가>는 조선판 노라를 떠올리게 한다. 더 이상 누군가의 인형으로 살지 않겠다는 주체성의 포효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글들을 만날 수 있다. 앞에는 원문, 원문이 끝난 뒤에 현대어를 실어 두어서 보기가 좋았다. 원문이 해석이 어렵지는 않지만 단 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아무래도 오늘날과 다른 철자의 표기, 띄어쓰기가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능한 원문으로 읽어보고 뒤에 현대어로 변경된 부분을 읽는다면 비록 그 시기를 경험하지는 못했더라도 작품을 통해서 그 시간을 더 잘 경험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


2권은 1920년부터 1945 해방 이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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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 정승화, 장태완 등 관련자 100인의 증언과 사진으로 재구성한 12·12 그날의 진실
이계성 지음 / 폴리티쿠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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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매스컴 사진 및 영상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죄수복을 입은 두 사람, 전두환과 노태우다. 어릴 때라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음에도 뇌리에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 때는 그저 그들이 부패한 죄로 사법대에 올랐다고만 생각했다. 정치는 무관심이었고 그저 노래 듣고 부르기 좋아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 책은 30 년전 5.18 진상 조사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법 심판대에 올랐을 때쯤 출간되어 나왔다가 올해 5.18 무렵 수정되어 다시 나왔다. 작가가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당시 상황을 궁금해 하는 젊은 층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12.12 쿠데타 전후 사정을 실고 각주 등을 보충하는 등 작업을 추가했다고. 12.12를 잘 모르거나, 타이틀만 알고 있거나, 안다 해도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책이다. 작가가 기자라 그런지 글이 마치 르포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장감이 넘쳐서 쉴 틈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를 왜 일으켰는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가? 궁금증을 위해서는 그 배경을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체로 10.26 이후 전두환 및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준비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꼭 쿠데타여야 했는가.'를 답하기 쉽지 않다. 책에서도 살펴보듯 군 내부, 정부 부처 인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씨앗임을 알아야 비로소 사건의 본질에 가 닿을 수가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윤필용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윤필용 사건은 1972년 유신 마무리 후 1973년 유신의 주역이었던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박종규는 경호실장, 강창성은 보안사령관이었고 윤필용은 수도경비사령관이었는데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과 윤필용 간에 밀착이 이루어지자 박종규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윤필용이 유신 자축 모임에서 이후락에게 한 '각하(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다음은 이후락(형님) 차례' 발언을 꼬투리 삼아 그를 끌어내리고자했다. 발언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사건을 조사하라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군 세력이 경상도 출신으로 걸러지게 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세력에게는 기회가 된 셈이다.   


책을 읽으며 12.12와 관련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던 여러 순간들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질문이 생겨나더라. 


먼저, 안타까웠던 순간들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놀랐던 것은 정승화 총장이 쿠데타 당일 오후 전두환을 불러 미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 전두환의 숨은 의중을 파악했어야 하는데... 


2. 정승화 총장 납치를 위해 온 보안사 인력과 방어 세력 간의 충돌로 총격전이 벌어지자 순찰 중이던 경비대는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공관경비대장인 황인주 소령과, 반일부 준위는 반대편 방향에서 몰려오는 육본 헌병 병력(33헌병대 소속 병력)과 마주쳐 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육본 병력은 정승화 총장 연행 때 문제가 될까봐 합수부에서 파견한 인력들이었다. 이들이 약간의 시간차로 부딪치지 않았다면 납치되던 정승화 총장의 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3. 전두환은 반란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 갔다.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의 동의를 얻어 오라며 재가를 거부하며 버텼으나 결국은 막판에 전두환의 손을 들어줬다. 최규하가 끝까지 재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꽤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4. 윤성민 참모차장은 사태를 확인하고 반란군을 단호히 진압하기로 결심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휘하 병력을 확실히 장악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국방장관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으나 실패하자 총리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로부터 통화를 거부당하고 말았다. 대통령과 참모 차장이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다면?


5. 육본 지휘부 세력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쿠데타 대응에 철저히 실패했다. 리더가 부재했다고는 하나 신군부의 쿠데타임을 인지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식으로 전두환 측에 대응했다면? 


