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포 투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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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너무 좋았던 탓일까. 살짝 아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쓸쓸한 여운이 나쁘지 않았던 느낌. 좋았던 단편도 있었지만 소설집 전체 평점은 셋하고 반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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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1-07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읽고 싶어서 장바구니 담아둔 책인데요.
아 책 소개 보지도 않고 에이모 토울스라 담아뒀는데 단편집이군요...

자목련 2025-11-11 11:46   좋아요 0 | URL
저도 소개글을 꼼꼼하게 살피지는 않았네요. 저는 좀 아쉬운 단편집이었어요^^
 


더디게 읽고 있다. 읽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짧은 가을은 하루하루가 아쉽게 흐른다. 맑고 높은 가을 속 흰 구름은 기량을 뽐내기느라 바쁘다. 작정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풍덩 하늘 바닷속으로 빠져든다. 눈 닿는 동네 산에는 아직 단풍을 찾기가 어렵다. 아파트 단풍나무만 곱게 물든 모습이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레몬빛을 닮은 모과를 보는 일도 즐겁다.


밤에는 보일러를 돌리기 시작했다. 물 온도를 가을로 변경했다. 그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보일러는 계획이 다 있겠지. 보일러에 주황빛 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보일러는 일을 한다. 그 순간을 위해 보일러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어쩌면 보일러는 오매불망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능을 가진 물건은 그 자체로 든든하기 보다 기능을 보여줄 때 던 든든하니까.






더디게 읽고 있는 책도 그런 마음일까. 나를 읽어줘, 나를 만져줘, 나를 돌아봐 줘. 그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쌓아두고 북엔드에 세워둔 책만으로 나는 기분이 좋은데 책의 마음은 다를지도. 조금 더 세심하게 책의 마음을 들여다봐야겠다.


10월에 읽겠다고 구매한 책이지만 11월에 읽게 될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이웃님 덕분에 알게 된다. blanca 님 덕분에 이 두 권의 책이 나왔다는 걸았다. 김연덕이 쓴 10월 이야기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유디트 헤르만의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를 땡스투와 함께 구매했다. 제목을 보자 마자 이책이구나 싶었던 책은 하재영의 『지극히 나라는 통증』를 이제 읽으려 한다. 세 권의 책이 도착했을 때 기쁨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리고 곧 김연수와 황정은의 단편이 수록된 책도 구매할 것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더딘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읽고 있는 책을 마무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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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10-3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울대는 빛그림자 속에 들어있는 책이 아늑해보여요.
올해는 가을이 짪은 것 같아 아쉬워요.
벌써 롱패딩을 입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저는 난방 돌아가는 소리가 돈으로 들리는데 자목련님께서는 주황빛 불의 오매불망 기다림이라고 표현하시다니~~
역시 시인이십니다^^

자목련 2025-11-04 10:27   좋아요 0 | URL
너울대는 빛그림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 순간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은 행복해요.
가을이 짧아서 아쉽지만 겨울에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니 곧 겨울을 기대할 것 같아요.
쌀쌀하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망고 2025-10-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 속 책탑이 고요하고 예뻐보여요😍

자목련 2025-11-04 10:29   좋아요 0 | URL
책탑은 언제나 예쁘죠. 김연덕의 표지는 더욱 그렇고요^^

blanca 2025-10-3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가 너무 아쉬운데 또 여기에 걸맞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와줘서 따라 읽기 바쁘네요. 오늘 보니 단풍이 와, 감탄 나올 정도더라고요.

자목련 2025-11-04 10: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예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은 깜짝 선물 같아요^^
단풍을 보는 일, 가을의 특권이에요!

