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김장김치를 형님 댁에 가서 얻어와 먹고 있다.
재작년부터는 나도 가서 일손을 보태긴 한다.
이번엔 60포기를 했는데,  형님네, 시집간 딸네, 그리고 우리 것과, 가까이 사는
우리 동생네 것까지 한 통.
(앗! 이 글을 쓰다보니 동생네 김치까지 얻어와 먹는 주제에 내가 형님에게
너무 인색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네. 이런 것이 바로 글의 효용.)

그런데 절인 배추가 60포기쯤 되다보면 온갖 젓갈을 넣어 만든 양념이 모자르게 마련이다.
절반쯤 버무렸을 때 맨 처음 형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양념이 떨어져 간다는 걸 알았다.
형님은 다시 남은 젓갈과 고춧가루, 파 등을 섞어 새 양념을 만드시고.....
난 아무 생각 없이 배추를 버무리다가 문득 처음양념으로 버무린 김치가
아무래도 더 맛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준비해간 김치냉장고용 김치통을 조금 남은, 처음양념으로 무치고 있는 형님께
비굴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내밀었다.

"형님, 헤헤, 처음양념으로 한 게 더 맛있을 것 같아서 우리도 한 통......"

막내동서라고 나를 무지 이뻐하시는 형님이 눈을 흘기며(입가엔 미소를...)
나의 요구대로 막 버무린 김치를  가득 담아 주셨다.

그리고 부랴부랴 있는 재료만 넣어 마련한 두 번째 양념으로 담은 김치를 세 통,
모두 해서 네 통을 얻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첫번째 양념으로 만든 김치가 들어 있는 제일 큰 통을 동생네에게 줘버린 것.
김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하며 도로 달라고, 바꾸자고 할 수도 없고.
'에라,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갈 수밖에.......

겉절이를 바께스로 담아온 걸 임시로 먹다가,  잘 익은 김장김치를 한 통씩
야금야금 꺼내 먹다보니  김치냉장고 속에는 김치가 딱 한 통이 남았다.
그리고 봄이 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야심만만하게 꼬불쳤던, 온갖 젓갈이 들어간 동생네 김치는 맛이 좀 혼탁하고 쓰겁고,
남은 재료로 대강 버무린 우리집 김치는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동생네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내심 얼마나 놀랐던지......

어쩌면 인생은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인간관계도 포함된다.
순한 얼굴로, 마음 가는 대로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맛난 김치를 또 선물받을지도.......
아니면 말고!

(결론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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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3-2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결론이 웃기잖아요.

mong 2006-03-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면 말고!
으하하하

로드무비 2006-03-2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해도 웃겨요. 블루님, 몽님......^^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맛난 김치에 집착합니다.)

라주미힌 2006-03-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김치가 땡겨요... 볶음밥과 함께 먹으면.. 쩝쩝

Mephistopheles 2006-03-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발적이더라도~~ 뽑기의 달인이신 겁니다..

로드무비 2006-03-2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제가 착해서 상을 받은 게 아니고?=3=3=3

라주미힌님, 점심으로 드세요. 그렇게......^^

paviana 2006-03-2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우리 입이 봄이 되었다고 알려주는것 같아요. 겨울내내 젓갈 많이 들어간 김장김치 먹다가 봄에 겉저리 먹으면 맛있잖아요.ㅎㅎ
저희는 김장 담글때 젓갈 많이 들어간거 (이건 나중에 먹을거) 조금 들어간거 나눠서 담그는데 먹을때는 그냥 순서고 모고 아무생각없이 먹어요.

로드무비 2006-03-22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그런 부분도 있겠군요.
그런데 맛의 차이를 확인한 건 설에 형님댁에서
김치를 먹어보고, 또 한참 전 동생네 식탁에서였어요.
ㅎㅎ 나름대로 생각해서 눨 한다고 하는데 나중에 보면
다 까먹어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까지......
그래서 재밌는 거지요.^^

반딧불,, 2006-03-2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하여간에 님의 글솜씨에는^^
맞아요. 이상하게도 신경을 쓰면 음식이 더 맛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더 안되구요. 이건 모든 세상살이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맞더라구요.

이상하게 똑같은 김치도 제각각 맛이 나는 것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친정에서 김장을 네 집으로 보내걸랑요;;; 헌데 다 틀려요.맛이^^
제일 맛있는 것은 친정 뒤란에서 익은 진짜 김장김치!!!!

