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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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사랑해야 한다.(307쪽)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사랑해야 한다.(307쪽)

​모두에게 좋은 책이라는 평을 받은 책은 읽기가 겁난다.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되었고 꼭 읽어야지 하는 다짐을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쉬운 무언가와 마주했다면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남들이 느끼는 감동의 크기가 나의 그것과 같을까. 누군가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솔직한 기분을 가짜로 포장할 수도 없으니 큰일이 아닌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 그러했다. 열네 살 모모의 성장소설이며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란 질문을 떠올리는 소설 말이다. 아름다운 감동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모모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럼에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모모는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대신 로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했다. 아니다, 모모 스스로 자랐다는 게 맞겠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며 로자 아주머니가 키우는 아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어린 모모는 일찍 철이 들었고 긍정적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모모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모뿐 아니라 창녀의 아이들을 키우는 로자 아주머니와 양탄자를 팔았던 하밀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 주변의 이웃들. 그들은 모두 상처를 지녔고 버림받았고 고통을 견디며 살고 있다. 유태인인 로자 아주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힘든 시절을 보냈고 하밀 할아버지는 점점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모모와 대화를 나누고 모모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건 모두 그들이다.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모모가 마주한 세상은 로자 아주머니의 말처럼 엉덩이로 먹고사는 삶이 있었고 자신과 같은 아랍인이 아닌 유대인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러나 모모는 그만의 유머로 모든 걸 소화해냈고 어린아이가 느꼈을 외로움과 슬픔을 모르는 척했다. 그런 모모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가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244쪽)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252쪽)

죽었던 사람이 죽기 전으로 돌아가고, 자동차가 거꾸로 달리는 모습은 모모에게 최고의 감동이었다. 영화를 더빙하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영화 되감기처럼 모든 걸 되감을 수 있기를 바라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모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고 싶었던 모모의 진심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철이 들었다 해도 아이는 아니인데. 자신의 보호자인 로자 아주머니가 거구의 몸으로 7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모모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로자 아주머니의 병은 그녀가 두려워했던 암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식물인간으로 살 수도 있다고 의사는 전했다. 이웃들이 와서 로자 아주머니를 닦아주고 돈을 주기도 하고 의사가 다녀갔지만 희망을 갖기는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모모 혼자 간호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없다면 모모는 살 수 없었다.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아는 로자 아주머니는 자신을 지키고 싶어 했고 모모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로자 아주머니가 원하는 방식대로 말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함에 있어 많은 이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모모를 사랑한 어른들이 있어 모모는 사랑을 아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모모를 사랑해서 같이 살고 싶어서 열네 살이 아니라 열 살이라고 거짓말을 한 로자 아주머니, 세상의 지혜를 들려준 하밀 할아버지, 모모의 존재를 특별하게 인정해준 그들이 없었다면 모모는 웃음을 모르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외당한 이들이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정겹고 따뜻함이 가득하지만 이 소설은 지독하게 아프다. 모모가 조금 천천히 인생을 알았더라면 소년의 날들이 조금 길었을 텐데.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모모가 사랑 때문에 사람 때문에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랑받기 충분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아는 것으로도 대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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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10-26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아이는 자신이 자라는 환경 때문에 일찍 철이 들기도 하죠 그렇다고 아이다운 마음이 다 없는 건 아닐 거예요 모모 둘레에 있는 사람도 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지만 모모를 사랑해서 다행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가진 사람이 더 아이한테 사랑을 주지 않기도 하잖아요


희선

자목련 2019-10-30 17:38   좋아요 1 | URL
그래도 아이가 일찍 철이 드는 건 속상한 것 같아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성장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소설 보다 : 여름 2019 소설 보다
우다영.이민진.정영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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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할까. 그건 소설가와의 세대차이와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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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9-10-23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전 저만 세대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는줄 알았어요.
전 아예 100자평도 남기지 않았더랬죠.
정영수 작가의 소설을 제외하곤 두 작가의 작품은 읽었지만,읽은 기억이 하나 없네요ㅜ
읽으면서 줄곧 내 머리가,내 가슴이 받아들일 틈을 주지 않는구나!그런 생각을 가지며 읽었던 기억만...
내가 즐기는 소설은 딱 그정도의 테두리가 있다는 자각을 함으로 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뭐 그런 씁쓸함도 느꼈어요.
헌데 자목련님은 소설가와의 세대차이와는 다른 것이라고 하시니....음!! 위로받는 느낌입니다^^

자목련 2019-10-25 09:50   좋아요 0 | URL
소설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떄로 소설을 읽는 행위가 피곤하게 다가오는 소설도 만나는 것 같아요.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이상한 말일지도 몰라요, ㅎㅎ
 
