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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변명 ㅣ 대학병원 건강교실 6
서민 지음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모해짐님이 선물해주신 <기생충의 변명>을 다 읽었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무려 사나흘간에 걸쳐 맛있는 과자를 서랍 속에 숨겨놓고 먹듯 아껴가며 읽었다. 재미있는 책을 단숨에 해치우지 않고 사나흘 동안 나누어 읽는다는 건 어지간한 이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어제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재밌는(?) 뉴스를 전해주었다.
"엄마, 엄마, 오늘 1학년 9반 어떤 아이가 배가 아파서 설사를 하는데 화장실에 가지 않고 바지에다 쌌대!"
"저런!(사실을 말하면 나는 '저런!'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우야꼬!로 바꿔 읽으시길) 실수한 친구 놀리면 안되는데 '친구야,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울지 마!'하고 위로해 줘야 좋은 친구지."
부모 역할을 하다보면 자신의 평소 성품이나 인격과는 다르게 이렇게 위선을 떨 때가 있다. 더구나 마이 도러는 그런 재미있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 중에서도 제일 앞자리에 속한다.
그런데 딸아이의 대답이 더 웃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안 울었다는데?"
울지도 않는 아이를 어떻게 "울지 마!"하고 위로하느냐, 그런 이야기다.
기생충이 주인공인 책인만큼 이 책에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대변, 항문 뭐 그런 향기롭지 못한 단어들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저자의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입담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이 책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경쾌하고 발랄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밥상머리에서 신문 대신 들고 읽는 것도 무방할 정도.(단 123쪽 사진은 밥 먹을 때 보면 절대 안 됨.)
옛날 옛날 내가 단발머리 여중생일 때 '간디스토마'로 불리는 급우가 있었다. 회충검사 때 재수없게 간디스토마로 판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충! 그런데 그게 뭐 자랑거리라고 밝히느냐 하면 요충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요충이나 회충으로 판명난 아이들은 간디스토마 아이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소근소근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맹세코 나는 그런 적은 없다. 요충으로 간지러워 잠 안 오는 밤, 짝사랑하는 머스마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던 기억은 있지만......
<기생충의 변명>은 의학전문 학술서답게 기생충의 이름들이 정식 명칭으로 나온다. 간디스토마는 간흡충으로, 또 사람이나 동물의 눈이 주요 은신처라는 동양안충, 매일매일이 남여상열지사라는 주혈흡충, 굴을 먹고 걸린다는 참굴큰입흡충......
'21세기는 기생충의 시대다'라는 헤드카피와 함께 서문에는 '멸시와 배척 속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여러 기생충의 다양한 삶을 통해 공존의 방법과 삶의 지혜를 배우자'는 저자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월드컵 무렵에 쓴 원고인 듯, 각국 월드컵 팀을 기생충에 비유한 꼭지가 나오는데 월드컵의 영광을 못 잊어하는 축구팬들이라면 꼭 한번 찾아서 읽어볼 만하다.(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인용하지 않겠음.)
의대 본과 2학년 때 방송반 작품으로 '킬리만자로의 기생충'을 쓴 적도 있다는 저자 서민 교수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기생충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틈틈이 기생충학을 연구하고 있는 소장학자로서의 고충을 유머러스하고 페이소스가 짙게 풍겨지는 일화로 소개하고 있다.
특정 마을의 역학조사를 위한 대변검사나, 개 눈에 서식하는 기생충을 조사하기 위해 사육장에서 또는 도축 현장에서, 또 기생충과 관련 있는 파리인가 모기인가를 잡기 위해 뒷산에서 망을 들고 진을 치는 그의 하루는 어느 빼어난 단편소설이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고 눈물겹다.
(이 책을 선물해준 님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