2006-03-2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3-2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전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꼭 결과가 좋은 건 아니겠죠..^^
근데 전 뜬금없이 전력을 기울여 김치를 담고 싶어지네요.
재료를 고르고 애써서 김치통에 채워놓은 후 잘 익기를 기다리던 그 설레임이 그리워집니다.

sooninara 2006-03-2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어머님은 젓갈 팍팍...
친정어머님은 젓갈 하나 넣고 시원하게..
전 친정쪽것이 더 좋아요^^
로또보다 더 잘 뽑으셨네요. 축하

로드무비 2006-03-2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저도 패스하는 것 무지 많습네다.^^

사야님, 지난주엔 내 손으로 세 번째 김치를 담았어요.
정확하게는 겉절이.
모양도 맛도 훌륭하여 스스로에게 감탄했답니다.
뻔뻔한 남동생 왈, 이제 우리(!)도 김치 담가 먹자.ㅎㅎ
앞으로는 김치도 가끔 만들어 먹을 생각이에요.
(전 두 번 계속 실패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포기하는 습성이 있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속삭이신 님, 전 제 방이 너무 흥청망청해 보이는 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좀 미안했어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나 자신에게만 미안하면 되더군요.
그런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기분과 사정 속에서
알아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말씀엔 노코멘트입니다. 저도 히히~

반딧불님, 정말 신기한 노릇이지요?
생각해 보면 친정 뒤란만한 김치냉장고도 없어요.
우와, 써놓고 보니 너무 멋진 표현이다.=3=3=3






로드무비 2006-03-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이것저것 젓국 많이 든 김치는 맛이 진하고 구수해서 좋고,
새우젓만 넣은 김치는 또 깔끔하고 시원해서 좋아요.
맛이 너무 탁하지만 않으면 다 좋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자라면서 먹은 엄마표 김치가 입에 더 맞는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요?

merryticket 2006-03-2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결론이십니다..

조선인 2006-03-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은지가 먹고 싶어요. 엉엉엉.

blowup 2006-03-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대충 사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다행인 세상 이치입니다. 승부가 아니라 뽑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고마운 로드무비 님.

날개 2006-03-2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보관을 잘 하신걸지도.....^^

rainy 2006-03-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 아주 멋진걸요.. 인생이 공평하다는 안심도 되고 ^^

로드무비 2006-03-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그럴지도.
(사실 내가 한 거라곤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것밖에 없는데.ㅎㅎ)

namu님, 고맙다고까지 하시니, 님의 대충이 어느 정도인지
살짝 짐작이 갑니다.
같은 종끼리의 감지력이죠.^^

조선인님, 가래떡 먹고 싶으시다더니 오늘은 묵은지.ㅎㅎ
오늘 저녁에 드세요.
우리 동네에도 '떡삼겹과 묵은지'라고 식당이 하나 생겼더라고요.^^

올리브님, 제가 좀 심오합니다. 헤헤=3=3=3

로드무비 2006-03-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님, 바뀐 서재 이미지 멋집니다.
자기 마음 편한 대로 사는 거죠, 뭐.
더러 진실을 날조(?)하더라도...^^

박예진 2006-03-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오늘 학교에서는 굴이 너무 먹고 싶어가지고 여자애 1명 남자애 1명과 굴타령을 했어요. 굴이 들어간 김치,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굴....으으윽 ㅠ.ㅠ
근데 지금은 아주 맛있는 김치를 먹고 싶네요! 김장김치요 ~~
흠 ! 그리고 로드무비님 ! 저 이벤트해요~시간 나시면 꼬옥!놀러오세요~~:)

조선인 2006-03-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삼겹과 묵은지!!! 아, 제가 바란 메뉴인가봐요. 침만 꿀꺽.

2006-03-22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3-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상 잘 못 한거 없이 살아도 악수를 뽑아들고 낭패인 경우도 종종 있잖아요. ^^

플레져 2006-03-23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올인이에요.
얼마전, 야구도 그랬잖아요...훗~
보관을 잘 하셨다는 거에도 한 표 ^^

로드무비 2006-03-2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뭐 전 항상 그런 자세로 살고 있으니까요. 헤헤~

수단님, 악수를 뽑아들고 낭패라,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어쩌라고요.=3=3=3

4학년 1학기님, 무 물론 졸업하셔야죠.
송구스러워 할 필요 조금도 없습니다.
님의 인사 너무 반가웠어요.^^

조선인님, 묵은지와 삼겹살, 가래떡 드셨나요?
혹 못 드셨으면 오늘 내일 주말이니까 꼭!^^

박예진양, 어머 굴을 좋아한다니 너무 예뻐요.
캡쳐 이벤트에 도전해 볼까요? 불끈.=3
(<책만 읽는 바보>는 저도 탐나서...)
혹시 깜빡하고 참석 못하더라도 너무 서운해 마시고요.^^

치유 2006-03-2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솜씨가 정말 대단하시네요..푹 빠져버리겠는걸요??
그나 저나 김장 김치 너무나 먹고 싶네요..시원한 걸로.........저희는 그 시기에 이사하고 어쩌다 보니 김장을 못하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얻어다 먹었는데요..올 가을에는 맛있게 담아보려구요..김치냉장고에 김치가 가득이면 주부는 든든한데..텅 빈 김냉....흑!~슬퍼..

