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제16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신동옥 외 지음 / 새봄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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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며 시를 읽는다. 무엇을 위한 시인지도 모른 채 시인이 무엇을 갈구하는지도 모른 채 읽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왜 시를 읽는 것일까. 인간에게 시란 어떤 의미인가. 문학이 길을 잃고 독자에게 외면 받은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시를 찾는 건 구원 아닌 구원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작(露雀) 홍사용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노작문학상의 2016년 수상작 신동옥의 시는 유려한 언어의 사유가 아니다. 삶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인간의 고통과 시인 스스로의 성찰을 담았다. 하여 낯선 언어지만 익숙한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저수지를 보면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살풍경한 저수지를 떠올린다. 그러다 점차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인간과 마주하는 것이다.
    

 죽은 것 산 것 몽땅 다 저 속에 있다 / 온몸에 뼈란 뼈는 / 죄 부셔져 / 불로 돌아가고 바람에 흩어져라 / 눈보라 치듯 휘돌다가 / 피리 소리를 내며 빨려든다 / 소용돌이친다저수지부분
 
 물은 생명을 키우는 젖줄이다. 한때는 풍요로운 단물이 가득했지만 어느 순간 수몰되거나 썩어버리는 것을 인간의 생과 닮았다. 버려진 저수지가 되고 만다. 결국엔 사그라지고 쇠락하는 검은 짐승을 애도하는 시는 순수한 문학의 정수, 시 본연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시적 아름다움에서 매몰되지 않으려는 시인의 자아를 볼 수 있다.
 
 시인의 번뇌와 고뇌를 반영한 퇴고의 첫 부분 아름다운 시를 얻는 밤에는 울음도 없이 흐느끼는 꿈을 꾸었다. 먼 곳에서 문장을 좇아 말을 달려온 이 하나, 인적이 드문 꿈의 빗장을 밀다가는 두드렸다에서는 다른 자아가 등장한다. 한 없이 유려해서 고래가 되는 꿈이 땅을 버리고 / 맨 처음 바다로 나아간 한 마리 고래가 되어서 / 내 남은 숨 모두 들이켜고도 / 차고 넘칠 퀴퀴한 추억에 익사하던 어느 먼 옛날 / 전생의 힘을 빌어서 끝장내지 못한 미련은 / 나도 모를 누구의 꿈결을 텀벙거리고 / 치달리고 달리까?저수지의 검은 짐승과 이어진 듯하다.
 
 신동옥의 시는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 문이 너무 거대해서 손잡이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이런 시를 보자. 우주백반여자는 백반처럼 늙었다로 시작해 여자는 백반처럼 늙었다로 끝난다. 삶이라는 투쟁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전체를 다 읽지 않더라도 그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비루한 삶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로 겹쳐지는 건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세계로의 확장, 그러니까 다른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신동옥의 시를 읽다 보면 이미지가 허상이 아닌 실재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의 아름다운 동상들이 그렇다. 동화 속 마법을 연상시키는 운율은 현실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아 뿌린다. 시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당신의 살인자마저 살해당하는 나라에서는 누구 노래를 끝마쳐야 하나요? / 나의 아름다운 동상들, 우리의 영혼은 짐승의 냄새를 경작하고 있습니다 / 파도가 끝나는 곳에 구름이 구름이 끝나는 곳에 바람이 일 듯 / 소금 호수를 걸어간 파리한 사나이 / 제 피의 농도를 가늠하며 피눈물을 한 방울씩 떨구네요
 
 몇 편의 시를 읽고 신동옥 시의 내부를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외부에서 내부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외 추천우수작인 김근, 김성규, 김중일, 안상학, 오은, 정병근, 하재연, 허연 시인의 작품을 보면 저마다의 리듬이 느껴진다. 자신만의 고유한 방향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발견한다.
 
 절망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 대한 단상을 단호한 시로 노래하는 김중일의 시는 편안하면서도 오랜 여운을 남긴다. 아마도 시를 통해 우리네 슬픔을 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높이로 날아오는 새를 보면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새가 바로 우리이므로.
 
