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돌이님이 전태일 열사 반신상을 페이퍼로 올리신 걸 보니 생각나는 하루가 있다.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러 갔던 날.
1995년 11월 개봉, 딱 10년 전이다.

박광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제작비는 한푼 두푼
국민들의 기금을 모아 만들어졌다.
전태일 열사의 열렬한 팬으로서 나도 얼마간 정성껏 냈다.

박광수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 나는 그의 영화들이 별로였다.
아무튼 영화사에서 초대권을 두 장 보내주어서 그때 연애도 아닌 것이 묘한 관계로 만나던
몇 살 연하의 시인이랑 강남의 극장에 갔다.

엔딩 크레딧에 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영화보다 그것이 감동적이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에나, 전태일 열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가슴에 돋은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만든 홍기선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박광수 감독은 그 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 실수를 하여 완전히 내 눈밖에 났다.
부산 출신인데 자신이 나온 고등학교를 '똥통학교' 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고등학교 출신 중에 한동안 내가 짝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던 것.

극장 로비에서 시인이 내심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소설가를 만났다.
이름에 '응'자가 들어가는 그 젊은 소설가는 나와 시인을 보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소설가 '응'과도 나는 안면이 있었던 것.
그날, 부산의 내 도서관 친구가 예술의 전당에 공연을 보러 오기로 되어 있어 우리는 함께 어울리기로 했다.

내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가랑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시인을 대동하고 약속장소에 나타나자
너무나 즐거워했다.
나도  그 상황이 즐거웠다.
노래방에서 쾌감(!)은 극에 달했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와 두 미남자가 나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야말로 열창을 할 수밖에......
시인은 '사랑한 후에'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소설가도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술, 노래방.....유흥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냈다.
그들과 헤어져 친구와 집으로 돌아올 때 조금 깨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문인들이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얻어먹기만 하다니!
아무리 우리가 노처녀기로!
물론 그런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즐겁게 놀았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정말 아까운 건 따로 있다.
그날 내 가방 속에 이윤기의 <하늘의 문> 1권이 들어있었는데 소설가 응에게  빌려준 것이다.
절판이라 구할 수도 없는 책이니 두고두고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응은  꽤나 재밌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었는데 이젠 '내 책을 빌려가서 안 갚은 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시인은 '우디 알렌의 <범죄와 비행>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가 안 갚은 놈!'과
멋들어진 필체의 편지 한 통으로만 남아 있고.

아무튼 전태일 영화 개봉일은 내 인생에서 제일 흥청망청했던 날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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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5-09-2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
아 흥청망청은 했으나 소득이 별로 없었던 듯.... 게다가 이후 장기 투자의 역할도 별로 안됐던듯....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

hanicare 2005-09-2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응준씨가 문득 떠오르긴 하네요.후훗..시인은 누굴까. 미남자라니 더 궁금하지만. 완전히 맨입으로 얻어만 먹었다니. 쯔쯔...저라도 기분 상하겠어요.아무리 내 주머니가 토실토실하고 상대가 삐쩍 말랐다 해도 차라도 한 잔 사야지....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요, 자기 품위를 유지하는 길이었을텐데.

인터라겐 2005-09-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마지막이 .... 책 떼어 먹는 사람이 제일 얄미워요...

국경을넘어 2005-09-2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태일 평전>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들이 평이 엇갈리더군요. 본 사람들 대부분이 영화가 별로라고...

비로그인 2005-09-2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하하하. 텅 빈 공간 안에서 우렁차게 웃어봅니다. 소설가 '응'님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습죠. 그날 로드무비님이 쏘신 덕분에 그 분들의 가문 살이 두룩두룩 올라 글케 기름진 문장들이 나왔다 생각하렵니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하는 문학계의 진정한 큰 손..

히나 2005-09-2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너무 재미있어요 특히 소설가 응씨와 관련된 부분, 정말 이응준씨 맞나요? 이번에 중앙일보 문학상인가 수상한 여자가 이응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러는데 재미있더라구요 이제 이응준도 선생님 소리 들을 나이인가 싶어서.. 박광수 감독 영화는 저도 그냥 그래요 우선 재미가 없고 너무 심각하셔서.. 안경을 쓴 그 인상때문인가.. ^^;

로드무비 2005-09-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이름에 응 들어간 소설가가 이응준 씨밖에 없나요?
낭패인데...^^;;
박광수 감독 영화는 칠수와 만수부터 뭔가 삐그덕거리더라고요.
요즘은 아예 그의 영화 안 봐요.^^;

복돌이님, 님이 우렁차게 웃으셨다니 기뻐요.
사실은 유명한 문인들이 우리와 놀아주어 감지덕지했답니다. 헤헤~

폐인촌님, 맞아요.
평전 읽고 울고불고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난리도 아니었는데
영화는 너무 멋을 부려서 마음에 탁 걸리더군요.
홍기선 감독이 만들었으면 기가 막혔을 텐데.....

로드무비 2005-09-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책 한 권에 비디오테이프 한 개에 제가 너무 야박한가요?ㅎㅎ

하니케어님, 저녁 메뉴도 별것 아니었거든요.
서초동 교대앞 유부우동집.
김밥하고 다 해서 돈도 얼마 안 나왔는데......
(저도 조금 아쉬워요. 그런데 사실 돈이 없긴 했어요. 그들!^^)

바람돌이님,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페이퍼로도 쓰고...
소득이 있네요, 뭐!^^

urblue 2005-09-2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진 제 책들이 생각납니다. 코스미코미케, 아르마다, 키니냐가, 픽션들...으흑..

코마개 2005-09-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그 영화 저도 좋았어요. 감독 이름은 로드무비님이 말해 주셔서 알았네요. 그 영화랑 느낌이 비슷한 소설이 '숨은 그림찾기'인가...뭐 그런게 있었는데..(금주현상)
별로 본 사람 없는 영화를 본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서...

마태우스 2005-09-2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의 장점은 하루 일과를 얘기하실 때 지루하지 않게, 멋드러지게 쓰신다는 거예요. 님의 글, 저는 참 좋아합니다. 마지막 결론도 어쩜 그리 멋지십니까.

숨은아이 2005-09-2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최응삼인가요? 라 하려구 했는데... ㅎㅎ 이 영화에서도 로드무비님과 공통점을 하나 발견! 그것만으로 좋으네요, 그냥.

엔리꼬 2005-09-2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이 중간에 들어가는 사람 중에 최응삼도 있습니다. 다들 그분을 무시하지 마시길... 저도 <전태일> 영화 자체보다는 마지막 사람들 이름 쫙 나오는 부분이 더 멋졌어요.. 도저히 자막 끝날 때까지 극장 밖을 나갈 수 없었죠.

