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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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어떤 장벽에 맞닥 들일 때가 있다. 그건 외부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크기로 다가오겠지만 전자의 경우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전쟁과 질병이다. 후자의 경우는 다스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삶의 전반이 흔들릴 때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야 할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나를 살게 하는 절박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의미할 것이다. 전쟁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삶에 속하지 않는 현재의 삶에 내심 안도한다. 전쟁과 완전히 차단된 채 살고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만큼 전쟁이라는 상황은 예측불가하니까. 전쟁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된 시대를 상상하며 공포가 득달같이 달려든다. 죽음이 선포되는 순간,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아마 수동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나이트 워치』의 여섯 청춘들의 어떤 삶과도 겹칠 수 없는 그런 시간을 보냈을 게 맞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 인물, 특히 여성인 케이, 헬렌, 줄리아, 비브의 일상에 더욱 눈길이 닿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세라 워터스의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그녀가 너무도 구체적으로 공간을 구성해 그 상실의 시대가 무척 실감 나게 다가왔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영국을 배경으로 시작해 여섯 명의 삶을 보여주며 그들의 과거를 1944년과 1941년을 통해 보여준다. 현재 그들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건과 인물에 대해 차례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대를 산다. 그래도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산다. 각기 저마다의 사정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건 당연하다. 이 소설이 탁월한 건 인물들의 관계를 식상하지 않게 잘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지만 어느 시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다는 것이다.

1947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케이는 짧은 머리로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낸다. 그녀의 집에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의사가 일을 하는데 그의 진료 내용을 엿듣거나 거리를 배회하고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다. ​고객이 원하는 여성을 찾아 연결을 해주는 상담소에서 일하는 헬렌과 비브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눈다. 모든 걸 다 말하는 헬렌과 다르게 비브는 약간의 비밀을 품었다. 헬렌에게는 작가로 성공한 줄리아란 동성 연인이 있고 비브에게는 헤어지지 못하는 유부남 애인이 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비브의 남동생 덩컨과 그가 교도소에서 만난 프레이저가 있다. 소설은 여섯 명의 현재와 과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뒤흔든 전쟁과 사랑에 대해 말한다.

소설 초반에 헬렌과 비브, 둘과 케이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헬렌의 관심은 오롯이 집에서 글을 쓰는 줄리아로 향한다. 그녀가 자꾸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를 떠날까 봐 두렵다. 줄리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꾸만 확인한다. 모든 게 안정을 되찾고 평온한 일상으로 기우는데 그녀는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사소한 것들, 가령 리전트 파크 밴드의 팡파르, 얼굴을 어루만지는 햇살, 발밑의 까슬까슬한 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진한 맥주, 사랑하는 이와의 은밀한 친밀감 따위를 즐기고 싶다면 멍청한 걸까,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이런 소소한 것들이 다일까? 이걸 지금 이대로 간직하면 안 될까? 이것들로 조그만 수정구슬을 만들어 부적처럼 목에 걸고 다니면 다음에 위험이 닥쳤을 때 도움이 되려나? (79~80쪽) ​

지독한 경험 때문일까. 그건 비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만남은 갖는 애인과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활하는 동생 덩컨도 비브를 힘들게 만든다. 어느 하나 쉬운 관계가 없다. 거기다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덩컨의 친구 프레이저까지.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과 그냥 이대로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게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케이의 고독과 덩컨의 과거를 만날 수 있는 1944년에 이어 1941년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깊은 심연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다. 구급 대원으로 일했던 케이와 그녀 곁에 있던 순수하고 맑은 헬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 대한 의심으로 교도소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덩컨, 그와 반대로 넘치는 확신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프레이저. 독일의 미사일 공습으로 집들은 파괴되고 대피소로 뛰어드는 일상, 밤마다 사람들을 구하려 폭격의 장소로 나가는 케이가 구조한 비브, 밤새 혼자 케이를 기다리다 운명처럼 줄리아를 만난 헬렌.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가 아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운다. 반은 무너지고 나머지 반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은 빛나고 격렬하다. 그 공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내게로 닿을 정도다. 사랑은 무엇일까? 쏟아지는 폭격을 뚫고 헬렌을 걱정하며 달려가는 케이의 용기일까. 극진한 케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향하는 줄리아에게 손을 내미는 헬렌의 마음일까.