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투에고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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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토끼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고 단정을 지었다. 그런데 토끼 옷을 입은 단무지였다니. 자세히 보아도 잘 알 수 없는 게 있다. 그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보여주었을 때에 진짜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무지인 자신의 모습을 토끼옷으로 숨긴 ‘무지’처럼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 옷을 온전한 나로 봐주는 이에게는 토끼로, 숨겨진 단무지를 발견해주는 이에게는 단무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어떤 때는 나는 단무지랍니다. 크게 소리치고 싶은 순간도 올 것이다. 오래도록 우리 곁을 지켜주는 ‘콘’ 같은 존재에게는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어릴 때는 구름이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보니 구름도 하늘 밑에 있더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내가 가진 불안과 긴장도 다시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거잖아. (51쪽)

누구나 숨기고 싶은 모습이 있다.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모습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가시와 모난 형태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만들던 때 말이다. 그런 일상을 견디고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투에고’ 작가는 글이라고 했다. 진심을 꺼내 글로 기록하는 일. 문득 어떤 밤이 떠오른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고 답답한 마음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때였다. 그러한 밤에 나는 뭔가 썼다. 물론 작가의 글처럼 위로나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는 그런 글은 아니었다. 욕을 쓰기도 하고 화를 나는 상대의 이름을 나열하기도 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위, 어떤 분노를 부수는 방법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방법을 추천한다. 후련해지는 기분도 있고 그렇게 뭔가를 쓰다 보면 결국엔 나와 마주하게 되니까.

서로 다른 ‘나’들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 가능한 한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거든. 그래도 그 둘이 평화롭게 만날 때가 있어. 바로 내 진심을 꺼내 글로 기록하는 순간이야. 이 시간을 통해서 난 비로소 내가 누군지 발견하는 것 같아. (96~97쪽)


 

 

우리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다. 나에게 좋은 사람,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된다. 내 맘 같지 않아서 속상하다는 친구의 말에 네 맘이 어떤데, 하고 물을 적이 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친구처럼 우리는 내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모른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삶이 존재할 수 없듯 내 마음과 똑같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때로는 나를 온전히 이해할 존재가 나밖에 없으니 나를 안아주는 일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를 믿어주는 거, 나는 앞으로 괜찮을 거라고 토닥여주고 응원해주는 거, 바로 스스로에게 가장 완전한 친구가 되어주는 거야. 그 순간 내 감정을 이해해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137쪽)

그리고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콘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을 나의 연락을 기다리며 나를 지켜봐 주는 친구처럼 말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온전하게 바라보는 존재, 그런 존재 앞에서는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다. 제목처럼 ‘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본연의 나로 존재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모르는 걸 인정하고 잘못한 일은 사과하는 것. 상대에게 나를 강요할 수도 없고 누군가 강요하는 대로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그게 우리가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전제하고 출발해보기로 했어. 그러면 다수가 손을 들었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지.'우리'나 '모두' 같은 말로 뭉뚱그려서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어. (122쪽)

​매 순간 불안과 걱정이 나의 일상을 흔들 때 무지와 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편안해질 것 같다. 아무런 기대 없이 창문을 열었을 때 맑은 하늘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무지와 콘을 만나는 순간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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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10-2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토끼가 아니라 단무지가 토끼옷을 입은 거였군요. 그냥 지나치던 이모티콘도 자세히 보니 다 사연이 있네요 ^^

자목련 2019-10-25 09:46   좋아요 0 | URL
네, 저마다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캐릭터라고 할까요.

또이 2019-10-23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ᆢ단무지였구나

자목련 2019-10-25 10:03   좋아요 0 | URL
토끼가 아닌 단무지였더라고요. ㅎ

희선 2019-10-26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어리테일에는 개구리 옷을 입은 고양이가 나와요 이름은 프로시예요 그래도 프로시는 고양이라는 걸 아는데... 무지는 단무지였군요 이름에 나오지만 잘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겠습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기는 하죠 그런 걸 잘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희선

자목련 2019-10-30 17:39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개구리 옷을 입은 고양이도 귀여울 것 같아요.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117쪽)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다 읽고 발췌한 문장을 적어보니 내가 어떤 단어에 끌렸는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환대’였다.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현재의 일상에서는 그런 환대가 사라졌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일상에서의 일탈 혹은 탈피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라 여행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 뭔가 다른 삶을 꿈꾼다기 보다 반가운 인사와 정성스러운 마음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영하에게 여행이 그러했을까.

 

보통의 여행 에세이와는 다른 여행에 대한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남다른 느낌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잦은 전학을 다녔던 그에게 여행은 그 시절의 결핍을 치유해주는 하나의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언제 다시 떠나야 할지 모르는 불안으로 인해 친구들과의 사귐에 있어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았을 그에게 삶은 여행의 연장선은 아니었을까 싶다.

