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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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은 이동으로 채워진다. 존재하는 순간 움직이기 시작하여 끊임없이 이동한다. 공간을 이동하고 새로운 시간과 마주하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삶은 그렇게 확장된다. 지나온 삶을 궤적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떠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곳이 아닌 그곳, 그리고 경계에서 두 곳을 바라보는 일은 아닐까. 곳곳에서 경험하고 마주하는 삶의 조각들이 바로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에 담겨있다.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라는 목적이 여행의 시작이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일들은 누군가의 보통의 일상이다. 공항의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는 일, 호텔에서 퇴실하면서 키를 반납하지 않는 일, 동행했던 이와 잠시 이별하는 일, 처음 본 이를 만나 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 안내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의 공간을 둘러보는 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단면을 하나하나 만나는 일이었다.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여정을 함께 하는 일은 그들을 만나는 일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공유한다. 단순히 ‘나’의 여행기라 여기면 안 된다. 소설을 통해 만나는 방대한 세상은 수많은 에피소드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공항, 유적지, 호텔, 유람선, 섬, 도시, 저마다 공간이 간직한 시간의 힘이 전해진다. 떠나지 않았다면 발견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 그러니 방랑의 순환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 귀퉁이에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이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280쪽)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세상이라는 유기체를 볼 수 있다는 기쁨, 방랑의 특권일 것이다.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이동했을 때 볼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꿈꾼다. 그곳에 도착해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글쓰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자동차, 비행기, 배, 이동하는 수단에 따라 풍경은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시선의 주체가 멈춰있다면 그저 풍경은 단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진짜 풍경을 원한다면 떠나야 한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391쪽)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392쪽) 이동을 위한 멈춤만이 의미가 있을 뿐. 삶이 이동하지 않고 멈춘다는 건 인간의 심장이 멈춘다는 것과 같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추구하는 ‘방랑’(여행)이란 움직임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는 타인의 삶인지도 모른다. 이동해야만 볼 수 있는 풍경과 이야기들 말이다. 그건 물리적인 이동에 한정된 게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저 깊은 곳의 욕망을 꺼내 마주하고 움직임의 마지막인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간의 몸과 장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또 하나 방랑의 세계를 구축한다. 심장이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 가장 확실한 움직임이며 여행이라는 놀라운 사실. 그러므로 방랑자에겐 자유로운 사고의 전환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때문에 이 책 자체가 소설이라는 경계를 넘어 활발하게 이동하는 ‘방랑자’인 셈이다.

 

움직이는 건 사유하는 일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읽는 일도 그러하다. 『방랑자들』을 읽기 전 내가 몰랐던 세상(지식, 정보, 기록)과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한 곳에 고여있어 멈췄던 마음이 이동하는 순간이다. 능동적으로 나를 이끄는 힘, 그게 바로 이 책의 가치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유연한 사고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니 얼마나 굉장한가. 이제 진짜 방랑자가 될 시간이 임박해왔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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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물어보기 위해 계속 짐작했다

의자에 앉으면 밀려오는 졸음에 대해

반대편에서 이어지는 평화에 대해

 

주택가를 무심히 지나는 고양이의 눈빛처럼

의심을 둔 채 확실해지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문 앞에서는 매일 가능성과 마주쳤다

걱정을 알면서 우연을 내밀고

우산을 준비하면서 모자를 준비하고

 

무언가 일어날 거라는 생각으로 안도했지만

바람의 끝을 구름이라 부르거나

모래에서 기록을 찾는 식으로

비슷하게 시작해 조금 다른 이유로 끝나는 건

단지 비슷한 일로 남겨두었다

거짓말을 구해 아무데에나 숨길 수 있었고

고개 숙이는 혹은 고개 돌리는 내게

짐작하는 동안 내게 말했다

 

나에 대한 확신은 반복되는가 경험적인가

그리고 무력해지는 잠으로 돌아와 차츰 잊어버렸다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쌓인 곳에서

다시 물어보기 위해 계속 짐작할 뿐이었다 (「짐작하는 날들」, 전문)

 

 

