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읽은 책들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사실 며칠 전에 했어야 하는데 늦어지고 말았지만 또 안하고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한다. 

2024년은 4월부터 일이 바빠지고, 이후에는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독서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다. 작년에 분명 집에 묵혀둔 책을 읽겠다고 세워둔 계획은 어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린 것 같아 창피하다. 그래도 봄부터 시작한 독서 모임을 겨울까지 지속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었던 기회가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책 이외에 전시회와 강연을 다녀왔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봄에 다녀온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이야기> 전시회를 통해서 인도의 불교 미술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고, 12월에는 <여성의 시선, 여성의 세계> 강연을 들었다. 같은 건물에서 전시회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한국근현대 여성 미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총 몇 권을 읽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50권 이상은 읽었으나 100권까지는 못 읽은 것 같다. 아무렴 읽은 권수가 중요할까. 결국 어떤 책을 읽고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겠지.



올해 뽑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 직후사>,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현대 중국의 탄생>, <세계철학사 총4권>, <뭉우리돌의 바다/들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생명의 여자들에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한국여성문학선집 총7권>, <딕테>


상반기에 뽑은 책들 중 몇 권과 하반기에 읽은 책들이 추가되었다. 

하반기에 읽었던 <세계철학사> 시리즈와 <한국여성문학선집>, <딕테>가 참 좋았다. 


이중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독서모임을 통해서 읽게 된 책이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언어학자 김수경의 개인사를 통해서 한국 근현대의 미시사를 조망하는 동시에 조선어에서 남북한의 현대어로 변환하는 과정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언어학자로 김두봉, 이희승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김수경이라는 이름을 새겨두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다. 그는 특히 당시 세계적으로 트렌드였던 언어의 구조에 천착했고 이를 조선에 맞게 개량하려 했다. 아무래도 언어의 구조와 문법을 설명하는 부분은 어려웠는데 다행히도 출판사에서 결정한 사항인지 언어에 대한 설명과 개인사를 교차로 편집하여 독자가 책을 놓을 수 없게 한 점이 센스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4년 도쿄 미쓰비시 중공업 건물에 폭탄이 투척된 사건을 파헤친 책이다. 누가 폭탄을 터트렸으며 왜 터트렸는가. 사망자나 부상자들 중에는 미쓰비시 중공업 근무자들 뿐 아니라 민간인들의 피해가 있었다. 폭탄을 투척한 이들은 민간인들의 피해까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도쿄 행동위원회의 '늑대' 멤버로 일본의 전범기업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적폐청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제를 문제삼으며 천황의 암살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하여 건물 폭파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의 일본을 생각하면 이런 세력이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지만 그때 사회적 분위기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달에 바로 <생명의 여자들에게>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일본의 여성해방운동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데 당시 사회상이 어떠했는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을 통해 배경 지식을 얻은 상태에서 <생명의 여자들에게>를 읽었기 때문에 읽기 훨씬 수월했다. <생명의 여자들에게>는 앞서 언급했듯 일본의 여성 운동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신좌익 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이 교집합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또 여성해방운동 속에서 여성의 실존적 문제 간의 충돌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추가적으로 몇 권만 언급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1945년 해방 직후사>는 해방 직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살펴봄으로써 현대 한국의 원형을 추적하는 책이다. 해방 후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들은 많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진 통념과 다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초반에 개인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윌리엄스 소령이 미군정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의 편향된 시선이 가져온 나비 효과는 건준과 여운형의 세력을 비롯하여 중도 세력까지 나락에 빠뜨리게 했다는 것. 이들은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세계철학사>는 국내 철학자가 썼다는 장점 때문에 우선 잘 읽힌다. 그리고 서양의 철학자를 설명할 때 동양의 철학자를 소개해주어 이해를 더한다. 대부분의 철학서들이 서양 철학자들만 언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양 철학자들 사이에 동양 철학자들도 나란히 배치하여 균형을 더한다는 생각이다. 철학은 어느 시대든 정치와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왜 그런 철학 사조가 등장했는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인데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저자의 사족이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독자가 적절히 수용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 사조를 정리하기에 레퍼런스로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이 시리즈를 읽어냈다는 것이 2024년의 가장 큰 수확이지 않나 싶다. 특히 나는 근현대 시기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때의 철학사조와 철학자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딕테>는 차학경의 유작으로 그녀의 전방위적 글쓰기를 경험할 수 있는 책이다. 에세이로 읽히기도 하고 역사로 읽히기도 하고, 시나 희곡 같기도 하고 평론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의 머리에 어쩜 이리 다양한 지식이 있는지 그것을 글로 펼쳐낸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천문학도…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어머니의 조국에 대한 대화를 통해서 이방인과 경계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슬픔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사실 두려움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크게 어렵지는 않다. 독해하려고 하는 순간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를 수용하는 것처럼 독자에게 와 닿는 점이 다 다를 것이라고 본다. 