야클 2005-09-2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동안 흥청망청 한번쯤 써 보는 것도 괜찮을것 같아요. 딱 한번쯤은. 그래야 여한이 없죠. ^^

클리오 2005-09-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끝까지 얻어먹었던 그 사람들이 나빠요... (어째 별 관계있는듯, 없는 듯한 댓글... --;)

인간아 2005-09-2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의 문> 1권은 종종 헌책방에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구하게 되면 로드무비님께 보내드릴게요.

이리스 2005-09-22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로드무비님이 아까워하시던 <하늘의 문>도 (언젠가는)구할 수 있게 되고.. ^^; 근데 그 문인들 참 나쁘군요. 흥... 저도 응준.. 이라는 이름만 생각나더라는..^^

로드무비 2005-09-2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운빈현님 고맙습니다.
2권, 3권만 달랑 꽂혀 있는 걸 보면 속상해요.
다 읽은 책인데도......^^

클리오님, 수입이 거의 없는 청년들이었으니 이해해 주자고요.^^

야클님, 전 그런 의미에선 여한이 없습니다.
행운이죠.^^

서림님, 님의 이름도 자막에 있었던 건 아닌지...^^

숨은아이님, 그 공통점이 뭘까요?
궁금합니다.^^

마태우스님, 예, 저도 제 글이 마음에 들어요. 헤헤^^
(알라딘에서 제가 세번째로 좋아하는 마태우스님!=3=3)


로드무비 2005-09-2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괜찮은 한국영화는 무조건 개봉관에서 보는 걸 원칙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저 영화 보셨다니 저도 반가운데요?^^

블루님, 픽션들 외엔 모두 모르는 책.
책들이 발이 달렸나?
(친구에게 빌려주고 못 받았다고 언젠가 쓰셨죠?)

로드무비 2005-09-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낡은구두님.
글고보니 저 그날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불렀군요.
페이퍼에 쓸걸.ㅎㅎ
님도 그런 책 있으면 운빈현님 졸라 보세요.^^

2005-09-22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5-09-2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통점은, 그거죠 뭐. 내 이름 언제 나오나 보려고 자막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는... -_-; (앗, "언젠가는"은 제 노래란 말입니닷.)

돌바람 2005-09-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 이상은


젊음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이렇게 이제 뒤돌아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로드무비님! 엽서 받았답니다. 필체가 너무너무너무 멋져서 무조건 손들고 저요 저요 하길 잘했다고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조조영화과랍니다.^^ 보내주신 시집은 301번에서 멈춰 있는 걸 어찌 아시구. 곱씹으면서 잘 보겠습니다. 글구요, 저도 조정현(? 갑자기 이름이 헷갈려요. 맞나? 피아노에 나왔던) 나왔던 <가슴에 돋은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대학 때 보았답니다.^^


로드무비 2005-09-2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돌바람님!
잘 들어갔군요.
빠른우편으로 보낸 보람이!^^
조'재'현이 연기를 참 잘했죠.
거친 사내들의 세계가 그냥 막 육박해 오는 영화였어요.
'언젠가는' 올려주셔서 너무 기뻐요.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2005-09-2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그랬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속삭이신 님, 책이 잘 도착했군요.
다행입니다.
책은 천천히 보내주셔도 되는데...^^

혜덕화 2005-09-2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재미있어요. '내 책을 빌려가서 안갚은 놈!" 앞에서는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님이 부럽네요.

클리오 2005-09-2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돌바람님이 올려준 노래의 저 가사 참 좋아해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날개 2005-09-22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글은 읽고 나면 수많은 댓글들 때문에 항상 스크롤의 압박이......^^;;

로드무비 2005-09-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모처럼의 흥행이구만요.
흥=3 님은 요즘 장난도 아니시면서!^^

따우님, 사진 정말 멋지더군요.^^

클리오님, 알라딘엔 유난히 이 노래 좋아하는 분들이 많당게요.^^

혜덕화님, 전 언제나 차분한 님이 부러운 걸요.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ㅎㅎ

플레져 2005-09-2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주 맛있는 장아찌에 아주 고소한 비빔밥이랑 곁들여 먹은 것 같아요. 꿀꺽~ 그 "응" 짜 들어가는 소설가...그분이죠? 제가 생각하는 그 분이요 ㅎㅎ
그 "응" 소설가는 제 친구랑 친구이기도 한데...헤~ 이르지 않을게요 ^^;;

chika 2005-09-2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저도.. 눈알빠지게 내 이름 찾았더랬지요. 그 깨알같은 이름.. ;;;

근데요.. 로드무비님, 모처럼의 흥행이라니요. 컴 고장나서 뜸하다가 글 쓰신거 아니었어요? 흥행한번 못하는 나는 주눅들게스리~ ;;;;

로드무비 2005-09-2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오, 님의 이름도 그 자막 속에 있었군요. 반가워라!^^
그리고 괜히 그냥 그렇게 말해본 겁니다.
치카님이 주눅드실 일이 뭐 있다고.
님도 괜히 그냥 그렇게 말씀해 보신 거죠?^^

플레져님, 아주 맛있는 장아찌에 비빔밥 먹고 싶어요.
그리고 응이라는 소설가는 플레져님 친구의 친구분이 맞겠죠?
이르지 마세요. 흑=3
 

오늘 아침 나는 아주 으시대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다른 때와 달리 음식물쓰레기 내용물이 아주 괜찮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봉지 속은 버릴 것이 없었다.

어제 저녁 소고기무국을 끓일 때 나온 콩나물 대가리와 꼬랑지, 무 껍질, 양파 껍데기, 대파 허물,
그리고 놀라지 마시라!
오늘 아침 당근사과주스를 갈아마시느라 나온 당근 껍질과 찌꺼기 사과껍질이 다였다.

거기다 당근과 사과는 도깨비방망이로 갈아서 베보자기에 넣고 탕약을 짜듯이 꼭 짜서 먹었다.
필 받은 김에 '당근 찌꺼기도 비빔밥에 넣고 비벼 먹을까?' 잠시 궁리하다가,
맛이 좀 이상할 것 같아서  관뒀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우쭐우쭐 누가 이 알뜰주부  좀 안 봐주나, 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식물쓰레기를 관리실 앞 통에 쏟아부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건 좀 섭섭했지만......

아침부터 어떻게 당근주스씩이나 만들었느냐,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책장수님의 어여쁜(?)  한마디 말 때문이다.
출근을 준비하며 꾸깃꾸깃한 카키색 면바지를 그냥 털어서 입으려는 남편에게 물었다.

