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대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흥미로웠지만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건 책 뒤편에 실린 참고문헌 서적 소개부분이었다. 그 중 현대전의 주요한 전략인 공중폭격에 대한 꼭지를 읽으면서 폭격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에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는데,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전직 폭격수였던 하워드 진의 육성을 통해 그 괴로움을 다시 한 번 겪어야 했다. “항공대에 소속되어 3만5천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다는 건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다는 것, 비명 소리도 듣지 못하고, 피도 보지 못하고, 토막난 시체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현대의 전쟁에서, 원거리에서 잔학행위가 자행되는지, 저는 아주 잘 압니다. 제가 그 때 바로 이런 일을 했습니다”(p. 294) 3만5천피트 상공에서의 폭탄투하는 크레이지 아케이드에서의 폭탄설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직 폭격수였던 하워드 진이 전쟁이 끝난 후, 제대군인 원호법 아래에서 무료로 대학교육을 받고, 그 후 대학교수 생활을 하면서 주도했던 흑인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에 대한 회고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당연히, 이 책에서는 역사학자로서의 하워드 진보다는 사회운동가로서의 하워드 진,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하워드 진의 모습이 부각된다.

 하워드 진이 남부의 스펠먼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당시 남부의 인종차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검둥이 여자애와 한 차에 타고 있으면서 뭐가 무질서한 행동이냐고 묻는 겁니까?”라고 경찰이 버젓이 추궁하는 그곳에서 하워드 진은 한가하게 강의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는 차별에 맞서는 학생들의 조직적인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다. 하나의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 흑인민권운동은 그 작은 행동들의 결합과 반복으로 이후 전국적인 앉아있기 운동으로 번지면서 운동의 성과를 일구어 내게 된다. 여기서 하워드 진이 주목하는 것은 비단 운동의 성과만이 아니다. 오히려 전국적인 운동과 그로 인한 변화를 가능케 한 최초의 작은 행동의 의미를 중요시한다. 사회변화의 길목에는 누구도(정치인, 거대 언론)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꿈틀대는 작은 움직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반전운동 초기에,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전쟁에 찬성하는 상황에서 조직된 수백명으로 이루어진 집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나중엔 십만명이 운집하는 반전집회를 만들어 내고 68년을 거쳐 전국적인 반전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 사소한 변화들에 대한 하워드 진의 신념은 책 전반에 걸쳐 여러차례 확인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희망을 전파하는 하워드 진의 열정은 어떤 부분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손석춘의 소설 “아름다운 집”의 주인공 이진선은 신학문에 대한 부푼 기대감을 안고서 들어간 대학의 입학식을 이렇게 기록한다.  “오늘의 입학은 입사인지도 모른다.” 때는 1938년, 조선의 현실은 대학생이 신학문의 꿈을 키우며 학문에만 정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학문조차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대학생의 얼마나 복받은 것인가. 하지만, 오늘날의 대학생에게도 대학 입학은 곧 바로 입사일 뿐이다. 완전히 다른 의미로 말이다. 이 황량한 대학 풍경 속에서 대학생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고민은 거의 실종되었고, 운동이라는 말은 ‘스포츠’라는 조소 속에서 희화화된 지 오래다.

 다시 하워드 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무수히 많은 학생 운동가들이 하워드 진과 함께 운동을 조직하고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사회의식이 특별히 투철하고, 그들의 상황이 다른 무엇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참담했기 때문일까? 남부의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외적 조건은 분명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시대에 비해 특별히 많은 고민을 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고 각종 차별과 불평등 역시 각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학생과 지금의 학생들을 둘러싼 외적 조건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때의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들고, 지금의 학생은 각종 고시, 취업준비에 모든 걸 걸게 만들었을까? 자본에 대한 사회전반의 예속 강화 등의 (내가 잘 모르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학생들을 이끌 수 있는 선생님의 존재 유무이다. 즉, 지금 한국에는 ‘하워드 진’이 없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발언일까. “나는 학생들이 내 수업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안정된 침묵을 버리고 목소리를 높여 발언하고 불의를 볼 때마다 그에 맞서 행동하게 되기를 바랬다”(p.253) 라는 교육관을 가진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었다는 것, 그 교육관을 몸소 실천한 선생님을 옆에 둘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때의 학생들이 사회 변화의 주체로 앞장설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을까.