<한국여성문학선집>은 한국의 근현대 여성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말까지 한국의 여성 문학은 쉴틈 없이 달려왔다. 최근 들어서 비로소 언급되는 나혜석, 김명순 같은 여성 작가도 있지만 아예 이름조차 잘 거론되지 않았던 작가들도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 이상으로 한국 여성 문학이 사회 구조적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고 여겨졌다. 이 책과 함께 <체공녀 연대기>,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처럼 한국 여성 노동사를 함께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고, 한국 근현대 미술을 다룬 최근작 <그들도 있었다> 시리즈를 함께 읽는다면 구현의 세계까지 확장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보인다.


2025년은 어떤 책을 읽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적게 읽더라도 더 알차게 읽고 꾸준히 쓸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겠다. 

모쪼록 이곳에 들어오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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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1-02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우리 지금처럼 같은 책을 그리고 또 다른 책을 읽읍시다.

거리의화가 2025-01-02 08:25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늘 그렇듯 매일 일상을 열심히 살고 책을 읽고 쓰는 한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지난 달 말 세계철학사 시리즈를 완독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찜해서 장바구니에 채워 넣었다. 보관함에 넣어 놓은 책들은 애써 보지 않으면 결국 지나치게 되더라. 그렇게 주워 담은 책들이 법의 힘, 광기의 역사, 기억의 에티카 세 권이다. 추가로 비코의 책은 <오리엔탈리즘> 책을 재독하고 있는 중에 체크해 놓았다가 담은 책이다. 이 책들과 커피 1킬로그램을 샀더니 예상대로 10만원은 훌쩍 넘어가버렸다. 



서양 근대의 구조주의는 합리주의의 또 하나의 형태로 데카르트의 이원적 구도를 삼원적 구도로 변화하는 시도였다. 현상이 실재(계)라면 구조(이미지)는 상상계(추상/상징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를 통한 의미를 계열화(수직화)하고 타인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라캉, 푸코, 레비나스, 데리다 중 나는 푸코와 데리다에 관심이 갔다. 


미셸 푸코는 배제, 감금, 수용 등의 구조를 통해 지식-권력의 관계를 분석해내고 주체의 존재, 행위가 문제화되는 순간에 대해 밝히려 노력했다. 그는 또 ‘담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어서 주목을 끌었는데 책 <오리엔탈리즘>에서도 ‘지식과 현실은 담론을 낳고 담론의 내부에서 생긴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본질은 담론의 실체적 존재나 무게다(P172)’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여러 책들 중 <광기의 역사>를 택한 건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제도가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과 한계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데리다는 유대인으로서 사유하고 저항하면서도 자신에게 존재하는 배타성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철학자들과 차별점을 두었다. 그는 마르크스 철학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해서(이 책을 들여다보기 전 마르크스부터 독파해야 하는 건가) 이것이 아무래도 내게 책 선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 책이 후에 발터 벤야민의 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서 또한 기대가 된다.


다카하시 데쓰야의 책은 제목과 부제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 20세기의 세계사적 전쟁들에서 역사적 폭력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서 담고 있다. 아무래도 한나 아렌트의 철학과 비교해서 엿볼 수 있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그 전에 아렌트 책부터…). 