6.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사태 마지막까지 본분을 지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 진압 작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가 최소한 자리를 지켜 지휘권을 행사했다면 어땠을까? (본인의 소임을 다 했다면)


7. 신군부는 1공수여단을 서울로 진입시켰다. 이에 장태완 수경 사령관은 30사단 박희모 소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병력을 동원하여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막아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박 사단장은 육본과 합수부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 결국 합수부 측의 지시를 따라 서울 주요 통로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를 따랐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이 떠오르거나 인상 깊은 장면도 많았다.


1. 전방에 있던 9사단과 제2기갑여단을 서울로 불러들인 합수부 측은 과연 국가를 위한 선택이라 말할 수 있나?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반격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과정에 의한 수단이 아니었나.


2. 쿠데타 당일 밤 육본 참모회의가 열렸다. 전방 사단 병력들은 장관 없이 병력 동원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상황에서 윤성민 참모차장은 참석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태완 소장은 명령부터 내려야 한다고 단언했고 이 의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군수 참모부장인 안종훈 소장 뿐이었다.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쿠데타군에 손을 들자는 거요?"(P299) 그의 말은 백번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종훈 소장은 5.17 전국 계엄 확대 회의 때도 소신 발언을 했다는 것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중심을 지키는 군인들은 내쳐지고 권력 맛을 아는 인간들만 승승장구를 했으니 참...


3. 전두환은 쿠데타 이전부터 군 개편을 구상했고 정승화 총장의 혐의가 없음을 알면서도 박정희 시해 동조자로 몰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선배 장성들을 모으면 정승화를 연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생각한 그 자신감이 소름끼친다.


4. 신군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12.12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인 위컴은 전방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킨 것에 특히 분노했다. 군 핵심 전방 부대를 쿠데타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12.12 사태를 10.26 사건 수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신군부는 이후 정치에 가담하지 않을 거란 약속을 하며 빠져나갔다.


1980년 3월 5일 정승화 총장은 내란방조죄 혐의를 받아 재판부에 넘겨졌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범인임을 알고도 나라의 실권자가 될 것으로 판단해 그의 내란 행위를 도왔다.'고 공소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정승화 변호인 측은 내란 행위 여부가 논란인 상황에서 공판은 대법원 판결 후로 연기해야 한다며 공판 기일 변경 신청을 했으나 재판부는 그 요청을 기각해버렸다. 군검찰은 내란방조죄를 적용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물증이 아닌 심증만으로 불충분함이 발견되어 확인 과정에서 7년형으로 확정됐다.  


같은 해 4월 14일 전두환은 기존 보안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직하게 되면서 막강한 권력자의 지위에 오른다. 바깥은 개혁의 바람으로 일명 '서울의 봄'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권력의 정점에 오르며 국가를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착착 해 나가고 있었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겸직 요구를 관철하려할 때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최광수 비서실장을 압박하는 등 여러 사정이 있었다는데 과연 최규하 대통령은 이 때 전두환을 올리는 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12.12 쿠데타 사건을 책을 통해 복기하면서 노재현 국방 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의 진심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고 사망한 두 사람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영화 <서울의 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완독하고 이제서야 보았다. 영화는 빠른 전개로 쉴틈없이 몰아치지만 아무래도 등장 인물이 가명을 사용하고 사건을 아무래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보충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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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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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았다. 몇 달전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놓쳤었는데 이번에 책 <노마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사실 책의 내용과 영화 내용은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연결되는 지점은 있다. '떠나는(방랑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몇 년전부터 부쩍 몸이 하나둘씩 고장이 나고 회복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듦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많아진다는 것도 그렇다.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할 때가 많은데 가능하면 가까운 사람들과 덜 아프게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자식 등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떠나 보낸 이들 등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영화의 등장인물들로 나오는데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동안 어딘 가에 주거하며 정착하는 삶이 안정적인 것이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20년을 넘게 일하면서도 내 집 하나 없는 지금의 삶은 이미 그런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도 은퇴하면 여행하려고 요트를 사두었으나 어느 날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요트는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서도 가진 것들을 놓은 채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자원의 소비와 순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지구의 자원을 쓸 줄만 알았지 이를 자연에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 지 고민하지 않는 민망한 지구인으로 살면서도 깨닫는 바가 없다면 이 지구는 앞으로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 속 풍경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영화관에서 더 큰 화면으로 보았다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른 하늘과 대지는 복잡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느끼게 만든다. 


