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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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까지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문맹이었다면, 21세기의 문맹은 그림을 못 읽는 사람을 뜻할 것입니다." 어느 지면을 통해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진중권의 이 도발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 솔직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글자는 웬만큼 읽는데 그림 좀 모른다고 문맹이라는 딱지까지 붙이고 살아야 되는 건가. 돌이켜 보면 그림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는 길고도 깊은 것이긴 하다. 학창시절 미술성적만큼은 항상 최하위권을 유지했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도 않지만 그린다고 해봤자 중학생 수준에도 못 미칠 것이다. 내 주변에 포진해있는 일군의 미학도들은 나의 컴플렉스에 불을 지폈으며,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림과 미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정도는 갖춰야겠다고 마음을 먹곤 했다. 그리고 그 미학도들의 추천에 따라 시작은 "미학 오디세이"로 하겠노라고 말이다.

  입문서로 "미학 오디세이"는 장단점이 있다. 우선 적당한 두께에 깔끔한 편집은 초심자로 하여금 최소한 지레 겁먹어서 도망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좋다. 고대 이집트부터 근대 미학에 이르기까지 자칫 지리해질 수도 있을 법한 미학사 여정은 다양한 컬러 삽화와 판화 예술가 에셔의 도움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진중권이 공을 들인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광대의 글쓰기"로 가능함을 설파했던 그답게 이번 책에서도 그의 미학강의가 독자들의 뇌로 사르르 녹아들 수 있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에서의 핵심은 심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능수능란한 구어체의 구사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답법을 들 수 있겠다.  "원래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법이다."라는 패기만만한 발언을 하더라도 잰 채 한다는 비판에서 그는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유구한 미학사를 책 한권에 포개다 보니 아무래도 곳곳에서 힘이 달린다. 특히 고전주의 이후의 미학사 부분은 내용이 조금 어렵기도 하거니와 설명도 조금 부족해 미학 입문으로 애 책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버겁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장이 끝날 때마다 참고문헌 목록을 충실히 달아놓았기 때문에 더 공부하고픈 사람은 알아서 찾아가며 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놓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막의 막연한 공간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피라미드까지 세웠다는데 방대한 미학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참고문헌을 찾아서 읽는 노력 정도는 독자들이 해주는게 인류의 조상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 책을 읽은 솔직한 평은 꽤 재미있게 미학사 전반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정도가 될 것이다. 태초의 주술이 고대에 예술로, 중세에는 종교로, 근대에는 철학으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날카롭고, 루벤스와 푸생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엇갈린 평을 통해 예술의 다양함을 이끌어내는 부분은 깔끔했다. 태초에 존재했다는 아름다움이 인류사를 관통하며 어떤 양상을 띠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진중권의 미학사 여정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  여자친구가 미술관 가자고 할 때마다 핑계대며 안 가서 미안했는데 진중권의 도움도 얻고 했으니 다음엔 내가 먼저 제안해봐야겠다. "시립 미술관에 꽤 흥미로운 작품전 하던데"하고 말이다. 여전히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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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3-0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어려운 미학이지만 처음으로 공부 좀 해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레이야 2007-03-03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오래전 이 책 사두고 다 못 읽고 꽂아둔 게 생각나요.
조만간 읽어야겠습니다.^^

얼음장수 2007-03-0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영합니다. 하지만 저도 2권을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으니 쉽게 "강추" 하지는 못 하겠네요. ㅠㅠ

로드무비 2007-03-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마이 도러의 그림에 메모 남겨주신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진중권 씨 글은 무엇보다 재밌게 술술 읽혀서 좋아요.^^

얼음장수 2007-03-0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맘에 없는 말은 할 줄도 모르고 하지도 않습니다만, 군생활하다보니 가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저는 그림 못 그리는 게 한입니다. 가끔 뭔가 떠오를 때 글보다는 이미지로 남기고 싶을 욕구가 생기는데 그림으론 절대 표현이 안 된단 말이죠ㅠㅠ
 