소단 2006-03-31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우깡을 맛나게 먹고 있었는데 님 글을 읽다보니 속이 넘 느끼해져서 막 김치 한조각 먹고 왔습니다..근데 이 김치가 묵은 지라 엄청 시네요..사먹는 김치가 나쁘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댈때만 빼고 김치를 사먹고 있습니다.. 김치 담그기가 하도 번거로와서 말이죠.. 님글을 읽으니 굴이랑 조개젖 듬뿍 넣은 김치가 넘 먹고싶네요..
 


--20개의 악성 코드가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악성 코드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시스템이 최적화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최적화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컴퓨터를 켜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뜨는 창.
난 오늘도 어김없이 '아니오'를 눌렀다.

나는 악성 코드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고,
시스템을 최적화하고 싶지도 않다.
무엇이 지금 내 삶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까짓 컴퓨터의 악성코드쯤이야......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최적화는
컴퓨터가 나를 향해 더이상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내가 삶의 모든 행위에 의미 부여를 중단한 것처럼.

그런 창이 뜨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그런 질문에서 자유로워지려면?"이라고 물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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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3-1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그러셔도 인생엔 리셋이 없잖아요...^^

비로그인 2006-03-1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맨날 자동업데이트를 하라는 것과 무선인터넷이 발견되었다는 메시지가 뜨는데 저도 좀 거기서 자유로와 지고 싶어요..ㅎㅎ
사진 참 멋지네요..^^

플레져 2006-03-1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동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두어개의 창에 아니오 누르고 나면 그제야 자유로워져요 ㅎㅎ
지우는 방법을 알았는데................ 까먹었어요. 크~
그냥 뭐 아니오 한번 누르고 말지~ ㅎㅎ
사야님처럼 제 노트북에도 무선인터넷 창, 자주 떠요.
요샌 무선인터넷을 쓰니까... 안뜨면 불안하더라구요 ^^

mong 2006-03-1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개의 봄꽃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봄꽃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예.예~

--봄날씨가 최적화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최적화하시겠습니까?

--얼렁 쫌!

sudan 2006-03-1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두 번만 '예'를 클릭하시면, 저 질문은 안 뜰 것 같은데요?

로드무비 2006-03-1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귀여워라.
기분이 안 좋았는데 몽님 댓글 보고 풀어졌어요.
스무 개의 봄꽃을 감상하고 난 후 꽃비빔밥을 해먹었음 좋겠어요.=3=3=3

플레져님, 나중에 지우는 방법 알면 가르쳐줘요.
나도 모르는 창이 얼마나 떠오르는지 주하가 보면 막 야단치면서
하나하나 지워줘요.

사야님, 뭐 그 정도 문안이면 저도 아무렇지도 않겠습니다만.
영화 스틸컷입니다.
블루님 페이퍼에서 가져왔는데 영화 제목이 갑자기 생각 안 나네요.

메피스토님, 그래서 스릴 있잖아요.

로드무비 2006-03-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그래요?
전 뭐 복잡한 일이 벌어질까봐.

Mephistopheles 2006-03-1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꽃...비빔밥...좀 나눠주시면 안될까요...아침을 안먹고 와서요...^^

로드무비 2006-03-1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뱃구레가 커서...안 된다는 말입니다.=3=3=3

Mephistopheles 2006-03-1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삐지고 페이퍼 끄적거리고 있었어요 ~~ 흥 !! ^^

로드무비 2006-03-1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 흥!!은 뭡니까?^^
(점심 맛난 걸로 많이 드셔요. 제 앞으로 달아놓고요.=3=3)

싸이런스 2006-03-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우리를 괴롭히는게 왜 이리도 많은 걸까요.

반딧불,, 2006-03-22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어판에서 그 프로그램 일단 삭제하시구요.
인터넷농협 들어가서 PC보안 중에서 V3 한번씩 돌려주면 되요.
절.대.로 인터넷 것은 받을 것이 못되요.