<노마드>의 저자는 21세기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 방문하여 경험한 바를 책의 서두와 말미에 썼다.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마치 영화 속 풍경(물론 위치는 완전히 다르지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책의 내용을 압축하여 말한다면 유목민들의 역사일텐데,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관계에 기반하여 기술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기원전 8천년 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문명사를 요약해놓았다. 인물, 사물을 묘사하듯 그려서 지루함을 덜하게 하고, 세계사답게 특정 연도에는 세계 곳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술하는 것도 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괴베클리 테페는 고대 문명사를 다시 썼을 정도로 지금은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이곳은 인간이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유적이어서 특히나 중요하다. 수렵-채집, 이동 중심의 생활을 하던 인간이 정착하는 인간이 된 것은 농경의 시작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어떤 문화도 과거와의 단절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수렵-채집을 하면서도 농경으로 잉여 생산이 늘어나면서 점차 정착으로 이어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로부터 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수많은 유목민들이 거쳐가는 대자연이었다. 초원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은 여러 모로 말이 중요 자원일수밖에 없었다. 말은 1차적으로 인간의 이동 수단이 되었는데 말에 바퀴가 결합함으로써 마차 또는 전차로 변화하면서 인간의 이동 수단을 확장시켰다.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성벽은 길가메시 신화가 서성이는 공간이다. 우리는 길가메시를 인간을 대표하고 엔키두는 자연을 대표하여 문명 대 야만으로 쉽게 치부해왔다. 하지만 엔키두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위협으로 느끼면서도 이를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시리스 신화는 홍수를 통제하는 법을 알려주는 존재인 '오시리스'와 사막을 지배하는 '세트'가 나온다. 이집트는 오늘날에도 문명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과연 이집트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일구어낸 문명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어쨌든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뼈아픈 실패처럼 여겨졌고 이는 신화로 남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그런 구도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이 전투가 끝나고 온갖 모험을 하며 귀향하는 이야기로 유목민과 정주민 간의 갈등 끝에 정주민으로 귀착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간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다루는데 그저 모험과 전쟁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는데 유목민적 삶의 특징에서 볼 수도 있다는 지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흥미로웠다.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 시절부터 국력을 키우다가 크세르크세스 때가 되면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할 정도가 된다. 페르세폴리스는 온갖 물자가 드나들어 부유했고, 여러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다양성을 지닌 곳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당시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곳이었으나 알렉산드로스 1세에 의해 파괴되면서 유목 세계가 파괴되었다.)


흉노와 서쪽에 있는 그들의 짝 스키타이인은,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 말하는 동과 서의 세계를 연결하면 혜택이 생긴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텝 민족은 사치품 교역을 이끌어간 초기의 견인차였다. 성벽 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민 위주로 유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주의 필요성 때문에 부득불 말 타기의 명수가 되고 수레와 전차를 발명했던 스텝 민족은 방대한 거리를 횡단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알고 있었고, 낯선 것에도 편안해했다. 또한 생소한 관습을 용인할 줄 알았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 P152


4세기 초 기후 변화로 세계적으로 강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때 목초지나 물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늘어나 고트족, 훈족은 도나우강을 넘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기번은 훈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였으나 훈족은 BC451년 로마와 고트족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로마 힘을 약화시킨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븐 할둔은 <역사서설>을 통해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유목민의 능력에 관심을 두었고 그 중 아랍인들을 유목민들 중 가장 굳센 종족이라 생각했다. 아랍인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책을 통해서 비롯된 것들이 크다. 

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700년대 중엽에는,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과 발칸 반도의 오지로 규모가 축소된 반면, 아랍의 지배권은 인더스 강에서부터 대서양까지 뻗어나가 이전의 어느 제국보다 커졌다. 하지만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핵심 측근과 장군들의 대다수는 도시 정착민이었지만, 아랍인의 85퍼센트와 8세기 무슬림들은 대부분 이동하는 삶을 살거나 유목민의 전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 P193