대한민국사 4 -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4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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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 한홍구의 네번째 역사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이번에도 한홍구는 FTA, 국가보안법, 사학개정법, 병역제도 등 다분히 논쟁적인 이야깃거리를 들고 나왔다. 저 어디 역사문서 보관함에나 들어있을 법한 죽은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이 뜨거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자는 또 얼마나 많은 자료를 뒤졌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이 책이 한겨레 21에 연재했던 글을 묶었다는 것만 생각해봐도한홍구가 펼치는 역사이야기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역사에 제법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품었던 것 같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부터 해서 몇 권의 한국현대사 서적을 겨우겨우 읽었다. 대한민국사 1, 2권도 이 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현대사의 이해'라는 학교 강좌도 찾아서 듣고 세미나도 할려고 했지만 사정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역사란 단지 사료의 집합일 뿐이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관이니 뭐니 하는 것도 사료없이는 어떤 설득력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사관에 대한 사료의 절대우위를 선언해버렸다고 해야 될까. 왜 그런 비겁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상 역사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 것은 정해진 길이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답하기 어렵다. 그 무섭다는 시간의 힘인 건지, 오랜만에 발견한 대한민국사라는 이름의 책이 그냥 반가웠던건지, 아님 또 다른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예의 그 비겁한 결론에서는 조금이나마 멀어지고 있다는 징표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랜만에 읽은 역사책으로 "대한민국사"는 썩 훌륭한 벗이었다. '지금' '한국'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그의 글은 역사에 대한 공부가 결국 오늘 우리(사회)에 대한 이해와 반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일관되게 보여주기에 나약한 내게 다시금 힘을 준다. 주관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태도나, 쉽고 재미있는 문체를 위한 노력은 비전공자들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이 책만의 미덕이다.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거나 아예 몰랐기에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3부의 마지막 꼭지인 '국립묘지를 보면 숨이 막힌다'와 5부의 '최일병, 김일병, 그 다음은'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민족이 근대의 산물인 이상, 민족국가간의 전쟁이 만들어낸 국립묘지 또한 근대의 발명품일 수밖에 없다. 전쟁 희생자를 기린다는 미명 하에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국가동원의 선전물로 이용되는 국립묘지의 태생도 서글프지만, 생존시의 계급과 성명에 따라 묘역의 크기까지 구분짓는 한국적 상황은 서글프다 못 해 서럽기까지 하다. 죽음마저도 구분짓는 비인간적인 발상에 잠시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한홍구만큼 병역과 군대문제에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또 그에 걸맞는 활동을 보여준 이도 드물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에는 한층 더 나아가 병역 문제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구체적인 논의는 책에 잘 설명되어 있고 내 눈길을 끈 부분은 "군대문제를 개선하고 바꿀 수 있는 힘과 역량은 예비역들에게 있는 것인데 예비역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라는 한 여학생의 지적이었다. 어디 관심만 없는 정도인가. 군대문화를 확대재생산하는 가장 큰 주체야말로 예비역들이 아닌가. 예비역들 반성해야 한다. 더불어 입대하기 전에 비해 군대문제에 관심도 줄고 감각도 둔해진 현역인 나도 반성해야 한다. 안에 갇힌 자는 더욱 경계해야하거늘 많이 게을렀다. 오랜만에 읽은 이 한 권의 역사책을 계기로 다시 역사에 관심도 가지고 자주자주 나를 돌아보겠다고 다짐해본다.

 덧) 이런 어설픈 자기 고백은 좋아하지도 하지도 않는 편이지만, 앞으로 좀 더 멋진 인간이 되자라는 자기 다짐으로 한 번 써봤다. 

덧2) 아무리 생각해도 유시민에 대한 글은 일기로나 쓰는 게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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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3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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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이공계 대학생들의 글쓰기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대입에서 논술 비중을 늘이겠다는 교육부의 발표로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보다는, 중고등학생을 자녀로 든 일부 학부모들)도 글쓰기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점에 즐비하게 자리한 각종 글쓰기 관련 책들은 글쓰기의 달라진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다.