"며칠 전 세탁소에서 다려온 바지는 세탁기 속에 들어있나?"

"아니! 여기 있잖아!"

그는 장롱 문짝 옷걸이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바지를 보여주었다.

"아니, 그걸 입잖고 왜 꾸깃꾸깃한 바질  입고 나가려고 그래?"

"아무 날도 아닌데 다림질 된 새바지 입고 나가려면 아깝잖아!"

'아이고, 책장수님아,  미안!' 

아무 날도 아닌데 다린 새바지를 입을 수 없다니!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책장수님이 너무 예쁘고 미안해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그리고 정말 얼마나 얼마나 미안하던지.....

할인점에서 산 싸구려 양복바지 다린 걸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책장수님, 
마누라가 다려준 셔츠나 양복을  이때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내 남편.
나는 처음부터 다림질은 아주 쥐약이라며 평화롭게 살고 싶으면 다림질한 옷에 대한 기대는 
버리라고 강요해 왔다.
그리고 되도록 구김이 덜 가는 옷을 골라서 사고 다급한 경우에는 세탁소에 맡겨 왔다.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할 수 있어! 한두 가지 정도는 못해야 인간적이지!"

이것이 뚫린 입이라고 걸핏하면 내가 읊은 대사다!

그렇다고 해서 다림질을 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미안한 마음을 나는 몸에 좋은 당근주스나  잘 차린 밥상과 술상 같은 걸로 계속 만회하며 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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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5-09-02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갈아만든 당근주스와 잘 차린 밥상이라...
그정도면 충분히 만회가 되고 말고요.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하냐고 사느냐고요.

첫 추천은 제가 했어요~
참말로 명언이시옵니다.

urblue 2005-09-0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랑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출근한다고 셔츠를 다려줬거든요. 근데 좀 지나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며칠 후 포기했지요.
저도 다시는 다림질할 생각 없어요.

플레져 2005-09-0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물 쓰레기 내용 부분은 정말로 공감해요 ^^ 저두 좀 괜찮은(?) 쓰레기일 경우 걸음을 좀 늦추기도 ㅋㅋ
다림질을 10분 안에 헤치우기까지 저는 한 2년 걸렸나봐요. 정말 어려운 다림질. 아직도 버버벅....

조선인 2005-09-0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질도 못 하고 잘 차린 밥상을 만들 줄도 모르는 저는 어쩌죠? 히히히

세실 2005-09-0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질은 신랑이 제꺼 까지 해주고, 잘 차린 밥상도 생일날에만 해줘요~ ㅠㅠ

엔리꼬 2005-09-0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도 다림질은 신랑이 다 하고, 밥상은 신부가 다 해요 ^^

인터라겐 2005-09-0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시집 잘가셨다... 저렇게 고운 마음씨 가진 남편 많지 않아요..진짜로... 전 콘에어 스팀다리미 산것 가지고 잘 써먹어요.. 회사 갔다오면 바지 뒷부분이 심하게 구겨져 있는데 아침에 그거 입고 나가는거 보면 제가 싫어서 구겨진곳만 다림질을 하는데 세워두고 하니 그건 편쿠 좋더라구요..

음 티셔츠도 인디안모드 상설매장에서 산게 있는데 빨아서 널어만 두면 주름 깨끗한게 있더라구요...ㅎㅎ 앞으론 그런 옷만 사기로 했답니다..

로드무비님과 책장수님은 정말 너무 어울리는 아니 서로를 너무 아껴주는 한쌍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히나 2005-09-0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워시 앤 아워 옷만 고집한답니다 다림질 안 해도 되는 회사에 다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림질도 그렇고 한 두 가지 정도 밖에 잘 하는 게 없는 인간이라.. 알뜰주부 로드무비님의 자신감이 부러워요 후후.. 그런 의미에서 추천..

서연사랑 2005-09-0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랑 생일에만 특별축하의 의미로 다림질을 해 주지요.
오히려 제가 하면 싫어해요. "일부러 주름 두 개 잡아놨지?!" 하면서.

로드무비 2005-09-02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네! 책장수님 만난 건 하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곧 제 생일이 다가옵니다. 이 페이퍼를 책장수님이 보셔야 할 텐데...;;)
그리고 전 인터라겐님의 신랑이야말로 땡 잡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ㅎㅎㅎ

서림님, 아이고 참, 문제 풀러 갈게요.;
두 분 정말 잘 만나셨네요!^^

세실님, 님은 어여쁘기까지 하시잖아요!(뭔 말이랴?^^;;)

조선인님, 괜한 말씀이신 거 다 알아요.
저야말로 밥상술상 차리는 재주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요즘
잘 안하니 문제죠.^^;;;

플레져님, ㅎㅎ 정말 우린 별게 다 자랑이죠?
감수성이 너무 뛰어나서 피곤해요.(이건 또 뭔 말?;;)

블루님, 안되는 걸 붙잡고 끙끙거릴 필요가 없다는 게
저의 유일한 확신이랍니다.(님도 그런 기미가...^^)

지우개님, 목 기브스 푸신 것 축하드려요.
이제 왕성한 활동 하실 거죠?
제 바톤 좀 받아주세요.^^
(추천 고마워요!)

줄리 2005-09-0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차린 밥상 혹시 로드무비님이 잘 잡수시려고 하시는거 아녜요? 물론 술상도요 ㅎㅎㅎ

sudan 2005-09-0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수님을 위하여 말없이 추천만.

로드무비 2005-09-0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안됐다는 표시인가요?^^

줄리님, 그, 그, 그걸 어떻게! =3=3=3

비로그인 2005-09-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수님, 멋재이! 전 바늘과 실하고도 안 친할 뿐더러 셔츠 앞쪽을 다리면 뒤쪽이 죄다 구깃구깃해지는 다림질 젬병이에요!!

로드무비 2005-09-0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그러고보니 저도 바늘하고 실하고 안 친하네요.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할 수 있어? 두세 개는 못할 수도 있는 거지!"
~로 대사 바꿀까요?ㅎㅎㅎ
(한 개 두 개 계속 늘어나면 안되는데...;;;)

클리오 2005-09-0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마음이 찡합니다. ^^

sudan 2005-09-02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좋은 분인 것 같아서요.

날개 2005-09-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수님 너무 멋있어요..!! 바람직한 남편상이라고나 할까....ㅎㅎ

이리스 2005-09-03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집마다 다림질 하는 사람이 다 다르더라구요 ㅋㅋ
아내 옷까지 다림질해주는 남편들도 많아요 ^^ 군대에서 다들 군복 다려봤으니 어쩌면 남자가 더 잘 다릴지도.. 호호..