 비관주의로 무장한 채 절망을 말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절망의 목소리들의 합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가 없다. 역사를 낙관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역사에서 희망의 흔적을 찾아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할 때 현실을 조금씩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수십년간 각종 운동을 주도하고, 수많은 대학생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하워드 진이 하는 말이니 거기에는 거역하기 힘든 진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을 취한다는 건 결국 달리는 방향으로 간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어영부영 갈피 못 잡고 있다가는 나 역시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딸려가게 될 것 같다. 기차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끔 하기 위해 더 공부하고 더 많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또 어렵겠지만, 작은 움직임이라도 만들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하워드 진이 내게 하고자 했던 말도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뱀발) 그러고 보니 이 책을 몇 년전 친한 친구 녀석에게 선물을 해줬었는데, 그 때는 이 책의 내용도 모르고 하워드 진에 대해서도 이름만 몇 번 들어본 정도였던 것 같다. 정말 생각없이 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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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3-31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책장을 넘기는 게 만만치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때문에 리뷰를 쓰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3-3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 오버랩 됩니다.
좋은 자녀되기보다 좋은 부모 되기가 어렵고,
좋은 학생보다 좋은 스승 되기가 약 100배는 어렵겠지요 :)

얼음장수 2007-04-01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그래서 전 선생되기는 예전에 포기했습니다. 좋은 학생이라도 될려면 생각하면서 살아야할 것 같아요. 4월입니다!

파란여우 2007-04-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번엔 <미국민중사1,2>를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얼음장수 2007-04-12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네! 알겠습니다! 허나 책값이 좀 나가더라구요. 읽을 자신이 생기면 꼭 읽을게요.^^

2007-04-12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7-05-2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 서재에 즐찾 돼있는 것 보고 이제서야 찾아왔어요.
하워드 진, 너무 좋지요? 존경스러운 분...

얼음장수 2007-06-2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냥 존경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전직 폭격수가 가장 진보적인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그게 하워드 진의 대단함일까요? 아니면 미국 사회의 저력일까요? 반갑습니다.^^

학생 2007-10-0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 우연히 이책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얼음장수님의 리뷰를 보게 돼었는데 리뷰만으로도 책의 느낌이 저에게 가득 전해져 옵니다. 좋은 리뷰글 감사드립니다. 책이 어려워보여서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글보고 바로 구매했습니다.. 저도 읽고 이렇게 좋은 리뷰를 쓸수 있었으면..^^ㅎㅎ 어쨌든 항상 행복하세요...

얼음장수 2007-10-0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님/ 좋은 책이 될 거라 믿습니다. 부족한 리뷰에 대한 칭찬은 감사하구요. 저도 미국사는 잘 몰랐지만 크게 상관 없었습니다. 님도 행복하세요^^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의 최대 화두는 신체다. 독일에서는 독일의 습속에 따라 주조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한국식으로 변형되어 적응한 진중권의 몸은 저자의 말마따나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맥락에서 무엇보다 정직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몸에 새겨진 흔적을 통해 압축 근대화로 인해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3가지 층위가 혼재한 한국인을(한국사회를) 분석해보겠다는 이 책의 분석 방법 역시 조금 낯설 수는 있을지언정 꾸밈은 없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끔 한다. 사실,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진중권, 이름 석 자만으로도 읽고 볼 일이다.

 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다룬 1부, 근대화 속에 내재된 전근대성을 해부하는 2부, 전근대성이라는 모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생겨난 탈근대성을 분석하는 3부로 크게 나뉜다. 낯선 시각으로 한국인의 습속을 냉정하게 분석하겠다고 하는데, 그 시각이 얼마나 낯선지, 분석은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간의 기대감과 또 얼마간의 의심을 가지고 읽어보기로 했다.