엇갈리는 사랑으로 누군가의 삶은 비통함에 빠진다. 어쩔 수 없는 일, 전쟁처럼 영혼은 폐허가 되었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끝난 줄 알았던 상실의 삶은 계속된다.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한동안 그 시절, 그 공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잊은 줄 알았던 오래전 사랑이 그리워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어디선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살아가는 동안 내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붙잡고만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습니까? 잘 지내십니까? 그걸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뭘 하고 삽니까? (152쪽)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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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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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당연하다. 나는 작가가 아니고 작가가 내 의도대로 소설을 썼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어떤 내용을 예상했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어떤 사회적 고발을 다뤘을 거라 짐작했다. 포괄적 의미로 생각하면 사회적 고발은 맞다. 다만, 디테일에서 다를 뿐. 조남주의 『사하맨션』은 가상의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그 안의 오래된 낡은 사하 맨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구상이지만 얼핏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벗어날 수 없다. 본국과 분리된 섬이자 타운은 도시국가가 되면서 엄격한 신분제도가 생겼다. 주민권을 가진 L, 체류권을 가지고 2년마다 심사를 받아 연장해야 하는 L2. 그리고 사하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어떠한 국제기구나 지역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은 나라. 타운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사하맨션은 유일한 통로 혹은 비상구 같은 곳이다. (33쪽)

 

최소한의 안전장치, 기본적인 인권의 존중도 없이 사하라 불리는 이들의 일상은 참담했다. 그러나 사하의 주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공동체를 꾸렸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하나, 둘,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사하로 모여든 이들은 그들만의 규칙을 세우고 관리를 하며 40년을 이어온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사하로 들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그곳에 사는 이들, 한때 살았지만 지금은 없는 이들,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디론가 사라진 이들에 대해서.

 

701호에 사는 진경과 도경 남매는 처음부터 타운의 원주민은 아니었다. 본국에서 도경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이곳에 왔다. 어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사하에서 살아간다. 작은 희망이라면 막연하게  L2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일까. 아니, 그런 희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경과 도경뿐 아니라 사하맨션에 사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러했다. 사하에서 태어나 자란 사라, 우미, 우미를 키운 꽃님이 할머니, 관리실 지키는 영감, 그리고 생의 마지막으로 사하를 선택해 사하로 오는 사람들. 그들의 직업은 일정하지 않았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타운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주민권이 없었으니까.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네 현실과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람들을 태우고 흔적 없이 사라진 배, 메르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신종 호흡기 전염병, L2와 사하, 그리고 주민까지 모여 타운의 국회와 총리관을 향한 나비 폭동이라 불리는 시위 모습. 소설 속 사건 하나하나는 우리가 떠올리며 짐작할 만한 그때 그 사건들과 겹쳐졌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고 완전히 외면할 수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막연하게 소설이니까 기막힌 SF 이야기라 여길 수가 없다. 소설 속 인물 중 누군가는 내가 아는 이와 닮았고 그들의 고통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말할 수가 없으므로.

 

내가 모르는 세상 어딘가에 사하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갑자기 몰려든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몇 년 전 읽은 최인석의 『강철 무지개』가 생각나기도 했다. 차라리 현실과 동떨어진 구성으로 완벽하게 멋진 SF로 후련한 결말을 보여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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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6-26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요즘 정유정 작가의 신작과 함께 팟캐스트에서 많이 소개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전작 82년생 김지영과 많이 다르다고 하더니, 자목련님 리뷰 첫 문장에서도 그런 느낌이 오네요.

자목련 2019-06-26 16:52   좋아요 0 | URL
네, 화제의 소설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작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82년생 김지영>과는 다르지만 큰 들에서 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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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가 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누구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나는 친구의 기억 속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건 맞는데도 말이다. 기억이란 이처럼 완벽하고 정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지우고 싶은 기억은 그것을 아는 모두가 완전히 지워주기를 바란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큰 기대 없이 읽은 소설 『너의 이야기』이 자꾸만 기억에 대해 묻는다. 인생을 만들고 채우는 어떤 기억, 인생을 부수고 비우는 어떤 기억, 기억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만화 주인공을 떠올리는 표지 때문일까.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에 대한 조금은 뻔하고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던 내게 소설은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서툴고 어설픈 감정을 마주하는 스무 살 두 주인공의 마음이 아프고 그들의 쓸쓸하고 고독한 인생이 어느 시절의 우리와 닮아 먹먹했다. 나노로봇에 의한 기억 개조 기술을 통해 가공의 기억을 만들 수 있다는 기발한 접근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SF나 판타지를 예감하기에 충분하다. 소설의 주인공 치히로의 부모는 행복한 결혼 생활과 실재하지 않는 자녀와의 기억을 구매한다. 현실이 아닌 가공의 기억인 ‘의억’의 가공인물인 ‘의자’에게 대리 만족을 한다고 할까. 그런 부모를 보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스무 살 치히로는 다른 선택을 한다. 아름답고 행복한 의억이 아닌 그 시절의 기억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전부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공간에 아무것도 없기에 허무해진다. 차라리 그 공간 자체를 지워버린다면 이 허무도 안개처럼 사라지리라. 텅 비어 있다는 것도 이를 담을 그릇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완전한 제로에 가까워지고 싶었다.(14쪽)