책읽는나무 2025-11-0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빛이로군요.
가을에 걸맞는 책들.
저와도 겹치는 책이 보입니다.^^
가을빛 같은 가을 날들이 이어졌음 좋겠네요. 자목련 님께.^^

자목련 2025-11-04 10:32   좋아요 1 | URL
나무 님과 겹치는 책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환한 가을을 안온하게 보내시고요^^

yamoo 2025-11-0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더디게 읽고 있습니다..ㅎㅎ
오늘 산 책은 언제 읽을 지 몰라요..ㅎㅎ
간혹가다 바로 읽을 책을 구매하기는 합니다. 그런 책은 구매해서 바로 읽어요. 그 외에는 기약이 없어요..ㅎㅎ

자목련 2025-11-04 10: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늘 산 책은 오늘 산책의 기쁨으로, 언제 읽을지는 몰르고요~~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하유지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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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지 않아도 따라야 하는 시류가 있다. 주류와 비주류를 떠나 어쩔 수 없이 편승하는 것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자칫하면 고립될 수 있는 게 세상이기 때문이다. 편리하고 좋은 방향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지 나는 잘 모르겠다. AI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때가 있다. AI를 기반으로 만든 광고가 등장하고 모든 궁금증을 해결한다. 키오스크의 등장만으로도 놀랐던 때를 떠올리면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AI의 등장은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남들은 AI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유지의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도 주인공과 인공지능의 우정을 다룬 기존의 소설과 비슷하겠지 싶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조금 달랐다. 뭐가 다르다면 일상생활에서 인공지능이 어떻게 스며들고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예측하게 만든다.


소설은 중학교 2학년인 강미리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가정용 로봇 아미쿠 3.1(이하 아미쿠)와 만남으로 시작한다. 혼자가 익숙한 미리내는 아미쿠가 귀찮고 싫다. 프로그램 개발자였던 아빠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인공지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해고된 아빠는 제주도로 떠났으니까. 거기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아미쿠의 관리를 미리내가 해야 한다. 그런 미리내와 다르게 엄마는 가정교사 기능까지 탑재된 로봇이라 더욱 기대가 크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사사건건 설명과 해설을 덧붙이는 아미쿠의 등장이라니. 어떻게 해서든 반품을 할 생각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는 관심도 없는 부모님보다 미리내에게 자장 중요한 건 글쓰기다. 실은 미리내는 도로시란 이름으로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작가로 인정받고 싶지만 댓글은커녕 조회수도 한 자릿수다. 놀라운 건 아무도 모르는 그 사실을 아미쿠가 알고 있고 심지어 잘 읽었다며 가정교사 기능으로 첨삭과 조언 서비스를 제공하냐고 묻는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미리내와 아미쿠의 관계는 달라진다.


아미쿠의 조언대로 소설을 수정하니 조회수도 늘고 댓글로 달렸다. 미리내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미리내는 학교에서도 소설 생각뿐이다. 얼른 다음 회를 써서 기다리는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아미쿠의 도음으로 소설은 더 풍성해지고 생동감 넘친다. 처음엔 마냥 좋았는데 점차 소설을 쓰는 게 자신인지 인공지능인지 묻게 된다.


그러다 반 아이들이 도로시가 미리내라는 사실뿐 아니라 소설도 인공지능이 대신 써 준 게 아니냐며 의심하며 공격한다.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전부 미리내가 쓴 소설이었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미리내는 아미쿠에게 자신이 쓴 소설이 누구 작품이냐고 따지듯 묻는다. 아미쿠는 미리내가 쓴 소설이라고 답하지만 아미쿠의 조언 이후 사람들이 좋아했으므로 네 소설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아미쿠를 교환하기로 결정한다.


일주일 후 새로운 인공지능 로봇이 도착했다. 미리내에 대해 모든 걸 알았던 아미쿠는 사라졌다. 미리내가 쓴 소설 파일을 전달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글자 수, 공백, 낱말 같은 나열뿐이었다. 소설에 대한 감상은커녕 띄어쓰기 오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어디에서도 아미쿠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아미쿠의 필요성을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미리내와 아미쿠는 다시 만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 정보(데이터)의 온전한 삭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뜩하고 무서웠다. 소설에서는 미리내와 아미쿠의 만남이 반가웠지만 말이다.


아미쿠는 미리내에게 소설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 미리내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모두 아미쿠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한다. 소설 같은 건 쓸 수 없고 다 망해 버린 기분이라고 하자 아이쿠는 미리내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소설 쓰기라고 답한다.