로드무비 2006-03-2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말씀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제어판은 뭐고 피시 보안은 또 어디에 있는 거랑가요?;;

싸이런스님, 그러니까요. 휴=3
 

천경자 씨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인지 미국에서 투병중인 그에 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글 잘 쓰는 우리나라의 화가들 하면 요절한 화가 최욱경, 그리고 김원숙, 김점선, 황주리
등의 면면이 떠오르지만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된 글 잘 쓰는 화가는 천경자 씨가 처음이었다.
오래 전 그의 글을 엄청 낄낄거리며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을 썩 좋아하지 않은 건
그에게서 보이는 너무 심한, 에고이스트랄까, 부르주아풍이랄까 뭐 그런 면모들로 인해서였다.
카리스마는 또 어떻고!
그의 그림 속 여인들에게서 맡아지는 고독의 냄새는 내가 사는 세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 감탄하며 보고는 그만이었다.
내게는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10년도 더 전, 동숭동의 식당 낙산가든에 갔더니 시인 구상과 천경자 여사가 막 들어와
우리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두 분은 막역한 친구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자친구가 바바리 벗는 것을 도와주고
의자에 먼저 앉기를 기다리는 노시인은 거동이 조금 불편한 상태였지만 그날 그 식당을 찾은 손님들 중
최고로 멋진 신사였다.
자연스레 틀어올린 머리에 목에 두른 스카프 한 장까지 예사롭지 않았던 화가는
그때 이미 칠순에 가까운 나이였을 텐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성의 향기를 팍팍 풍겼다.

서울에 오니 저렇게 유명한 예술가들의 옆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구나, 하고
흐뭇하여 친구와 잠시 속닥였던 기억이 난다.
저 나이에 저렇게 멋진 이성친구와 한결같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부러웠던가!

구상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방송으로 듣고 낙산가든에서 뵈었던 그 멋진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화가가 느꼈을 슬픔에도 잠시 생각이 미쳤다.

언젠가 청담동 김동리 선생 댁에 원고를 받으러 갔다가 잠시 차를 한잔 얻어 마시며
다음 코스는 사당동 서정주 시인 댁이라고 했더니 그분의 입가에 떠오르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글마(그 녀석의 경상도 사투리)한테 안부 전해줘!"

서정주 시인에게 그 말을 그대로 전했더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멋진 미소를 보여주셨지.
그때는 두 분 다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소설가 최정희 선생님이 정릉 댁에서 투병중이실 때 김동리 선생님이 문병을 가셨다.
둘도 없는 화투 친구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새 양복에 빨간색인가 자주색 나비넥타이까지 꺼내어 매셨는데.
백발을  길게 풀고 누워 계셨던 최정희 선생님은 멋을 잔뜩 부리고 나타난 남자친구를 보고
환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분들은 지금 모두 세상에 안 계신다.
스쳐 지나가며 봤든,  아주 가까이서 뵈었든,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든,
투병중이라든지 돌아가셨다든지 하는 원로예술가들의 소식을 접하면
마음 한켠이  저릿저릿해진다.

 

(**제목은 소설가 서영은 선생의 글 제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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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3-1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경자 화가의 그림이라면 화려한 꽃무늬에 각진 얼굴의 여자가 떠오르고, 뭐랄까 화려한 외로움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암튼 그런 이미지가 떠올라요.
(참, 글마<그놈아 , 여기서 '아'는 兒 정도가 될까요? ㅎㅎ 만만한 친구끼리 악의없이 욕을 살짝 곁들인 호칭, 또는 상대를 얕잡아 무시할 때 쓰는 호칭입니다. '그 녀석' 아주 좋은 번역입니다. 짝짝짝^^)

로드무비 2006-03-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글마' 번역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ㅎㅎ
그런 분들도 친구를 떠올리면 얼굴에 그저 웃음이 묻어나는 게
신기했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젊었던지라.^^

Mephistopheles 2006-03-1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에 가서 그림 보고 그때 당시 엄청난 금액의 카달록 책자를
덥석 사버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sudan 2006-03-1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 같은 미소의 두 노 시인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지 뭐에요.(저도 모르게 미소가.)

mong 2006-03-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어도 허물 없는 친구들이 있다는거
참 든든할 것 같아요
반면에 그런 분들이 하나 둘 세상 떠나시면
그만큼 더 힘겨워 지겠지요......

플레져 2006-03-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 한송이는 여기..... 쿨럭 ;;;
김채원씨 자전이야기에서 정릉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구요.
저도...^^:;
글마, 한마디에 실린 우정이 너무 좋아요. 그런 친구가 될래요...부비부비...ㅎㅎ

로드무비 2006-03-1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릉구락부라고 모임도 있잖아요.
그리고 그런 친구, 약속할 수 있어요? 꽃송이같은 플레져님.^^

mong님, 노년의 고독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걸 보니
저도 늙나봐요.
남자친구 하나 확보해 둬야 하는데......
참, 있다! 생각해 보니!ㅎㅎ

sudan님, 그 웃음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요.
뭐 님께는 제대로 전달이 된 것 같지만......^^

메피스토님, '카탈로그' 너무 비싸면 절대 안 사요.
마음에 드는 포스터 하나 몰래 뜯거나 얻으면 너무 기뻤죠?
그 포스터와 도록들은 다 어디 갔나 몰러유.^^

Mephistopheles 2006-03-1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너무...이뻐서...그만.....!!

