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를 읽는데  이상하게도 김이경의 소설집
<순례자의 책>이 자꾸 생각났다.
('사람 책'이 있다는 걸 이 책을 보고 알았는데 '런던 사람 책'은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재밌게 읽었으면 그만이지 꼭 리뷰를 써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몇 달 전 읽은 책이 자꾸만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책'을 주제로 김이경이 풀어가는 열 가지의 이야기는 보기 드물게 매혹적이었다.
주제를 미리 정해 놓은 글쓰기인 만큼 자칫 억지스럽게 누덕누덕 기워 나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버릴 수 없었는데, 야무지게 이어놓은 몇 개의 이야기는 
각각 액자를 해서 걸어놓고 싶은 오묘한 색감과 문양의 퀼트 작품처럼
따로 또 같이 잘 어울렸다.

어마어마하게 큰, 기다란 주랑이 한없이 이어진 '저승'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끙끙거리며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 이야기('저승은 커다란 도서관')로 이 책은 시작된다.

18세기 한양에는 한 장 한 장 일일이 필사한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성업중이었다는데, 
'기연奇緣'이라는 제목의 조선 시대 패설과 얽힌 기구한 이야기('상동야화')는
"가시혼야(책을 등에 짊어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책 대여상)"를 소재로 한 에도 시대의
소설('들은 대로')과 멋지게 쌍을 이루었다.
한양의 세책점에서 취급하던 필사본과 목판본 책들이 활판본에 자리를 내주며 자취를 감추고,
에도 시대를 풍미했던 "걸어다니는 책 대여점" 가시혼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 편 한 편의 짧은 소설 뒤에 실린 "소설 속 책 이야기"는
차례대로, 화장실에 간 사람이 오기 전에 잽싸게 속삭이는 술자리 뒷담화처럼 흥미로웠다.

나는 전수운錢繡芸이다.
스물여덟 해를 살았고 자식은 없다.
몸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다.

나는 평생 책을 읽고 책의 궁실宮室에 들기 위해 전전긍긍하였으나
끝내 그 뜻조차 이루지 못하였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내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다.
책 읽는 즐거움만 누렸으면 좋았을 것을 왜 다른 원願을 품었던가. ('꿈')

중국 명대明代, 연경의 거대 서점 거리 '유리창'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뛰던 한 소녀는
30만 권의 장서를 갖춘 책벌레 범씨范氏의 개인 도서관(장서각) 소문에 혹해
자청해서 그 집안에 시집을 간다.
그러나 소수의 문중 남자들을 제외한 여성과 외부인에게는 절대 문을 열지 않았으니......

'어느 필경 수도사의 고백'도 절절하다.
수도원의 스크립토리움(필사실)에서 성스러운 율법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베껴 쓰며
말씀을 묵상하던 어린 소년이 서서히 지혜를 체득하여 쉼없이 이어지는 알파벳들 사이로
틈을 내어 문단을 나누고 구두점과 대문자를 이용해 말씀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하였으니,
인간의 손에 의해 더럽혀지고 잘못 전달된 말씀들이
그의 지혜에 힘입어 본래의 무오함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이 흐뭇했다.

내가 쓴 것처럼 빨려들어가 읽은 '작가의 말'을 소개한다.

책을 읽고 쓰고 만들면서 꽤 오랜 세월을 보냈다. 회의가 든 날도 많았다.
세상은 고사하고 사람의 작은 잘못도 바로잡지 못하는데
책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책을 떠나지 못한 건 끽연의 습관 같은 것이리라.
똑같은 습관인데 끽연은 나무라고 책은 권장하는 세상을 보며,
어쩌면 끽연보다 독서의 폐해가 더 클지도 모르는데, 하고 생각한 것이 출발이었다.
이 책에 실린 열 개의 상상, 그리고 여기 실리지 못한 더 많은 상상들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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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2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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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2 2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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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2-0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로드무비 2009-12-02 20:24   좋아요 0 | URL
님도 이 책 리뷰 쓰셨어요?
좀 있다 가볼게요.^^
 
사람 사는 세상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 2단 접이 특수양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학고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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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핑을 뜯고 몇 장의 사진을 보다가 그만, 비닐로 눈물을 닦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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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3 2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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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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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13: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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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14: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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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3 2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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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3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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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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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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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4 1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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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4 1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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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4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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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4 2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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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4 2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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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5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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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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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으며 오랜만에 리뷰를 쓰고 싶어 컴 앞에 앉았더니,
이런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승객 용변 손수 치워준 '천사표 버스 기사'>
그리고 그 버스 기사님을 찬양하는 댓글들이 주르륵 달렸다.

