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단벌 '골덴 마이(코르덴 재킷)'가 하도 후줄근해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러 가는 길,
촉감이 이상해 뒷목 닿는 부분을 보니 올록볼록한 골이 다 닳아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10년이 훨씬 넘었다.
드라이를 하지 말고 새것을 한 벌 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기 싫은 일감이라  계속 미루고만 있던
출판사 발행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의 하고많은 조용한 곳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세탁소가 보이는 건널목 앞에서
차들이 씽씽 달리는데 큰 목소리로 악을 쓰며 통화했다.
그리곤 좀 느긋해져서 '1년만 더 입지 뭐!' 하며 예정대로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겼다.

다음날 우리 동네 커피집에서 그를 만났다.
운전면허가 없으니 기동력도 없고, 게을러빠져서 원고나 교정지를 갖다주기는커녕
집 앞으로 무조건 오기를 원하는, 거기다 약속은 밥 먹듯 어기는 늙은 아줌마 아르바이트생에게 
일감이 끊기다시피 한 지는 꽤 되었다.
그 출판사 발행인은 누군가의 소개로 통화만 몇 번 하고 처음 보는데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희색이 만면했다.
얼마 전에 나온 것이라며 책 한 권을 내미는데 어제 하루에만 주문을 천 부 넘게 받았다는 것이다.
귀에 익숙한 자기계발서였다.
일을 맡기로 하고 용기를 내어(!) 받고 싶은 금액에서 얼마를 깎은
금액을 제시하니 그 당장 오케이다.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에게 달포 전 야심차게 낸 책이 좀 나가느냐고 물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가수 한대수 식으로 표현하면 '양호한' 책이다.
그런데 하루에 10부 정도 나간다나!
거기에는 친구와 동생에게 내가 주문하여 보내준 책도 포함되었으리라.

오늘 아침 <인간극장>을 보는데 55세와 45세에 결혼 20주년을 맞은, 
작은 중국집을 하느라 정신없는 아빠와 엄마에게 축하선물을 하기 위해 9남매 중
집에 있는 일고여덟 명의 아이가 저금통을 깨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게 하여 모은 돈이 4만 원이 채 안되는데 아이들이 마트에 가서 고른 것은
엄마의 분홍 립스틱과 아빠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김훈의 신작소설 한 권이었다.
립스틱 한 개 값과 책값은 맞춘 것처럼 비슷비슷했다.
아이들이 몇 달간 모은 책값 14800원!
권정생 선생이 살아생전 농부들의 배추 한 리어카로 환산했던 원고료가 생각났다.

다음날 세탁소에서 옷을 찾아오는데 세상에나, 너무 멀쩡한 거다.
골덴 마이는 모름지기 칼라와 소매가 희끗희끗 낡은 게 또 맛이어서
한 2, 3년쯤 더 입어도 괜찮겠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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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1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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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2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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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하나를 먹는 행위도 따지고 보면 사실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이다.
소화작용에 필요한 각종효소들을 합성하는 일과 음식에서 에너지를 얻는
일련의 화학반응들을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챙겨서 수행해야 한다면,
나는 결국 굶어죽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박테리아같이 보잘것없는 존재도
산소가 없는 곳에서 당을 자동으로 분해할  줄 안다.
이것이 사과가 썩는 이유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445쪽


먼지떨이를 들고 모처럼 청소를 하려다 책꽂이를 한 칸 한 칸 살피니 
읽지 않은 책이 태반이다.
웃긴 건 그 책들을 대부분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런 식의 자기기만은 사실 애교에 속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와 무작위로 펼쳤더니
위의 구절에 연필로 밑줄이 쳐져 있다.
언젠가 내가 쳐놓은 밑줄 부분을 읽는 건
점쟁이가 건네준 내 점괘를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수행遂行'의 遂는 굳이 찾아보니 '드디어 수'이다.
보잘것없는 일상의 작은 행동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수행修行'이라고 마음 깊이 받아들인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수행'을 생각하니 왠지 <일상 예찬>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그림들이 재밌어서 가끔 꺼내 보는 책이라 바로 찾아 페이지를 펼쳤다.
몇 장 넘기니 '불행이나 행복 앞에서 날뛰지 않았다는 스토아 철학풍의 현자'
스피노자의 한마디와 함께 꽤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이 쳐져 있다.

"현실과 완벽, 나는 이 두 가지를 같은 뜻으로 여긴다."
일상생활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들은 도덕의 존재를 순순히 수긍하면서도,
매우 자발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통해
그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다.
(...)
네덜란드 회화는 미덕도 악덕도 부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의 충일한 기쁨으로 초월시킨다.
(...)
화가들은 아름다움이 가장 무의미한 오브제,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 깃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165~167쪽)


책들이 일제히 말을 걸어오는 날이 있다.
뻔히 아는 사실이나 미루어 짐작할 뿐인 어떤 이치도
활자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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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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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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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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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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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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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2-02-0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언제고 꼭 읽고 싶다. 아직은 나와 멀어, 일단 책부터 사야하고! 했는데, 집에 있는 책이었네요 ㅎ 일단 읽는 일부터 해야겠는데, 청소는 언제 할겨??!!
로드무비 님의 이 글을 읽고, 앉은 자리에서 쉼표(,) 찍으며 생각해요~
그래 천천히 살자, 책들이 일제히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날..! 만끽하고 싶어요..