아바스 왕조 때가 되면 종이가 전해져 필사가 가능해진다. 이후 타타르인 몽골이 부상하는데 중국, 위구르에 이어 호라즘까지 섭렵하며 힘을 키우다 나중에는 캅카스부터 카스피해에서 고려까지 7000km가 넘는 영토에 다다를 정도가 된다. 몽골의 중요 도시는 카라코룸과 사마르칸트다. 두 도시 모두 방대한 제국을 대표하는 도시이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개방성 있는 도시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빌럼 수도사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까지 한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등을 통해서 몽골이 세계 중심이자 문화적, 경제적으로 확장성을 지닌 곳이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무너뜨린 오스만은 제국의 길에 들어선다. 그들은 천막, 말 중심의 유목민 뿌리를 잊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대서양 횡단이 시작된 이후 베이컨과 갈릴레오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자연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은 '근면'을 신념으로 삼았는데 원주민을 게으르고 방랑적 기질이 있는 이들로 치부했다.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말 영어 사전을 만들며 노마드, 유목, 방랑을 배제하여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존슨 박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두 견해 중 어느 것도 그가 왜 "nomad"를 사전에 등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사하라를 본 적이 없고, 엠티쿼터 나고비 사막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막desert을, "황무지, 황야, 황폐한 고장,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사전에 실었다. 방랑자wanderer는 "방랑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과 같은 사람이면서, 그와 동시에 토지나 일터로는 쓸모없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이동 방목을 뜻하는 transhumance도 그의 고향 마을에서 행해진 일이었는데도 사전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migration도 싣지 않았다: P345~346). 빙켈만은 고대예술사를 통해 유럽의 고대 문명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기계식 파종기와 제니 방적기가 발명되고 공장식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영국의 생산력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후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증가하여 생활비가 늘어나면서 부익부빈익빈으로 구성원 간 불평등이 심화한다. 미국에서는 라이플(총기)이 개발되고 철도가 깔리면서 들소 등이 내몰리고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무너뜨리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을 상대로 미군이 패배하면서 희대의 학살극이 벌어졌고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당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곱씹을수록 문명과 야만의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이며 이는 일방적인 잣대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넓고 큰데도 여전히 이들의 역사는 정주사보다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유목민들 자체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이 크다. 저자도 서두에 밝혔듯 이 책의 서술도 서구의 사료를 이용했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동방과 서방의 기준도 오랫동안 서방이 기준인 것처럼 이어져왔듯 정주사와 유목사도 그래왔다. 그래도 최근에 와서 문명에 대한 비판이 많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되는 자연과 기후의 영향이 그렇다. 순환이 중요함을 알았던 유목민들의 지혜가 앞으로는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방랑하는 우리의 "다른 반쪽을 재평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바를 밝히는 작업은 모두 우리 정착민들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우리가 협력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가볍게, 그리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갔다는 점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행동할때 기민함과 유연함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계와 지속적으로 균형을 맞춰갔다는 점에서삶의 또다른 방식, 인류의 "다른" 반쪽이 먼 과거의 비옥한 정원에서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사냥하며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유지해온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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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7-08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내용 궁금했는데 화가님 덕분에 궁금증을 풀었네요. ^^

거리의화가 2024-07-09 08:4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오랫만에 댓글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한데 궁금증을 푸셨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7-09 0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옮겨다니면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았군요 그건 사람이 적어서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이 늘지 않았을지... 인류가 죽 그렇게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역사는 바꿀 수 없으니...

한곳에 산다 해도 그렇게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7-09 08:47   좋아요 1 | URL
수렵-채집 생활에서 시작한 인간이 정착을 주로 하게 된 이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수렵-채집 기간이 훨씬 길었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일장일단이 있을텐데 미래인들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해요. 그러나 지구를 망가뜨렸다는 것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희선 님 감사합니다^^
 
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줄리아 로벨 지음, 심규호 옮김 / 유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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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란 무엇인가. 영어에서 마오주의자 또는 마오주의란 두 용어는 미국에서 냉전시기 중국을 분석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외부 위협을 의미하는 '붉은 중국'을 유형화하고 정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것은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일원화된 권력에 의한 억압의 광기로 간주되던 모든 것들을 일축하는 포괄적인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본서에서 말하는 '마오주의'는 지난 80년 이래로 마오쩌둥과 그의 영향력에 기인하는 광범위한 이론과 실천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P20). 책을 주문하면서도 그랬지만 책을 받고 나서도 저자가 과거 서구가 바라보는 중국, 그러니까 냉전적 시각에 의한 마오주의를 다룰까봐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저자도 밝히듯 책은 후자적 방향으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이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저자는 마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영향력에 대해 부인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책은 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으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인 국제 공산주의는 무너졌지만 중국은 살아남았다.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고 마오주의가 있다. 마오주의는 끝내 살아남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공산권에 영향을 미쳤고 자국 내 신마오주의가 부활함으로써 그 영향력은 지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기존에 퍼져 있던 마오주의에 대한 분석은 빠져 있거나 왜곡된 이야기가 많다고 이야기하며, 가장 큰 문제는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 진단한다. 


