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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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좀 더 크고 넓은 도시 같은 곳. 한때 그런 곳에서 살았고 지금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산다는 건 매한가지니까.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남고 그게 삶의 이치라는 걸 알지만 떠나고 남는 마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고 남고 싶어서 남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실, 내 마음 하나도 벅차니 당연한 일이다. 어떤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가능할까. 문진영의 『딩』 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딩』은 아버지가 죽고 집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 K로 돌아오는 지원을 시작으로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이다. 작은 어촌 마을인 K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스치고 지나가며 연결된 사람들, 특별할 것 없는 다섯 명의 사연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가만히 쌓이고 스며든다. 지원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을 하면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를 위한 목적으로 내려왔다.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연락처를 받은 주미에게 연락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주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모텔(지금은 호텔로 이름을 바꾼)에서 일을 하면서 언젠가 고향을 떠나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에 남았다. 첫사랑과 결혼을 기대했던 연인도 지원을 떠났다. 지원도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K는 서핑으로 유명해져 주미의 호텔을 찾는 이도 많다. 똑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장례식에서 만난 지원이 연락을 하고 둘은 만난다.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둘은 소주를 마시며 지원의 사정과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함께 지원의 집에 와서 잠까지 잔다. 지원을 위해 북엇국을 끓이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호텔로 향한다.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주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72쪽)






지원이 떠난 사람이면 주미는 남은 사람이었다. 마치 돌아온 이를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지원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주미가 있기에 지원은 언제들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남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주미의 호텔에 묵은 재인이 그러하다. 재인은 호텔에서 죽은 연인 P가 묵었던 방에서 지낸다. 재인과 P는 하와이에서 만났다. 재인은 어학원 강사였고 P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다. 둘은 곧 연인이 되었고 P는 서핑을 즐겼다. 그랬던 P가 K의 호텔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재인은 지금 그곳에 있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영식의 포장마차에 들른다.


영식의 포장마차는 지원, 주미, 재인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한때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영식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었다.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어린 주미 덕분에 살았고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 쑤언이 포장마차 일을 돕는다. 술과 안주만 파는 게 아니라 식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밥을 팔았다. 혼자 포장마차를 찾는 재인이 그런 손님이었다. 쑤언은 배를 타는 일을 했지만 일이 없을 때 영식을 도왔다. 함께 일했던 마수드가 죽고 쑤언은 남았다. 베트남을 떠난 쑤언이 돌아갈 곳은 베트남이었다. 한국의 겨울과 눈을 딸 누에게 들려주지만 눈이 없는 그곳이 돌아갈 곳이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게 삶이라면 어떤 이별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삶은 돌아오지 못하고 어떤 삶은 떠나지 못한다. 어딘가 부유하다 머물기도 하고 어딘가 부유하다 상처가 나기도 한다. 돌아갈 그곳이 있어 이곳을 버틸 수 있는 삶, 떠날 그곳을 기대하기에 이곳을 견딜 수 있는 삶,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안아주는 남겨진 삶. 『딩』의 지원,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삶이었다. 떠날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단속하는 게 아니라 머무는 동안 마음을 기대고 나눠줄 수 있는 삶. 쑤언이 등대 계단참에 둔 귤 하나가 지원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P가 재인에게 알려준 국물 맛을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드에 뭔가가 부딪혀 상처가 나면 부른다는 ‘Ding’을 가만히 따라 읽는다. 상처가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산다는 건 상처를 받는 일 투성이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테니까. 그런 상처가 무섭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P가 재인에게 한 말처럼 당연한 거니까. 상처가 남긴 흉터는 때로 성장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앞으로 나갈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 ……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86쪽)


문진영의 『딩』은 삶이라는 파도에 뛰어드는 모두를 응원한다. 큰 소리로 모두가 외치는 함성은 아니다. 가만가만 지켜보며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괜찮냐고 말해주는 그런 목소리다. 슬그머니 귤 하나를 쥐여주고 뜨근한 어묵 국물을 한 컵 담아주는 그런 마음. 작지만 사라지지 않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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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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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발신자는 계속 같은 질문을 하면서 확인을 하고 수신자는 한 번의 답으로 통화를 끝내고 싶기에 둘은 서로 완벽한 불통을 이룬다. 그럼에도 다시 또 전화가 오면 받을 수밖에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바로 전에 전화를 건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한 몸처럼 사용하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20여 년 전에 발표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개가 수록된 『잘못 걸려온 전화』 속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아주 짧은 이야기는 인물의 성격이나 시대적 배경 같은 설명은 찾을 수 없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예고 없이 도착한 우편물 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절대 이상하지도 않고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아 놀라울 뿐이다.