​어쩌면 치히로는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치히로는 행복하고 소중한 청춘 시절의 의억을 복용한다. 첫사랑의 소녀 도카란 의자까지 말이다. 너무나 생생한 의억 덕분에 치히로는 혼란스럽다. 가공된 기억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카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녀를 그리워한다. 도카와 보낸 어린 시절, 학창 시절, 함께 들은 노래, 같이 보낸 서재, 그 모든 것이 치히로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놀라운 건 현실에서도 도카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다정한 도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치히로도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도카를 외면할 수 없는 마음. 그건 독자인 나의 마음도 같았다. 어쩌면 치히로와 도카는 진짜 친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할 정도다.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니까.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기억을 다투며 치히로와 도카가 더 가까워졌다면 청랑하고 예쁜 사랑으로 끝났을 것이다.

도카의 진실은 무엇일까? 소설은 이제 치히로가 아닌 도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치히로의 예상대로 도카는 의억을 만드는 ‘의억기공사’가 맞았다. 치히로가 의뢰한 이력서를 보고 도카는 청춘시절의 새로운 기억인 ‘그린그린’을 만들었다. ​도카는 누군가에게 아름답고 예쁜 기억을 만들어주는 완벽한 스토리 텔러였지만 정작 그녀의 어린 시절은 치히로와 비슷했다. 천신을 앓고 있었지만 부모님의 보살핌이 아닌 방치된 채 혼자 지냈고 학교에서도 양호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만의 시간, 가상의 친구를 만들면서 보낸 시간이 그녀를 의억기공사로 만든 것이다. 의뢰자의 상황에 맞게 완벽한 기억을 만든 그녀가 신형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 AD)에 걸린 건 운명이었을까? 점점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소멸하는 인생, 도카에게도 아름다운 기억, 소중한 인연이 필요했다. 도카 스스로 치히로의 ‘그린그린’ 속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이 된 것이다.

정체성의 존립 근거가 기억의 일관성이라 한다면, 나는 매일매일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해 겨울로 접어들며 나는 나 자신을 의뢰인과 의억 사이에 설치된 여과 장치와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단련에 따른 사적 감정의 소멸과 다른 점은, 나라는 인간이 글자 그대로 소멸함에 따라 나타나는 부차적인 현상에 불과했다는 점일 것이다.(282쪽)

나를 잃어버린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을 매일 마주하고 확인하는 삶이란 얼마나 무참한가. 모든 걸 알고 매일매일 도카를 찾아와 자신을 부정하는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치히로. 서로의 기억 속에 상상이나 환상이 아닌 진짜로 살아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너무도 절절하게 전해진다. 붙잡고 싶은 기억과 기억 사이를 걷는 느낌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더욱 마음이 아리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더 빨리 서로를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한 번 더 반전이 있기를 바랐다.

나는, 나만은, 도카를 구원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절망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공포를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321쪽)

기억을 다루는 소설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색다르고 신비로운 소설은 처음이다. 서로의 삶을 지배하는 기억는 갖는 일, 치히로는 도카에게 마지막이자 단 하나의 기억이 될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 우리가 마주하는 건 어떤 기억일까. 끝까지 붙잡고 싶은 기억은 무엇일까. 소설 속 의억과 의자가 허무맹랑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왜일까. 우리 주변에서 마주하는 질병 알츠하이머병 때문은 아니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하나의 기억을 지우고 하나의 기억을 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쓸지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남아 있는 건 사랑하는 이와의 기억이 아닐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사랑하는 이와 보낸 순간에서 생기니까.

운명의 상대는 존재한다. 그것은 당신의 연인이 될 상대일지도 모르고, 친구가 될 상대일지도 모른다. 파트너가 될 상대일지도 모르며, 호적수가 될 상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만나야 할 ​상대’가 한 명씩 할당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불완전한 인간관계를 묵묵히 받아들인 상태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370쪽)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말이다. 그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별을 반복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면 완벽한 삶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이는 얼마나 될까. 운명의 상대를 모르기에 삶은 비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치히로와 도카의 삶이 그런 것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억이 나에게로 왔다.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려고 한다. 누군가 나를 지치게 만들고 외롭게 할 때마다 나를 다정하게 안아줄 테니까.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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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2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이 책 표지만 보고 만화책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소설이었군요.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자목련 2019-06-26 16:54   좋아요 0 | URL
그쵸? 표지에 좀 더 공(?)을 들였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어쩌면 그래서 기대하지 않게 점수를 많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ㅎ

