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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평점 :
역사책은 안경이다. 예전에 역사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많은 걸 몰랐을 때, 그러니까 역사는 암기과목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 안경이 투명하고 깨끗한 안경인 줄 알았다. 누가 봐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시력이 나빠 자세히 볼 수 없는 것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런 안경인 줄 알았고, 그 안경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랬기에 역사에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진실을 그대로 암기해서 머리 속에 많이 넣어둘수록 역사를 많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역사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 역사만큼 치열한 이념의 대립의 장이 없고, 역사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분야가 또 있을까 싶을만치, 학자마다 다른 말들을 한다. 예전에 투명안경이라고 생각했던 그 역사를 보는 안경이 사실은 기본적으로 색깔이 섞인 선글라스였다는 사실을 요즘에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조선의 힘]을 읽었다. "'지곡서당'과 '한국사상사연구소'에서 한학을 배웠고,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리학 등 사상사를 중심으로 고전을 공부하면서 기억,기록,역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책앞날개)는 이 책을 쓴 이는 오항녕. 내겐 낯선 이름이다. 이 책은 조선사의 여덟가지 쟁점을 글쓴이의 역사관으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내가 읽어왔던 역사책들과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낯설기도 학고 다소 어렵기도 한 책이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대한 기존의 오해, 왜곡, 무지 혹은 부정적 시각 등을 전면적으로 반론하고, 500년 왕조를 이끈 조선의 저력을 재평가하는,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시론서이다. 문치주의, 대동법, 실록, 강상 등 500년 시스템을 유지한 '힘'과 그 가치를 재발견하는 한편, 근대 이후의 왜곡된 역사관으로 인해 굴절된 조선성리학, 광해군, 당쟁, 단종 등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바로잡으려 했다."(책앞날개) 아... 이 말대로라면 내가 그간 어설프게나마 읽어왔고 그래서 나름 조금 "안다"고 생각했던 역사상은 "오해, 왜곡, 무지, 혹은 부정적 시각"으로 얼룩진 것이었던걸까...
책의 전반부, 그러니까 문치주의의 꽃이라는 경연, 실록, 헌법(과 강상), 대동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수월케 읽혔다. 아니 수월케 읽혔다기보다는, 그간 생각해보지 못했던 "제도사"에 관한 이야기라 글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많고 그래서인지 무척 흥미롭게 읽혔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글쓴이와의 견해 차이 때문인지, 재미가 덜했다.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광해군의 "화려한 부활"에 대해 글쓴이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조선의 성리학과 당쟁에 대한 식민사학의 해석과 그 식민사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학자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긴 마찬가지. 내 역사적 지식의 부족함 때문에 어느 쪽 의견을 편들어야 하는 건지, 글쓴이가 말한 "객관적인 주관"(p242)을 가지기엔 아직 많이 모자람을 느낀 것이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소득이랄까.
글쓴이는 대중적인 역사책을 써왔던 역사학자들이 "가상의 팥쥐와 콩쥐"를 만들어 대중의 관점에 부합하는 역사 쓰기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글쓴이가 비판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가 역사가 이덕일인데, 이덕일에 대해서 글쓴이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글을 쓴다"(p249)거나 "대중의 호의가 그에게는 이제 독이 된다. 아니, 어쩌면 알게 모르게 필자는 독자의 달콤한 독을 즐겼는지도 모른다."(p249)는 등의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두 역사학자 사이에선 이미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둘러싸고 한 차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논쟁이 있기도 했던 모양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책을 즐겨읽었던 나로선, 이 책은 무척 색다른 경험이었다. 역사를 보는 또다른 색깔의 안경을 발견했달까..
즐겨읽는다는 것과 깊이 있는 연구와 이해의 차이점 따위를 생각해보게 한 책이었다. 아직은 내 역사적 지식의 부족함으로 이 책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소득 하나는, 역사를 보는 관점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어느 한쪽의 의견에 매몰되지 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실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이 책을 통해 얻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