얼마 전 <딕테>를 읽으면서 탈식민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성찰과 인식에 대한 공부를 더 해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세 권의 책이 이 책과도 여러 모로 연결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비코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여러 번 거론되는 철학자다. 비코는 문화인류학 및 민족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특히 <새로운 학문>이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더군다나 비코는 마르크스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마르크스의 경제관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런데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읽어봐야지^^












연말이면 한 해에 출판된 책들 중 엄선된 책을 중심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가려 뽑는다. 학술서 부문에서 <DMZ의 역사>, <세계철학사 1~4>,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울산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가 후보에 오른 것이 보였다. 이중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이외에는 모두 읽었다. 교양서 부문에서 <헌법의 순간>,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가 후보 부문에 올랐고, 번역서 부문 후보에 오른 책 중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감정의 문화정치>,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이 눈에 들어왔다. 이 중 김수경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은 수확이고, 샹탈 자케의 책은 비록 읽지는 못했지만 구입은 해 두어서 다행이다. 편집 부문 후보 에는 <한국여성문학선집>, <520번의 금요일>이 올랐다. 뽑은 책들 중에서 눈에 들어온 책은 당장은 못 읽어도 시간을 두고서 도서관을 통해서라도 구해 읽어보도록 하려고 한다.




12월은 정말 너무 읽은 책이 없지만 그마저도 읽은 책들 중 아직도 리뷰를 못 쓴 책들이 남아 있다. 결국 안 쓴 것은 핑계겠지. 부디 해를 넘기지 않고 리뷰라도 쓰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달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은 날들이 3일 뿐이어서 남은 날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꺼운 책은 불가능하니 얇은 책으로 한 두권 정도만 읽자 싶다. 이북으로 담아둔 한강의 책을 읽는 것도 괜찮겠다. 



한동안 사진 찍을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았던 것 같아서 어제, 오늘 산책하면서 사진들을 찍었다. 어제는 그냥 걷기만 했고 오늘은 필라테스 나가서 유산소 및 기구 운동을 했다. 할 때마다 ‘너무 힘들다.’ 소리가 나오지만 그래도 하고 나면 조금이라도 근육이 만들어지기를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





오늘 오전 안타까운 비보를 들었다. 2024년 12월은 여러 모로 나라에 악재가 끊이질 않는 것 같다. 우려와 탄식 속에서도 부디 하나씩 정돈되기를 바라고 있다. 

연말인데도 뒤숭숭한 분위기 때문인지 마음이 휑하다. 그렇지만 또 지금 이 순간을 외면하지 말고 주어진 매일을 최선으로 살자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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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29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맘이 휑하고 자꾸 한숨만 나와서 책을 못읽겠어요.
맘 아픈 뉴스들만 자꾸 들리니
정신이 멀쩡한 저도 우울해집니다.
비문학은 저랑은 좀 멀어져 있는데 좋은책들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한 해 마무리 잘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4-12-31 17:38   좋아요 1 | URL
정말 이 달은 특히나 너무 힘이 드네요. 나라에 악재가 이리 거듭되니 참... 내년에는 부디 나라가 정상화되면 좋겠습니다.
은하수 님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2024-12-30 0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해 얼마 남지 않은 때 사고가 일어나다니, 그 소식 보고 놀랐습니다 식구분들은 무척 슬프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2024년 남은 날 잘 보내시고 새해 잘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12-31 17:39   좋아요 1 | URL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황망하고 슬픕니다.
희선 님 한 해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늘 따뜻한 말씀을 전해주셔서 위로가 되었답니다. 내년에는 더 자주 댓글로 찾아뵐 수 있도록 해볼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개인의 삶에서 나아가 철학과 사회, 역사까지 아우르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절감하고 있다. 몰랐던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그녀의 삶에서 배우는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까지 덤으로 얻어간다. 이 고급 정보가 에세이로 담겨 쓱쓱 읽혀서 더욱 좋다.