서니데이 2019-06-2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표지 보고 라이트노벨 같은 책 같았는데, 쌤앤파커스에서 나온 소설이었네요.
기억이라는 것이 소재가 된 이야기는 많은데, 이 책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가 되는 모양이네요.
리뷰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시원한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19-06-26 16:53   좋아요 1 | URL
보편적으로 다루는 기억과는 다른 접근이 아닐까 생각해요. 드라마 <바람이 분다>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서니데이 님도 남은 하루 평온하게 보내세요^^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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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몰랐던 거야. 우리는 무너뜨리는 것도 희망이고 다시 세우는 것도 희망이라는 걸. 허물어진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까와는 조금 다른 모양의 마음을 새로이 쌓아 올리는 것이 성장이라는 것을. 언젠가, 희망 덕분에 생긴 울퉁불퉁한 마음의 결을 한 겹씩 쓰다듬으며 그것을 경험이라고 부를 날이 오고야 말 거라는 걸. 그래 이 글은, 그 겨울 핸드폰을 이불 위에 던지고 울던, 단지 지금보다 조금 어렸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136~137쪽)

 

귀여운 캐릭터에 절로 눈이 간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이다. 애교가 넘치는 복숭아, 어피치. 분홍 분홍 색감이 설레는 봄을 닮았고, 맛있는 복숭아의 계절 여름을 부른다.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이런 기분 좋은 느낌은 무엇일까. 기분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처럼 다정함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글이라니. 매일 어떤 말이 넘어지고 어떤 문자에 속상하고 누군가의 태도에 마음이 쪼그라드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포근한 마음의 엉덩이였다.

 

길바닥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문득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 토실토실 말랑말랑, 그 어떤 거친 바닥에서도 뼈와 장기를 폭신폭신하게 받쳐주는 엉덩이. 심한 말, 못된 말, 독한 말을 들은 하루 몽실몽실 내 마음을 감싸, 그 어떤 명사와 동사도 경동맥을 찌르지 못하게 지켜주는 그런 마음의 엉덩이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6쪽 프롤로그 중에서)

 

감성, 치유, 위로라는 키워드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해 받는다면 그야말로 미세먼지 따위 걱정 않고 숨을 들이마시는 일처럼 반가운 일이다. 명랑만화를 보는 것 같은, 맛있는 불량식품을 먹는 것 같은 즐거움을 기대해도 좋다. 귀여운 악동 어피치의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는 덤까지. 사실 저마다 웃음 코드가 다르기에 아무리 내가 재밌게 읽었다고 해도 고스란히 그 느낌이 전달될 수는 없다. 그래도 남녀노소 누구가 좋아하는 뽀로로, 곰돌이 푸, 아기 상어를 떠올리면 생기기는 미소 같은 것이라 말하고 싶다. 아무튼 그랬다는 말이다.

 

 

나는 어제 눈을 빛내며 나 자신이 좋다고 말했고, 오늘은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가능하다면 평생 안 보고 싶었어. 매일 내가 예쁘고 매일 내가 미워. 내가 알기로 이런 변덕스러운 마음은 사랑밖에 없는데. (48쪽)

 

기발하고 산뜻해서 어디 공감 버튼이 없나 찾게 만드는 글, 이미 경험했기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말을 건네고 싶은 글을 지나 하루하루 복잡다단한 일상을 보내는 스스로에게 전하는 괜찮다는 글에서는 나도 그 말을 따라 하고 만다. 매일매일이 행복할 수 없듯 매일매일이 불행하지는 않다는 걸 확인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꽤 잘 사는 건 아닐까.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삶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지금 아파해도 괜찮아. 나는 네가 언젠가는 다시 행복에 겨워 두근거릴 거라는 걸 알고 있어. (78쪽)

지친 하루하루의 끝에 매달린 신나는 여름휴가를 계획하는 이들에게 휴가지에 어피치도 데리고 가라고 말하고 싶다. 게으르고 나른한 일상을 어피치와 함께 즐기면 어떨까. 조금씩 줄어드는 휴가가 아쉬워서, 일상으로의 복귀를 피하고 싶은 순간 어피치가 건네는 귀여움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휴가는커녕 잠깐의 휴식도 사치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쌓인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어피치의 귀여움은 확인해보는 게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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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감사노트 - 내 삶에 넘치는 하나님의 선물, 100일간의 감사 기록 153 감사노트
이찬수 엮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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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메모를 통해 잠깐이라도 나를 기록하며 기도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유용한 감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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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6-14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개 읽어보았습니다. 좋은 기록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매일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목련님, 편안한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19-06-15 10:09   좋아요 1 | URL
좋은 기록의 시작이라는 말이 참 예쁘네요. 서니데이 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