어떤 내용일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제목의 「도끼」를 시작으로 표제작인 「잘못 걸려온 전화」, 마지막 「나의 아버지」는 하나같이 불친절하면서도 익숙하다. 화자의 정확한 나이나 성별도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닮았고 심지어 어떤 글은 나를 닮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때로 고독하고, 외롭고, 분노하고 증오한다.


「도끼」속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는 전화를 걸어 의사를 부른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건 아내다. 하지만 아내의 주장대로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이 안식처를 찾아 떠도는 것 같은 「나의 집에서」나 소모품처럼 공장에서 일을 하다 결국 암에 걸린 「어느 노동자의 죽음」은 고단하고 지친 삶의 끝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지친 상태일 것이다. 어떤 침대든 간에 아무튼 침대 위에서 잠이 들 것이다. 구름이 떠나가듯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에서. 그런 식으로 세월은 흘러갈 것이다. ( 「나의 집에서」, 23쪽)






삶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선뜻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어떤 문제는 자신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어 원하지 않는 협상을 해야만 한다.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의 소음과 교통 체증을 뒤로하고 이사를 온 시골은 천국이었지만 곧 고속도로가 생기고 이전이 도시에는 화단과 쉴 수 있는 벤치와 어린이 놀이터까지 만들어진 「집」처럼 말이다. 도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는 삶. 아,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이렇게 따지는 나에게 이런 문장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답한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너를 두렵게 하고 너를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건 인생이라는 것,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 「영원히 돌아가는 회전열차」, 112쪽)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모든 게 시시해질 때가 있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애면글면 살 필요가 무언가 싶은 마음. 가족과 같이 지내도 그들의 생각을 모르고 가족을 모른 채 살면서 그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정작 소식을 받자 멀리 떠나려는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마음. 그래서 어떤 문장은 더 깊게 와닿고 어떤 문장은 절로 감탄하게 된다. 어쩌면 25개의 짧은 이야기는 세상은 그런 거라고. 산다는 거 별거 아니라고 살아보니 그렇다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고백 같기도 하다. 세상은 부조리한 것투성이고 삶은 한순간이라고.


없어진 것은 단지 당신 일생 중 하루뿐임을. (「도둑」, 115쪽)


밖에는 인생이 있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 「나는 생각한다」, 140~141쪽)


손에 잡은 동시에 끝까지 술술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후련한 산뜻함으로 마무리할 수 없다. 잘못 걸려온 전화처럼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개운치 않음이 아니라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그런 마음이다. 잘못 건 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전화를 걸 수밖에 없는 누군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거절하지 못하는 누군가, 그들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서다. 그들 중 하나는 나일 것만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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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06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모르는 번호는 안받는데 ㅋㅋ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은 재미있는거 같아요. 특히 예측할수 없는 이야기 ~!
전 아직 이 책을 안가지고 있는데 단편집인가 보군요 ~ 얼른 구매해야겠습니다 ~!!

자목련 2024-03-06 14:41   좋아요 2 | URL
저도 대부분은 안 받는데, 몇 차례 이어지는 번호는 이상하게 받고 나서 후회합니다. ㅎㅎ
새파랑 님 즐겁게 읽으세요^^
 

초미세먼지로 뿌연 날이다. 아파트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기회가 되면 이 공사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급하면 급한 공사라서 그런지 휴일에도 소음이 가득하다. 아무튼 공사는 진행 중이고 날씨는 조금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 내일은 비가 온단다. 비가 오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뿌연 기분을 걷어낼 책, 책 이야기는 언제나 즐겁다. 2월의 책에 이어 3월에는 이 책으로 충분하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가 구매한 책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 2월에 구매한 책이다. 이제 3월의 시작이니 3월에 사고 4월로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어떤 책인지 책 이야기를 하자.