 1부의 주요 텍스트는 신문 기사이다. 현재 한국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것이 목표이니 만큼, 한국사회의 현재적 징후를 미시적으로 드러내는 신문기사를 주 텍스트로 삼은 것 같다. 진중권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화는 곧 군대화다. 이는 당연히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시대의 강력한 유산이다.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에 100km 산악 행군, 해병대 극기 훈련 체험을 의무사항으로 포함시키는 기업문화가 한국이 아니면 어디에서 가능하겠는가. 농경사회의 시간 관념과 노동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의 몸이 국가권력의 ‘인간개조’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본주의적인 신체가 되었다는 저자의 분석은 뼈아픈 진실이다. 정말로 평균적 한국인은 박정희가 만들어낸 프랑케슈타인이란 말인가. 

 2부의 주요 텍스트는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이다. 한국의 전근대성을 해부하는 부분에서 서구 사회의 문명화를 다룬 책을 주요 텍스트로 삼았다는 것은, 서구에서 이뤄졌던 근대화 과정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전근대성이 상당 부분 잔존해있다라는 분석이 뒤따를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진중권이 서구 중심주의적인 시각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라는 비판을 받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어차피 한국의 근대화라는 것이 자의든 타이든 간에 서구의 근대화를 모델로 설정해서 따라간 것이니 만큼, 근대화된 서구를 기준으로 한국의 전근대성을 파헤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해 보인다. 차라리 조금 더 나아가 서구적 근대화 자체를 비판하거나, 한국이 서구를 모델로 근대화를 진척시켜야만 했나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진중권이 낯선 시각(독일에서의 유학경험)으로 한국사회를 읽어보겠다고 한 만큼 얼마간 서구중심주의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마치 홍세화를 읽으면 프랑스가 민주주의의 천국 같고, 박노자를 읽으면 북유럽이 지상의 파라다이스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3부는 월터 옹의 “문자문화와 구술문화”를 바닥에 깐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해방직후만 해도 전국민의 문맹률이 90%에 달하는 사회였고 사정이 많이 나아진 지금도 실질적인 문서 해독능력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달리는 구술문화적 특성을 가진 사회이다. 이 구술문화의 특성을 영상문화의 차원으로 구현시켰기에 한국이 디지털 강국, 게임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분석은 흥미롭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신세대의 보수성을 분석하는 진중권의 시각이다. 요즘 세대는 이미지의 세대, 이미지는 곧 비선형적인 시간의식을 의미한다. 이 비선형적인 시간의식이 선형적 시간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역사의식의 결여를 낳아 신세대의 보수성이 비롯되었다는 접근은 날카롭다. 3부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핵심 주제는 디지털 시대의 복제문화에 관한 것이다. 원본을 대신하는 복제, 원본 없는 복제,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를 뜻하는 ‘시뮬라크르’로 설명할 수 있는 디지털 복제 시대에서 짝퉁은 진품을 만들어내고, 아우라의 전면적인 파괴가 발생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 책의 집필동기에는 아무래도 ‘황우석 사태’가 깊이 자리하는 것 같다. 프롤로그의 시작도 “황우석 사태”와 관련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책 전반에 걸쳐 ‘황우석 사태’를 다양하게 분석하고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최대 텍스트는 ‘황우석 사태“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기에 진중권의 시선은 신선했고, 특유의 글빨 역시 여전했으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내리꽃는 그의 비수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짜릿했다. 저자의 말대로 앞으로 한국인의 신체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새로운 존재미학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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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3-0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휴, 책에서도 그렇게 창의성이 중요하다는데, 실컷 읽고서도 어설픈 요약으로 일관하는 리뷰를 쓰다니. 으헉.

클리오 2007-03-0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번번히 진지한 리뷰를 조용히 읽고만 가기가 죄송해서 흔적 남겨요. 이 책, 읽어봐야겠군요....