산사춘 2005-09-03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 덕에 술만 처먹고 댕기던 딸내미 옷 다림질 해주고 구두 닦아주셨던 아부지가 떠오릅니다. 그 덕에 제 솜씨가 남달라서 아예 다림질할 옷도 없고 닦을 구두도 없어진지 오래군요. (이게 아부지께 고맙다는 태도더냐?)

산사춘 2005-09-03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너무 좋아요. 과거 십팔번이었는데, 노래방 가믄 꼭 다시 해봐야겄시유.

로드무비 2005-09-03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무신 노래요?
님의 과거 18번 궁금합니다. 가르쳐 주세요.^^
(아버지 너무 자상한 분이시네요, 부럽습니다!)

낡은구두님, 사진 보고 너무 어여쁘셔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술나서 댓글 안 달았어요.ㅎㅎㅎ
그리고 남자들이 다림질을 많이 한다는 것 이 페이퍼에 달아주신
님들의 댓글 보고 알았답니다.^^

날개님, 멋있는 건 아니고요, 쫌 착하죠. 헤헤~
그리고 적어도 제게는 바람직한 남편상 맞습니다.^^

수단님, 안되어 보여서가 아니고 좋은 분 같아서라고요?
기분좋습니다.^^

클리오님, 책장수님 입장을 말씀하시는 거죠?
찡하다니!^^

panda78 2005-09-0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때 셔츠 열 댓장을 줄줄이 다렸더니 무르팍도 시리고 발목도 아프고 머리도 띵하네요. - _ -;;; 아, 세상의 모든 셔츠가 링클 프리로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나..

2005-09-0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제가 가장 혐오하는 일이 다림질이라지요. 신랑 셔츠는 안 다려주면서 중학교 들어간 딸래미 교복은 열심히 다려 주고 있답니다. 버려둔 모성애가 그렇게라도 회복 된다는 듯이..

로드무비 2005-09-06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다람질 싫어하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군요.
위로가 됩니다. 호호^^
(전 다람질에 관한 한 모성애가 생길 것 같지 않아요.)

판다님, 셔츠 열댓장, 아아, 갑자기 옆지기분 직업이 궁금해요.
혹시 연예인?^^
(앞으론 링클 프리로만 사세요, 셔츠도 바지도...^^)

sooninara 2005-09-2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일요일에 와이셔츠 일주일치를 다려두면 좋은데..
간혹가다 개길때가 있어요..ㅠ.ㅠ
그럼 제가 다려주어요.. 다림질 정말 싫은데...
 

오래 전 문학관 자료 모으는 일을 하면서 많은 문인들과 또 유족의 집을 방문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소설을 쓰는 대표적인 두 소설가의 아드님은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아버님의 친필원고와 각 저서들을 보자기에 싸서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고 살고 있었다.

인간의 허위의식을 통쾌하게 비틀면서 인생의 부조리함과 잘못된 사회에 대한 분노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감추지 않았던 두 소설가는 살아생전에도 간신히 생계를 꾸리며
님의 집 문간방 같은 데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그들의 두 장손은 또 가난을 그대로 대물림하여
아버지의 원고보따리를 머리맡에 모셔 놓고 시난고난  마음을 앓으며 살고 계셨다.
아버지의 자료를 보러온 나같은 애송이 직원에게도 허리를 굽실굽실하며......

그런가 하면 살아 생전에도 큰소리 치며 풍류를 즐기며 유쾌한 시작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한 시인의
아드님은 15년 전 20억짜리 양재동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님의 친필원고나 유품에 대해서도
아주 쿨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 시인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고민과 애환이 있었겠지.
아무튼 교수에 사장에 그의 자손들은 모두 하나같이 번드르르하고 여유만만이었다.

도(道)에 통달한 듯한 유니크한 그의 시세계는  어쩌면 '생활'이라는 거룩하고도 구차한 현실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유복한 그의 처지에서 기인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현실에 매이지 않는 그의 성정이나 삶의 태도가 여유있고 풍요로운 삶의 자리를
구축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떵떵거리고 잘 살고 독립투사의 자손들이 고생을 바가지로 하며 사는 현실과도
아주 무관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적어도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몇몇 문인의 경우에 의하면......

그래서 나는 그때 결심(?)했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쿨하게 살기로!
그런데 그런 결심 자체가 쿨하지 않고 촌스러운 짓이라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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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늘빵 2005-08-2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은 신기한것도 잘 만드셔. ^^ 저도 쿨하게 살고픈데 전 쿨한 사람은 아닌거 같아요. 훕.

비로그인 2005-08-2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하게 가슴은 뜨겁게~
과거청산이 되지 않는 나라의 문인들의 삶이란.. 쓸쓸한 풍경입니다.

2005-08-22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8-2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차가워~~ 오늘 유난히 차가운 로드무비님~! ^^

로드무비 2005-08-22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신기해요. 오늘 아침 저의 (쿨함=)심통 사나움을 감지하시다니!^^
원고지 50장으로 쓸 수 있는 글을 여섯일곱 장으로 써버렸네요.
실명을 쓰고 제 생각을 펼치고 하는 건 다음에......^^

복돌이님, 저 마야 너무 예뻐요!^^
그리고, 과거청산, 그거 생각하면 저는 뻑이 가서말입니다.;

아프락사스님, 얼굴은 쿨한 미남이시던데...=3=3

물만두님, 그거(이모티콘!) 볼 때마다 신기해요!^^

히나 2005-08-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예술가들이 가난하기만을 바라는 건.. (부자나라 사람들이 인도가 그저 가난한 영혼의 땅이기만을 바라고 거기서 위안을 얻듯이) 사람들이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환상같은 거 아닐까요? 저는 20억도 좋고 30억도 좋고 많은 예술가들이 부자였으면 좋겠어요.

물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문제에는 공감합니다. 이후 친일행적을 한 예술가들의 화려한 행보에도 치가 떨리구요.

숨은아이 2005-08-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 예술가들이 가난해야 진실하다, 뭐 그런 뜻은 아니구요, 가난이든 부든 대물림되는 것, 그게 슬프지요.

히피드림~ 2005-08-22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두 소설가와 시인 한 분, 실명을 공개합시다.^^;;

엔리꼬 2005-08-2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술가가 부자가 되는 것도 찬성하지만, 부자가 되서도 예술가의 혼은 잊지 말기를 원해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겠죠? 특히나 자손들에게는요..

국경을넘어 2005-08-2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소설가 두분은 누구실랑가... 혹시 한 분은 김정한 선생? 아님 말고!!!

