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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
김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빨리 읽고 리뷰를 쓰고 싶은 욕심이 나는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최영미의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그리고 심지어는 주문해놓고 그렇게 기다리던 공선옥의 <사는 게 거짓말 같은 때>가 토요일에 도착했는데 뒤로 미뤄두고 이 책을 먼저 집어들었다.
리뷰 전에 자랑질
클래식 음악애호가 김갑수, 1989년 그의 첫 시집 <세월의 거지>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 지금은 출판평론가로 명성이 자자한 모 씨가 나와 같은 출판사에 다니다가 <출판저널> 기자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독자서평 원고를 맡았는데 원고 들어온 게 없다며 급히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얼마 안되긴 하지만 원고료도 있다길래 방금 사서 재밌게 읽은 김갑수 시인의 <세월의 거지> 서평을 얼렁뚱땅 써서 넘겼다. 일로 알게 되어 꽤 친하게 지낸 원로소설가 한 분이 출판저널에서 그 글을 읽었다며 한국일보에 실린 어느 원로화가의 인터뷰 기사를 화가의 자전적인 수필로 바꿔 써달라고 내게 부탁하셨다. 그걸 써드리고 원고료를 10만 원 받았다. 그리고 웅진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내 친구가 어느 날 우연히 그 회사 복도 자판기 앞에서 만난 김갑수 시인에게 독자서평을 쓴 친구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접선이 되어 딱 한 번 술도 거하게 얻어마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김갑수 씨의 시집을 읽음으로 인하여 나는 꽤 많은 경제적인 이득과 더불어 시인과 술을 마시는 영광을 누려봤다는 것이다. 에잇! 리뷰의 서두가 뭐 이래! (죄송.)
처연하면서도 심상한 자기고백
이 책이 음악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바람대로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에는 지나간 사랑의 사연과 젊은날의 방황과 고뇌, 마흔을 훌쩍 넘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시인의 처연한 자기고백이 그의 영혼을 매료시킨 클래식 음악의 선율과 함께 실려 있다. 자신의 한쪽 눈이 완전히 멀게 된 사연도, "한번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 애인에 대해서도 그는 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심상하게 말한다. 나는 그의 담담한 어조가 좋다.
십몇 년 전 전문 음악실을 방불하는 광화문의 그의 아지트에 대해 소문이 무성했는데 내가 조금만 뻔뻔하거나 용감했다면 그 곳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경 못한들 그게 뭔 대수겠는가. 이 책은 나같은 클래식 음악의 문외한도 아무 부담없이 읽을 수 있게 재밌게 쓰였다.
오래 전 <음악, 귀로 마시는 황홀한 술>(제목이 정확히 기억 안 난다)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작곡가와 음악과 명반을 소개하는 책을 읽고 당장에 살 명반 제목을 수첩에 빼곡하게 기록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남의 입을 통해 듣는 음악의 감동은 읽을 때뿐이었다. 송영 선생의 비슷한 책도 마찬가지. 재밌게 읽고 호감은 가졌지만 그 당장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지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선물받은 말러의 교향곡들과 카잘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 외에는 이렇다 할 명반 한 장 가져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게 될지도 모른다.
음악이 안겨주는 전존재의 떨림이라!
--인생이 너무나 별게 아니라는 생각에 진저리치며 음악 속으로 도망을 친다. 거기 모든 것이 다 있다.(18쪽)
리스트와 바그너, 연애 문제로 악명이 높은 두 작곡가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막힘이 없고 참 명쾌하다. 연애 문제로 그 자신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 눈친데 저자는 이를 결코 숨기려는 기색이 없다.
--그들은 사기친다고 드러내면서 사기쳤다. (...) 두 예술가는 그런 삶으로 충분히 화려했고 또한 충분히 고생을 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작품을 남겼다. 나는 그런 리스트, 바그너를 사랑한다.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25쪽)
삶이 괴로워서 음악으로 도망을 쳤다는 시인 김갑수는 음악에 빠져 시도 쓰지 않고 아예 클래식 음악 전문가로 방송 진행자로 나섰다. 이 책에서 30대, 40대, 50대 독신 트리오였다는 편집자 시절의 시인을 포함한 광화문 3인조 이야기가 나는 제일 재밌었다. 무명의 음악 애호가들의 삶, 나도 한번 그렇게 미친듯이 살아봤으면......
그리고 캐슬린 페리어니 벨라 바르톡 등 생전 처음 듣는 가수와 작곡가의 이름, 시인 김정환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음악이라며 그의 작업실에 놀러오면 청하여 듣는다는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몇 번 곡 등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시인의 음악 소개는 정말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그의 책을 읽다가 언젠가 비오는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듣고 무지 좋았던 에릭 사티의 곡명을 알게 됐으며, 작가 최인호의 딸 다혜 양이 초등학생일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듣고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접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국어 선생을 하는 내 친구 딸은 두 살 때 방문에 걸어놓은 아기 그네 위에 앉아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듣는 것이 취미였다. 그 곡을 들을 때 너무나 행복해 하는 아이의 모습이 결혼도 하지 않은 나는 신기하기 짝이 없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마이 도러는 음악적 재능이 없는지 몰라도 그런 애창곡이 없었다. 요즘은 운동회 준비를 하며 배운 학교 교가를 고래고래 악을 써가며 시도때도 없이 부르는데......
나는 오래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어떤 음악회에서 이탈리아 가곡은 악보도 보지 않고 열창하더니 한국 가곡을 부를 때 소절마다 악보를 보면서 부르는 어느 소프라노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클래식 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미워했던 적이 있다. 그 무렵 또 윤호진 연출의 뮤지컬 <겨울나그네>를 예술의 전당에 보러 갔다가 겉멋만 잔뜩 든 그 엉터리 뮤지컬에 실망해 끝까지 보지 않고 일행과 함께 중간에 나오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내 돈으로 음반을 열심히 사지 않았을 뿐 이렇게 저렇게 주워듣고 좋아라 했던 곡들은 꽤 되는데......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 이야기만 기대하고 이 책을 집어든 클래식 매니아 독자라면 어쩌면 조금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클래식 외에도 록이나 분노의 하드 코어, 밥 딜런 30주년 기념 콘서트장에서 사회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나갔다는 시네이드 오코너의 소식까지 뭐 하나 내 구미를 충족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테리 리드, 할리 니어 등 그의 소개를 듣기만 해도 호감이 가는 대중가요 뮤지션들의 이름을 내 수첩 귀퉁이에 옮겨 적게 했다. 그것이 앞으로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