얼음장수 2007-03-09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제 병입니다. 별로 진지하지도 않은 놈이 뭐 좀 쓸라치면 소심해져서 진지해지거든요. 소프트하게 써야지 하면서도 몇 줄만 써놓고 보면 벌써 드라이해져 있으니 이거야 원. 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2007-03-10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음장수 2007-03-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담감님/ 제가 읽을 정도인데 뭐 어렵겠어요? 내일부터 4박5일 휴가라 주말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 좋은 주말 되셔용^^

비로그인 2007-03-1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보고 추천.

얼음장수 2007-03-1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난책님/ 고맙습니다. 헤헤.
 
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가 엄청난 히트를 친 이후로 "~ 콘서트"라는 제목의 책들이 여러권 나오는 것 같다. 물론, "과학 콘서트"가 많이 팔린 이유는 제목에 붙은 콘서트라는 세글자 때문은 아니다. 충실하고도 재미있는 내용, 그리고 저자의 빼어난 글쓰기 실력이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콘서트의 관객이 된 듯한 재미와 정보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의 파급력 역시 한 몫 했겠지만) 출판계의 극심한 불황탓일까. 개인적으로 "과학 콘서트"이래로 "~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들을 보면서 무리해서라도 '콘서트'라는 제목을 갖다 붙여야 했을 출판인들의 고뇌를 떠올렸다. 다행히 "~ 콘서트"로 나온 책들이 대체로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게 알찬 책내용 덕분인지, '콘서트'의 힘인지, 양자의 절묘한 결합으로 인한 것인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과학 콘서트"는 목차만 봐도 제목에 '콘서트'를 붙인 이유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다른 "콘서트"들은 내가 아는 바로는 굳이 '콘서트'라는 제목을 붙일 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황광우의 "철학 콘서트" 역시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제목은 썩 적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책 제목 짓는 건 출판사 마음이고, 제목도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책 제목으로도 딴지 걸고 비문 하나로도 시비걸 수 있는 게 리뷰어의 권리라고 한다면 저자나 출판사도 과히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 콘서트"는 쉽다. 저자가 옆에서 개인강의해주는 듯 문체도 편안하고(로빈슨 크루소와 "동물농장"으로 마르크스를 설명하는 친절함), 책 내용도 '철학'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어렵지 않다. 저자는 동서양 대표 사상가 10인을 선정해 그들의 삶과 대표저술을 통해 그들의 철학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 책의 돋보이는 부분은 그들의 저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져온 그들의 삶을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논어"에서 공자왈 하는 죽은 공자가 아닌, 너무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 해 제자들과 밥벌이를 걱정해야만 했던 살아있는 공자를 만날 수 있다. "성서"의 존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저 낮은 곳에서 버려진 이들을 위해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예수와 마주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토머스 모어를 가장 많은 생각을 하면서, 가장 많이 옮겨 적으면서 읽었다. 유토피아의 의미를 '어디에서 없는 장소'에서 '이상향'으로 바꿔 놓았다는 그의 책 "유토피아". 모어가 꿈 꾼 유토피아의 많은 부분들이 현실이 되었다. 참정권과 교육권에서의 남녀 평등이 이루어졌고, 그 당시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주민 자치제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다. 물론, 모어 이전에도 유토피아를 꿈꾼 이가 있으니 바로 플라톤이다. 그 유명한 이상국가. 하지만 모어는 '철인'의 자리를 '대중'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정치사상사에서 하나의 획을 그을 수 있었다. 모어의 최종 목표였던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여가시간의 증가만큼은 자본의 강한 저항으로 아직까지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 하고 있으나 계속 꿈 꿔 볼 일이다. "내 목이 짧으니 자를 때 유의해주게"라는 말을 남기며 떠난 모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역시 옳다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꿈을 꾸라는 것 아닐까.