 ‘아주 작은 새가 있었다. / 먼지보다 작은 새였다. / 제 그림자로 세상을 고이 덮으려던 새였다./ 깊고 깊은 높이로 날아오른 새가 있었다. / 날 새도록 새는 날고 날았다 / (중략) 우리는 모르는 새 그 새의 그림자를 걸치고 살았다. / 날았다 우리도 날개사 다 녹도록 날았다. / 새와 함께 새파란 하늘이 되었다. / 결국 그 새는 세상의 가장 높은 봉우리 위에 다다랐다. / 희생자의 무덤 위였다.’
 
 경쾌하면서도 쉽게 다가오는 일상의 풍경을 그린 오은, 시어의 반복으로 재미를 주면서도 자조적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김근, 적막과 고독을 평범한 일기처럼 써 내려간 김성규, 기이하게도 물질에서 인간의 세계를 구축하는 하재연, 가장 보편적인 일상을 친근하게 들려주는 안상학, 되돌릴 수 없는 아픈 생을 가만히 바라보며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내려는 허연의 시는 문득 서러운 삶을 세상에 내 놓고 통곡해도 좋다는 허락 같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그들에게 삶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도구는 시 하나일 것이다. 안과 밖을 오가며 수많은 말을 고르는 삶의 고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무딘 세상에 스스로 날카로운 창이 되기를 바란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시를 쓰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신동옥의 이런 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시를 위한 각오를 응원할 뿐이다. 오랫동안 경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기를 말이다.
 
 ‘속죄하는 마음에서 / 나는 오늘 여기 吉音에서 죽고 / 나는 드러누울 것이다./ 모든 동물이 꼭 제 몸뚱이만 한 무덤을 남기도 가듯이 / 우선 일생 나를 끌고 온 그림자를 / 발바닥에서 떼어 / 여기 吉音에 묻어두고 / 시작하겠다.’ 드러누운 밤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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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2-3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자목련님 지난 한 해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자목련 2017-01-02 07:4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올해 건강하고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서니데이 2016-12-3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곧 시작할 정유년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시간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좋은 연말, 희망 가득한 새해 되시길 바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자목련 2017-01-02 07:43   좋아요 1 | URL
언제나 다정한 서니데이 님, 감사해요.
활기차고 건강한 20167년 시작하세요^^
 
거기 있나요 - 2016 제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형서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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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출간되는 소설을 전부 읽기란 어렵다. 꾸준하게 문예지를 통해 읽는 경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관심 있는 작가의 소설집을 기다리는 경우라면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소설이 반갑다. 그러니까 수상작이 아닌 다른 작가의 소설을 먼저 읽게 되는 경우도 그렇다. 2016 제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거기 있나요』에서 나는 먼저 조해진의 「문주」를 읽었다.

 

 ‘내게 문주의 의미는 문기둥이었다. 대학 시절, 4년 가까이 나와 언어교환을 했던 한국인 유학생이 표준 한국어사전에 나와 있다면 알려준 의미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문기둥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지붕을 떠받쳐주는 뿌리이자 건축물의 무게중심이 되는 문기둥은 내 삶 가장 먼 곳에 있는 유적지 같았다.’ (「문주」, 129쪽)

 

 자신의 이름을 통해 존재와 근원에 대해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까. 문주라는 한국 이름으로 독일에 입양된 나나는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싶다는 서영의 제안으로 한국에 온다. 서영의 집에서 머물며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나나는 철로에서 자신을 구해준 ​기관사를 만날 수도 모른다고,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차분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가 한 편의 흑백 다큐멘터리 같다. 나나로 살면서 문주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을 나는 나나와 문주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긴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문주」, 131쪽)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들려주는 이야기인 천운영의 「반에 반의 반」은 유쾌하면서도 묘한 슬픔을 불러온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고 하나의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도 다르다. 할머니의 고단한 생애는 가족의 역사와 겹쳐지기도 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선물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할머니를 시작으로 돌아가신 가족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소설의 제목처럼 반에 반의 반이라도 알고 있는지 묻게 된다.