아미쿠는 자기가 도로시의 첫 번째 독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자기를 되찾고 싶어 했는지도 말이다. (162쪽)


이쯤되면 미리내가 다시 소설을 쓸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미리내가 아미쿠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것까지 말이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청소년 문학의 목표를 다했다고 할까. 그러나 이 소설이 다른 건 창작 와 예술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누구나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관계의 본질입니다.” (158쪽)


아미쿠가 미리내에게 한 말이 다정하고 따뜻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창작의 주체는 누구인지, AI와 협력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앞으로 더 다양한 분야에서 마주하게 될 AI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진지한 고민과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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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1-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I는 제게 언제나 화두입니다...

자목련 2025-11-07 08:58   좋아요 0 | URL
일상으로 파고드는 AI의 속도가 너무 빨라요.
놀라면서도 두렵고요.
 


삶의 어려움이 표출되기까지 그것은 조용하게 움직인다. 아무도 모른다. 안간힘을 쓰느라 애쓰고 있다는걸. 그런 삶을 알고 경험한 이만이 한눈에 포착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놀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어떻게 그녀는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짧은 분량의 단편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 을 읽으면서 안감힘과 고요함이 동시에 몰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슬픔이고 절망이며 어떤 결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이 제일 좋았다. 좋았다는 건 강렬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보통의 일상을 무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함축적인 메시지. 주인공 남자 카헐의 행동을 묘사하며 그를 향한 동료의 시선과 걱정은 단순한 배려의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키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성 혐오와 차별이다. 카헐의 결혼이 왜 파탄 났는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이다. 끝내 카헬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게 되더라도 제목처럼 너무 늦게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등한 관계가 필요하다는걸,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억울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는 시간, 어머니의 가사 노동이 당연하다 여기더라도 어머니가 자기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 발을 거는 남동생, 그걸 보고 웃는 아버지. 그런 집안에서 보고 배운 대로 그는 살아왔으니까. 카헐은 아버지가 웃지 않았더라면,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생각하며 안타까워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한다. 변화하려는 노력은커녕 자신이 그들과 같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카헐은 연인 사빈이 준비하고 만든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서 배번 음식 재료 값이 아깝고 설거지가 많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사빈이 지갑을 놓고 와서 대신 계산을 한 것을 기억하고 생색을 내는 남자다. 사빈에게 고마운 마음은 전혀 없는 그 모든 게 당연한 남자. 결혼 준비 중 결혼반지 사이즈 조정을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도 돈이 아깝다 말하며 화를 낸다. 이런 남자랑 결혼을 찬성할 이가 누가 있을까. 사빈의 결정은 옳은 일이고 현명했다.

타인의 상처와 슬픔에 대해 관심 없고 무지한 이기적인 카헐을 보면서 상실과 절망을 온몸으로 경험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펄롱이 떠올랐다. 마침 영화를 보기도 했다. 카헐의 대척점에 있는 이가 펄롱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연민, 고통을 나누려 애쓰는 마음은 경제적 부유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 선함,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 아픈 이들을 위한 연대와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펄롱은 그걸 해낸 사람이다.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를 지나치지 않았다. 이름을 물었고 도움을 주려 했다. 늘 거기 있으니까란 말이 이렇게 따뜻하고 힘이 있던 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아처럼 사소한 것들』, 82쪽)

키건은 카헐과 펄롱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지만 그 방법을 달리했다. 카헐 개인의 문제를 여성 혐오로 이끌어냈고 수녀원의 소녀를 돕는 펄롱의 모습으로 잘못된 사회 규범을 고발한다고 할까. 놀라운 통찰력은 키건 고유의 아름답고 비범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너무 늦은 시간」의 첫 문장처럼 말이다. 고요할 정도로 차분해 강한 울림으로 남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키건의 소설은 두 번 읽게 된다.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너무 늦은 시간」, 12~13쪽)