 모어가 특히 인상적이라 따로 한 단락을 맡겼지만, 다른 사상가들도 꽤 흥미로웠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를 읽으면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이황을 읽으면서는 이황보다는 그의 학문적 라이벌이자 나이를 떠난 우정을 나눈 철저한 반권위주의자 기대승이 궁금하다는 생각을, 마르크스를 읽으면서는 저자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가지 내 의견과 배치되는 부분은 노동에 대한 저자의 견해였다. 노동이 신성하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 있다. -p. 219" 는 다분히 논쟁적인 발언이다. 나는 인간이란 놀 때 본성이 드러난다고 생가하고 노동은 유희하는 인간에겐 굴레라고 생각한다. 노동에 관해서라면 김훈의 말에 동의를 한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사회에는 김훈식의 온전한 인간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제목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긴 했지만 알찬 책이다. 소개된 원전을 읽어 봐야겠다는 의지도 다지게 해주고(어디까지나 의지!) 작금의 현실과 관련해서 고민하게 해주는 부분도 많다. 철학이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도 빠져들게 할만큼 재미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왜 고전을 읽어야되는지 그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전히, 앞으로도 살아서 생명력을 더해갈 고전, 그 문으로 가는 친절한 안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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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3-07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좀 하신 분이라면 바로 원전에 도전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콘서트라는 제목에 딴지를 걸었지만 생각해 보니 철학이라는 제목도 그다지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네요. 나날이 공부할 게 쌓여만 가네요.

2007-03-07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3-0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콘서트 시리즈(?)는 대체로 평이 좋군요 ^^
조곤조곤히 적어주신 리뷰 감사합니다. 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얼음장수 2007-03-0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했헸님/ 고쳤습니다요. 이젠 팔도 다 나아가니 팔 때문에 오타가 많다는 핑계도 못 대겠어요. 책 재미나요. 저자의 폭넓은 지식 덕분이겠죠.

체셔고양이님/ 읽어보시면 왜 좋은 평을 받는지 알 수 있을 거에요. 하긴, 저는 책 10권 읽으면 9권 이상은 그저 좋다고 헤벌레하는 편이긴 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책은 아주 쉽고 과하게 친절합니다.

프레이야 2007-03-20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료한 글로 책을 읽고 싶게 하시네요.
팔이 많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

얼음장수 2007-03-2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걱정해신 덕분에 빠르게 호전되고 있습니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생전에 전인권 씨는 대학 강단에서 수강생들에게 꼬박꼬박 '~씨'라는 말을 붙여서 호명했다고 한다. 나아가, 학생이 선생에게 "전인권 씨, 질문이 있는데요!"라고 말하거나, 신문기자가 대통령에게 "노무현 씨!"라고 부르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날이 오길 기대했다고도 한다.(p.12)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그가 얼마만큼  평등한 커뮤니케이션을 열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러한 비권위주의적인 태도가 그가 태생적으로 권위주의적이라는 더 큰 진실을 가릴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는 양심적이고 건강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찌 이런 선생님을, 아니 이 저자에게 애정을 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태생적으로 권위주의적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그 역시 한국의 전형적 가정에서 성장한 '동굴 속 황제'이기에) 그가 권위주의를 싫어하긴 싫어하는 모양이다. 책을 마무리하는 부분에 이르러 이런 말까지 덧붙이는 걸 보니 말이다. "당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 직장, 단체 등이 권위적인가 아닌가를 알아보고 싶다면, 그곳에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거나, 구성원 중 누군가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분위기라면 분명 문제가 있는 곳이다." (p. 297) 뻔한 이야기지만 이 발언의 의미를 새기며 생활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머릿말을 통해 파악한 저자의 면모는 저자에 대한, 나아가 책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전인권 씨는 지독하리만치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자신의 유년기를 복기해 낸다. 그의 이 처절한 솔직함에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는 '아니, 이 사람 이렇게까지 말하면 가족 생활, 사회 생활에 지장 생기는 것 아닌가' 하고 주제넘은 걱정까지 들게 할 정도이다. 그의 솔직함은 여태까지의 자신의 인생이 실패였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실패의 원인을 한국 가정에서의 그의 성장과정에서 찾는 것이 일환이기에 단순히 유년기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지루하게 반복된다는 인상도 종종 풍기지만, 대체로 공감할 수 있다. 나아가, 나 자신의 유년기를 돌아보고 나의 정체성 형성에 대해 반성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참 고맙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한국의 남자 아이에게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를 사랑한 남아가 아버지를 강력한 경쟁자로 여겨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인데, 애초에 한국의 가정에서는 경쟁자로서의 아버지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들은 꽤 오랫동안 어머니와의 동침권을 확보하고 목욕탕도 시장도 함께 간다.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공간에 머무르며 어머니와는 내외할 뿐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길 건수가 도통 없을 수밖에 없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난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엄마 옆에서 엄마의 젖가슴을 주무르면서 동침하며, 원래 엄마와 아빠는 떨어져 자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의 가정이야 또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정설로 여겨지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정면으로 반박한 부분은 나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대목은 아버지(가족)-선생님(학교)-대통령(국가)로 이어지는 수직적 위계에 대한 분석이었다. '군사부일체'를 빌리지 않더라도,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며 대통령을 존경하라는 말은 어린 시절 귀에 못 박히도록 듣지 않았는가. 결국 위에 열거한 3가지 공간 모두 '아버지의 언어'가 지배하는 공간, 아버지(선생님, 대통령)을 매개하지 않고는 다가갈 수 없는 공간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다. 동시에 가족-학교-국가라는 공고한 카르텔을 구축해 개인의 자아를 옭아매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하는 문제는 역시 '정당하게 아버지를 살해하기'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살해'란 내 안에 존재하는 아버지, 내가 가정에서 동굴 속 황제로 자라면서 만들어낸 이상적인(실재로는 지독하게 권위적인) 아버지상을 되돌아보고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버린 자신을 구하는 길이며, 결국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임을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이 글을 읽는 남성들이여. 그리고 나여. 그렇게 솔직해질 각오가 되었는가?