 

 ‘그걸 기억해야 한다. 흥이 많은 냥반이었다는 걸. 흥이 나면 떡도 나오고 노래도 나오고, 노래가 나오면 어깨춤이 절로 따라 붙고. 손수건을 할랑할랑.’ (「반에 반의 반」​, 153쪽)

 

 한유주의 「그해 여름 우리는」자살이라는 공통분모로 모였던 20대 청춘의 암울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살하고 싶다는 이유로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네 명의 청춘. 저마다의 일을 한다. 그들은 모두 죽고 싶었지만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에는 눈부신 청춘, 청춘의 특권은 어디에도 없다. 무겁고 잔잔하다. 과거의 일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 인물이 현재의 청춘을 대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청춘의 일부라는 걸 알기에 가슴 한켠이 서늘하다.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까.

 

 ‘그래도 우리가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건 서로에 대한 미량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상대에게서 바닥을 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바닥이나 밑바닥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로서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만나면서도 바닥이나 밑바닥이 드러날까 두려워 서로서로 피상적이지 않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실은 무엇이 피상적이지 않은 질문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210쪽)

 

 ‘그해 여름 우리가 정말로 자살하고 싶었는지 지금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절반의 진심이었다. 다른 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니 그들이 진심으로 자살을 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측컨대 그들 역시 절반쯤 진심으로 자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해 여름 우리는」, 225쪽)

 

 과학 논문처럼 난해하게 다가온 수상작 박형서의「거기 있나요」, 접할 때마다 어렵게 느껴지는 김태용의 소설 「음악 이전의 밤」, 어린 시절 상처를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어른의 이야기를 다소 복잡한 인물 소개와 전개로 시작되는 최은미의「눈으로 만든 사람」, 미술 블로그를 운영자와 출판사 편집자와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관계에 대해 그린 김금희의「새 보러 간다」, 가족의 기대를 받았던 삼촌의 인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묻는 윤성희의 「스위치」는 겨울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스위치 같은 거야. 그렇게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그러니 스위치를 잘 켜고 있어야 해.’ (「스위치」, 123쪽)

 

 스위치를 잘 켜고 있어야 한다는 소설 속 삼촌의 말처럼 우리가 잘 켜고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문단이 흔들리는 요즘, 소설을 좋아하고 읽는 나는 누군가 그 답을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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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멋진 리뷰 입니다~ 제가 알라딘 이면 , 상주고 싶을만큼 !^^ ㅎㅎㅎ

자목련 2016-12-28 15:11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이 주시는 상이라 더 기쁩니다^^

[그장소] 2016-12-28 16:27   좋아요 0 | URL
이히힛~ 말로만 반짝반짝 하는 상을 드려서..죄송하네요! 그치만 넘 좋은걸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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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곁에 두고도 바로 읽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 생각 날 때 읽고 싶을 때 읽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강의 시집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처음 몇 편의 시만 읽고 단편소설에서 만났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에서는 시가 소설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하나의 서사시 같았던 소설이 시집에 있었다. 생경한 느낌보다는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시를 쓰는 한강, 하나의 사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그의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내게 닿는 듯했다.

 

 나는 지금/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이미 꽃잎 진/꽃대궁/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누군가는/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새벽은/푸르고/희끗한 나무들은/속까지 얼진 않았다//고개를 들고 나는/찬 불덩이 같은 해가/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다시/견디기 힘든/달이 뜬다//다시/아문 데가/벌어진다//이렇게 한 계절/더 피 흘려도 좋다  (「새벽에 들은 노래3」전문)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저녁 잎사귀」일부)

 

 매일 찾아오는 새벽과 저녁은 고요와 적막을 선물하고 그 시간은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곳에서 길어올린 언어로 시인은 읊조린다. 누구나 견뎌내야 하는 삶의 고통을 담담히 노래한다. 시인은 어떤 일이 닥쳐와도 지난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것이라 말한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지면’ 얼마나 쓰라리고 아플까.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애도하는 일, 그리고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일이 삶이라는 걸 그는 다 아는 듯 냉정할 정도로 차분할 뿐이다. 그럼에도 시를 둘러싼 우울과 어둠은 어찌할 수 없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