로드무비 2005-08-2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인촌님, 김정한 선생님은 아니에요.ㅎㅎ
실명을 거론하는 건 좀 거시기합니다.^^

서림님, 부자가 되어서도 너무 심한 사치는 부리지 않고
어렵게 사는 이웃 보면 주저없이 지갑 털고 기부하고......
전 딱 그 정도만 바랍니다. 부자 예술가들에게요.^^

펑크님, 실명 공개하면 제가 다칠 수도 있어서!^^

숨은아이님, 친절한 설명 감사!^^

스노드롭님, 제가 가난한 문인 부자 문인 이렇게 나눈 건 아니고요.
저도 잘사는 예술가들 보면 좋아요. 단, 교만하지만 않으면요.
그리고 가난한 문인도 좋아요. 구차하지 않고 당당하면요.
그리고 때론 구차해 보여도......좋아요!^^

마태우스 2005-08-2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수.
한명은 저랍니다... 죄송합니다. 저 20억짜리 집에 삽니다...

로드무비 2005-08-2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그거 정말이세요?
야호! 너무너무 신납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부자가 있다니!^^
(그런데 요즘 20억 집은 15년 전의 20억 집과는 좀 다르지 않나요?
아래위층 합해서 200평에 드레스룸만 해도 안방 두 개 합친 것 같던데...^^;;;)

2005-08-22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8-22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잘 들어갔군요. 다행!^^
 

오늘 낮, 아니 어제 오전 <예술가로 산다는 것> 리뷰를 올렸더니 검정개님이
또 한 편의 페이퍼를 독려해 주셨다.
안 그래도 꼭 한번은 이야기하고 넘어가려 했다.
문학을 앞세워 여성들을 등쳐먹고 다녔던 한 사기꾼에 대해......

어느 날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다.
어딘가에서 나의 지점토 작품을 봤다며 한번 만나고 싶다는 용건이었다.
나는 어린애 장난 같은 손바닥만한 내 지점토 액자를 '작품' 이라고 표현하는 것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혹시라도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하지 않았냐고?
나도 모르는 미술적인 재능이 있어서 어쩌면 인생이 새로 꽃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0. 1프로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걸 보니 그 정도는 스리살짝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커피숍에서 다음날 대낮에 남자를 만났다.
솔직히 말해 호텔 커피숍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승용차로 김해 도요까지 모시겠다고 했던 전날의 말과는 달리 그는 고물 오토바이를 끌고 나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지점토를 재미삼아 같이 만들고 있는 친구가 조금 뒤 올 거라고 했더니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처음 보는 순간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어서 도리어 나로서는 부담이 없었다.
무슨 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않겠는가!
10여 분 뒤 내 친구가 왔고 그가 미적미적 일어나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친구의 귀에 재빨리 속삭였다.
오늘 저 인간을 골탕 좀 먹여야겠는데 우리 둘이 떨어지면 큰일난다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달리다가 김해의 으슥한 수풀이나 자기 집에서 나를 자빠트릴
생각이었던 그는 내가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하자 당황하는 기색도 잠시, 그러자고 했다.
친구와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를 쫓아 택시를 타고 먼저 김해 그의 집필실이라는 데 갔다.
택시비를 내가 낼 줄 알았다가 그에게 내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지갑을 꺼내던 땡감 씹은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리뷰에도 썼다시피 그의 숲속 방은 꽤나 운치가 있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신동아 무더기를 비롯하여 꽤 많은 책들......
다탁 겸 책상으로 쓴다는,  나무밑둥을 잘라 만든 테이블......자칭 공예가요, 도요의 주인장답게
내오는 다기 세트도, 손놀림도  그럴듯했다.

도요에 가보자고 졸랐더니 다음에 안내하겠다던 이 남자, 마지못해 일어서서 우리를 안내한 곳은
아는 사람의 도요.  그것도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아 알았다.
친구와 나는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남자를 점잖게 따돌리고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다음날, 나의 펜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나의 집요한 추궁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던 것이다.
친구는 깜짝 놀라더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B일보에 실린 그녀의 시를 보고 시인이자 공예가라며 어느 날 그가 연락을 취해 왔단다.
여상을 졸업하고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바로 결혼을 해버렸던 그녀, 우체국에 근무하는데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시를 쓰는 것으로 간신히 인생의 고달픔을 달래던 중 재수없게 그 놈의 마수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남편에게 관계를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뜯어가는 돈도 수월치 않다고 했다.
어떻게 알고 남편이 없는 시간에 집까지 찾아오던 그에게 어느 날  지점토 액자와 내가 보낸 엽서가
눈에 띄었던 것.
그녀는 미안하다고 협박에 못 이겨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고 울먹였는데 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지만 친구의 전화번호를 넘긴 그녀의 철없음이 이해가 안되어서......

문학을 공부하는 여린 여성들을 맘껏 유린하고 다닌 그 남자(자신의 입으로 열 명을 넘는다고 자랑까지
했다니 진짜 나쁜 놈이다!),  한 번만 더 나타나면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라 했더니
말을 안 듣고 얼쩡거리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걸려 ..죄로 고소당했다.(이후의 이야기는 생략!)

솔직히 말해 문학을 내세워 미끼를 던지면 그걸 덥석 물던 순진한 여성 문학도들의 태도도 내겐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은 든다.
내가 너무 정서가 메말라서 아예 문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무튼  세상천지도 몰랐던 그 때(20대 중반)  나는 한 친구를 멋도 모르고 수렁에서 건져내었다.
그녀는 이혼(어차피 예정된 것이었다!) 등 호된 값을 치러야 했지만......
그런데  나는 첫눈에 그가 사기꾼임을 알아봤는데 왜 그녀들은 그걸 몰라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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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0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5-08-10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익적 무비님 덕에 그 사기꾼, 최소한 운신이라도 좁아졌겠지요?
<사기꾼으로 산다는 것>이나 <성폭력범으로 산다는 것>같은
르포형식의 소설이 기다려지는 새벽입니다요.
저 제목으로 자전소설들은 안쓸터이니...

사마천 2005-08-10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고백이십니다. 많이 와닿는군요.

로드무비 2005-08-10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늦게 안 주무셨네요.
제가 좀 똘똘하긴 했죠? 호호^^

산사춘님, 문학 공부하는 여성을 모두 자기 밥으로 보던 나쁜 놈이
제게 된통 걸려든 거죠.
우리 산사춘님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합니다요.^^

국경을넘어 2005-08-1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대단히 현명하십니다. 짝짝^^* 그런데 그넘 정말 나쁜 넘이군요. 우리 폐인들은 저런 놈들 상대 안합니다. 저런 놈들에게 우리 폐인들끼리 하는 말이 있는데... 이런 공간에 그 말을 차마 써 놀 수는 없고 쩝...