  한 아이의 유년기에서 아버지, 어머니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가 형제, 자매다. 그리고 전인권 씨는 실제로 형제, 자매가 4명이나 있었다. 허나, 책에서는 자신의 유년기에 영향을 끼친 형제, 자매와의 일화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물론 이 책의 기본 구도가 나-아버지-어머니로 이루어진 삼각형이었겠지만, 특히 한국에서 동기간의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그 부분은 좀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패했고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이 책을 읽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는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 독서의 효용은 어차피 개인차가 있는 거니까. 이 책이 최소한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머릿말과 맺음말이라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본문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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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3-0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지 2주정도되니 복기가 힘드네요. 전인권 씨의 글은 솔직했지만 제 글은 그렇지가 못 하네요. 책 읽을 때 좀 더 의미있게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야 겠다라는 다짐을 해봅니다.

나비80 2007-03-0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서평인걸요. 익숙한 내용이지만 전인권 씨에 대한 소개까지 함께 접하니 읽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얼음장수 2007-03-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 소이부답님의 반이라도 따라갈려면 아직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계발서 읽느니 이 책 읽으면서 의미있게 자신을 한 번 돌아보는 게 훨 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소이부답님의 글의 자주 접하게 해주시는 건 어떨는지요.

파란여우 2007-03-0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책보다 서평이 더 근사하게 표출되는 경우를 발견하죠.
이 리뷰도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설마, 책은 그저그런데 얼음장수님의 서평이 너무 촘촘하고 성실한거 아니겠죠?^^

얼음장수 2007-03-07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과찬아십니다. 좋은 책이었습니다. 더 좋은 책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이미 가버렸네요. 항상 힘을 주시는 여우님. 고마워요^^
 

 다음주 목요일까지는 왼팔에 깁스를 감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외팔이로 살아온 17일 그리고 살아갈 4일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이젠 웬만큼 팔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판도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면 배꼽을 잡겠지만 말이다. 하긴, 사람들이 자신의 근원인 배꼽을 너무 태만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배꼽 잡으면서 한 번 눈길을 주는 것도 자기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되겠다.

 유도에 입문하면 처음 3개월은 낙법만 줄기차게 배운다고 한다. "하나, 둘, 퍽. 하나, 둘, 퍽" 물론 실전에서의부상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유도 도복도 처음 입은 내가 딸랑 러닝 20분에 스트레칭 5분하고 유도한다고 덤볐으니 왼팔 인대 좀 늘어난 건 그래도 착하게 살았다고 하늘이 도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고 당시의 그 끔찍한 고통과 왼쪽 팔꿈치 윗부분에 형성되었던 엄청난 크기의 붓기는 당분간 지워내기 힘들 것 같다. 사실 오늘도 자판을 좀 많이 두드렸더니 질끈질끈 쑤셔댄다.