마리아 미즈는 어릴 적부터 농민의 딸로 태어나 자급자족하는 삶을 느끼고 배웠다. 내 땅을 소유한다는 것, 사회적으로 보장되었던 공유 재산의 가치, 공동 작업과 상호 부조에 대한 중요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1930년대 이후 독일에 나치당이 사회에 뿌리 내렸고, 생활하던 마을에도 불어닥쳤지만 미즈의 부모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미즈는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기에 나치즘을 설파하는 학교 교사에 대해서도 동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후반을 지나며 아이들은 전쟁놀이가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을 짐작하며 성장했다(적군은 늘 프랑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미즈의 다섯 오빠들은 징집되어 독일 상비군으로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쟁으로 마을에 난민들이 들어닥치자 미즈의 가족들은 피난처를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지냈다. 미즈는 그들에게서 대도시의 폭격과 기아, 파괴 등 처참한 전쟁의 피해에 대해 듣는다. 

상대적으로 서부에 치우쳐 있던 마을은 전쟁 초중반까지는 버텼으나, 미국이 프랑스를 침공한 뒤 독일까지 밀고 들어와 마을이 공격받자 지하실로 대피해야만 했다. 

그래도 전쟁은 끝이 났고 전쟁터로 떠났던 미즈의 오빠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이 험난한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즈의 어머니의 자급자족하는 자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 말이다. 


미즈가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었다. 

기독교 도제 하의 교육 시스템은 소년 기숙사만 제공되었고 소녀기숙사는 없었는데 나치는 체제에 협력하고 부응하는 학생을 길러내기 위해 과거의 이런 관행을 깼다. 나치즘은 문제지만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준 것은 일정 정도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여서 섬뜩하다.

15살 이후가 된 소녀는 다른 집에 가서 일을 해주는 하녀로 있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즈는 이를 거부했고 16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학교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 ‘인도’라는 세계를 만나 외국어 학습을 할 기회가 생겼고, 종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타자를 통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이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는 후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의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철학 하에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그 세계가 좁다고 느꼈다. 세계로 나가 변화를 돕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그녀는 인도에서 독일문화원 강사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미즈는 인도의 종교, 카스트 규범 제도와 인도 여성의 실제 삶 간의 괴리 등을 보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지인이 한 말이 후에 그의 삶을 바꾸었다. “계급 투쟁을 보았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년을 채우고 돌아오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투병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그녀를 받아줄 만한 그릇의 사회가 아니었다. 1968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서 미즈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마르크스주의에 감화를 받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가 그녀를 행동하는 삶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가톨릭교로 자란 그녀는 야간시국기도회의 참여를 통해서 종교(교회)와 정치가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는 여성 차별과 억압 문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71년 1월 야간시국기도회 체제공개비판 선언을 통해 그녀는 종교가 더는 억압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버린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쾰른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을 통해 여성에 대한 사적 폭력이 공적인 사회 문제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도왔다. 페미니스트 연구 방법론을 통해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의 가사 노동이 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는 비단 여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농민과 농촌은 낙후되고, 노동자와 도시는 진보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나는 ‘노동’, ‘생산 노동’ 같은 용어를 명확히 하고 싶을 때마다 마르크스의 파란색 책을 꺼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의 정의는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의미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972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Luxemburg, 1913)을 읽은 사람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룩셈부르크가 ‘자본 축적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비자본주의 환경’도 점점 더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비자본주의 환경’이 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일용직 및 식민지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엔에서 정한 ‘비공식 부문’의 착취는 필연적으로 이들의 생계를 파괴한다(Bennholdt-Thomsenm, 1981).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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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22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읽은 글들, 페이퍼 보며 다시 정리가 되니 좋네요^^
끝까지 잘 읽을 수 있겠죠?
전 1/3쯤 남았네요~~~

거리의화가 2024-12-23 07:56   좋아요 1 | URL
은하수 님 저도 정리 차원에서 올렸는데 도움이 되신 것 같아 기쁘네요^^
1/3이면 얼마 안 남으셨네요. 크리스마스가 껴 있는 주인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뒤숭숭해서 연말 분위기는 안 나지만 모쪼록 마음만은 따뜻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추운 날씨 건강 잘 챙기시구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12월 3일 이후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까지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의 일상은 멈췄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게다가 지난 한 주는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더욱 슬픈 날들을 보냈다.