로드무비 2006-03-15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서늘하게 아름다운 그림들이긴 하죠.^^
 

10만 원을 주웠다. 빳빳한 신권으로.
그런데 그걸 어제 하루 만에 탕진해 버렸다.

3월 1일, 하루종일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다가 자다가 말다가 리뷰도 하나 올리고 하는데
저녁 무렵 갑자기 방구석에 태산처럼 쌓인 옷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태산같은 옷무더기는 처음에 작아진 내 청바지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하루 간신히 입고 나갔다 와서 허리가 너무 끼길래 옷장 속에 넣어두기도 그렇고
세탁하기도 아깝고 해서 구석 대나무 상자 위에 우선 걸쳐 놓았다.

거기에 또 어느 날, 얼룩이 조금 묻은 흰색 '추리닝'을 좀 있다 얼룩만 빼서 입자, 하고 걸쳐 놓았다.
그렇게 하나씩 쌓이기 시작한 옷들이 두세 달 만에 엄청난 산을 이룬 것이다.
그때그때 간단하게 해결할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다 보면 문제는 꼭 저런 모습으로 드러난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 옷들을 전부 끌어내려 세탁할 옷과 장롱 속으로 들어갈 옷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침대 위가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묻었을 때 바로 지르잡아 주어야 하는 얼룩은 오래 지나면 옥시니 뭐니 하는 최강력 세제로도
깨끗이 없앨 수 없다.
그런 얼룩들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옷에 묻은 얼룩이든 마음의 얼룩이든......

옷들을 정리하다 보니 장롱과 벽 사이  20센티미터 쯤의 틈에 하나하나 쑤셔박기 시작한
침대보와 베갯잇, 얇은 이불, 담요, 그런 것들이 또 눈에 들어왔다.
그게 또 태산이었다.
마침 사둔 대용량의 쓰레기봉투가 있어서 아까워 버리지 못하던 안 쓰는 것들을
과감하게 집어넣었다.

그 다음 눈에 띈 것이 화장대 옆 옷걸이 주위를 점령한 가방들.
본래 가방은 장롱 속에 넣어놓는데 그것도 어쩌다 보니 한 개 두 개 그 구석에 쌓였다.
외출하고 돌아와 가방을 비우던 중 갑자기 요의라도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아무곳에나 집어던진 그 가방 위로 또 온갖 가방들이 쌓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가방들 중 하나에서 빳빳한 지폐가 열 장 든 봉투가 나왔다.
영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을 보러 가던 날 들었던 큰 베가방이었다.
키가 크면서 모든 바지가 깡충해진 딸아이 바지와 옷을 몇 개 사려고 비상금을 털어 나갔었다.
그리곤 깜빡한 것이다. 쇼핑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지만.......

10만 원이 든 봉투를 깜빡할 만큼 나는 타락했는가!

아무튼 책장수님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난 뒤 으시대며 한턱 내기로 했다.
늦은 점심으로 굴볶음밥을 먹고 밥생각은 없었으니 간단하게 족발을 뜯기로.

그렇게 지폐 두 장을 썼다.
그리고 어제 오전  인터넷뱅킹으로 2만 원을 내가 아는 노숙자 쉼터로 송금했다.
그리고 피부가 너무 꺼칠꺼칠해 50프로 세일한다는 에센스를 한 병 주문했다.
그리고 보관함의 책 몇 권을 함께......

인터넷뱅킹을 하며 없었던 돈이니 이 기회에 전부, 하는 생각을 안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다.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아무튼 우리 집 안방에서 돈봉투를 주워 하루 만에 탕진하는 재미는 정말 각별했다는 말씀.
(책장수님 왈, 대청소를 하니 하나님이 상을 주신 거라고!  내가 얼마나 평소  청소를 안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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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3-0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진'이라시기엔 요모조모 살뜰하게 쓰셨구만요 뭘
그런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는 재미는 언제나 각별하다는 말씀.
=3=3=3

urblue 2006-03-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10만원이 든 봉투를 깜빡하는거랑 '타락'이랑 무슨 관계여요?

진주 2006-03-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십만원 주으러 가려고 했더만..차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Mephistopheles 2006-03-0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주차장에서 220만원 수표 줏은 적 있었어요..제돈은 아니지만요..주인찾아줬죠..^^

瑚璉 2006-03-0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저는 청소를 해도 피전 한 닢 못 건지는 걸까요?