출판사 <시간의흐름>에서 나온 책을 종종 산다. 어떤 작가의 산문이 나오나 살피고는 있지만 구매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제니의 산문집이라서, 그의 산문을 읽은 기억이 없어서. 나만 안 읽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새벽과 음악』이란 멋진 제목의 책을 샀다. 문진영의 장편은 최근 단편집을 읽고 다른 소설도 더 읽고 싶어서 검색하다 『딩』을 구매했다. 이미 읽었다. 좋았다. 많이 좋았다.


어쩌다 보니 자꾸 세계문학을 산다. 아, 어쩌자고 사는 것인가. 이러다 책장에 세계문학, 고전문학만 남을 것 같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산문 『이게 다예요』를 읽었지만(무척 얇은 책이라 읽었다고 하기엔) 그의 소설은 읽은 적이 없다. 영화 <연인>의 원작과 고민하다가 믿고 보는 분의 리뷰와 댓글로 이 소설이 더 좋다는 걸 보고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얇기도 하고 제목에 끌리고 평도 좋아서 샀다. 사실, 중고를 사고 싶었지만 중고는 찾지 못했다.


3월에 읽게 되기를 바란다. 2월보다는 이틀이나 많고 휴일도 이제 없으니까. 꽉 찬 날들에 알뜰살뜰 챙겨서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려면 속도를 내야 하는데, 느릿느릿 거북이의 날들이다. 주변에 경주를 할 토끼가 있다면 좀 나을까 싶다가 토끼가 어마어마하게 많구나 싶다. 온라인의 책 모임, 책 리뷰만 생각해도 그렇다. 그럼 나는 그냥 내 속도대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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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3-0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을 잡아라˝ 제가 좋아하는 책^^ ˝새벽과 음악˝은 정말 제목이 멋지네요.
자기 속도대로 읽는게 제일 좋죠 저도 느림보;; 봄이 성큼 다가온 3월! 자목련님 속도대로 여유롭게 독서하는 3월 되시길요😄

자목련 2024-03-05 15:58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봄에는 꽃도 봐야 하는데...
망고 님, 마당의 싹들은 많이 자랐나요?

은오 2024-03-0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어쩌자고죠?! 사놔도 한국문학 위주로 먼저 읽으셔서 남는 건가요...?! ㅋㅋㅋㅋ
자목련님은 3월에도 알찬 독서생활 하실 게 이미 보입니다~!!

자목련 2024-03-05 15: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한국소설과 에세이 먼저 읽어서...
은오 님은 학교에 계실까요?
 

만약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몇몇 쓸데없는 사건들, 그러니까 자동차 사고들이나 병원 신세를 진 일들이나, 사랑 때문에 가슴 앓이를 했던 일들은 피하면서 말입니다. 하나 저는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제 대외적인 이미지나 전설, 그 안에 거짓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바보 같은 짓들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며, 과속을 좋아합니다. 물론 제게는 그것 말고도 위스키나 자동차들만큼이나 수많은 취향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음악이나 문학처럼 말이죠. (372쪽)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터뷰집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를 읽기 전 그동안 내가 읽은 그녀의 글을 검색해 보았다.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었다. 첫 소설이자 대표작인 『슬픔이여 안녕』은 읽지 않았다. 그 소설의 내용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열아홉의 나이에 소설을 썼다는 정도만 알뿐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생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가 궁금했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과 기대를 생각하면 진도가 팍팍 나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는 않았다.


1954년부터 1992년 사이에 가졌던 인터뷰의 내용은 질문이 비슷한 것도 많았고(아, 당연한 것인가) 그러니 중복된 느낌의 답도 많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내 느낌으로 사강은 솔직하고 유머를 좋아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강의 소설과 에세이만 읽었던 나는 그가 희곡도 쓰고 영화도 만들고 드라마도 썼다는 건 몰랐다. 그는 희곡과 소설에 대해 소설은 작가 자신이 더 많이 개입되기에 어렵고 희곡은 바깥을 향하는 장르라서 훨씬 쓰기 쉽다고 설명한다. 연극은 재미를 주고 소설은 열정을 준다고 말한다. 기회가 되면 그의 희곡을 읽어보고 싶다.






