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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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은 어른, 대학, 독립, 자유와 같은 단어였다. 적어도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스무 살이 되면 해야 할(할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곤 했다. 그러나 스무 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성적에 맞춰 들어온 대학에서 공부는 재미가 없었고 연애는 달콤하지 않았다. 당시에 시들하게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내게로 달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은희경의 『빛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를 추억한다거나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다.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그 시절과 소설 속 그 시절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다고 할까.

 

1977년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의 한 여자 대학교 입학한 화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한 대학 생활과 동기, 선배들의 이야기로 함축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대상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숙사의 내부 사정도 흥미롭다. 귀가 시간과 점호가 있다거나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과정이나 외출증을 끊는 일은 마치 군대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거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단순한 구성은 아니다. 1977년과 2017년을 오가며 화자인 ‘김유경’과 같은 대학 기숙사 동기이자 소설가인 ‘김희진’의 시선으로 다루기에 서로 다른 기억으로 서술된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 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281쪽)

 

어쩌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흐려지고 왜곡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소설에서 소설가 김희진의 소설 속에 그려진 1977년 기숙사의 모습은 소설가의 시선으로 재편집되었고 ‘나’는 그것이 때로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4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꼬집어 판가름을 내고 싶지 않다. ‘나’는 과거의 자신이 품었던 생각과 의지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일부는 그 과거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건 인정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기대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아쉬워할 수도 있다. 소설 속 그녀들과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살았다면 당시 서울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유신정권의 시대, 대학생의 정치적 의식과 활동에 대해 은희경이 날카롭게 파고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 학보사 기자인 화자의 시선으로 스케치를 하듯 보여준다. 다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의 미팅과 연애, 결혼에 대해서도 기숙사 구성원 각각의 목소리를 빌려 들려준다. 한 방에 네 명씩 생활하는 여대생은 다양한 사회 계층을 의미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 계층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런 구성이 가장 매력적이고 탁월하다. 여자 대학교의 기숙사란 특정 공간에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가장 정확하고 내밀한 그녀들의 의견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의 곁에서 그들의 수다, 때로는 논쟁을 가만히 듣고 있는 듯 착각에 빠지는 이유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목소리는 어떤가 생각도 해본다.

 

‘나’가 친구인 김희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똑같이 작동한다. 소설 속 그들과 같은 세대가 아니더라도 잊고 있던 어떤 시절을 불러오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소설가 은희경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나에게는 지워진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선명하게 살아날 때 한 편으로는 당혹스럽지만 한 편으로는 반갑고 신기하다. 은희경의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그런 기분을 안겨줄 것이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337쪽)

 

오랜만에 만난 은희경의 장편을 읽으면서 정미경, 공지영의 소설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던 나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처럼 소설은 때로 잊었던 나를 불러오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이런 소설이 있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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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더위를 유독 심하게 타는 체질이기도 하거니와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기대했던 일에 대한 결과도 모두 좋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기대했던 만큼 그 과정에 있어 열심을 내지 않았던 것,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없었던 게 맞다. 대충, 늘 하던 대로 하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건 이기적이다. 아니, 늘 최선을 하고 열심을 다했다면 그 자체로 최선이었겠지만 말이다.

배롱나무를 보러 가자던 친구를 만난 하루만 유독 반짝였다. 사진은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며 찍은 것이다. 놀이터를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맑아진다. 모든 놀이터가 간직하고 있는 선하고 신나는 기운이 전해진다고 할까. 여전히 태양이 뜨거워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조용하던 놀이터였지만 그 안에 고인 생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던 8월의 말경부터는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고 소멸하는 여름을 지켜보았다. 완전히 소멸했다고 할 수 없지만 이젠 여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이른 추석에 마음은 괜히 분주하고 네 장의 달력으로 남은 올해를 생각하면 조바심을 감출 수 없다. 마음이 그러거나 말거나 가을엔 소설을 읽어야지. 한국소설을 읽어야지. 그래야지. 읽고 있는 은희경의 장편과 김금희와 윤이형의 단편집 단편집, 최정화의 장편. 모두 궁금하다. 소설 읽기 좋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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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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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엄마가 언제 웃었을까?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나와 함께 동네 어귀에서 찍은 사진에서 엄마는 웃고 있었다. 앳되고 수줍은 미소였다. 몇 장 남지 않는 사진을 보면서 엄마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았다. 돌아가신 엄마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여성 삼대의 이야기 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를 읽으면서 나는 엄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소설 속 어느 엄마와도 닮지 않는 엄마가 자꾸만 생각났다.