책은 그가 단순히 관광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일(소설 쓰기)과 취재를 위해 여행을 떠난 곳에서 마주한 일상에 대해 들려주는데 다양한 에피소드와 그에 따른 깊고 넓은 사유에 반하고 만다. 중국 여행에서 비자가 없어 도착하자마다 다시 추방당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방송으로 잘 알려진 ‘알쓸신잡’에서의 여행, 힘들었던 배낭여행과 『검은 꽃』집필을 위해 아내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한 이야기. 어떤 것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게 없다. 김영하는 여행을 말하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대학시절 운동권에 속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여행지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특별한 존재를 원하는 여행자의 심리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로 설명하고 ‘알쓸신잡’을 통해 경험한 ‘비(非) 여행’과 ‘탈(脫) 여행’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내게 여행의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어떤 여행을 꿈꾸는 것일까. 책에도 등장하는 방 안에서도 세계의 모든 걸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직접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욕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 이곳과 다른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과 그곳에서 다시 이곳을 그리워하는 복잡한 마음은 아닐까. 여행을 대하는 태도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충동적으로 짐을 꾸리고 누군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을 세우고 점검한다. 그러나 김영하가 그러했듯 우리가 기억하는 여행은 완벽한 여행이 아닌 돌발 상황이 삶으로 파고드는 그런 여행이다. 그런 여행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 그 도움을 기억하는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전하고 그것은 아름다운 순환으로 발전한다. 여행이라는 우리네 삶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139쪽)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며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148쪽)

방구석 여행자에 불과한 내게도 이 책은 여행의 기쁨을 안겨준다. 김영하가 여행과 접목시켜 읽어준 책들과 인문학적 사유만으로도 충분하다.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삶에 대해 생각할 것들을 제시한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삶이라는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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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0-2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대‘와 ‘여행‘ 이라는 두 단어가 닮은 듯 다른 듯이 공존하는군요. ^^

자목련 2019-10-23 14:33   좋아요 1 | URL
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인데 묘하게 공통점이 있는 듯하더라고요.
 

 

그들이 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들어갈 때는 가능했던 자세가

나올 때에는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목한 당신의 마음이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순간이 어째서

관객들에게 패러독스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밖으로 긴 장갑을

던져주기 바랍니다 간직했거나

감추어졌다 펼쳐지는 지문을 우리는 주울 뿐입니다

당신이 발을 딛는 바닥은

내 머리 위의 심연

가까워지는 당신의 손을 절대

만질 수 없는 투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얀 새의 윤곽을 만드는 검은 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지나치듯이 (「회전문」, 전문)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 담아둔 말처럼 용기가 고여 있다. 어제는 주기적인 일정을 변경하면서 괜히 짜증이 났다. 한 번 변경한 일정을 다시 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누구의 잘못과 미안함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는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속으로 짜증을 냈고 미안해하는 마음에 화가 났다. 왜 그랬을까. 번거로움, 귀찮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별거 아닌 것들인데 그냥 대수롭지 않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들은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사소하다고 여기는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나 아닌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그런 기준들이 싫다. 그런 게 싫으면서도 나는 또 누군가에게 기준을 제시한다. 참 우습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 안에는 비용의 최소화가 있다. 발생하는 비용이 최우선이다. 이게 맞는 것일까? 맞고 틀림의 문제라고 여겨야 할까. 단순하게 생각하려 하는데도 한 번씩 복잡함으로 빠져든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피곤한 시간, 아주 작은 일상이 나의 기분을 바꾼다. 가스레인지 점화 손잡이가 부러졌다. 그래서 그쪽 화구를 사용하지 못했다. 인터넷 쇼핑몰에 검색하니 손잡이를 구매해서 끼우면 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제조회사의 것으로 구매를 했고 결과는 꽝이었다. 나의 부주의로 발생한 일이다. 나름 꼼꼼하게 살피고 주문했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객센터에 문의를 했더니 바로 부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안내를 받았다. 오래된 제품인데도 부품을 구매할 수 있다니 신기했다. 고가가 아니라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냉장고나 TV의 경우는 출고된 지 얼마 되지 않아도 부품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권장 사용기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보통의 택배비 2배를 지불했지만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마스크를 채우듯 점화 손잡이를 끼우니 완벽하다.

 

지난주에는 노벨문학상이 발표되었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든다. 이유는 글쎄. 이번에 수상한 작가의 소설을 책장에서 발견하고 언제 이 책을 샀던가, 혼자 웃었다. 한 권은 읽다가 말았고 한 권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어리석은 욕심은 줄어들지 않는다.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 『밀크맨』이 궁금하다. 오래 생각하고 기다렸던 작가의 신간 소식은 기쁘다. 소설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10월의 절반 이상이 흘렀고 아직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독감 예방 주사는 올해도 맞지 않을 것 같다. 건강해진 기분이랄까. 그냥 그렇다고 주문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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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10-1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찾아보니 한 권 있더라구요. 이번 아니면 언제 읽으랴 싶어 책을 들었지만, 영 페이지가 안넘어간다는..

자목련 2019-10-21 16:5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또 잠자고 있었겠지 싶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