독자는 착각한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작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 속 인물이 작가의 일부라고 여기는 거다. 아마도 많은 독자가 사강의 소설에서, 연애와 사랑에서 그것이 사강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결론지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사랑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확장된 것 같다. 친구를 좋아하고 함께 지내고 그들을 도와주는 사강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인다.


사강의 말대로 그는 운이 좋았다. 물론 소설에 대한 비평가의 혹독한 비평이나 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비하는 있었지만 사강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고 돈에 대한 부분에서도 풍족함을 누렸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좋아하고 스피드를 즐긴 모습과 다르게 그녀는 차분한 분위기를 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독자가 안다고 느끼는 사강은 진짜 사강은 아닌 것이다.







저는 차분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 제게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제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도함 속에 빠져드는 일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피로함의 극단에서만 쉴 수 있고, 불안함의 극단에서만 안정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심연에서만 새로운 책을 쓰기 시작할 수 있지요. (171쪽)


이 인터뷰집에서 가장 중점적인 분야인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하게 느껴진다. 글쓰기의 어려움이 분명 있을진대, 그것에 대한 구질구질한 변명 같은 것 찾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명확하게 말한다. 좋아서 쓴다는 것, 얼마나 당당한가. 글에 대한 사강의 생각과 정의는 정말 아름답고 멋지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글 쓰는 게 좋아서입니다. 그것은 악덕인 동시에 미덕이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쾌락으로 바뀌는 미덕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내밀한 일입니다. (250쪽)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창조해 내기… 우리들의 모든 약점들, 지성과 기억력의 약점들, 마음과 취향과 본능의 약점들, 그것들이 마치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한 군데로 모으기… 그렇게 모은 무기들을 돌격해 오는 ‘무’를 향해 우리 자신의 상상력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백지의 힘의 돌격을 향해 집어던지기. (285쪽)


사강이 좋아하는 프루스트와 생일이 같았던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사르트르와 보낸 시간, 그들은 서로의 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바보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실명이 된 사르트르와 식사를 하는 부분에서 사강은 그의 어머니가 된 느낌이었다고 전한다.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유머가 많은 사르트르와의 관계, 사강은 그것을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앞으로 사강의 소설을 읽을 때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다는 사강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 사강,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당돌할 정도로 직진한 사강, 산책을 학 사람을 보고 멍하게 있기도 하는 사강, 그리고 항상 담배 연기와 함께 한 사강을. 그러면서 소설 속 이런 문장이 사강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짐작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휘바람을 불며 하루를 시작할 것 같은 사강,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서 말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결코 심연을 좋아하는 그런 취향을 가지지 않을 거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늘 아침에 짧은 사냥 노래를 휘파람을 불면서 잠에서 깨어날 거야. (『잃어버린 옆모습』, 94쪽)






아직 읽지 못한 사강의 소설이 더 궁금해진다. 지난 삶에 대해 후회는커녕 단호하게 기꺼이 자신의 삶을 껴안고 살아가는 당당하고 멋진 사강이 들려줄 사랑과 삶의 이야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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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3-0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문 참 좋네요!
그런데 피로의 극단에서만 쉴 수 있고 불안의 극단에서만 안정을 취하다니.. 게다가 절망의 심연에서만 새 책을?? 책이 꽤 많던데..

자목련 2024-03-04 15:00   좋아요 1 | URL
사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신만의 가치나 신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쓰는 일은 사강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책읽는나무 2024-03-0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
막 좋진 않아도 왠지 끌리는 작가로 다가옵니다. 인터뷰집은 작가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겠군요?^^

자목련 2024-03-04 15:01   좋아요 1 | URL
맞아요, 꽂히는 작가는 아닌데 또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는. 인터뷰집은 그녀의 소설을 더 읽고 싶게 만들고요,

coolcat329 2024-03-0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여자들은 참으로 당당하고 솔직하고 자신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저돌적이고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모습이 저는 좀 부담스러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작가지만 그 자신의 캐릭터만으로도 문학계의 스타가 되기 충분한 사람인 건 확실하네요.

자목련 2024-03-04 15:03   좋아요 1 | URL
저돌적이고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딱 사강에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걸 보면 스타는 스타였구나 싶어요.
 