 흔히 좋은 글을 쓰기 위한 3대 조건으로 다독, 다작, 다상량을 꼽곤 한다. 다른 사람이 쓴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스스로 글을 많이 써보고, 평소에 글쓰기와 관련해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뜬구름잡는 이야기만 같다. 실제로 글을 써보면 서론-본론-결론은 어떻게 구성할지, 맞춤법은 맞는지,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는지부터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이 중에서도 문장에서 단어 선택의 문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글쓰기 전략에 관한 책이나 맞춤법에 관한 책은 쉽게 구해 볼 수 있지만 어휘 문제에 관한 책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반가운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쓸수록 적절한 어휘 사용에 대한 압박이 커져가고 있음을 느끼기에(마음에 꼭 드는 표현을 골라냈을 때의 기쁨이란 것도 있지만) 한 번 더 반가운 책이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일종의 한국어 뉘앙스 사전이라 일컬을 만하다. '속과 안'. '궁둥이와 엉덩이', '참다와 견디다' 등 실제 언어 생활에서는 직관적으로 꽤 정확하게 구분해서 쓰는 말이지만 어감의 차이를 쉬이 설명할 수 없는 짝낱말들의 차이를 어원 분석이나 다양한 용례를 통해 잘 드러내준다. 재치 넘치는 삽화와 깔끔한 설명은 독자로 하여금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내용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게끔 도와준다. '입말'. '글말', '본디말' 등 우리말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도 이 책의 돋보이는 부분이다.

 두 명의 공동 저자가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 곳곳에 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거니와 번역 작업이야 말로 언어의 섬세한 뉘앙스까지 포착해야 하는 작업이 아닌가. 이들이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가라는 점도 이 책의 집필 과정에서 상당 부분 기여했을 듯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말들을 우리는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꽤나 적확하게 구사한다. 그러니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헷갈리는 어휘들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치 않는다. 비슷한 뉘앙스를 가진 짝낱말을 보면서 책의 설명을 읽기 전에 혼자서 나름의 답도 구해보고, 설명을 읽으면서 자신의 나름 짐작했던 것과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갈리는지를 파악하면서 읽는다면 어휘 몇 개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것 이상의 언어에 대한 기본사고력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머릿말에서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바이기도 하니, 이 책은 적극적인 독법으로 임해야 건질수 있는 것이 많을 것 같다. 저자들의 부단한 노력과 정성이 돋보이는 책,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곁에 두고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볼 만한 한국어 참고서로 손색이 없다.

덧) 뉘앙스 사전이라 칭한 책을 읽고도 뉘앙스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표현을 수두룩하게 써놓고 보니 리뷰쓴 손이 참 민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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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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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나도 토포러?

 
 오랜만에 만난 친구 녀석과 술 한 잔 하다 자연스레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 왈, "이야~ 가마히 생각해보면 군대에서의 2년하고도 2주(본보기로 잘못 걸려서 영창 갔다왔단다)가 꼭  하룻밤 꿈만 같다." 부러움에 몸을 떨며 내가 대답했다. "난 내 군생활이 하룻밤 꿈으로 끝날 수 있는 거면 소원이 없다. 잠에 푹 빠져가 길다란 꿈 꾸고 일났는데 제대하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겠노."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아주 긴 잠을,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내가 제대하는 날인, 그런 긴 잠을 자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럴 때면 스트레스나 받지 말고 꾸역꾸역 살아가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이러다 내가 정말 이상해지는 건 아닐까 조금은 두려워하며.
 
정신병동에서 심토너를 구출하다.
 
 그래서, "캐비닛"이, 반가웠다. 토포러들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 반가운 나머지 존재하지도 않는 그들이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얼마나 현실이 팍팍하고 고통스러웠으면 자버렸을까. 아니 깨어나지 않아버렸을까. 걸쭉한 입담탓에 웃으면서 읽었지만, 그래서 내내 웃을 수 만은 없었던 토포러들의 이야기였다. 토포러 외에도 시간을 잃어버리는 타임 스키퍼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사랑하는 여자의 곁에 있기 위해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 기억을 조작하는 메모리 모자이커, 자신이 온 별과 통신을 하기 위해 생업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외계행성과의 통신에 투자하는 사람들 등 이 도시의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기이한 심토너들의 이야기가 13호 캐비닛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이들은 정상성이라는 범주에 의해 낙인찍힌 현대의 낙오자들이다. 이들은 체제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변두리에 위치 지워진 군상들이며, 현실에서는 대개 '정신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수용되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현실의 정신병동에 있는 심토너들을 13호 캐비닛을 통해 바깥으로 끌어온다.
 
