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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6월
평점 :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든 책이다. "편지" 형식의 글이라니 딱딱하지 않겠구나, 어렵지 않게 세계사 이야기를 조곤조곤 재미있게 들려주겠구나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 책은 내 예상과는 방향이 전혀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의 성격은 "세계사 편지"라는 제목에서보다는 그 앞에 작은 글씨로 씌여진 "새로운 세대를 위한"에서, 그리고 "'만들어진 역사',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라는 부제에서 훨씬 더 잘 드러난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역사책들과는 성격을 아주 달리하는, 그래서 내겐 낯설게 느껴지는 역사책이었다.
이 책의 글쓴이는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과 국경의 경계와 틀을 넘어선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자"(책앞날개)라고 소개되고 있는 임지현 교수다. "한국 사회의 본질주의적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해왔다."(책앞날개)는 그에 대한 소개는, 이 책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요소이리라. 이 책은 월간[우리교육]에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역사에세이에서 시작된 글이다. 2000년에 시작된 연재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저자의 큰 딸아이를 수신인으로 했던 모양인데,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 "새롭다는 느낌도 별로 없"(머리말 中)고 어색한 감이 있더란다. "수신인을 아예 바꾸어 딸애 대신 이런저런 역사적 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냐"(머리말 中) 휴머니스트출판사 측의 제안으로 이 책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편지의 수신인 중 17명은 역사 인물이거나 역사학자이고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8번째 수신인은 "한중일의 동료시민들"이다. 편지 수신인의 면면을 들여다보자면 이렇다. 에드워드 사이드, 사카이 나오키, 헤르만 괴링, 공자, 베티토 무솔리니, 이오시프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로자 룩셈부르크, 체 게바라, 마르코스, 다비드 벤구리온, 한나 아렌트, 지그문트 바우만, 요코 가와시마 웟킨스, 얀 브원스키, 니시카와 나가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다시 이름을 살펴봐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반쯤이고, 그나마 잡다하게 읽어왔던 역사책 속에서 자주 접해왔던 인물들이 반 쯤이고.. 그렇다. 하지만 그나마 이름이라도 자주 봐왔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조차도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보니 낯설다.
"일본 우파의 [새역사교과서] 못지않게 조악한 국정 국사 교과서만 유일한 텍스트로 삼아 민족의 영광과 발전이라는 목적론적 역사관의 국사를 배우고, '국산'의 경제학을 신성한 경제적 행위라 믿고, 한글 전용의 텍스트로 민족문화의 위대함을 전수받은 세대"(p169)들의 후예라 그런지, 나로서는 그간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역사 문제에 대한 글쓴이의 문제의식은 놀라움이고 틀을 깨는 것이었다. 그랬다. 대학교 때 역사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던 충격 중의 하나가 그런 것이었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니까 누가 봐도, 누가 이야기해도 똑같은 모습일 수 밖에 없고, 이견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배워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도출된 하나의 결론일 뿐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느꼈던 충격이라니... 이 책은 그 이상의 충격 같은 걸 내게 툭 던져준다. "과거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미래보다 과거가 더 예측하기 어렵다는 구소련의 냉소적인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이처럼 현실이었구나."(p386)
책을 덮으면서도 뭔가 아쉬운 것은, 내가 글쓴이만큼 역사에 박학하지 못한지라 글쓴이와 수신인 사이에서 오가는 그 많은 이야기들의 전제가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을 알지 못해 독해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어떤 가치관을 형성할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하는지라 다만 더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나 역시도 나름의 "관점"을 갖고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우선은 책을 덮어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