숨은아이 2006-03-0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댁도 방구석에 입다 만 옷이랑 가방이랑 무더기로 쌓여 있구나. 아이 반가워라. 하하. (전 그렇게 다른 옷이랑 가방은 방구석에 쌓아놓고 맨날 똑같은 옷이랑 가방만 입고 들고 다닌답니다.) 10만원은 참으로 알차게 쓰셨는데요?

로드무비 2006-03-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do님, 없었던 돈 생긴 걸 모두 후원금으로 보내지 못하는 거나
갖고 싶었던 10만 원짜리 물건을 턱 사버리는 정도의 호기가 없어서
사는 게 요 모양 요 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그럭저럭 만족은 합니다만......
(그런데 지대열공이 뭐죠?^^;)

숨은아이님, 어머 너무 반가워요. 저도......
저만 이러고 사는 건가 싶어 가슴이 답답했는데
동지가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그리고, 너무 알차게 쓴 게 불만입니다.
나의 쫀쫀함이 드러나서......^^

호리님, 피전이라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그런데 피전 한 닢 건지시려면 건망증이 좀 있어야 하는데
너무 총기가 많으신 것 아닙니까!^^


로드무비 2006-03-0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현금이었다면 좀 갈등하셨을라나?
저 같으면 그랬을 것 같은데요. 헤헤~
착한 일 하셨네요.^^

진주님, 우아한 분께서 어울리지 않게......
전 건망증이 부쩍 심해져서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할 것 같아요.
그럼 또, 이렇게 낄낄거리며 탕진하는 거죠.^^

블루님, 5만 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래도록 하고 살았거든요.
그 생각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저 방만해진 것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mong님, 요즘은 페이퍼 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나는데
님의 음악 선물로 원기충전하고 있습니다.
줄줄이 올릴깝쇼?^^

비로그인 2006-03-0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기분 정말 끝내주죠.
근데 글을 읽다보니 전 로드무비님 댁이 혹 대궐같이 넓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ㅎㅎ

Mephistopheles 2006-03-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등안하고 인 마이 포켓 했을 껍니다...^^

로드무비 2006-03-0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갈등 안하고?
저도 어쩌면...ㅋㅋ

사야님, 대궐은 무신.....님이 사시는 집 생각하면 안되지요오.
좀 있다 페이퍼 하나 올릴게요.
정리한 방구석 사진과 좀전 찍은 주하 사진.^^

아영엄마 2006-03-03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 꼭 공돈 생긴 것 같은 흐뭇한 기분으로 홀라당~ 다 써버리셨군요. ^^

로드무비 2006-03-0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꼭 그게 공돈인 것 같더라니까요.^^

비로그인 2006-03-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보랑께요!! 이 뻬빠 좀 보시랑께요!! 제가 말임돠! 컴터 하드가 나가버려 거금 십만원이 개작살나게 생겼다고 엊저녁부터 울부짖고 있었다구요!! 안방 장판을 다 까보구 댕겼어요, 제가..혹시나 눈 먼 천원짜리라도 장판밑에 달라붙어 있나, 하구..
캬..생굴밥에, 책주문에, 후원금에..때깔나게 쓰셨습니다!! ^^b

어룸 2006-03-0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엣!! 진짜 그게 뭐 '탕진'이예요!! >ㅁ< 그렇게 알차고 쓸모있게말고요 좀 제대로 '흥청망청'해주셔야 읽는사람도 보람(?)이....ㅋㅋㅋ

날개 2006-03-0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 1일날 님도 대청소를 하셨군요.. 저도 방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근데, 전 왜 침대밑에서 100원짜리 하나 못 주은걸까요...ㅠ.ㅠ

로드무비 2006-03-0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대청소는 아니고 중청소쯤 될까요?ㅎㅎ
그러게 평소 경제관념이 좀 희박한 사람이 공돈을 얻는다고...^^

투풀님, 전 왜 이르케 착실한 인간일까요?
저도 제가 지겨워 죽겠습니다.=3=3=3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지송!^^

복돌이님, 아이참, 5만 원은 남겨놓고 쓰는 건데!
안방 장판을 다 까보고 댕기셨다니 저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어디서 눈먼 돈 한 뭉치가 복돌이님께 떨어지길 빕니다요.^^

반딧불,, 2006-03-0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노숙잔데(3===3333333)

kleinsusun 2006-03-0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드무비님, 노숙자 쉼터에 20%를 보내셨군요. 선물같이 찾아온 비상금을...
복 받으실꺼예요.^^

로드무비 2006-03-0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20프로라는 개념 없이, 기분이 좋아서.ㅎㅎ
공돈도 전부 쾌척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요?
20프로의 축복이라도...헤헤.^^