두 번째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에킬섬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의 이야기다. 혼자만의 시간, 자신만을 위한 공간에서 글을 쓰려는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상대는 독문학 교수라며 집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한다. 집 앞에 와 있다고. 무례한 남자에게 여성 작가는 저녁에 다시 오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손님을 위한 케이크를 준비한다. 남자는 대접받은 차와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면 글을 쓰지 않고 케이크나 굽는다며 여성 작가를 가르치려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여성 작가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무시하는 태도에는 여성차별이 깔려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남자의 표본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마지막 단편 「남극」은 추리나 스릴러 소설처럼 보인다. 남편과 아이가 전부였던 여성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간 도시에서 벌어진 이야기.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성과의 하룻밤은 일탈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남편과 다르게 세심하고 친절한 남자.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체로 매끄럽게 흘러가는 삶의 이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은 소설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도 여전하다는 걸 키건은 말한다. 그녀만의 시선과 방식을 세상을 향해 계속 외친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까지.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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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29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헐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쉽지 않을 듯 보이네요.ㅠㅠ

자목련 2025-10-30 12:22   좋아요 0 | URL
그쵸, 완벽하게 변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5-10-3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건의 소설은 참….대단한 내공인 듯 합니다.
무조건 좋아요.^^

자목련 2025-10-31 09:42   좋아요 0 | URL
얼마나 많은 시간 공들이고 연습했을까, 저도 무조건 좋아요!
 
감정의 혼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황종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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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엔 수만 개의 방이 있고 길이 있다. 어떤 이는 그 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돌보며 살고 어떤 이는 가장 큰 방만 신경 쓰며 산다. 혹자는 마음 다스리기를 하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잡히고 다스려진다면 뭐가 어려울까. 복잡하고 혼란스러움 그 자체가 마음이니 문제인 거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타오르고 주체할 수 없기에 대책 없이 무너지고 만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런 인간의 심리를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아니, 꿰뚫어 본다고 하는 게 맞겠다.


『감정의 혼란』 속 네 편의 소설에서 만난 인물은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은 아니다. 어쩌면 심연 깊은 곳에서 꺼내지 못한 우리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직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는 얼마 없으니까 말이다. 표제작 「감정의 혼란」의 인물만 봐도 그렇다. 소설은 회갑을 맞은 화자가 들려주는 스승과 자신에 대한 과거 이야기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꺼내는 건 과거에는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거나 그때는 감정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젊은 시절 학문과 등을 지고 방탕하게 지내다가 아버지의 방문으로 시골대학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그곳에서 한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에 매료된다. 교수의 집을 오가며 학문에 열중한다. 그러나 제자인 자신을 대하는 스승의 태도에 혼란스럽다.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다가 한순간 차갑게 변하는 일이나 수업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돌아오는 기이한 행동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교수의 젊은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화자에게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알 수 없는 마음과 반발심의 충돌 때문인지 화자는 교수의 젊은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은밀하고 짜릿함보다는 괴로움이 가득한 그에게 스승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화자는 그 사랑을 이제야 꺼내고 자신도 교수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어둠 속의 이 목소리, 어둠 속의 이 목소리, 이 목소리가 내 가슴속 깊숙이 꿰뚫고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뼈저리게 느껴졌던가! 그 목소리에는 내가 그전에, 아니 그 전뿐 아니라 그후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림이 깃들어 있었으니—평범한 운명을 사는 사람은 결코 헤아일 수 없는 심연에서 터져나오는 울림이었다. ( 「감정의 혼란」, 386~387쪽)


슈테판 츠바이크는 휘몰아치는 교수의 감정과 어찌할 줄 모르는 화자의 마음을 소설에서 섬세하게 묘사한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억누르다 결국 폭발하고 마는 순간에 도달한 교수의 처절한 목소리가 내게도 들릴 것만 같다.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키고 싶거나 들키고 싶지 않았을 그 복잡함. 그 시절을 깊고 깊은 곳에 가둬둘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누군가의 비밀을 듣는 일을 조심스럽다. 그것이 소설 속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독자를 소설이라는 비밀에 발을 들이게 만드는 놀라운 이야기꾼이다. 표제작에서 화자와 스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게 만든 것처럼 「아모크 광인」과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모크 광인」 속 여행 중인 화자는 인도를 떠나 유럽을 향하는 배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다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선박에 숨어 지내던 남자로 그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다. 그런데 화자가 보기에 몹시 불안한 상태라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여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냉소적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일까. 화자는 그 남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고 마침내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자는 의사로 7년 전에 인도에 왔다. 사연 많은 남자는 인도에 도착해 처음엔 의욕적으로 살았다. 현지어를 익히고 원주민과 잘 지내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흥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지냈고 계약기간이 끝나 유럽으로 돌아가기만 기다리던 차에 한 여자가 찾아온 것이다. 원주민이 아닌 백인 여자였다. 그러나 여자는 의사에게 시원하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의사를 찾아왔다는 건 어디가 아프거나 진료를 받을 목적인데 말이다. 남자는 호기심이 생겨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관찰하다 도도한 여자에게 빠져버린다. 그러니까 화자가 남자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 심리의 수수께끼는 불안할 만큼 나를 사로잡아, 그 관련을 밝혀내고 싶은 충동이 핏속 깊이 들끓게 한다. ( 「아모크 광인」, 119쪽)