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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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떤 이는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로, 어떤 이는 그리운 이가 존재하던 시절로, 어떤 이는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가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은 돌아갈 수 없기에, 닿을 수 없기에 그립고 애틋하다. 어쩌면 시인 박노해에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어린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눈물꽃 소년』은 시인 박노해가 아닌 어린 소년 박기평의 이야기로 순하고 맑고 시린 글이라서 울컥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어린 날의 이야기를 읽노 라면 어느새 내 어린 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진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을 키워준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박노해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그림과 함께 짤막한 33편의 글은 우리를 모두 그 시절의 소년, 소녀로 이끈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12쪽)


할머니의 심부름을 받은 어린 소년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 길을 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 가냐고 묻고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처음 가는 길이라 겁먹고 두려운 길을 물어물어 간다. 물어보면 된다고, 답하는 이의 말을 잘 들으면 된다고. 진한 사투리 가득한 그 시절을 나는 잠시 상상한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소년 기평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내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무서웠고 엄격했다. 기평의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손주를 위하는 분이 아니었다.


귀여운 기평의 일상을 쫓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그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자랐는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아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기평의 주변에는 사랑이 많은 어른이 많은 듯하다. 할머니, 부모님, 동네 어른들, 공소 신부님, 학교 선생님, 친구들까지. 꼬마 기평이 소년 기평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한 편의 동화처럼 예쁘지만 마냥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아버지와 단 한 번의 기차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남겨두고 공장에 다녀야 했던 어머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흰 고무신이 소년을 기다렸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그 슬픔을 묵묵히 쌓아두었을 소년. 수업 시간엔 선생님께, 훈장 선생님께, 성당에서는 신부님께, 알 때까지 질문을 하던 소년. 선생님의 질타와 매에 부당함을 말하는 소년, 그 소년이 노동운동가, 저항 시인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형이 가져다준 시집을 읽고 시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흐뭇해지고 소년이 쓴 시를 읽으면 감동이 밀려온다.


폼을 잡고 시를 쓰다가, 홀로 웃고 울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던 그때.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고 그렇게 내가 시에게로 갔다. (159쪽)


고운 꽃이 피었다

높은 벼랑 끝자리에

나는 너무 작아서

까치발로 서 봐도

닿을 수가 없어

꽃들아 꽃들아

내 키가 자라기 전에

떨어지지 말아라 (191~192쪽)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들과 산이 놀이의 전부였던 굴곡진 현대사를 체험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첫사랑 소녀와의 이별은 아프고 외갓집에서 본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저금통에서 몰래 동전을 꺼내 자전거를 빌려타던 모습은 깜찍하다. 그 시대에 자전거 대여라니, 생각도 못 했던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졸업식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느라 농사일을 하며 매번 꼴찌를 하는 친구에게 외상으로 국밥을 사주는 호기로운 소년. 중학교에 올라가 신문배달로 외상을 갚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칭찬을 하고 꼭 안아주고 싶다.


“사람의 이름은 말이다. 저마다 깨끗한 비원이 담긴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서 그 뜻을 알려주는 것이제. 네 이름대로 네 길을 걸어가면 이미 유명한 사람 아니냐. 다른 사람 이름 가리지 말고, 제 이름 더럽히지 말고, 자기 이름대로 살면 그게 유명한 사람 아니냐. 알겄느냐. 평아, 이 유명한 놈아!” (220쪽)


꿈에 대해 어떤 사람이 될까 고민하는 기평에게 훈장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내 이름으로 반듯하게 성실하게 살라는 당부. 박노해가 들려주는 어린 소년 기평의 이야기는 결국 소년, 소녀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모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빠르게 변하고 쉽게 잊고 쉬운 것, 새로운 것만 쫓는 우리에게 말이다.


어린 나를 품어 기른 이들은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시대를 견뎌냈다. 그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 그들이 내 안에서 말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걸 품은 위대한 역사적 존재다. 아무리 오늘이 힘들어도, 다시 고난이 닥쳐와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말」, 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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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2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이름대로 살면 유명한 거라는 말씀!! 좋네요. 기억해 둬야겠어요^^

자목련 2024-02-28 15:04   좋아요 0 | URL
그죠? 그런 의미로 독서괭 님의 이름을 불러드립니다.
독서괭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