로드무비 2012-02-02 15:38   좋아요 0 | URL
icaru님 저도 그런 책이 꽤 되더군요.
<사람들은 자가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이승우 소설집도 있는데...
심지어는 이 소설집이 어떻게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청소 작파하고 책 읽는 재미가 그저그만이었습니다.
덕분에 페이퍼도 하나 건지고.ㅎㅎ
 

오후에 꽁꽁 싸매고 동네 은행에 다녀왔다.
딸아이의 세뱃돈을 저금하기 위해서였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는 이상하게 작년부터 큰 돼지저금통에
주하와 동주의 세뱃돈을 1년 동안 모아,
세배를 끝내자마자 저금통의 배를 따서 정확하게  반씩 나누어 주셨다.
작년엔 손자손녀 각자 무려 30만 원이나 되더니,
올해는 실망(!)스럽게도 겨우 15만 원씩이었다.
저금통 개봉에 임박하여 금액에 자신이 없었던 아버지는
 5만 원짜리 두 장과 만 원짜리 한두 장씩을 급히 넣으셨던 것 같다.
딸아이 몫으로 떨어진 동전이 8만 원 정도,
은행에 가는데 무거워서 팔이 빠질 지경이었다.
(아버지, 내년에는 그냥 지폐로 주세요.
이 무거운 걸 들고 기차 타고 부산에서 서울 오셨습니까!)

은행은 세뱃돈을 저축하러 온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그런데 나중에 내 차례가 되어 담당직원과 얘기 나누다가 보니
세뱃돈 때문에 미어터진 게 아니었다.)

객장에 설치된 텔레비전 모니터에 시인 유하 영화감독이 나왔다.
신작 <하울링>의 주연배우 송강호에 대한 소개가 그럴듯하다.

-저는 열연을 싫어해서요.
그런데 이 배우는 열연 없이 자기가  맡은 역할을 납득시킵니다.

이상하게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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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0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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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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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서 주굉 선사의 <산색>을 읽으면서 내게 위안을 줬던 구절은
'도를 배우는 데는 요행이나 굴욕이 없다'였다.
아직도 인생에 '요행'을 바라고 '굴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다.
한편으로 가장 인상적인 단어 중 하나는 '간망 看忙'이었다.

세속에서 재물이 넉넉한 사람이 섣달 그믐날 방에 편안히 앉아서
가난한 사람이 의식이 곤궁한 것을 살펴보곤 하는 것을 '간망'이라고 한다.
...여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단함을 느긋하게 바라본다는 뜻이겠다
.(83쪽)

설 명절 하루 전 절친 세 가족이 모여(어른 6인 청소년 4인) 돼지갈비를 배 터지게 먹고
아이들이 근처 극장에서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영화를 보는 동안
어른여성 둘은 커피를 마시러 가고 나는 남자들 틈에 악착같이 끼어
카페 옆 홍어삼합집에서 한잔 더 마셨다.

자정 무렵 카페에 전부 모여 커피와 빙수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떠들다 헤어졌는데

부득이하게 우리 가족만 대리기사님을 불렀다.
차로 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 약정요금은 1만 원.
궁금해서 나중에 물어보니 남편은 5천 원을 더 드렸다고 한다.
'5천 원짜리가 용케 있었네!'하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높은 줄 위를 버선발로 걷는 것처럼 사는 게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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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0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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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1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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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1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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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1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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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크코트 - Jesus Hospital
영화
평점 :
현재상영


포스터가 먼저 가슴을 관통한 영화 . 바로 나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화 속의 인물과 가족, 종교를 한마디로 뭐라 표현할까.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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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2-01-1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로드무비님이닷~~
저도 엄청 올만에 왔는데 님도?
아니면 제가 안 올 때 총총 오셨었나요. 아무튼 방가방가~^^

로드무비 2012-01-15 00:20   좋아요 0 | URL
진주님 반갑슴다.^^
알라딘엔 가끔 책 살 때 외엔 걸음 안했어요.
이제 좀 자주 오려고요.

프레이야 2012-01-1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려구요.
로드무비님 안녕하셨지요? ^^

로드무비 2012-01-16 11:0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여자집사님 배역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는
김미향씨도 주인공 언니로 나옵니다.
꼭 보세요.
프레이야님도 잘 지내셨죠?^^

2012-01-15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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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6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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