마오주의의 시작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저작에서부터다. 그가 없었다면 중국 내외의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상상하기 힘들다. 스노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공산당을 국제적인 홍보의 천재로 조명했고, 마오쩌둥의 사상과 실제 성격과는 다른 그의 페르소나를 묘사하여 국경과 언어, 계층을 넘어 전 세계의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중산 기득권층의 성장 배경에서 자란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돈을 벌기 위해 1928년 상하이에 입국했다. 초반에는 중국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1930년대 초 들어 쑹칭링(쑨원의 부인)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이후 중국 정치계 인물들을 두루 만나게 된다. '중국의 붉은 별'에는 스노가 공산당 근거지로 잠입하는 과정과 중국공산당의 생존을 위한 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루며 좋은 이미지를 확산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작에는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옹호를 넘어선 추종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이름을 높여가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은 정풍운동 때문이다. 1942년 정풍운동은 문화대혁명의 전신이라 불리는데 형태를 보면 문화대혁명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이 1941년 공산당 최고 영도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당내 기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목표를 고립시키고 왕년의 동료들을 비판 공격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며, 대중집회(중국의 군사적 용어로 말하자면 비판투쟁대회이다)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적'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강제적으로 대중의 집단적 조롱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풍운동'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인간조작 시도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1950년대 미국은 이런 운동을 '세뇌'라고 불렀고, 중국은 이를 '사상개조'라고 불렀다(P69). 


1950년대 중국과 세계는 '세뇌'와 '도미노 이론'으로 대표할 수 있겠다.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미국은 한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되면 다른 나라도 연쇄적으로 공산주의가 팽창하며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도미노 이론'을 펼치며 색깔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세뇌'는 에드워드 헌터가 지은 두 권의 저작인 '붉은 중국의 세뇌(1951)', '세뇌: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1956)'로 대표된다. "중국이 자유 세계를 향해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에드거 스노에 이어 에드워드 헌터의 저작으로 마오주의는 강화될 수 있었다. 

중소 갈등은 냉전을 앞당겼고,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근절하기 위해 급진적인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대기근으로 스스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정적이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끌어내리며 피바람을 일으켰다. 


1960년대 중국의 국내 선전 매체에는 세계 혁명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심지어 음악과 수학 교과서, 연극과 보드게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도자가 세계 혁명의 공동체를 영도하는 형상으로 가득찼다. 1960년대 중반에 성인이 된 세대는 특히 이런 선전을 잘 받아들였다. 중국 신문 및 방송 매체는 도처에서 그들 부모 세대가 참전하여 누렸던 영광스러운 군사적 희생(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그들도 놓칠 이유가 없으며 세계 무장투쟁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저자는 마오주의가 세계적 보편성을 표방했으나 단지, 지역성을 띤 국제화 형식이었다 말하며 이를 '고등 마오주의'라고 말한다.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나의 부모님도 전후 세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한 것에 대해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아직도 어릴 적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전쟁과 이념에 대한 색깔론을 소리 높여 들을 때가 악몽처럼 떠오르곤 한다. 