심신 미약 상태로 승객이 실수를 한 상황이라면 운행중인 버스에서 그 용변을 치우는 건
버스 기사의 몫 아닌가?
그 당연한 일이 포털 뉴스 기사 중 '시사' 부문  메인 으로 뜰 정도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지즈 네신의 유배지 회고록(거창하게 표현해서)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에는
오랜만의 외출에서 실수를 한 그 노인이나, 용변을 치운 기사님, 그 광경을 지켜본 승객들,
불친절한 자기 동네 버스 기사와 비교하며 그 기사님을 칭송하는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
버스를 모는 기사라면 당연한 일이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일입니까? 하며
실력 이상의 딴지를 거는 나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용산참사 농성자들 징역 5~8년 구형'이라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폭력으로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고 폭력에 상응하는 처벌이 없다면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두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될 것"이라며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이 검사들의 논지.

분기탱천하여,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닙니까?'라고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독수리 타법 때문인지 이상하게 손이 떨려 실패했다.

- 우리 역사에는 유배지나 감옥에서 말로 다하지 못할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제가 유배지에서 겪은 일들은
관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서문)

50여 년 전, 터키의 서슬 퍼런 계엄령 하에서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글로써  신념을 지켜 나가다가 감옥에 갇히고
혹독한 유배생활을 경험한 아지즈 네신의 유배 일기 중
이 유머러스하고 파라독스한 서문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관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가볍디가볍게 표현한 
그의 유배지에서의 기록은 요 며칠 나를 사정없이 웃기고 울렸는데,
"1년 전에만 만났더라도 부모에게 물려받아 탕진한 거액의 유산 중 몇 분의 1을
당신에게 주었을 텐데..."라는 말로 춥고 배고픈 유배지의 작가를 현혹한 사기꾼들에게
마지막 빵 한 조각을 기꺼이 내민 아지즈 네신의 흉내라도 내봐야 하나 어째야 하나......





 

 

 

 

 

 

 

나 또한, "내일모레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이 비슷한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현혹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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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1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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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1 2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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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잡히지 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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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450만 이주노동자 중에서 절반이 모루 아빠와 같은 미등록 노동자다.
해마다 10만 명 정도 되는 이주노동자를 새로이 들여온다. 땀흘려 일해온 미등록노동자는
버려둔 채로.
새로운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오래 된 노동자들은 계속 쫓기고 강제로 추방당한다.
(...) 모루가 아빠에게 숨죽여 했다는 말을 전한다. "아빠, 제발 잡히지 마."(49쪽)

신문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어쩌다 집어든 책을 펄쳐도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우울한 현실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끝없이 늘어진다.
가령 '976명 해고해 놓고 841명 신규채용 계획'이라니,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에 실린 <쌍용차, 구조조정 본색 드러났다>라는 제목의 기사는 어떤가?
'이 치졸한 나라가 필요할 때만 쥐어짜듯 부려먹고 매몰차게 내치는'(170쪽) 건
미등록 이주노동자뿐만이 아니다.
그건 바로 이 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운좋게 지금 현재 정규직 노동자라고 해도 또 안심할 것은 못 된다.
일터에서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벌 수 있을 때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그악스러워지고, 이 책 속의 작은 제목처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