겨울에 관한 시를 읽고 싶어 시집을 둘러보다 결국엔 이런 시를 읽는다. 뭔가 주저하는 날들, 뭔가 마음에만 키우는 나의 말들이 짐작하는 말들이었구나 싶다. 짐작하는 건 헤아리는 게 아닌데 짐작하는 건 혼자 단정하는 일인데, 그런 생각이 든다. 지난주에 서울 병원에 다녀오면서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짐작했다. 그 짐작이 맞을지 틀릴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문장처럼 다시 물어보기 위해 계속 짐작하는 건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물어보지 않고 확인하지 않고 혼자서 짐작하는 건 나쁜 마음을 키울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선명하고 정확한 게 좋다. 짐작하는 마음에 부정이 아닌 긍정의 힘을 실어주는 시라 생각한다. 짐작하는 건 준비하고 연습하는 일이고 짐작하는 건 기대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짐작하는 날들의 끝에는 어떤 날들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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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는 모과가 있다. 노란 모과가 아닌 연두색에 가까운 모과가 있다. 단단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단단하진 않았을 텐데. 여리고 여렸을 어린 모과는 언제부터 단단해졌을까. 생긴 모양이 그리 예쁘지는 않다. 상처도 제법 많다. 제대로 잘 익었다고 볼 수도 없다. 만질 때마다 모과 양이 내게로 닿는다. 코를 가까이 대봐도 그렇다. 모과라는 말이 예뻐서 자꾸만 모과, 모과라고 이름을 불러본다. 모과의 계절을 생각한다. 뜨거운 모과 차를 마시는 계절. 모과를 곁에 두었지만 차를 끓어셔 마실 수는 없다. 모과를 자르기도 힘들고 나는 그런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좋아하는 동생이 보내준 생강차를 마시고 있다. 하루에 한 잔씩. 저녁 식사 후 생강차를 마신다. 물을 끓이고 컵에 생강차를 몇 스푼 담는다. 물을 부으면 알갱이들이 스르르 녹는다.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무언가가 나를 안온하게 감싸주는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뜨거움이 전해진다고 할까. 두 손 가득 컵을 쥐고 천천히 생강차를 마신다. 한 모금 마실 때에는 잘 몰랐던 맛이 점점 더 깊어짐을 느낀다. 생강차를 마시는 나이를 생각한다. 생강차를 마시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생강차를 매일 마시는 나를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이곳에도 눈이 내렸다. 아침에도 일어나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진짜 겨울이 시작된 것 같았다. 이미 겨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부인하고 싶은 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말할 수 있는 단어, 겨울과 눈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눈처럼 가만히 내려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소설을 읽고 싶다. 현대문학상 수상 소식이 반가운 백수린의 짧은 소설들이 모인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가 그런 소설일 것만 같다. 김사과의 독특한 제목의 소설 『0 영 ZERO 零』, 편혜영의 수상작도 궁금하지만 김혜진과 이주란의 단편이 더 궁금한 『호텔 창문』도 이런 날씨에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황인찬의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까지.

 

 

 

 

 

 

 

 

 

 

모과 향이 방 안을 전부 채울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채운다. 모과가 익는 밤은 아니지만 모과가 있는 밤으로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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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1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9-11-2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커피 중독이라 자목련님의 생강차 이야기가 오히려 더 와닿아요. 그리고 저 책들 저도 읽어보고 싶은 것들과 겹쳐서 리뷰가 기다려지네요...

자목련 2019-11-21 08:48   좋아요 0 | URL
커피는 여전히 사랑하지만 계절마다 다른 차를 마시고 있는 저를 발견해요. 김사과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막힘없는 문장이 매력적이에요. 이 아침 뜨거운 커피가 전하는 온기로 하루를 여시길 바라요.
 

 

아름다움과 슬픔은 동격이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나는 이런 문장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집에 나오는 단편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슬프기 때문이다. 아름다운데 왜 슬프냐고 묻는다면 당신도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알 거라 답하겠다. 미래의 삶을 상상한 SF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은 김초엽의 소설로 인해 전부 사라졌다. 한때 내게 과학 장르 소설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다고 할까.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김초엽이 안내하는 소설은 분명 현재가 아닌 가깝거나 먼 미래가 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이 존재한다. 그곳을 탐험하고 거주한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기존에 영화나 소설로 만난 이야기와 다른 건 없다. 하지만 뭔가 특별하다. 불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열여덟 살이 되면 이동선을 타고 순례의 길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한 데이지가 지구에 대해 들려주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속 지구는 현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게 완벽하게 태어난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분류된 사람들, 과학자 릴리의 인공 배아 디자인이 성공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구 밖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불행하지 않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 유전자로 태어난 사람들.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 그런데 왜 순례자 가운데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생겨났을까?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중략)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레자들은 알게 되겠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52~53쪽)