심토너를 인정하는 한가지 방법, 나
 
 백칠십팔 일 동안 사백오십 박스의 캔맥주를 마신 사람이 있다. 조사를 하나 바꾸는 게 좋겠다. 백칠십팔 일 동안 사백오십 박스의 캔맥주'만' 마신 사람이 있다. 할부로 찾아오지 않는 불행에 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캔맥주를 마시고 깡통을 찌그러뜨리는 일 뿐이었다. 이 남자, 다시는 찾아오기 힘든 운 덕에 모 공기업의 연구소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의 기쁨도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 말곤 할 일이 없던 무료함 때문에 회사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권박사의 연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 13호 캐비닛을 발견하고 순전히 무료함 때문에 1에서 9999까지의 숫자를 돌리는 무모함으로 13호 캐비닛을 열고 심토너들의 기록을 보던 나는 권박사에게 발각돼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권박사의 조수로 일하며 수많은 심토너들을 겪으면서 심토너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묘한 애정을 보여주는 나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한다. 권박사가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란 심토너들을 따뜻하게 보관하고 기록할 수 있는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또 하나의 심토너라 볼 수 있는 손정은을 대하는 태도나, 중간에 잠깐 드러나는 나의 학창 시절 때의 모습은 심토너를 인정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각자의 시계를 차고 함께 지하철을 타기
 
 이제, 심토너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기본적으로 심토너들이 현대문명의 부산물이며 따라서 우리모두가 함께 끌고 가야 할 존재임을 암시한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으니 말이다. 동시에 작가는 섣불리 심토너들을 이해하겠다는 태도는 경계한다. 결국, 세계란 각자의 시계를 찬 사람들이 각자의 시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각자의 시계를 존중해주는 일,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밖엔 없다.  내가 요새와도 같은 섬에 가서 13호 캐비닛의 보관자이자 기록자로 남게 된다는 결말은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언수가 생각하는 문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기록일까. 기발한 상상력을 걸쭉한 입담으로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김언수라면 뭔가 더 있을 것 같다. 왠지 정이 가는 김언수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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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1-25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재 가공업을 정밀 목재 가공업으로 바꾸는 선생님의 대사에 두손두발 다 들었습니다. 얼마만에 이렇게 배꼽 잡으며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얼음장수 2007-02-03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비닛을 읽으며 유머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뭐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삶에 대한 여유에서 오는 건지 발랄한 상상력에서 오는 건지 아직까지 감은 못 잡겠습니다만. 뭐, 어쨌든 유머라면 환영입니다^^
 
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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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윤경은 보통 심지를 가진 작가가 아닌 것 같다. 전작(前作)의 작가의 말이나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드러난 그녀의 확고한 소설관을 통해, 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현의 연애"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사실 뜻밖이었다. 요즘 한국 문단에 유행하는 문학과는 다른 문학을 써보겠다고 힘줘 발언하던 심윤경이, "달의 제단" 출간 후 인터뷰에서 "달의 제단에서는 전통이 소멸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전통이 살아남는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라고 말한 심윤경이, 연애라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된 소설을 출간했다는 소식은 내게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를 물게 헀다. '아무래도 연애 이야기로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풀지 못한 의구심과 함께 "이현의 연애"를 집어들었다. 그래도, 심윤경이라면, 뭔가, 다를 거라고 믿으며. 혹은 자위하며.

