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사흘간 이야기를 갑자기 늘어놓고 싶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엊그제 월요일은 모처럼 영화를 보러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어이없는 이유로 놓치고 말았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정오 조금 지나면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특기교육을 받으러 가는 바람에, 한두 달에 한 번꼴로 영화를 보러 나가는 즐거움마저 원천봉쇄된 상태. 그런데 그날은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가서 오후 네 시경에나 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조카도 두시 반경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데 그날은 세시 반에 보내달라고 쪽지까지 써서 원아수첩에 붙여보냈으니 외출을 하기에는 만사 오케이였다.
아침부터 일어나 샤워를 하고 서둘러 김밥을 싸서 아이를 보낸 후 지아장커 감독의 <플랫폼>을 볼까,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볼까 인터넷으로 시간을 좀 알아보려는데 전자레인지 앞에 두고간 도시락 주머니가 눈에 띈다. 순간 가슴이 철렁. 시간을 보니 아홉시가 다 되어가고 조카 녀석도 어린이집 버스를 타야 할 시각이다. 미친 듯이 아이를 안고 도시락 주머니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학교 가는 길에 어린이집이 있으니 버스를 중간에 만나든가 안하겠나! 다행히 모퉁이 길에서 차를 만나 아이를 태워 보내고 나는 3,4백 미터의 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집에서 신는 통굽구두가 유난히 불편하고 발이 아팠다.
다행히 어린 종다리 같은 아이들이 반별로 줄을 서서 인원 점검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5,6십 명쯤이나 자기 아이를 배웅하느라 웅성거리고 서있었다! 마이 도러의 담임 선생님은 사십대 후반의 여성으로 새빨간색 캐주얼한 옷을 아래위로 한 벌 입고 계셔서 내 눈에 금방 띄었다.
선생님과는 눈인사만 하고 아이 이름을 부르니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는 배시시 웃는다. 아이의 가방에 도시락을 넣어주는데 서너 명의 아이들이 나를 에워싼다.
"아줌마가 주하 엄마예요?"
"그래."
"얘가 주하 짝꿍인데요, 주하를 괴롭혀요."
"어떻게 괴롭히는데?"
"때리기도 하고요, 꼭두각시 춤출 때 바닥에 누워버려요."
두세 명의 아이가 주하를 대신하여 녀석의 비행(?)을 내게 일러바친다. 주하의 짝이라는 녀석을 보니 개구져 보이지만 어질게 생겼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잘 다녀오라고 아이에게 인사한 후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들었다. 설마 아침부터 김밥 좀 쌌다고, 3, 4백 미터쯤 달렸다고 그렇게 피곤할까? 정신적인 피로였다. 마을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서울에 가 영화를 보는 일도, 봄옷을 좀 사는 일도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세탁소에 전화를 해 겨울옷들 드라이크리닝을 맡기며 아이의 한복치마도 무릎 위 길이로 바느질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린이날 전날 운동회가 열리는데 꼭두각시 춤을 춘다는 것이다. 알림장에 보니 그게 준비물이라고 써있었다. (참고로 나는 바느질, 다림질 이런 건 완전 젬병이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갔는데 오후에 주하 남자친구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꼭두각시 의상을 문방구에서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탁소에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 바느질 중지를 부탁하고.(하마트면 큰일날뻔했다. 새 한복치마를 못 쓰게 만들 뻔!)
어제 오후엔 조카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픈 바람에 병원 문 닫을까봐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다녀왔고. 밤에는 학교앞 문방구에 꼭두각시 의상을 사러 갔다. 저고리가 아이에게 너무 커서 작은 사이즈가 없냐고 물었더니 밤 열한시 경에 가져오기로 했단다. 그리하여 아이를 재우고 혼자 밤길을 걸어 다시 문방구로 갔다. 아이에게 꼭 맞는 저고리를 살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오늘은 처음으로 녹색어머니회 활동이 있는 날, 2단지와 3단지 사이의 건널목에 노란조끼를 입고 어깨띠를 두르고 한 시간 가량 서있다가 왔다. 내 맞은편 길에서 나와 마주보며 깃발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학부모 회의 때 인상이 좋아 내가 제일 호감을 느꼈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알고봤더니 왜소증 아이의 엄마. 고3, 중2의 아들들이 있다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아이가 키가 클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이야기해 준다. 중간에 담임 선생님이 일부러 내려오셔서 수고가 많다며 내 어깨에 손을 잠시 얹어주셨는데 나는 그 손길이 그렇게 황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겸손한 인간이었다니! 학부모의 심정이란 이런 것인가!
여덟시 오십분쯤 되자 거짓말처럼 아이들도 출근길 차량도 딱 끊겼다. 오늘 당번이었던 엄마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네 명. 우리는 학교측에서 마련해놓은 조그만 콘테이너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낸 건 큰 수확.
그런데 오늘 한 시간 동안 내가 그 건널목에서 본 것은 막연하게 상상했던 활기찬 등교길이나 출근길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표정은 대부분 침울했다. 날씨 탓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아이들도 사는 게 많이 힘든가 보다. 배가 아프다고 울며 집으로 돌아가던 고학년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쯤 괜찮아졌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