 몸이 아프니 덩달아 마음도 괴로웠다. 아픈팔 덕에 근무는 좀 편하게 설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쾌재를 불렀건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 안 되는 근무시간이었지만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 시간들을 겪고 내게 남은 건 비참함이었다. 그 무서운 실감 속에서 나는 그 무엇도 손 대기 힘들었고 내내 신세 비관만 하다, 사람들이 이러다 우울증에 걸리는 구나,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조금씩 고통이 가시고, 한 손이 두 손의 일을 대체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온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른손의 몫을 대신해준 녀석들은 주로 입, 무릅 등이었다. 이 시기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해준 파란여우님과 더불어 내 팔이 낫는데 가장 큰 공헌을 세워주었다. 커피 봉지는 입으로 뜯고, 종이 뭉치는 무릅으로 고정시키고, 다른 일들은 조금 서툴고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라도 한 팔로 차근차근 해 나가면서 한 팔로 생활한다는 게 생각한만큼 힘겨운 것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왼 팔에 깁스를 한 상태는 일종의 장애인데 이 장애라는 사실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딴애는 기특한 생각도 해보았다. 1급, 2급... 이라는 국가적 분류체계에 포함되면 장애고 그렇지 아니면 비장애인가. 비장애인의 눈으로 규정짓는 장애라는 건 얼마나 편의적인 걸까 이런 생각을 했다. 장애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한 어줍잖은 생각의 편린일 뿐이기에 허점이 많겠지만 앞으로 공부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수확 정도는 얻었다.

 보름 남짓한 시기동안 7권의 책을 읽었으니 평소의 3배정도 본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팔 부상은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첫 번째 페이퍼도 팔 부상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않았겠구나. 여전히 괴롭고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깨달은 바도 없지 않으니 압박 붕대와 부목 속에 숨어있는 팔도 그리 섭섭하게만은 여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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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0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깁스 하고 고생 많으시군요. 그래도 책 볼 시간을 많이 얻으셨으니 좋았기도 하구요. 새옹지마네요. 그래도 푸시고 나면 잘 적응하시고 조심도 하시기 바래요^^

파란여우 2007-03-0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미학을 시작으로 얼음장수님의 순도 높은 리뷰를 기대하며
회복을 기념하는 축하 인사를 더불어 드립니다.
팔이 다 나서면 봄 꽃도 활짝 필 것입니다.^^

로드무비 2007-03-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팔이론--외팔이로
오타 신고하고 갑니다. 제목이니 눈에 띄어서요.
외팔이로 지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깁스한 사람 멋져 보이던데......^^

얼음장수 2007-03-0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한답니다. 육체와 정신에 관한 님의 말씀은 내심 반박해보려 했지만, 몸과 마음은 거짓말을 못 하더라구요. 함께 봄꽃을 기다려 보지요.

로드무비님/얼마 안 살았지만 팔 깁스만 세번쨉니다. 제 깁스한 모습에 뭇 여인네들이 다 반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만 하고 싶어요. 생각해보니 조금 머뭇거려지기는
합니다만, 쩝.^^

비로그인 2007-03-0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유도...
좋은 운동입니다. 그쵸?
그나저나 부상이 빨리 완쾌되시면 좋겠네요.
서재 재오픈한 기념으로 마실다니는 중입니다. 반가워요 얼음장수님 :)

얼음장수 2007-03-0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참말로 죄송스럽게도 유도랑은 영영이별 영이별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예약된 멘트) 저도 종종 들르게요. 담배피는 모습 멋지군요.

2007-03-17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음장수 2007-03-1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별 말씀을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저도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읽고픈 소설이 요즘 많아서요. 자주 들러 따뜻한 글들 구경 많이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