돌바람 2005-08-1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나는 첫눈에 그가 사기꾼임을 알아봤는데 왜 그녀들은 그걸 몰라봤을까?'
여기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넘어져서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아이가 크면 무비님 같은 스케일과 사기꾼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urblue 2005-08-1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말씀에 동감. 제 눈엔 그런거 전혀 안 보이거든요.

검둥개 2005-08-1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너무 멋지게 골탕을 먹이셔서 그 사기꾼 거의 불쌍한 마음까지 들 지경입니다. ^________^ 저도 그런 사기꾼을 만나면 한 방에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얼굴에 정말 사, 기, 꾼, 이라고 써 있단 말이죠 흠 ~~ :) 아주 공익적인 글임다. 추천!

로드무비 2005-08-1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정개님, 택시비 뒤집어 씌운 거밖에 더 있나요?
사기꾼이라는 심증만 있었지 물증이 없는 상태라
그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답니다.(조금 아쉬워요.;;)
추천의 생활화 잘 실천하고 계신 거죠?^^

블루님, 전 그런 거 좀 제발 안 보이면 좋겠어요.^^;;

돌바람님, 어제 님 리뷰들 죄 읽고 다녔는데 흔적 보셨나요?
그리고 저 무지 쫀쫀한 인간입니다.
스케일이란 표현은 철회해 주세요. 찔려서요!^^;

폐인촌님, 그렇죠? 저 그때 참 현명했죠?
(누가 칭찬해 주면 저는 한술 더 뜹니다.^^)
그리고 그럴 때 폐인들끼리 하는 말 무지 궁금하니
귓속말로 좀 속삭여 주세요.^^

oldhand 2005-08-1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드무비님 너무 멋지십니다. 저런 사기에 걸려드는 사람들 참 안타깝지요. '현명함'이란 참 중요하고 필요한 덕목이에요.

2005-08-10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05-08-1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수행을 거치면 그렇게 사람보는 눈이 개안하게 되는거죠??? 난 정말 필요한데.

인터라겐 2005-08-1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원래가 의심많은 사람이라서 웬만한건 콧방귀도 안뀌는데 가끔 살다보면 말도 안되는것에 혹할때가 있더라구요..
그나저나 그 펜팔했던 친구분... 지금은 잘 살고 계시죠? 그분 얘기에선 울컥했어요..

돌바람 2005-08-10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이상하다 싶으면 로드무비님 무조건 동해해주실 거죠. 리뷰 보고 왔습죠. 히히. 근데 <검정비닐 단화를 주워 신다>는 언제 봐주실 건데요. 흑흑흑^^

호랑녀 2005-08-1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해운대에서 김해까지, 택시비가 좀 나왔겠는데요?
잘 하셨어요. 그런데 누구나 그걸 다 알 수는 없으니 어쩝니까요. 사기꾼 얼굴에서 사기꾼이라는 글씨를 보아버린 로드무비님의 내공이 무섭고만요 ^^

2005-08-10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5-08-1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목도 존경스럽지만 점잖게 밟아주신 방법이 더... 아, 그런 지혜를 배울 수 있었으면.

마태우스 2005-08-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 잘 읽었습니다. 그건 이런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사람들을 잘 속게 만들지 않을까요.

얼룩말 2005-08-1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너무 무섭다. 그 남자한테 걸려든 여자들이 너무 불쌍해요 아..어쩌지

깍두기 2005-08-1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까지 확 텀태기 씌워 버리지 그러셨수. 무진장 비싼 걸로^^
그 친구분이 안되었네요. 나도 개념없는 사람이라 저런데 걸려들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플라시보 2005-08-1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때 엄마가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정신 못차리는 것을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아빠 친구라며 찾아옴) 제가 계속 말려서 사기꾼이라고 말해서 간신히 벗어난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기꾼을 참 잘도 알아보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나봐요. 아무튼 그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고, 이미 걸려든 친구까지 구출해서 다행입니다.

클리오 2005-08-1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사람 하나 잘못 얽히면 인생이 괴로워지는군요. 그나저나 어찌되었건, 피해없이 마무리 되어서 다행입니다. 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여요..

로드무비 2005-08-1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룩말님, 무섭죠?
지금은 상처를 잊고 잘 살고 있겠죠.^^

마태우스님, 그런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별것 아닌 제 쪼가리 글들을 애지중지하니까요.
추천 강요해 가면서...^^

숨은아이님, 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재수없는 인간에게 재수없게 대해줬을 뿐인데......^^

호랑녀님, 딱 보니 궁짜가 흐르는 인간이라 택시비로 애 좀 먹였죠.
내공은 아니고 처, 천부적인 감感이라고 할까요?ㅎㅎ^^

돌바람님, 그 페이퍼가 열리지 않아서...좀 있다 열리면 읽어볼게요.
(알라딘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왜.;;)
그런데 제가 동행할 일이 있을까요?ㅎㅎ

인터라겐님, 네. 그 친구 수원에서 잘 살고있나봐요.
아유, 인정도 많으셔라.^^

야클님, 수행이 아니고요, 처, 천부적인 재능이라고나 할까.=3=3=3

속삭이신 님, 님의 횡설수설 무지 재밌어요.^^
그건 그렇고 바쁘시구나아~

올드핸드님, 현명하다고 해주시니 송구스럽네요.
이상하게 저 땐 머리가 팍팍 돌아가더라고요.^^


로드무비 2005-08-10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참, 그때 마시라고 내놓은 차도 안 마셨어요.
내가 멀쩡한 사람 의심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는데요,
지켜볼수록 감이 워낙 안 좋아서.
아무튼 제게도 씁쓰레한 기억입니다.

플라시보님, 어릴 때 엄마를 도우셨다니!
정말 영민하셨군요.
그러고보면 플라시보님과 저는 사기꾼을 잘 알아보는 쪽인가 봐요.
흐뭇.^^

그냥깍두기님, 저녁 먹다가 몰래 약이라도 타면 어쩌려고요.
사기꾼이라는 결론을 확실히 내리자마자 친구랑 그 길로 내뺐답니다.
나중 알고보니 같이 간 순진한 제 친구에게도 이상한 작업을 걸었더구만요.;;
(개념 없는 인간이란 소리는 저도 많이 듣는 편인데.^^;;;)

얼룩말 2005-08-10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을 사귀거나... 결혼하게 될 남자가 있게 되면 로드무비께 한번 검사를 받아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

날개 2005-08-1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 시절엔 무지 멍청했었는데, 로드무비님은 너무 현명하셨군요..! ^^ 저같은 사람은 아마 속아넘어갔을거예요..ㅠ.ㅠ 아니면, 거절을 못해서 쩔쩔매다 끌려다니던지...