본래 내 생일 주간이어서 휴가를 미리 내고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새벽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셔서 기존의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급히 지방으로 내려간 뒤 4일을 온전히 보내야만 했다.

그동안에는 책을 읽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어떤 소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옆지기와 회포를 푼다고 술을 진창 마셨더니 속까지 뒤집어졌다.


시아주버님은 원래도 신장이 안 좋아서 투석을 받으셨고 후유증으로 간, 폐가 모두 안 좋으신 상태였기 때문에 오래 버티기는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50세도 안 된 나이에 돌아가신터라 시어른들의 황망함이 컸다. 옆지기도 발인 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살 사람은 살아야지."

어른들의 말을 곱씹는다. 


일상으로 복귀는 했지만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멈췄던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책도 열심히 읽고 쓰는 생활로 돌아가야지.


돌아와보니 깨닫는 것은 결국 건강의 소중함이다.



연말이라 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몰라서 읽어야 할 책들을 부랴부랴 확인했다.


이번 주는 부득이하게 이런 책들을 읽어야 한다.

<마을과 세계>는 마리아 미즈의 삶과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사실 다른 책인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더 궁금하기는 한데 이는 추후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재독으로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한 책이다. 이번에 좀 더 깊이 읽으면서 다른 분들의 생각도 얻어갈 계획이다.

<딕테>는 오늘까지 100자평 써야 해서 급히 꺼냈다. 역시 다 읽고 올리기는 무리일 것 같지만!^^;



















<그들도 있었다> 시리즈는 완독했다.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인물 엿보기 사전 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 책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묻혀 있었던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조만간 리뷰도 써보려고 한다.
















올해도 알라딘에서 보내주신 선물을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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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12-17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화가님 큰일 치르셨군요 ㅜㅜ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네요. 오래 아프셨더라도 슬픔은 슬픔.. 고생하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12-18 08:36   좋아요 1 | URL
사실 몸 관리를 좀 하셨다면 몇 년은 더 사실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에 안타깝죠. 그래도 또 오래 투병을 하셔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셨던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위로 감사합니다.

2024-12-17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18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4-12-17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화가님 보이지 않는동안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화가님도 건강 챙기시고요. 옆지기 님도 상심이 크실텐데 아무쪼록 일상을 잘 이어나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는 오리엔탈리즘 가까스로 다 읽었는데 정말 너무 어려워서 읽은게 읽은게 아니거든요, 다시 읽으신다니 수시로 책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저야말로 거리의화가 님의 생각을 좀 얻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잘 지내세요!

거리의화가 2024-12-18 08:41   좋아요 0 | URL
시부모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유일한 혈육이었던 형님을 떠나보내니 그 허전함이 큰 것 같아요. 극복은 안되겠지만 곁에서 무던히 있어주려구요.

오리엔탈리즘 3개월에 걸쳐 읽기로 했는데 읽는대로 정리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락방 님도 모쪼록 무탈하시고 연말 잘 보내시기를요!

단발머리 2024-12-17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고생 많으셨어요 ㅠㅠㅠ 온 가족 맘도 몸도 너무 힘드셨을거 같아요.
어른들의 말씀이 참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말씀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요.
조용히 읽고 또 다시 읽는 잔잔한 평화가 거리의화가님 마음에 가득 채워지기를 바래봅니다.

거리의화가 2024-12-18 08:46   좋아요 1 | URL
당분간은 옆지기 곁을 지켜보면서 무던히 있어주려고 합니다. 상주 노릇하느라고 몸이 힘들기도 했는데 역시 마음이 더 힘들겠죠^^;
여전히 열심히 읽고 쓰시는 단발머리 님에게서 많이 배웁니다. 위로의 말씀 감사하고,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요.