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

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

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

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

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에 문득 놀라 돌아

봤다 해도  (「여름날은 간다」전문)

 

 소설에서 보았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겹쳐진 시를 읽는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시가 먼저였을까, 소설이 먼저였을까. 『희랍어 시간』속 말을 잃은 여자와 「회복하는 인간」속 화자를 만난다. 어쩌면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인간의 고통에 닿았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침묵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고통의 시간, 버티고 버티어 회복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순간과 부서져서 피 흘리는 영혼의 조각을 다시 이어붙이려는 몸짓을 본다. 그것이 어느 시절 나의 모습이며 당신의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시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반복되는 절망을 버티는 순간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도 하니까.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되도록 오래/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피 흐르는 눈 4」의 일부)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 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 (「회복기의 노래」전문)

 

 

 그래도 한 번쯤은 정말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운명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지난한 시간의 의미를 묻고 싶은 마음은 「서시」 가 대신한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괜찮다고, 어디서나 너를 지켜보았노라고 말하는 운명을 저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한강은 어떤 경험을 통해 이런 시를 쓴 것은 아닐까. 혹독할 정도로 텅 빈 충만을 느낀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당신, 가끔은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어리고/지워진 그늘과 빛을/오래 바라볼 거야./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거기,/당신의 뺨에,/얼룩진  (「서시」전문)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

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몇 개의 이야기 6」전문)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은 제목만 다를 뿐 하나로 이어진 듯하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 겹겹이 쌓인 낮고 작은 음성이 심연 속으로 파고든다. 새벽, 저녁, 어스름, 영혼, 죽음, 고독, 그리고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 저녁이라는 시간은 시인에게 우리가 아는 그 저녁과 다른 시간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독이 그곳에 존재했고 거기서 시가 피어나고 소설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녁은 모든 감정을 응축시킨 힘이었다. 가만히 생각한다. 언젠가 슬픔이 있는 저녁을,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이라는 저녁을, 고통과 절망으로 채워진 저녁을 꺼낼 수 있기를 바라며. 서랍 속에서 구겨진 채로 잠든 그들을 깨우지 않고 가만히 토닥일 수 있는 투명한 고요와 마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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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12-23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시집이네요.
요즘 날씨가 추워졌어요.
자목련님, 따뜻하고 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6-12-2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자목련 2016-12-26 10:0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의 다정한 마음이 더해진 크리스마스를 보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2016년 평온하게 채우세요. 고맙습니다^^*
 
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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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때문에 움직이지라는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196쪽)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삶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삶의 주인이 누구냐는 묻는 자체는 우습지 않은가. 저마다의 삶은 주인은 바로 자신이니까. 최정화의 『없는 사람』을 읽고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의 경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없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소설은 ‘도트’라는 인물을 감시하며 그의 행적을 이부에게 보고하는 무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트는 누구이며, 그를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누가 그를 감시하라고 지시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하게 무오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이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지켜봐 주며 돈까지 벌게 해주는 이부가 무오는 가족 같았다. 일은 아주 쉽게 여겨졌다. 도트, 그러니까 점을 따라다니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도트란 인물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처음에 무오에게 도트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점점 무오에게 주어진 일은 커졌고 도트는 점이 아닌 선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오는 이부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생겼다.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의 지도자인 도트가 선창하는 구호를 외치면 외칠수록 도트를 향한 다른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에 대한 정보를 주고 대비하라고 말하고 싶었고 자리를 이탈하며 갈등하는 도트에게 자신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이었던 무오는 노동자의 자리에서 그들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도트의 목소리는 무오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함께 파업을 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었다.