릴케 현상 2005-08-1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탕 좀 먹이자...그런 게 로드무비님 답네요^^ 저는 그런 배짱이 없어서리
'철없는'친구...딱히 철이 없다기보다 좀 불쌍한 사람이네요...세상엔 철없는 사람도 많고 불쌍한 사람도 많죠(난 아니라는 것처럼)

로드무비 2005-08-1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제가 심술이 좀 있어서요. 호호~
그리고 문학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좀 유약한 면이 있죠?
사람이 너무 좋아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난 아니라는 것처럼, 이라는 사족은 왜 다셨어요?ㅎㅎ)

날개님, 너무 현명, 그런 거 아니랑게요.
마침 저때는 평소와 달리 제 머리가 팍팍 돌아가더라니까요.^^
(그리고 날개님 은근히 강단있고 똘똘하신 거 다 알아요.^^)

얼룩말님, 저에게 검사를 받다니... 놀라서 저만큼 도망갔다 왔습니다.^^

얼룩말 2005-08-1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로드무비님 답글 너무 웃겨요

로드무비 2005-08-1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룩말님, 님을 웃겼다니 기분 좋네요.^^

릴케 현상 2005-08-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 아닐까요=3=3=3
 

토요일  자정 무렵 배철수가 진행하는 7080을 잠시 보는데 '도시의 그림자'가 나와서 
한때 내가 무지 좋아했던 노래  '이 어둠의 이 슬픔'을 불러주었다.
김화란이라는 여성 보컬의 실력이 빼어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쉽게도
촉새같이 생긴
바다새 한 멤버가 나와서 대신 불렀다.

그때가 몇 년도였던가?
기억도 안 난다.
부산 광복동에는 '무아無我'라는 음악실이 있었다.
내가 취직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것이 1988년이니까 아마 방황이 가장 극심하던
그 전 해쯤 되지 않을까?
시립도서관을 드나들다가 그곳 사서 한 명과 눈이 맞아 더러 밖에서 만나기도 하고 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나를 무아로 데리고 갔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 외에는 음악이나 연극 등 문화의 세례를 거의 받지 못했는데 그녀는 이었다.
그녀 덕분에 떼아뜨르니 뭐니 하는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 전성환 씨의 1인극을 관람하기도 했다.
그날 무아에는 도시의 그림자가 나왔다.
나는 여성 보컬 김화란에게 그날 뿅 갔다.
나의 여성 취향은 어디까지나  '선머슴 같은 외모의 실력자'라는 걸 그날 알았다.

오늘아침에는 또 뜬금없이 부산 조방앞 부근 보림극장여로다방이 떠오른다.
어느 소설가와 한 팀을 이뤄 작고문인이나 원로문인들의 유족 혹은 가족을 찾아다니며
친필원고나 일기장, 편지, 안경 등의 귀중한 자료를 모으고 다닐 때
어느 날 부산에 함께 출장을 가 소설가 요산 김정한 선생을 뵈온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언제 다음에 기회 있으면 하기로 하고 오늘은 어디까지나 여로다방 이야기다.
부산에 간 김에 그 소설가의 친구를 만나 밥을 먹었는데 그는 모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40대 중반의 독신여성이었다.

그 소설가는 바쁜 일이 있어 먼저 서울로 가고, 나는 다음날 소설가의 친구분을 만나러 신문사에 놀러갔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그분이 오십견을 심하게 앓고 계셨던 거다.
조방앞 보림극장 뒷골목 무슨 약국이 오십견에 정통한 처방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물어물어 함께 그곳을 찾아갔다.
오른쪽 어깨였는지 왼쪽 어깨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무지 아파서 밤에 잠도 못 잔다고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하신 장소가  바로 그 골목에 있던 '여로다방' 이었던 것이다.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유수의 신문사 논설위원 정도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꽤 잘 나가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내게 그녀는 오십견의 고통과 독신의 외로움을 하소연하던 연약한 여성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여로다방은 그 약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우리가 잠시 궁둥이를 걸친
거리의 벤치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허름하고 촌스럽고 커피맛은 그저그랬다.

그런데 내게는 왜 다방, 하면 여로다방이 떠오르는 것일까!

2,3년 뒤 그 소설가와 무슨 일로 부산을 다시 찾았을 때 함께 송도에 가서 회를 먹는데,
그 논설위원 친구분과 우연히 딱 마주쳤다. 
그렇게 먼 바닷가에서 약속도 없이 마주친다는 건 예사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서로를 외면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진 않았지만 나는 그때 너무 젊어서 두 분이 그러시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어깨가 뻑적지근하여 혹시 오십견이 오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먼 옛날 여로다방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은 이제 모두 내 곁에 없다.
무아에 함께 갔던 친구도 몇 년 전 무슨 일론가 나랑 틀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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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7-0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로다방, 이름 좋은데요 ~~ 한영애는 어떠신지요? 이 글에 한영애의 여울목을 걸쳐놓으면 어째 떡하니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

로드무비 2005-07-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정개님, 여울목 틀어주세요.^^

stella.K 2005-07-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어둠에 이 슬픔. 저도 좋아하는 노래에요. 노래방 가도 이 노래 잘 못 찾겠던데, 원래 없는 건지 제가 못 찾는 건지 그걸 모르겠더라구요.^^

로드무비 2005-07-08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이 어둠의 이 슬픔 좋아하셨다니 반갑습니다.
그런데 추천은요?^^

엔리꼬 2005-07-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봤어요.. 촉새같이 생긴 여자분은 '소리새'가 아니라 '바다새'입니다. 이제 40이 다 되었을텐데, 여전히 20대 같지 않나요?
그런데, 김화란씨보다 곡을 잘 살려서 부르지는 못하더군요.. 샤우트 창법이라 그런가? 아무튼 인터뷰 안해서 무지 섭섭했습니다.

돌바람 2005-07-07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히 여로다방, 무아, 하니까 '저 하늘의 구름 따라~ 음음음 음음 따라~ 정처없이 걷고 싶구나~~' 하는 노랫가락이 듣고 싶어졌어요. 김광석, 양희은 말고 그 이전의 남자 목소리였는데. 혹 아세요? 진짜 듣고 싶다.^^

서연사랑 2005-07-0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선 그대, 다시 한 번 말을 해 주오, 지난 날을 사랑했다고~ 떠나는 그대 다시 한 번 고백해주오..' - 이 어둠의 이 슬픔, 저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가사는 전부다 생각은 잘 안 나네요.