 

데이지가 상상하는 장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과 너무도 똑같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과 슬픔, 그것을 같이 나누는 연대의 모습. 과학의 발전이 불러올 인류가 소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완벽과 완전만 추구하는 세상에도 존재할 불완전한 삶을 향한 김초엽의 다정한 시선을 감지할 수 있어 좋다.

 

우주여행자를 위한 정거장을 관리하는 남자와 100년 동안 정거장을 점유하고 있는 안나가 나누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표제작「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가 가능한 시대에 과학자인 안나는 지구에 남았고 남편과 아들은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떠났다. 안나도 연구를 끝내고 가족이 있는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구와 행성 간의 새로운 이동 수단인 웜홀 통로가 발견되면서 이전의 워프 방법을 이용해 운항하는 우주선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안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족이 존재했던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향하는 일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81쪽)

 

사회와 국가를 위한 성공, 그들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생각한다.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우주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이다. 문득,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으로 사라지는 수많은 어제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안나 할머니가 느꼈을 그리움과 절망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이처럼 김초엽은 과학적인 이론과 소재를 끌어와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 그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 주목한다. 비혼모의 48세 동양인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는 과정을 다룬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도」과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관내 분실」에서도 겹쳐진다. 죽음을 애도하는 미래의 방식으로 죽은 사람들의 정보를 데이터로 만든 ‘마인드’를 관리하는 도서관이 등장한다. 새로운 형태의 추모공원 같다고 할까. 마인드와 접속하여 죽은 자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소설에서 지민은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엄마를 인식하는 마인드가 분실된 것이다. 소설은 임신한 지민이 죽은 엄마(은하)의 마인드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여성이 사회와 어떻게 단절되고 고립되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딸에게 집착하는 은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지민이 임신을 통해 막연하게 느끼는 어떤 두려움.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여성이 경험하고 견디는 현실이다.

 

“마인드들은 우리가 생전에 맺었던 관계들, 우리가 공유했던 것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뇌에 남기는 흔적들과 세상에 남기는 흔적들을 자신들의 방식들로 기억한다는 것이죠. 마인드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영원히 미해결로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마인드를 통해 그들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관내 분실」, 257쪽)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해한다는 것이 감정을 읽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낯선 행성에 도착해 외계 지성 생명체를 만나 그들과 지낸「스펙트럼」속 희진은 가능했을 것이다. ‘루이’로 불린 그들이 색채를 의미로 읽는다는 설정은 신선했다.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을 구매한다는「감정의 물질」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상대가 이해하기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생각하게 한다. 가장 가까운 이의 감정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인간과 「스펙트럼」속 ‘희진’과 ‘루이’를 비교하게 된다. 인간이 유년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의 공생으로 풀어낸 「공생 가설」을 통해서도 내밀한 관계를 말하는 듯하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미래,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급급한 나는 우주를 살아가는 미래를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나 김초엽의 소설을 통해 만난 미래라면 조금 달라진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공생을 꿈꾸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미래, 나도 그 미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김초엽의 다른 소설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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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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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라인더가 품고 간직한 시간 말이다. 아마도 그라인더의 시간을 알아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54쪽)

이야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야기, 누군가가 거기 살고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이야기.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로 시작하는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태고를 시작으로 그 주변에 대한 묘사를 통해 나는 그 작은 마을, 작은 우주를 상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태고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확장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누군가 등장한다면 달라진다. 나도 그러했다.