 결국 연애라는 타이틀을 걸고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했지만(이현의 입장에서 보면) 콕 끄집어내기는 힘들지만 뭔가 다르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 한 편을 알게 된 느낌이랄까. 그리하여 예술의 가장 고전적인 주제인 사랑은 이 책에서 새로운 색채를 덧입는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비극적인 이야기.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어떠해야했는지를, 이세 공과 이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진실되고 순수하게 아름다웠지만, 결코 아름답게 끝날 수는 없는 비극을 심윤경은 치밀한 이야기 배치와 정교한 심리 묘사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낸다. 적어도, 무얼 써도 다르게 쓰겠다는 심윤경의 의지만큼은 이번에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이현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 이야기이지만, 이진의 입장에서 읽으면 기록에 대한 이야기다. (이진이 한 번도 이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작품 후반부에 드러나며, 이는 앞부분부터 지속적으로 암시된다) 태어나면서 기록하는 사람의 운명을 타고 난 여자, 이진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시킨 건 어떤 의도일까. 소설가란 직업도 기록한다는 행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심윤경의 글쓰기와 관련한 어떤 면모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되짚어보면, 심윤경의 세 편의 작품을 기록이라는 테마로 연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의 동구가 글을 배워나가는 건 기록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을 획득하는 것이고, "달의 제단" 의 상룡이 소산 할매의 언간 해독작업을 하는 것은 옛 기록에 대한 복원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현의 연애" 의 이진이 영혼을 기록하는 것은 기록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기록 행위에 대한 심윤경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나온다.

 이진은 표정 없이 사각사각 기록했다. 부총리는 어이없어서 웃었고 나는 통쾌해서 웃었다. 내가 처해 있는 이 어이없는 상황, 이 여자기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무엇으로도 피해갈 수 없는 이 처절한 수모의 경험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 p. 268

 기록하는 자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나는 이 대목을 통해 심윤경이 기록하는 행위(글쓰기)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하는 작가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는 소설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큰 미덕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기록에서는 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가질 수 있는 여러 효용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맥락에서 약속을 어기고 이진의 기록을 훔쳐본 이현이 맞게 되는 파국은 기록을 모멸한 자에게 작가가 내리는 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이현의 연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이진의 기록이라는 이름 아래 중간중간 삽입된 4편의 이야기들이다. 억압받고, 욕망하고, 고뇌하는 영혼들을 기록한 이 4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경계에 선 듯 아슬아슬한 인생들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표현해내기 힘든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현과 이진처럼. 언어화시키기는 힘들지만, 4편의 이야기는 이현과 이진의 기본 서사와 묘하게 맞물리면서 기본 서사에 어떤 암시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더 상세한 분석은 내 능력 밖의 일로 느껴지니 안타깝다. 4편의 이야기는 짤막한 단편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 심윤경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1인칭 화자의 등장이나 심윤경 소설에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야기(특히, '라 캄파넬라')를 만날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혹시 다음번엔 단편소설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매혹적이고 독특한 분위기의 흥미로운 소설이었는데 의문점도 몇 가지 남는다. 특히, 천상계에나 존재할 법한 이진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조금 거슬렸다. 결국 이진이라는 인물은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작가의 의도는 짐작하기 힘들지만, 이진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는 내게 이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현실감을 거세시키는 작용을 했다. 동시에 약간의 지루함을 안겨다주기도 했다.

  결말은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주기도, 예정된 길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그런 결말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작가가 강렬하고 임팩트있는 결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달의 제단"에 이어 "이현의 연애"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이진에 대해서 이현이 기록한 부분은 그 강렬함을 천천히 녹여주면서 적적한 여운을 남김과 동시에 가슴 먹먹해짐을 니낄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나는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입니다"로 시작해 " 나의 이름은 이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로 끝나는 독특한 사랑이야기, 이현의 기막힌 연애담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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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1-18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윤경씨는, 이야기 구성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고 그만큼 빼어난 구성의 맛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상룡이에 이어 이현도 꽃미남으로 등장하는데, 아하, 우리네 훈남의 이야기는
언제 구경시켜주실지.

얼음장수 2007-02-0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았네요.
왠지 애정이 많이 갔던 책이었는데, 글에서도 그게 드러났나 봅니다.
지금은, 좀 쑥스럽습니다. 하하.

프레이야 2007-02-0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좋은 리뷰를 읽으면 예상치 못한 기쁨이지요.^^
읽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평도 모두 좋더군요.

마늘빵 2007-02-0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얼음장수 2007-02-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감사합니다. 읽는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다락방 2007-02-0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요 :)

얼음장수 2007-02-0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감사합니다. 좋은 작가, 좋은 책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