젖먹이를 떼어놓고 유학길에 오른 엄마 현옥 대신 인아를 키운 건 할머니였다. 인아에게 세상의 시작은 할머니였고 엄마는 조금 먼 거리에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룬 엄마에게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스물두 살의 휴학생 인아는 할 일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엄마의 전화 한 통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두 계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건 당연했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할머니와 친구분들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지방대 교수인 엄마 현옥이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이상할 뿐이다. 할머니가 폐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아는 알지 못했고 그래서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은 채로 하루하루 보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인아는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사랑했던 마음과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대했던 사랑이 달랐다는 것, 할머니가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고 힘들어했다는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유학을 선택한 엄마, 그러면서도 엄마 현옥과 할머니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애증 같은 것에 대해 인아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현옥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여성의 삶이 남성의 울타리 안에 있었던 할머니와 할머니와는 다른 세상을 향해 나갔던 당당하면서도 모질었던 엄마 현옥.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딸이었던 인아는 언제나 엄마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인아의 여린 마음을 할머니는 가장 먼저 알아보고 가만히 안아주었다. 소설에서 할머니와 인아가 빈대떡을 부치는 장면을 읽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포옹의 온기가 전해진다.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 (99쪽)

혼전 임신으로 어린 나이에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혼을 선택했을 때 현옥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인아에게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좋은 삶이라 말하는 엄마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인아를 키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선택지는 많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테니까. 같은 여자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인아가 아이를 키우고 안정이 된 후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말했을 때 서른셋의 나이가 젊고 예쁘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 엄마 현옥이었던 것처럼.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엄마라는 걸 우리가 늦게 아는 것처럼 인아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로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다. 일하는 엄마, 전업주부인 엄마, 엄마라 불리는 모든 존재의 삶은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까지 쉽게 인정을 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인아가 엄마 현옥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아픈 할머니를 보러 주말마다 오는 현옥이 할머니에게 엄마라 부르는 모습이 친근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렇다.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만 존재했을 것 같은 어리석음, 내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모진 외침이 소설 속에서 돌고 돈다. 

기존의 여성 서사를 다룬 소설과 다르게 백수린의 소설이 특별한 건 남녀의 대립이나 갈등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삼대 모녀를 통해 그들에게 이어진 섬세한 감성으로 어루만진다는 점이다. 여성의 결혼과 일, 그리고 육아에 대해 저마다의 다른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어진다. 할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화자인 인아에게 온 생명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듯 말이다. 인아 역시 생명을 품고 키우고 세상에 내놓고서야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더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까. 연약하지만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타인인 아이를 향한 엄마의 마음. 그 사랑이 행간에서 느껴진다.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 보거나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26쪽)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완벽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경험만 봐도 다르다. 엄마라서 무조건 믿어주고 지지하고 이해해주는 건 아니다. 엄마와 나의 사고가 다를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백수 린이 소설에서 할머니 세대의 엄마들이 무시와 폭력을 참고 희생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해할 수 없듯 현옥이 자신의 딸 인아의 삶을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감정을 알 것 같은 시기와 맞나는 것이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때로 다투고, 미워하고, 애틋해하면서 말이다.

낡은 사진 속에서 젊고 어린 엄마가 웃고 있다. 엄마에게 기댄 나는 그때 엄마의 나이를 지났다. 깜짝깜짝 놀랄 일에 절로 나오는 ‘엄마’란 외침을 빼놓고는 엄마를 부르는 일이 없다.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어도 괜찮다고 여겼던 엄마의 자리를 채우는 건 그리움뿐이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이가 되지 못한 채 서둘러 나와 이별을 한 엄마가 보고 싶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나의 엄마. 당신의 이름을 가만히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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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8-30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지나가는 8월 말 입니다.
많이 더웠던 8월 잘 보내셨나요.
자목련님, 기분 좋은 주말 되세요.^^

자목련 2019-08-31 11:46   좋아요 1 | URL
네, 아침 저녁으로 이제는 가을이구나 느껴요.
이럴 때 감기랑 친해지면 큰일이니 조심하시고요^^*

hnine 2019-08-31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대 모녀의 삶을 한 소설에서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 소설 궁금해지네요. 여성의 결혼과 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서사를 지어낸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고요.
읽으시면서 어머님 생각 많이 하셨겠어요.