누구나 기피하는 험한 일들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을, '국가적 필요에 따라 해외노동력을
도입하면서 그에 대한 대책은 전혀 마련하지 않고' 큰 시혜나 베푸는 듯 구박하고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몇푼 되지 않는 임금을 떼먹는 건 예사요, 차일피일 미루고 주지 않는 퇴직금을
함께 받으러 갔더니 모 회사의 부장, 뚫린 입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말입니다. 억울해요, 정말. 이 친구는 일은 잘해요. 저는 인정할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신경 많이 썼어요. 얼마나 잘해줬다구요.  어떤 때는 닭고기도 사다가
기숙사에 넣어주고, 얘들은 돼지고기 안 먹잖아요. 그러니까 꼭 닭고기로 사다줬다구요.
어떤 회사가 우리처럼 그렇게 신경 쓰겠어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짜식이 뒤통수나 치고,
허이구 참 기가 막혀서. 퇴직금은 무슨 퇴직금이에요. 외국인들 주제에, 배은망덕하기는..."
('퇴직금 소동' 54쪽)

임금을 떼먹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는 뜻이다.
특별한 악인의 말이 아니다. 그는 아마 눈을 껌뻑껌뻑, 꽤나 선량한 얼굴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는 또 누군가에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저런 말을 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주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할까,
책장을 확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통하고 기막힌 삶의 기록들이 넘쳐나는데,  
닭고기를 가끔 사줬다고 자화자찬하는 어느 부장의 이야기가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저자 이란주 씨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로 '최초의 이주노동자 인권선언'이라 불리는
외국인노동자의 삶의 이야기집 <말해요 찬드라>를 펴낸 후 몇 년 만에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말 많고 탈 많던 산업연수 제도를 몰아내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일부는
합법적인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다고는 하나 결국 맨몸뚱이로 내쫓기는 건 마찬가지.
그 모든 것은 허울좋은 변화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하나하나, 민망하고 미안해서 차마 글로 옮겨적고 싶지도 않다.
특히 강제단속과 추방 장면은 호러 영화처럼 소름이 돋을 정도.
그러니, 위에 잠깐 소개한 '퇴직금 소동'의 차 부장님  대사 정도는
아주 귀여운 에피소드라고 할까.

"사장님한테 자꾸 돈 달라고 하지 마. 사장님도 힘들어."('그가 미쳐버린 사연' 122쪽)

정신병원으로 다시 들어가며 아내에게 이렇게 당부하는 한 이주노동자의 말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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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9-06-1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감사합니다. 꼭 읽어봐야 겠네요!

로드무비 2009-06-10 21:27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가 감사합니다요.^^

balmas 2009-06-1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제목과 마지막 이주노동자의 말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눈물이 찔끔 나네요.

로드무비 2009-06-11 10:33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장면에서 눈물이 찔끔 났어요.
제목이 생각 안 났는데 아이들 이름을 넣어서... 저 잘했죠? 발마스 님.^^

치니 2009-06-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통이 트이지 않는 나날입니다. 도무지...

로드무비 2009-06-11 10:32   좋아요 0 | URL
바늘구멍만한 숨통을 기대하고 이것저것 끄적여봅니다.

릴케 현상 2009-06-1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친구는 일은 잘해요. 저는 인정할 건 인정합니다.<--에고고... 찔려요. 저 일은 잘 못하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ㅠㅠ

로드무비 2009-06-14 10:40   좋아요 0 | URL
산책 님, 찌찌뽕.
그런데 저는 '일도' 잘 못합니다.^^

승주나무 2009-06-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없음

안녕하세요. 승주나무입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와 네티즌들이 함께 시국선언 의견광고를 하려고 합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참여의사를 댓글로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즐찾 서재들을 다니면서 통문(댓글)을 돌리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남기는 스팸성 댓글이지만 어여삐 봐주세요~~~

http://blog.aladdin.co.kr/booknamu/2916466


2009-07-11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7-1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로드무비 2009-07-15 14:56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
지가 되려 고맙죠.^^

2009-07-16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7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7-1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그래욧. 완죤 질투 있죠

2009-09-22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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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남양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10여년째 다니던 영등포의 민중교회와 멀어졌다.
그 교회의 전도사였다가 막 안수를 받고 부임한 젊은 여성 목사님은
성실한 척하는 나를 꽤 믿고 따랐는데 이사 후 두세 번 나갔을까,
너무 멀다는 핑계로  걸음을 딱 끊었다.
고맙게도 그는 지금도 메일로 지난주 설교말씀과 주보를 보내주고 있다.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오늘 아침 지난주 주보가 뒤늦게 도착했다.)

