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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이 책은 늘 뭔가를 생각하고, 언젠가 어떤 통찰을 얻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것만을 기대하며 살아온 한 남자가 여행을 계기로 머릿속을 스쳐간 다양한 생각들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다 취재를 겸한 여행에서 얻은 정보를 보태고, 그런 여행을 하면서 사색한 내용을 서술한, 농도 짙은 보고서 몇 개가 실려 있다.(85쪽)
다치바나 다카시의 <사색기행>을 읽었다. '세계인식은 여행에서 시작된다'는 제목의 90쪽짜리 서론에서 미리 밝혀놓은 것처럼 그의 기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여행기와는 많이 달랐다. 관광객으로 들끓는 명소 위주의 여행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 목적 없이 휘파람을 불며 어슬렁 뒷골목을 산책하는 배낭여행과도 거리가 멀었다.
낯선 나라의 도시 뒷골목이나 바닷가, 혹은 시골의 한적한 길을 유유자적 한달쯤 배회해보고 싶은 꿈이 나에게도 분명 있었는데 나는 어쩌자고 여러 번 걸어들어온 그 기회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인도도 마찬가지. 서른 초반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둘은 나를 유혹하다 하다 포기하고 저희들끼리 유럽에도 가고 인도에도 다녀왔다. 친구들이 배낭여행을 간 동안 극장으로, 또 희귀비디오를 소장한 비디오가게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녔던 나의 선택은 과연 현명한 것이었을까?
제 1장, '무인도에서 보낸 엿새'(1982년)는 문명사회에 중독된 인간의 엿새간의 단독 무인도 체류기이지만 한 잡지사의 기획의도처럼 너무나 가볍고 뻔해서 다치바나 다카시 본인으로서는 상당히 독특하고 유쾌한 경험이 되었는지 몰라도 독자로서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일본의 한 무인도에 약간의 식량만 가지고 들어가 엿새를 혼자 보낸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단 며칠간의 경험일 뿐인데도 저자는 돌아와서 굉장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할 필요가 어딨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요컨대 나는 업무중독에서도 헤어나고 만 것이다.(119쪽)
제2장 몽골에서의 '개기일식' 체험(1997년)을 하게 되는 경위도 마찬가지이다. "몽골에 개기일식 보러가지 않을래요? 테레비아사히의 프로듀서가 이런 제안을 했다. (...) "개기일식으로 하늘이 새카매지면 헤일-봅 혜성이 육안으로 보일 겁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지요."(121쪽)
그런데 그가 꼭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이렇게 멋진 제안을 받고 거기에 응하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른바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었다. 가령 그는 중학생 시절에 망원경을 직접 만들어 별이나 달을 즐겨 관측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대학시절 이슬람 문화에 관심이 많아 아라비아어 수업과 페르시아어 수업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도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제 3장 '가르강튀아 풍'의 폭음폭식 여행(1983)은 일본의 최고 소믈리에와 프랑스의 와인 산지를 돌며 최고급 와인과 치즈를 원없이 먹어본 체험인데 이런 류의 취재여행을 제외하고는 다치바나 다카시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던 독특한 기행들로 이 책은 채워져 있다.
내가 제일 부러웠던 기행은 제6장 신을 위한 음악(1982년) 편으로 세속과는 절연되어 사람의 발길도 거의 끊어진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 울리기 시작했던 오르간 연주곡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아무 이유 없이 그가 눈물을 흘렸던 시간이다. 슬퍼서도 아니고 심란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마침 그 시간에 오르간주자는 연습을 시작했을 뿐인데 그 음악이 그의 영혼을 건드렸다. 나는 여행의 최고 순간을 그러한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그가 열아홉 살에 떠났던 유럽 반핵무전여행(1960년)이다. 대학 1학년 때 이런 종류의 여행을 구상하고 모금을 통해서 엄청난 경비(요즘으로 치면 1천만 엔?)를 마련, 친구와 함께 떠난 그의 기상과 호기 앞에서 나는 너무 부러워 할 말을 잃었다. '원폭수폭 금지 세계 홍보운동 추친위원회'를 고마이 군과 달랑 두 명이서 결성, 1년 동안 모금을 받아 원폭피해 사진집과 관련 다큐멘터리 필름 세 통을 들고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그들이 만난 유럽의 평화운동 단체나 운동을 하는 개인의 모습들도 상당히 인상깊다. "시위현장에서 놀랄만한 강인함을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 개인의 신념이나 신앙(퀘이커 교도 등)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 그뿐인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떠났던 이 6개월간의 여정에서 예술과 문화를 몸으로 체험한다. 어느 시골 구석에 가도 놀랄만한 미술작품들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그는 6개월간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칭 인생에서 최고의 공부를 한다. 체리나무가 있는 엑상프로방스 젊은 미망인의 집 마당에서 체리를 실컷 따먹던 그 일주일만큼 호사스러운 인생의 순간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는 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생운동을 그만두고 자신의 관심사인 공부에 매진한다.
그 뒤를 잇는 '팔레스타인 보고'나 '뉴욕 기행'도 무척 흥미로웠지만 저자의 말대로 그것은 보고서의 성격을 띤 것이니 너무 바쁜 사람은 건너뛰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기행과 보고서를 한 권의 책으로 무리하게 묶지 말고 두 권으로 따로 엮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별로 바쁠 것 없는 나는 팔레스타인 보고서나 뉴욕 연구까지 꼼꼼히 흥미롭게 읽었지만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흥분과 즐거움은 나도 모르게 반감이 되는 느낌이었으니까......그 점이 아쉬웠다고 하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