조선인 2005-07-07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이 말씀하는 남자가수는 이광조일까요? 김의철일까요? 궁금하네요.

히나 2005-07-07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아라, 부산에서 온 아는 사람 닉넴이 무아인데 혹시 거기서 나왔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드네요

인터라겐 2005-07-0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의 그림자... 지금도 그 노래 좋잖아요.. 꺼지는듯 흔들리는 도시의 가로등...가사가 참 멋졌었잖아요.. 이때 이노래 싫어하는 사람 없었을텐데요...
88년이면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네요..ㅎㅎㅎ 오래된.. 기억속에 좋았던 사람과 왜 틀어져 버렸을까... 안타까워요... 언제든 기회가 오면 화해하세요... 옛친구 만큼 좋은건 없는것 같아요..

돌바람 2005-07-0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김의철 맞아요. 고마워요. 찾아서 들어봐야지...

2005-07-07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엔리꼬 2005-07-07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방앞 보림극장.... 조방이란?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나라 면화의 재배 및 판매에 대한 영리의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 일대 8만평의 부지에 자본금 500만원으로 조선방직주식회사를 세웠다.
남한 일대에서 생산된 면화를 값싸게 사다 방직공장에서 면포로 가공하여 다시 우리나라 공장에 비싼 값으로 팔아 이중의 착취를 했던 것이다.
1968년부터 2년에 걸쳐 공장을 해체하고 시민회관, 범일전화국, 시장(자유,평화), 예식장, 호텔, 여관 등으로 개발하여 지금은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옛날 조선방직이 있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범일2동 일대를 조방앞이라 부르고 있다.
즉, 조(선)방(직)앞

urblue 2005-07-0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뭐랄까, 추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 올리는 재주가 있으신 듯.

2005-07-0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7-0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속삭이신 님, 몰랐어요. 정말,
그나저나 제게 귀여운 앙탈을 부리시다니 기분 좋은데요?^^
블루님, 모처럼 심혈을 기울여 쓴 페이퍼랍니다.
제 쓸쓸한 추억 한 자락에 추천은 하셨겠죠?^^
서림님,ㅎㅎ
조방앞 낙지볶음, 돼지국밥...전 먹는 것에만 관심 있습니다.
조선방직의 준말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자세한 설명 너무 고맙습니다.^^
그 위 숨어계신 님.
이 페이퍼 써놓고 쓸쓸하여 맥주 한 캔 했답니다.^^
돌바람님, 김의철 음반 얼마전 샀어요.
좋더라고요.^^
인터라겐님, 그게 말처럼 쉽나요?
기회가 오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스노드롭님, 글쎄 그게 맞는지 확인해 보시든가.^^
조선인님, 지난 여름에 제가 휴가길에 '불행아' 듣고 난리 쳤던 게
생각나네요. 님이 그때도 김의철 가르쳐주셨죠.^^
서연사랑님, 아이, 목소리도 고우셔라.
참 좋은데요?ㅎㅎ
가사는 저도 완전하게는 몰라요. 따라 부를 수는 있는데......^^
돌바람님, 누가 올려주시면 참 좋겠는데...그죠?^^
서림님, 어라! 두 번이나 댓글을...ㅎㅎ
아아 그 가수가 바다새 멤버였군요. 고칠게요.ㅎㅎ
저도 그날 가수 인터뷰를 빠트려서 무지 섭섭했답니다.^^

2005-07-07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7-0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두 도시의 그림자가 노래하는 거 봤어요! 그 노래 참 좋죠?
부산에 가면 로드무비님의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난생 처음 가 본 다방은 충무로의 명성다방. 친척의 결혼식이었을텐데 어른들 따라 커피를 시켰던 기억이... 그때 제 나이가 일곱살이었으니, 어른들이 다들 박장대소 하실만 하지요 ㅎㅎ

로드무비 2005-07-07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무로 명성다방.
어른들 따라 커피를 시켰다니 꼬마 플레져가 너무 사랑스럽네요.
마이 도러도 커피 좋아해서 큰일났어요.
(내가 안 보는 새 한 모금씩 훔쳐 마심;;)

날개 2005-07-07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노래 무지 좋아해요..^^

stella.K 2005-07-0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처럼 노래도 올려주셨으면 당연 추천했을텐데...ㅋㅋ. 죄송.

내가없는 이 안 2005-07-08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들여 쓰신 흔적을 느낄 수 있어요. 글을 읽고 나니까 쓸쓸해지는데요.

조선인 2005-07-0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그러고보면 로드무비님과 오랜 친구 같아요. 부끄~

로드무비 2005-07-0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공들여 몇몇 단어들에 색깔 입혔습니다.ㅎㅎ
(땡큐!^^)
스텔라님, 아니 언제 날개님이 노래를 올리셨던가요?
추천의 생활화!
저의 알라딘 슬로건이랍니다.ㅎㅎ
날개님, 꺼지는 듯 흔들리는 도시의 가로등~~~
이 대목에 안 넘어간 사람이 별로 없었죠.^^

stella.K 2005-07-0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추천의 생활화에 동의합니다. 추천 안 할 수 없겠군요. 늦게나마 추천입니다요.(아이참, 안 할 수 없게 만드시는군요.>.<;;)

로드무비 2005-07-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저도 부끄~
(벌써 1년 됐네요.@,.@)
스텔라님, 아니 그럼 세 번째 오셔서 추천 누르셨습니까?
충격입니다.ㅎㅎ
(고마워요. ^^)

oldhand 2005-07-0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좋아하는 로드무비 님의 추억담을 이제서야 봤습니다. 로드무비 님의 옛 시절 이야기는 왠지 어둡고 낡았지만 익숙한 찻집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준다니까요. ^_^ 도시의 그림자 여성 보컬은 가정의 반대로 가수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것 같습니다. 이 노래가 강변 가요제 금상 곡인데, 당시 대상을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가 받아서 빈축을 사기도 했지요. 지금 돌이켜 봐도 비교가 안되잖아요?

로드무비 2005-07-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올드핸드님, 그, 그, 그렇죠?
저 그래서 유미리 무지 미워했잖아요.(사실 죄도 없는데...)
익숙한 찻집에 앉아 있는 듯하시다니 뭐라도 한 접시 내고 싶은 기분이...
아아, 님의 댓글 보니 속이 뻥==3 뚫립니다.^^
새벽별님, 노래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죠?
저도 그래요. 추천 고맙습니다.^^
(그 친구분이 누굴까요? 남자?^^)

로드무비 2005-07-0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그리운 이름이죠.ㅎㅎ

산사춘 2005-08-1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어둠의 이 슬픔... 다시 불러 봅니다.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