희선 2024-12-18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셨군요 건강이 안 좋으셨다니... 옆지기 님이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네요 바로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가면 좀 나아질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12-18 08:47   좋아요 1 | URL
당분간은 옆지기가 형님 생각이 많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옆에서 좀 보면서 괜찮은지 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 그리움이 잘 사라지진 않더라구요. 물론 시간이 약이기도 하니 조금은 무던해질 수 있기를 저도 바라봅니다.

희선 님 일상이 편안하고 행복하길 늘 기원해요^^
 


나무연필 출판사에서 기획하는 북토크가 있어서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다녀 왔다. 세 세션 모두 ‘여성’을 화두 삼아 더 넒은 시야를 갖게 하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세션 1에서 정희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예상했지만 세 세션 중 관객수가 가장 많았다. 선생님의 음성을 오디오를 통해서 계속 들어와 익숙해서인지 들어오시자마자 ‘아! 저분이구나.’ 했다. 나무연필에서 내놓고 있는 ‘메두사의 시선’ 시리즈에 대한 기획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의 연구 및 출판 문화의 문제, 좋은 책과 다양한 책을 읽지 않는 독서의 문화가 있는 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모든 언어에는 위치성이 있어 로컬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탈식민주의 과정이기도 하다고. 젠더적 감수성, 남성성에 대한 좋은 연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책들을 번역해 내는 것이 ‘메두사의 시선’의 기획이라고 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토크 중간에 윤석열 정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션을 듣고 있으면서도 한숨과 탄식,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이어졌다. 좋은 독자가 있어야 좋은 책이 나온다는 말은 당연하다.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대한민국 사람들, 그마저도 인문학적 통찰을 주는 좋은 책을 읽지 않는 문화가 이어지는 한 출판시장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앞날은 희망적이지 않은 것 같다.


세션 2에서는 과학하는, 예술하는, 여행하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라는 여성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근세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 때 활동한 화가이다. 당시 16~17세기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여성들은 식물도감에 들어가는 세밀화를 많이 그려서 경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독일 마르크에 메리안이 모델로 쓰였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메리안이 활동하기 이전 클라라 페트로스라는 여성 화가가 있었다. 그녀는 ‘정물화’라는 명칭이 생겨나기도 전 식탁에 있는 소품, 음식 등이 담긴 정물화의 모태를 그려냈다. 여성은 길드에 가입할 수조차 없어 화가라는 명칭이 부여될 수 없었던 시절에 그녀는 활동했다. 미켈란젤로 등 당대 유럽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들은 북유럽 미술의 주요 작가인 여성들을 폄하했다. 이유인즉슨 성모를 그리지 않아서 신성성이 부족하다느니, 조형미와 균형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낮은 평가를 했던 것이다. 지금의 시기 우리가 중세 유럽의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꽃 시장이 발달하여 카달로그에 그림 그릴 기회가 늘어났는데 여성들은 이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북유럽 미술은 정물, 풍속, 꽃 등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 많았다고 보면 된다. 메리안은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저물 무렵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수리남에 가서 50대의 대부분을 <수리남 곤충의 변태>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냈다. 그 시기 여성이 섬에 단독으로 가서 몇 년을 보내며 글을 쓰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그 결과물이 바로 <수리남 곤충의 변태>다. 