자목련 2019-08-31 11:4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백수린 작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제가 느낀 것과 작가가 의도한 것은 다르겠지만 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와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더위가 물러가고 제법 서늘합니다.평온한 주말 보내세요.
 

 

하루하루 자신에게 만족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부족한 자신 때문에 화가 나고 제대로 의견을 말하지 못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쌓여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모른다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지만 그건 아닐 것 같다. 사실, 이건 요즘 내 마음이다. 일상에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존재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때아닌 사춘기도 아닌데 말이다. 제법 많은 일을 겪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그렇게 대처하면서 살아왔는데 왜 자꾸 흔들리는 것일까. 친구가 속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다 괜찮다고 말했는데, 그 작고 소소한 상처가 결국엔 죽고 사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걸 놓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저마다의 상처투성이로 결집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조건 상처를 감추고 살아야 할까.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보여줄 수 없고 혹여 타인의 시선에 상처가 아닌 것처럼 보일까 조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현재는 그가 살아온 과거에서 시작되고, 상처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하는 묘한 능력을 지녔다. 과거의 상처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내내 삶을 괴롭게 만든다. 김윤나의 『당신을 믿어요』는 그런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상처를 인식하고 제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안아줄 수 있는 힘에 대해 들려준다.

 

상처의 맨얼굴과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외로움과 절박함의 끝에 섰을 때, 자기 믿음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17쪽)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순간, 나는 믿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혼자만 끙끙 앓다가 내게서 분리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말하기로 다짐하는 순간, 나와 상대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설령 그 상대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그건 그의 몫이고 나는 이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내게 5년 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런 행동과 그런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참 싫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것도 부끄럽다는 표현을 했다. 나는 자꾸 말해야 상처는 작아지고 소멸하는 게 아니겠냐며 괜찮다고 말했다.

 

당신과 상처의 관계는 분명히 ‘사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찾다 보면 완전히 다른 옵션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전처럼 강한 척하지 않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 수 있고, 모두 너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대신 ‘서운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멈추어 질문해야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과 가까워진다. (36쪽)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보여준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난 엄마, 그런 엄마를 미워하며 살아온 시간과 알코올중독에 빠진 아버지의 폭력과 새엄마와 힘들었던 날들에 대해 담담하게 들려준다.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잘못이 아니고 그녀의 몫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다친 마음을 돌볼 이는 자신뿐 이었으니 혼자 벽을 쌓고 경계하고 생존을 위해 애쓴 그녀가 상담을 공부하고 누군가의 상처를 들어준다. 상처를 알기에 더욱 상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보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이 책은 김윤나 자신의 이야기이면서도 누군가의 이야기인 것이다. 쉽게 용서하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 들어주는 일, 궁금한 것에 대해 짐작하지 말고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부모와의 관계, 독한 말로 상처를 주는 가족, 아픈 형제 때문에 희생하거나 잘난 형제 때문에 비교당하며 쌓인 상처가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녀가 상담한 다양한 사례를 읽다가 어느 순간 화가 나거나 어느 순간 눈물이 난다면 그건 책을 읽는 독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내면에 가득한 상처와 슬픔을 무시하면서 살아왔을 누군가, 자신의 주변의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상처와 함께 자라다 보면 알게 됩니다. 내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들을 이미 해내고 있다는 것을요.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193쪽)

 