마오주의의 영향력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도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토지개혁과 비슷한 개혁을 실시했으나,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사회적인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에 중국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네바 협정에서 중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미국이 베트남 공산당의 통일화 연기를 미루도록 설득하여 베트남 분단이 확정되도록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서 중국의 국내 정책(문화 대혁명 등)에 의구심을 품은 베트남은 중국과 갈등하게 되고, 이는 양국이 미국과 화해를 시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1975년, 크메르 루주(캄푸치아공산당)의 총서기인 폴포트와 회견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 지휘부는 모든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으로 소개시켰으며(그 과정에서 프놈펜에서만 약 2만여 명을 즉결 처형했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화폐와 시장을 폐지하고, 집단화를 강제했다. 중국은 캄보디아를 베트남에 대항할 국가 세력으로 간주하여 크메르루주의 행동을 용인했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만들었다. 이후 크메르루주는 1977년 베트남과 관계를 단절한다.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과 미국이 개입했다. 공산주의자 동조자명단을 인도네시아 군부에 넘기고 준군사조직인 암살단에 자금을 지원하며, 왜곡된 선전 방송으로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공포와 혐오를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때 인도네시아 국내 학살은 은폐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정당 방위로 벌인 일임이 강조되었다. 학살 전 인도네시아 사회는 군부와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이 양극화로 인해 민간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폭력은 더 극성스러웠다. 1년 동안 군대와 민병대의 폭력으로 인해 최소 50여만 명이 사망했다는데, 장소만 다르지 한국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기에 씁쓸함이 일었다.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현상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 세계 마오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사상이 국경, 민족, 언어, 사회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남아시아에서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국가와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남아시아에서 마오주의는 인도 사회의 카스트제도와 인종차별에 적응해야만 했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마오주의 정치는 사회 저변의 불만과 결합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탈냉전 시대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가난한 농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빈곤한 농촌사회가 더욱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네팔 마오주의는 194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기까지 탈식민지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네팔 왕조의 종말 등으로 급격한 전환을 맞았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로 시작되었다. 네팔 마오주의자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물론 네팔 뿐만은 아니다). 카말라(프라찬다라는 별명을 가짐)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그는 네팔공산당의 일원이 되어 향후에는 마오주의 반란을 이끄는 리더가 된다. 그녀의 해방 운동의 시작은 구조적인 불평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생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왜 오빠만 학교에 갈 수 있고, 나는 안 되지요?" 그녀가 한 말이다. 어느 곳이든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불평등의 밑바닥에서 시작되고 이는 자유를 꿈꾸게 만들며 해방을 꿈꾸게 한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마오주의가 퍼져 있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현대 경쟁 사회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 반식민, 반서구주의에 입각한 중국의 메시지가 먹혀 들었던 것이다. 1960년까지 아프리카에서 매주 15시간씩 선전방송이 나왔고, 신문 매체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각종 합작에 대한 기사나 사진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마오쩌둥 서적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으며, 무엇보다 중국의 전폭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에 의한 아프리카 현대화 시도는 실패했다. 탄자니아는 기근이 일어났고, 짐바브웨는 일당 독재와 경제적 재앙이 나타났다. 두 국가 모두 안정적인 정치, 경제적 통치 체제를 원했으나 모두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960~1970년대 서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에 의한 갈망과 해방으로서의 분투와 저항 행동을 일으켰다. 문화대혁명은 젊은이들에게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부추겼다. 유럽과 미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의 목표를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했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정치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정치를 멀리서 지켜본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이것이 팩트가 아닐까). 

1980년대 페루 정부는 무능했고 부패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은 '빛나는 길'이었는데 그들을 이끈 구스만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비타협적 전쟁 모델을 선택했다. 이후 구스만은 페루 공산당을 창당하며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국가 기구를 압살하고 도시와 농촌, 백인과 메스티소, 인디언 사이 갈등을 조장하여 뿌리 깊은 차별을 만들어냈다. 인종과 계급을 넘어선 평등을 내세운 공산주의가 오히려 차별을 조장했음은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마오쩌둥은 보시라이에 의해 부활했고 마오주의는 시진핑에 의해서 더욱 그 흐름이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신마오주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현대 신마오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에 따르면, '대중민주주의'는 문화대혁명의 '네 가지 자유', 즉 '자유로운 발언', '자유로운 조직과 활동', '자유토론', '대자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언론 자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중이 여론을 통제하는 것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는 '사회주의적'이고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따라서 언론은 거의 모두 필연적으로 민족주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현재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마오 시대에 대한 공식적인 해독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얼마 전 베이징에서 관광객이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가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셜미디어가 강화되면서 중국 정부와 언론은 이를 경계하는 흐름을 더 강화하는 것 같다(위챗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마오주의가 유효한 이유와 그 특징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반제국주의의 물결로 그 영향력이 컸다. 둘째는 제3세계에서 더 유효했다는 점. 셋째는 반공주의에 대항 기저로 공산주의가 더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 넷째는 공산권이 무너졌음에도 중국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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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04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물흐르는 듯한 정리!!! 박수를~~!!!
탈식민 공부하면서 꼭 참조할 레퍼런스 중의 하나로 넣어야 할 것 같은 책 이네요 ㅠㅠㅠ 아직은 멀었지만…! 중국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과 복잡한 맘이 듭미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4-07-08 13:47   좋아요 1 | URL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중국에 대해서는 특히나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냉철하게 평가할 것은 평가하되 껴안아야 할 것은 껴안아야 하는데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럴수록 잘 알려고 노력해야지 하는 생각이 큽니다. 탈식민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ㅠㅠ 쟝 님 앞으로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