세션 3에서는 한국 여성미술가들을 조명하며 페미니즘과 교차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자와 사회자가 있어서 경쟁하듯 질문과 답을 이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두 여성 원로 미술 사학자들로부터 듣는 생생한 한국 현대 미술과 페미니즘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김홍희 선생님은 <페미니즘 미술 읽기>를 근간에 내셨는데 이 책은 경향신문에 페미니즘 미술에 대하여 다룬 칼럼들을 책으로 엮어 심화하여 출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윤난지 선생님이 기획하고 현대 한국미술포럼이 참여하여 소외되고 배제된 한국의 여성 근현대 미술가들 105명을 추려내어 엮어낸 결과물이다. 김홍희 선생님은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미술 현장과 담론을 균형 있게 책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윤난지 선생님이 기획한 105명의 인물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했음에도 가려져 볼 수 없었던 아티스트들이다. 일단 호명되어야 평가될 수 있다는 윤난지 선생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1990년대가 되면 한국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롯한 페미니즘 이론이 수입되는데 이 시기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비롯한 신세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대안공간에서의 미술 작업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 신세대 미술가들은 정치성과 결합하고 탈이데올로기를 호출하는 방식으로 미술 작업을 이어나갔다. 정체성이 없는 미술 작업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그들이었다. 그렇다면 현재를 이끄는 청년들인 MZ세대의 미술 작업은 어떨까. 그들은 개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업주의를 낮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 두 선생님들은 그들이 경질적 가치를 꿈꾸기를 바란다고 소망하셨다. 20세기는 여성 미술가들이 외면받아야만 했던 극심한 시기였다. 이제 더는 여성 미술가들이 박절받는 시대는 아닌 것 같지만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비롯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가부장제에 머물러 있다. <페미니즘 미술 읽기>와 <그들도 있었다>를 통해 한 책에서는 여성 미술가들의 인물 열전, 다른 한 책에서는 페미니즘 이론의 실천적 미술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이 책은 미술 생태계에서 남녀 편차가 극심하게 드러나는 한국 미술의 현대화 시기, 즉 20세기를 성별에 따른 필터링 없이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려는 시도다. … 

105라는 수만큼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을 목차로 묶어 구성하는 것은 모순과 편차를 아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의 시기와 내용, 방법 등을 고려하여 10개 항목으로 분류함으로써 최소한의 갈피를 잡고자 했다. - P6


북토크기 있기 전 같은 건물에서 특별 기획전인 <차이의 미학> 전시를 보았다. <그들도 있었다>에 포함된 미술가들의 작품도 들어가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특별전 <차이의 미학>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주제로 한 전시다. 살아가면서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는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잊고 타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행한다. ‘다름’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양성임을 깨닫고,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여정이 필요하다. 

전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는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나는 김윤신, 데비한, 김순임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김윤신 작가의 작품은 다양했는데 특히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합’과 ‘분’이 동양 철학의 바탕을 의미하듯 두 개체가 하나가 되고,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그리고 반복)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과 미술 재료(나무 등) 자체를 통한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또 다른 작품인 <즐거움의 울림>이나 <내 영혼의 노래>는 동양의 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비상처럼 날개를 펼칠 수 없었던 여성들이 활짝 개화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듯한 느낌이었다. 


김순임 작가가 표현한 설치 미술은 <비둘기 소년>이다. 작가가 뉴욕 레지던시에서 동유럽 출신의 이민자이지만 건물 관리인 다니엘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건물에 들어설 때 항상 다니엘을 마주했지만 동료 작가들조차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펠트와 깃털로 제작된 작품으로 다니엘이 소년이었을 때 길에서 음식을 주워먹고 연명할 정도로 어렵게 성장했다고 한다. 어른이 된 소년은 여전히 도시의 그늘처럼 존재한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풍경이 되어버린 도시의 비둘기, 건물의 풍경 같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은 이어진 존재가 아닐까. 



데비한 작가의 <비너스 상>은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고대 그리스 상을 표현했나보다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상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면 놀랍게도 모두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다. 눈과 코, 입술이 표현되지 않은 얼굴도 있고 오똑한 코의 얇은 입술을 가진 얼굴, 넓은 볼을 가진 코의 두터운 입술을 가진 얼굴, 뾰족한 코의 두툼한 입술을 가진 얼굴 등…. 작가는 해외에서 이주민으로 살면서 느낀 차별에 대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재료를 한국의 전통 재료인 도자기를 사용했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미의 척도’인 비너스를 단일한 미로 표현하지 않고 다양한 미로 표현해낸 이 작품에 오래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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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2-08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에서 하는 북토크에 다녀오셨군요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마침 전시회도 있어서 잘됐군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관심 가네요 저 책 나왔을 때 제목 본 듯도 합니다 스쳐 지났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12-10 10:56   좋아요 1 | URL
저도 북토크를 통해서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라는 여성에 관심이 가서 저 책을 구입했어요. 읽고 나서 공유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희선 님. 무탈한 한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