남편이 전쟁터로 끌려간 후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노베파의 시간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혼자서 남편을 기다리면서 겪는 두려운 일상과 감정의 혼란들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낳고 젊은 남자에게 동요하는 그 마음에 온전히 닿을 수 없었지만 앞으로 게노베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건 크워스카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오롯이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크워스카에게 냉담한 시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세상에 당당하게 맞섰다. 살아남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게노베파와 크워스카의 시간은 이제 그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딸 미시아, 루타에게로 이어진다. 미시아의 아픈 동생 이지도르까지 말이다. 그래서 게노베파와 남편 미하우와 딸 미시아, 아들 이지도르를 중심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읽다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 게노베파 가족을 인간의 대표로 삼고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잠깐 주변을 둘러본다. 아파트 화단을 지키는 나무, 새끼와 함께 나를 경계하면서도 다가오는 길 고양이, 액자 속 그림도 나를 지켜보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상상, 어쩌면 그 시작이 태고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보리수의 시간, 버섯 균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죽은 자의 시간, 신의 시간이 있듯이 말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악이 살아간다. 소설 속 나쁜 인간이 악을 말하듯, 우리의 사회도 그럴 것이다. 나의 시간에 속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전쟁에서 돌아온 미하우가 딸 미시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시간 속에서 미시아를 영영 멈추게 만드는 것.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 (83쪽) 이렇게 지극한 사랑이 있을까. 그런 사랑만이 존재하는 시간은 영원하겠지만 미시아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한곳에 머물다 고여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흘렀고 미시아는 성장한다.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탄생이 순환하면서 이어지는 일들이 결국 생이라는 것일까. 미하우가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사랑한 딸 미시아는 학교도 그만두고 사랑하는 파베우와 결혼을 하고 딸 아델카를 낳는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지도르의 시간은 어떤가. 오직 자신을 이해하는 루타와 함께 태고를 탐험하며 보낸다.

 

그런가 하면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에서는 게임이 중요했다.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게임을 통해 신이 인간을 만들고 세상을 지은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시간을 읽다 보면 신은 어디에 존재하며 왜 인간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묻고 싶어진다.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나고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보면서 신은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신은 모든 과정이 안에 있다. 신은 모든 변형 속에서 박동한다.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조그만 있고, 때로는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신은 그가 거기에 없는 순간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150쪽)

제법 고요하고 평화로운 태고에 외부인의 등장은 공포와 혼돈을 몰고 온다. 군인에게 점령당한 태고, 그들을 주시하면서도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 소설이 흥미로운 건 태고라는 지명은 허구에 불과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과거 폴란드의 역사과 닮았다는 것이다. 폴란드를 둘러싼 강대국의 외압, 유대인의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게노베파, 크워스카, 미시아, 루타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삶과 장애를 가진 이지도르의 이야기 말이다. 어디에도 존재하면서도 존재조차 부정당했을 누군가의 시간을 작가는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엔 모두 사라지는 존재라는 삶의 소멸과 그걸 인정하면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쓸쓸함을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보여준다. 승승장구하듯 돈을 벌고 정부의 고위직과 친분을 맺고 살아가는 파베우가 느끼는 감정은 소설 안에서 소설 밖으로 이동하여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졌다. 그토록 사랑한 미시아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제법 괜찮은 가장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오는 지난 시간들.

 

깨달았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간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파베우는 자신이 길가의 한옆에 내던져진 돌멩이나 버려진 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이 거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채 스스로 매초 무(無)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생생히 감지했다. (249쪽)

저만치 목표를 향해 나가느라 돌보지 못한 것들과 지나친 풍경들이 그래서 더우 애달프고 애처롭다. 어디 파베우가 느낀 슬픔뿐일까. 사랑했던 루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결국엔 태고를 떠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는 이지도르의 시간은 어떤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온 시간, 우표를 모집하면 느꼈던 희열, 결국 비루한 육체로 인한 고통으로 병원으로 요원으로 이동하며 생을 마감한 그의 시간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지 알지도 못한 채 주어진 생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 어느 누구도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고 살지 않았음에도 남겨진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해지고 만다. 1914년을 시작으로 80여 년 동안의 그들의 시간은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과 얼마나 비슷할까. 똑같이 포개어질 수는 없겠지만 다르게 비껴가지도 않을 터.

하나의 우주였고 다른 우주의 중심이었던 태고를 만나는 시간은 감동이었다. 84편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독특하고도 특별한 소설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점점 더 마음을 붙잡고 흔든다. 끝내는 단 하나의 조각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몰라 헤매던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숭고한 생의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생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위대한 것인지 가슴에 각인시킨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생의 시간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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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5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5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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