「아모크 광인」속 화자가 느낀 이런 감정은 어떤 것일까. 점점 타인과 무감한 사이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불필요한 감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상하게 끌리는 상대에게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되는 일 말이다. 나와 아무런 연결점이 없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처럼. 단 하루 동안 여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설은 호텔 옆 여관에 모인 일곱 명의 숙박객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호텔 주인의 아내가 손님이었던 청년과 야반도주를 한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수다를 떤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룻 사이에 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 설령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 해도 남편과 두 아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대다수가 아내를 비난하지만 화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자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한 그녀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화자의 말을 듣던 한 노부인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속 여인이 바로 이 노부인이다.


그녀는 마흔에 남편과 사별하고 슬픔에 빠져 방황하다 우연하게 룰렛 도박에 열중하는 한 청년을 만난다. 「아모크 광인」속 화자가 그러했듯 그녀도 청년을 향한 호기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 청년이 도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를 뒤쫓는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달래로 위로하다 하룻밤을 보낸다. 결과적으로 청년은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도박을 끊어내지 못해다. 그러나 그 스물네 시간은 예순일곱 해를 살아온 지금까지 평생을 지배한다고 고백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날 밤은 싸움과 대화, 열정, 분노와 중오 눈물어린 애원과 도취가 끝없이 이어져 저에게는 수천 년이 흐르는 듯 느껴졌고, 우리 두 인간은, 한 인간은 죽을 듯 날뛰며, 다른 한 인간은 얼결에 휩쓸려, 뒤엉킨 채 비틀비틀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죽기 살기로 소동을 뚫고 새로이 태어났어요. 완전히 변모하여, 감각과 감정이 바뀌어, 새로이.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 236~237쪽)


어디 그뿐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복잡한 심리의 묘사와 탁월함에 절로 감탄하지만 나는 이런 문장에 더 반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얼마나 수많은 사람을 관찰을 했을지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 공을 들였을지 알 수 있다.


손은 아무리 은밀한 비밀도 여지없이 드러내요. 간신히 달래져 잠자는 듯 보이던 손가락이 기품 있는 무심함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필할 수 없이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손들은 저마다 특별한 인생을 드러내니까요.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 214쪽


슈테판 츠바이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마다 특별한 인생 안에 숨겨진 욕망과 비밀이 있다는 걸 말이다. 우리가 아는 건 겨우 몇 개에 불과하다는걸. 그러니 재밌고 그다음이 궁금해서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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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10-27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타는 비밀 말고는 다른 출판사에서 읽어봤지만..츠바이크여서 저도 구매했습니다 ㅋ 츠바이크의 문장은 역시라는 감탄만 나옵니다~!!!

자목련 2025-10-29 12:31   좋아요 1 | URL
역시 새팡님은 읽으셨군요. 읽을 때마다 좋음이 커질 것 같습니다!

yamoo 2025-10-27 2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은 믿고 볼 수 있죠. 일단 저도 츠바이크 책들은 쟁여놓고 있는데, 이 책은 아직이네요. 이참에 얼른 갖춰놔야 겠습니다..ㅎㅎ

자목련 2025-10-29 12:35   좋아요 0 | URL
쟁여놓은 책만큼 츠바이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시군요!

coolcat329 2025-10-2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혼란은 두 번, 아모크 광인도 읽어봤지만 이 책으로도 읽고 싶네요. 츠바이크의 책은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입니다.

자목련 2025-10-29 12:36   좋아요 0 | URL
츠바이크의 문장은 정말 놀랍고 대단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