4월 마지막 수요일은 용산 참사 100일째 되는 날, 청년부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고 한다.
경찰의 원천봉쇄로 쫓겨난 유족과 추모객들은 서울역에 모였고 
4개 종단 즉 불교, 가톨릭, 기독교, 원불교가 함께 추모 예식을 진행했는데
문정현 신부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단다.

“저는 얼마 전, 용산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미사 드리고 이곳을 지킬 거예요.”

이 대목을 읽는데 가슴이 뜨끔했다.
참사 현장 가까이에는 간이조문소가 차려져 있고
봄꽃 화분들이 쭈르륵 놓여 있다는 것이다.
평택 대추리의 주민이었다가 용산의 주민을 자처하는 신부님도 신부님이지만
그 화분들은 언제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나마 가끔 몇 푼의 조의금이나 성금으로 때우고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좀 덜 이기적이고 양심적인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은밀히 하는 나.
그런데 그런 나의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을 여지없이 깨뜨려주는 사람과 글을
만날 때가 있으니.

김규항의 <예수전>.
종종 느끼는 거지만 그의 펜 끝은 탐욕스런 부자나 썩어빠진 이 사회의 지도층보다는,
'배울 만큼 배우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닌),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을 겨냥하고 추궁할 때가 많다.
'필요 이상 분열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운동'
노선이 다른 동지를 적보다 더 미워하는 풍경이 횡행한다'(151쪽)고 쓴 그의 말이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까.

-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
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119쪽)

날카로운 그의 시선은 이른바 '의식 있는 (척하는) 양심적인 시민'뿐 아니라
'힘없는 피해자'로 묘사되는 '인민'을 향할 때도 가차없다.

-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181쪽)

-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 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238쪽)

'인민들의 노동과 수고 덕에 살아가는 주제'에 겉으로는 그들을 존중하는 척 무시하며
자신의 이익과 안전만 도모하는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 대목에 이르면
(인텔리도 아니면서) 얼음덩어리 한 동이가 공중에서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다.
글로 만나는 그의 냉소와 독설은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 사람들은 더이상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이상주의적 태도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표징으로 여겨지고
(...)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관리하고 제 자식을
더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드느라 여념없다.(머리말 중에서)

'마르코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쓴 책이란다.
예수가 반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주년 신약성서>를 텍스트로 삼았다니
신선하면서도 섬세한 발상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그가 옮겨 적은 존댓말 성경 구절들이 마음에 착착 감겨오지 않아 아쉬웠다.
무조건 공감하는 건 예수의 관심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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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5-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웬디양님 이후에 로드무비님도 별 다섯개에 이런 리뷰라니.
그냥 볼까요? 종교 관련 책은 당분간 읽고 싶지 않았는데...^-^;;

로드무비 2009-05-15 16:47   좋아요 0 | URL
치니 님의 힌트에 달려가 웬디양 님 리뷰 읽고 왔어요.
글샘님 것도...
김규항의 예수에 관심이 있으면 읽어보세요.
전 통쾌하고 재밌더라고요.^^

twoshot 2009-05-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로 만나는 그의 냉소와 독설은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그 중독성을 요사이 좀 멀리 했지요.
그 아집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자꾸 눈살을 찌푸리게 되더라구요.
리뷰 감사 드립니다, 책은 나중에 볼께요^^

로드무비 2009-05-15 22:05   좋아요 0 | URL
책이 나온 걸 알고 바로 주문했답니다.
오늘 다시 펼쳐보니 밑줄 그은 대목도 꽤 많더라고요.
흡족한 독서.^^

(저도 그렇지만, 남의 고집은'아집', 나의 고집은 '신념' 아니겠습니까요.)

에로이카 2009-05-16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랜만입니다. 리뷰 잘 봤습니다. 김규항도 로드무비님도 여전하십니다. ^^

로드무비 2009-05-16 06:53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반갑습니다.'여전하다'니 좋네요.
잘 지내시지요?^^

율리 2009-05-1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들은 더이상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이상주의적 태도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표징으로 여겨지고
(...)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관리하고 제 자식을
더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드느라 여념없다.
너무 맞는 말같다...그래서 외로웠고, 이런 글을 날려주는 니가 있어 외롭지않다

2009-05-20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