반딧불님, 집 나오셨어요?ㅎㅎ
며칠 재워드릴까요오?^^


하루(春) 2006-03-0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탕진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돈이 길에서 주은 거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네요. ^^

로드무비 2006-03-04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전 탕진이라고 생각했는데
페이퍼로 쓰고봤더니 탕진이 아니더군요.^^

인터라겐 2006-03-0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꽁으로 (?)생긴돈은 언능 탕진해야 제맛입니다.. 아 지도 한번 집안을 발칵 뒤집으면 눈 먼 돈이 나올까요? 지금부터 뒤지러 갑니다

로드무비 2006-03-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뭐가 좀 나왔나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건 간장게장이 아니고 간장게장 국물이었다.
어제 저녁 우리 가족이 일산까지 가서 먹은 한정식 반찬 중의 하나.

먹는 걸 무지 밝히는 나이지만, 요즘 우리 나라 사람들 이렇게 맛난 음식을 밝히는지 몰랐다.
처음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일산 시내의 한 씨푸드 레스토랑이었다.
나도 텔레비전 음식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고 한 번 꼭 가봤으면 하던 집이었는데 해산물 뷔페로,
세상에나, 각양각색의 회초밥과 길쭉하고 넙적한 연어살을 몇 접시나 갖다먹어도 된다는 거였다.
며칠 전 마침 남편도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듣고 와 동생네와 함께 가자고 했다.
자기 용돈으로 쏜다고.
그리하여 드디어 어제 저녁 우리 가족은 부푼 가슴을 안고 두 시간 걸려 일산까지 진출했다.

점심은 거의 거르다시피 하고 일곱  시 무렵 도착했는데, 이게 웬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로비가 따로 있었고, 내가 보기에 7,80명의 사람들이 바글바글 앉아 있었다.
어여쁜 여성 둘이 데스크에 앉아 전화를 받고 예약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으니 두 시간, 평일에는 일주일 전, 주말에는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곳을 빠져나와 구 백마역 부근에 조성되었다는  먹자골목으로
차를 달렸다.

결국 두 바퀴나 뺑뺑이를 돈 끝에 우리가 안착한 곳은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평소 우리 가족의 외식비라야 동생네와 함께 움직여도 3, 4만 원 내외.
마이 도러와 동주가 환장하는 동네의 댓잎돼지갈비집이 고작이었는데, 어제는 차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달린 데다 예상 경비도 그 세 배였으니 말을 안해서 그렇지 모두 엄청 흥분해 있었다.
한정식집이 부디 우리 기대를 배반하지 않아야 하는데......

1인당 2만 원짜리 한정식 2인분과 2만 원짜리 갈비찜 정식을 2인분 시켜 먹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종업원 왈, 3만 원짜리 한정식 3인분을 시키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키면 갈비찜에 게장까지 한 마리 통째 나온다니, 우리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 집은 20년 전통의 한정식집으로 방송에 소개된 것만도 여러 차례, 특히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집인 듯했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전복죽부터 시작해 구절판에 조기구이에 갈비찜에 잡채에 장어구이에
다섯 가지 나물에 각종 쌈과 젓갈에 된장찌개에 돌솥밥까지 정말 한 가지도 맛없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양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
갈비찜은 딱 네다섯 조각이 나왔는데 주하가 배고프다고 난리 부르스를 쳐가지고설랑
한 조각 가지고 쪼개어 맛만 보고 전부 주하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입에 넣자마자 슬슬 녹는 장어구이도 한 점 집어먹으니 끝, 간장게장은 국물까지 짜지 않고 맛있었다.

돌솥밥에 미리 부어둔 물로 숭늉까지 깨끗이 바닥을 내고 나자, 흥건하게 남은 간장게장 국물에
자꾸 눈이 갔다.

"저 국물 가져가면 밥을 다섯 공기는 비벼 아이들 먹이겠는데 싸달라고 하면 안될까?"

책장수님은 물론 우리 올케는 그렇다 치고 짜기로 유명한 남동생까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그렇게 탐나면 1인분 사가지고 갈까? "

책장수님의 말에 나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1인분 한 마리에 16,000원 하는 간장게장 한 마리를 누구 코에 붙이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아무리 미련이 남기로서니 간장국물을 싸달라고 하는 건 좀 쪽팔리는 것 같아서 그 집을 나왔는데,
올케가 카운터에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며 지갑을 꺼내는 모습이 보인다.

'시누이의 게장국물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서 한 마리 싸고 있는 건가?'

나는 은근슬쩍 그런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어럽쇼,  달랑달랑 지갑을 흔들며 빈손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뭐 했냐고 물었더니 우리 올케 대답.