 

 진짜가 되고 싶다. 그게 무오의 진심이었다. 농성장의 이들에게 신의를 지키고 싶은 것이, 지부장을 일깨워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뀔 거라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가 되고 싶었다. 진짜로 이들 중 하나가 되는 것. 이들과 다르지 않은 농성대원이 되는 것. 여기에 속하는 것. 온전히 속하는 것. 이들과 다른 점 없이 섞이는 것. 그것을 원했다. (203~204쪽)

 

 무오는 덩그러니 혼자의 삶이 아닌 우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들로 인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삶,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는 확신 같은 거 말이다. 돈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간절하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트, 이부, 그리고 농성장의 노동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현장이 많다는 건 아프고 아픈 일이다.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게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소설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고발한다. 그러나 결국 그 안에서 만나는 건 개인의 고통이었고 불안한 삶이었다. 불안을 껴안으면서 나로 존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는 소망한다. 수많은 도트가 멈추지 않고 이동하고 있기를 바란다.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은 존재하기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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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12-1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샀어요!

자목련 2016-12-14 07:47   좋아요 0 | URL
리스트가 겹치는 게 신나고 좋아요!!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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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그러하다. 꼭 해야 할 말이기에 고민하고 고민한 후에야 하게 된다. 누군가는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존 밴빌의 소설 『바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말, 꼭 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한 연습과 연습을 하는 주인공 맥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맥스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고 50년 전의 어린 시절에 보냈던 시더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는 건 맞은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상실의 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맥스를 딸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과거로 들어가는 아빠를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시더스였을까. 시더스, 그곳은 그레이스 가족이 머물던 곳으로 맥스에게는 신들의 집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그레이스 가족이 맥스에게는 신(神)의 존재였다. 맥스는 현재가 아닌 과거로 빠져가듯 소설은 그 시절, 그러니까 맥스가 쌍둥이였던 클로이와 마일스와 함께 어울리던 시절로 초대한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2쪽)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며가 아내와 그레이스 가족과 보낸 시간을 차분하면서도 선명하게 들려준다. 가만히 맥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집 앞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맑고 투명한 여름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바다 냄새를 상상한다. 나른한 표정을 짓고 바다를 응시하는 그레이스 부인과 새침한 표정으로 맥스를 바라보는 소녀 클로이와 목소리를 숨긴 채 바다를 유영하는 마일스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잠시 머물던 하숙집에 불과했던 시더스가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 것이다. 적어도 맥스에게 그곳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아내를 잃고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는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우리 딸 클레어는 애나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뒤에는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114쪽)

 

 애나와의 이별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삶에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은 예정된 것보다 더 크고 깊은 통증이었다. 맥스에게 남겨진 삶은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웠고 누군가가 그리웠고 필요했다. 그러나 맥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건 새로운 누군가가 아닌 기억과 추억이라고 확신한다. 어쩌면 맥스의 삶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성적 호기심에 그레이스 부인을 흠모했던 소년이 자석에 끌리듯 당돌한 클로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사랑에 빠진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나오기도 전에 맥스는 클로이와 마일스의 죽음과 맞닿는다. 소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에 누운 늙은 원숭이만 있을 뿐이다.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애나를 생각하는 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밤이다.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나 자신도 없는 것 같다. 바닷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밤이면 우르렁대고 으르렁거릴 텐데, 가까워져 삐걱거리는가 하면, 멀어지며 희미해질 텐데. 나는 이렇게 혼자이고 싶지 않다. 왜 돌아와서 나를 쫓아다니지 않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최소한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거 아냐? 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그 끝도 없는 밤마다 이런 적막인 거야? 꼭 안개 같아, 당신의 이런 침묵은.’ (228쪽)

 

 따지고 보면 우리 삶에서 영원한 건 없듯 맥스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삶은 친구처럼 죽음을 데려오고 남겨진 삶은 다시 그 친구를 기다리는 일이다. 잔인한 진실이다. 존 밴빌은 당연하고도 처연한 진실을 너무도 아름답게 그렸다. 아련하게 겹겹이 쌓인 기억의 자물쇠를 열어 바다에 풀어놓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바다는 시더스를 닮았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유려하면서도 몽롱하고 어려운 소설에 더 가까이 닿고 싶은 욕망을 키운다. 저마다의 기억에 자리한 시더스를 생각한다. 내가 잊고 있던 시절, 나를 흔든 신(神)이 누구였는지 생각한다. 그리하여 첫 문장‘그들은, 신들은 떠났다.’에 담긴 맥스의 마음을, 그 아름다운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다. 결코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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