상처와 함께 자라는 것,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성장한다는 건 상처를 직시하는 일이고 그것을 때로는 안아주고 보듬어 줄 주는 순간 어느새 상처는 새 살이 나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니까. 내 존재를 스스로 부정할 때마다 나는 책을 찾는다. 최근 몇 달 동안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래서 김혜남, 박종석의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를 읽었다. 기존의 심리 서적에서 다루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이런 문장에 얼었던 마음이 녹는 느낌을 받았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게 괜찮은 게 아니고 실수와 자책을 할 수 있으며 울고 싶을 때 울고 나를 부정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이 부분은 앞서 김윤나의 책에서 마주한 부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행복은 우리의 권리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72쪽)

상처 입고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자기를 바라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눈물 가득한 연민을 느끼며 자신을 바라본 후에야 우리는 그러한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고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건강한 힘을 얻게 된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258쪽)

우리에겐 상처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 필요하고 상처를 통해서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닌 누군가를 이해하고 걱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쳐도 그 아픔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나는 내 안의 동굴로 들어가 묻을 닫아버릴 테니까.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존재 이기에 우리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가장 가까운 누군가, 혹은 낯선 존재, 때로는 이런 책들의 도움을 받는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내 목소리와 말투만으로 나를 알아차리는 친구가 있고 이런 책도 있다. 연달아 읽은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를 통해서도 많은 힘을 얻는다. 세 권의 책에서 주목하는 건 상처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알아봐 주고 들어주는 존재와 그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키울 수 있다는 믿음의 중요성이다.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당신이 옳다』, 167쪽)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불안하고 이미 지난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과거에 붙잡혀 살기도 한다. 그 과정에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상처와 상실이 있다. 책을 읽고 이렇게 쓰는 동안 조금 차분해진다. 시들해졌던 내게 책은 생기를 주고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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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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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사랑을 생각하면 부모님이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모습 말이다. 과거에는 ‘사랑의 매’도 그런 사랑에 속했었다. 아마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속 십 대 소녀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도 사랑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학교 시험에서 2등을 했다고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이니 말이다. 1등을 한 아이가 누구인지 묻고 “저 애도 머리가 하니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유진은 자수성가로 일가를 이뤘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표대로 생활해야 했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모범생인 오빠와 다정한 어머니,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둔 캄빌리의 가족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아버지 유진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모든 일에 감사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자유를 향한 목소리를 내고 가난한 이들을 볼보며 누가 봐도 좋은 아버지이며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니 캄빌리는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어머니와 오빠 자자도 마찬가지였다.

 

캄빌리가 계속 이렇게 살아아가는 건 아닐까, 나는 조바심이 났다. 단 한 번도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눈치만 보면서 자라면 안 될 텐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의 만남에도 제약을 두는 아버지라니. 캄빌리와 자자에게 세상은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캄빌리가 다른 세상과 교류할 기회는 오직 고모를 만날 때 뿐이었다. 소설에서 고모 이페오마는 가장 주체적인 삶을 보여준다.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아버지 유진을 설득하고 폭력의 희생자인 어머니를 위로하면서도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주고 이끄는 사람이다. 방학 동안 남매는 나이지리아 대학교의 교수인 고모 이페오마 집에서 세 명의 사촌과 생활하게 된다. 자동차에 넣을 기름이 없고 사용할 물이 충분하지 않고 먹을 음식도 없는데 그들의 생활은 캄빌리가 살아온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모든 게 자유로웠다. 캄빌리가 상상한 적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아마디 신부를 통해서도 캄빌리의 마음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마디 신부를 대할 때 설레고 떨리는 캄빌리야말로 진짜 십 대의 소녀라는 게 느껴진다.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274쪽)

성장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캄빌리는 그 과정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었던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과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가득했다.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이전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그 세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 사촌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이페오마 고모가 그곳에서 적응하면서 나이지리아를 그리워하는 마음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오빠 자자가 영성체를 거부하고 “그럼 죽을게요.” “그럼 죽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전해지는 결연한 의지처럼. 미세하게 시작된 마음의 움직임은 용기를 데려오고 행동으로 이끈다.

그래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혹독한 성장소설로 여겨진다. 하지만 단순히 성장소설로만 볼 수 없다.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한 사회, 문화, 정치, 제도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겪는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가부장 제도, 군부가 장악한 사회, 고모가 재직한 대학교의 시위 현장은 우리의 과거였고 현재에서도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캄빌리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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