"부산(우리 부모님 집)에 네 마리 택배로 보내기로 했어요. 너무 맛있어서!"

내가 본 중 최고로 유능하고 멋진 올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오늘아침 눈을 뜨자마자 간장게장도 아니고 그 간장게장 국물이 눈앞에 삼삼하지?
이런 제길,  인생이 초라하기 짝이 없구나!

 












 

 

 

 

 

 

 

**먹느라고 정신없어서 사진은 못 찍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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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2-1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로드무비님이 음식 얘기를 어찌나 감칠맛 나게 써주셨는지
간장게장 안먹는 제가 다 침이 막 고여요 풉

sudan 2006-02-19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 초라하긴요. 유쾌해보이는데요 뭘.

sudan 2006-02-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찍으신 사진인 줄 알고 감탄했다는 댓글 남기려다가.

로드무비 2006-02-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게장국물 때문에 모처럼 페이퍼 하나 쓰게 되네요.
유쾌하게 보인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휴=3
(사진 찍을 정신이 없었어요. 나오는 족족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 하다보니...)

mong님, 간장게장 안 드세요?
저도 뭐 그렇게 밝히는 편은 아닌데 저 집 건 왜 그리 맛나던지......^^

Mephistopheles 2006-02-19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마리 정도는 시누이에게 보내도 크게 해가 되지 않을텐데 말이죠.....^^
혹시 올케가 간장계장으로 감정을 표현한...것인가요~~ (후다닥~~)

로드무비 2006-02-1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뚱멀뚱. 이해합니다. endo님!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메피스토님, 어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을!
제가 사람이 너무 좋은가 봐요.=3=3=3

부리 2006-02-19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간장게장은 그다지 안좋아합니다. 다만 예약손님들을 안내하던 어여쁜 아가씨 둘,이란 대목에 잠이 확 깨네요&&

비로그인 2006-02-19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지금 제가 삿포로역에서 택배로 보낸 대게를 막 먹었어요..점심전 도착한 신랑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각자 보낸 시간들과 섞어가며 신났는데 또 이 페이퍼를 보니 간장게장도 먹고 싶군요..ㅎㅎ
로드무비님 올케 참 보기드문 며느리인거 같아요. 멋지다고 전해주세요..^^

Kitty 2006-02-19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으면...조금 찌질해도 그냥 싸가지고 옵니다;;;
전 한(?)을 품으면 오래가거든요 ㅠ_ㅠ;;;

비로그인 2006-02-19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글부글 입에서 침 괴는 소리..간장 게장은 밥도둑이라잖아요. 사실 전 밥에다 비벼먹기 보다는 숟가락으로 조금씩 간을 보듯 게장 궁물을 떠먹는 걸 좋아해요. 혀를 녹이는 짭쪼롬한 비린내! 아뛰, 게장이 날 소외시키는구나..

조선인 2006-02-2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우린 어제 점심에 빕스에 갔다가 본전 뽑으려고 너무 과식을 하는 바람에 옆지기랑 나는 저녁을 못 먹었다지요. 캬캬캬

urblue 2006-02-2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장게장이 글케 맛있어요? 으음...

로드무비 2006-02-2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전 양념게장 더 좋아하는데 저 집 것은 확실히
다르더군요.^^

조선인님, 빕스는 한 번도 못 가봤습니다.
그래 본전은 뽑으셨는지요?^^
(빕스 샐러드바도 괜찮다고 하던데...)

복돌이님, 저 집 것은 하나도 안 짜서 숟가락으로 듬뿍 떠 먹어도
괜찮을 정도였습니다.
미련 안 남게 홀랑 마셔버릴 걸 그랬나?^^;;

키티님, ㅎㅎ 다행히 오늘은 생각이 안 납니다.
제가 또 이미 지난 일은 체념이 빠르거든요.^^

사야님, 삿뽀로의 대게는 맛이 여기 꺼랑 똑같겠지요?
두 분이 각자 따로 여행하고 돌아온 풍경이 참 근사합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우셨을까? 서로!^^

부리님, 대기석의 여인들도 보통 이쁜 게 아니더군요.^^

날개 2006-02-2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싸오시지 그러셨어요...^^ (간장게장 국물 싸와본 경험자~)

로드무비 2006-02-20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달랑 간장만요?
놀라워라!^^

검둥개 2006-02-2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싸올 것 같아요. 아하하하 ^^

산사춘 2006-02-2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저 사진을 보구 제가 무비님만큼이나 간장게장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요. 막 눈물날라케요. 흑흑

로드무비 2006-02-2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흑, 언제 간장게장이나 원없이 함께 먹을까요?^^

로드무비 2006-02-2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검둥개님,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