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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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부모나 선생님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인생에 있어 친구는 소중하다. 그렇다고 친구의 비밀을 무조건 알 필요는 없다. 내 비밀을 들어주는 친구의 비밀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도 하니까. 나는 그것을 ‘순환의 법칙’ 정도로 여긴다. 그런 삶의 순환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고 믿는다. 숨통이 조여오는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 생은 아름답게 빛난다. 발레리 페랭의 『비올레트, 묘지지기』 는 그런 소설이다. 켜켜이 쌓인 슬픔과 고통이 새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소설, 작은 틈을 벌려 그늘진 삶에 빛이 들어오도록 도와주는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묘지기기 비올레트가 들려주는 담담한 자신의 이야기는 모두를 울린다. 단순하게 묘지를 관리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나는 소설을 읽을수록 점점 그녀의 삶에 빠져들었고 제발 그녀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당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올레트는 묘지를 관리하고 방문객에서 묘지의 위치를 알려주고 화분을 팔고 정원을 가꾸며 고요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남편 필리프 투생은 실종 상태고 죽음에 둘러싸였지만 평온을 느낀다. 


죽음이란 늘 그 모양이다. 죽은 지 오래될수록 산 사람들에게 끼치는 죽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세월이 삶을 풍화시킨다. 세월이 죽음을 풍화시킨다. (21쪽)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비올레트, 소설은 그녀가 살아온 삶을 천천히 보여준다. 누군가 죽고 장례식이 진행되고 추모하는 이들의 모여 죽은 자를 위해 노래하고 편지를 낭독하며 그를 기억하는 일,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그 순간을 기록하는 비올레트.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녀의 상처와 슬픔, 죽음이라는 사유를 통해 조금씩 회복하고 치유되는 시간은 그녀만의 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것이기에 때로 엄숙해지고 때로 먹먹함을 숨길 수 없다.


죽음은 도처에, 언제나 있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안 그랬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은, 늘 다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데도 우리를 물어뜯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개와 같다. 더 나쁘게는 우리 측근을 물었을 때. (117쪽)


아무리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삶은 너무 복잡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슬픔의 파도가 덮쳐온다. 비올레트에게도 그랬다. 부모에 대한 흔적은 하나도 모른 채 고아로 시작된 삶. 비올레트란 이름에 의미조차 생각할 수 없다. 이리저리 위탁가정을 옮겨 다니며 그녀가 바란 건 그곳을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등장한 필리프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첫 만남에 끌렸고 그를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필리프와 미래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없었고 사랑하는 일만 중요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필리프의 부모를 그가 막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곧 비올레트의 전부가 된 딸 레오닌이 태어났으니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차단기를 관리하는 건널목지기도 비올레트는 충분했다. 


레오닌은 비올레트를 웃게 했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바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오닌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친구들과 신나게 캠프를 떠난 레오닌이 사고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레오닌의 죽음은 비올레트의 삶을 꺾어버렸다. 슬픔의 무게로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레오닌이 잠든 곳의 묘지지기로 일하게 된 건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레오닌을 만나러 간 곳에서 사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비올레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침잠한 채 죽은 듯 살았을 것이다. 슬픔에 잠긴 비올레타에게 묘지지기를 하면서 그가 정원을 가꾸게 된 이야기를 듣고 흙을 만지며 그녀는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거기 레오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레오닌의 사고에 집착하는 비올레타에게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삶이란 이어달리기와 같아, 비올레트. 내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지. 내가 너에게 바통을 넘겨줄게. 언젠가 너도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도록 해.” (383쪽)


그러나 비올레트와 다르게 필리프는 묘지지기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묘지를 관리하는 일은 비올레트만으로 충분했기에 그는 예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를 만났다. 그의 외출은 실종으로 이어졌다. 죽음이 정착하는 묘지를 살피고 기록하는 비올레트에게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언을 위해 묘지를 찾은 남자 쥘리앵의 등장으로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경찰인 쥘리앵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비올레트에게 건넨다. 그 일기장에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록과 죽은 남자의 묘를 찾을 때마다 만난 묘지지기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발레리 페랭은 비올레트를 중심으로 남편 필리프와 쥘리앵과 그녀의 어머니, 레오닌 죽음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엮었다. 소설 곳곳에서 모든 죽음을 애도하며( ‘모든 죽음은 누군가의 사건이니까요.’ (49쪽)), 죽음과 삶을 사유(‘우리는 목숨을 구하는 방법은 배우지만, 자신 혹은 타인의 삶을 되살리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496쪽))하고 통찰한다. 동시에 아름다운 한 편의 연애소설이자 끝을 예상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형식도 지닌 놀라운 소설이다. 부서질 것 같은 비올레트의 생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적과 신비를 배운다. 저마다 생의 비밀을 간직하며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상실과 회복을 반복하는 모든 생을 위로한다. 좋은 소설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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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2-07-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덕분에 좋은 소설 하나 더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7-28 08:20   좋아요 0 | URL
저는 무척 좋았던 소설입니다. 오거서 님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 2022-08-0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저..자목련님 리뷰읽고 바로 책주문했어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8-08 15:17   좋아요 0 | URL
좋은 느낌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게 만나세요^^
 
멀쩡한 남자를 찾아드립니다 - 그웬과 아이리스의 런던 미스터리 결혼상담소
앨리슨 몽클레어 저자, 장성주 역자 / 시월이일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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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몽클레어의 장편소설 『멀쩡한 남자를 찾아드립니다』은 한창 방송가를 휩쓰는 연애 상담이나 일반이 출연해 커플로 이어지는 내용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세상의 수많은 남자 가운데 운명처럼 누군가 만나는 일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기에 전문가의 도움과 조언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21세기의 현재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남을 시작하지만 소설 속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영국의 현실은 다르다. 그러니 소설 속 ‘바른 만남 결혼 상담소’ 는 시대의 요구상을 반영한 기발한 사업이다. 


상담소의 사업자는 두 명의 여성 아이리스와 그웬으로 고객이 원하는 타입의 상대를 꼼꼼히 기록하고 연결시키려 노력한다. 아이리스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추구하지만 뭔가 비밀에 가득하다. 그웬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아들의 양육권은 시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시댁에 살지만 아들의 양육에는 권리가 없다. 환경과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둘은 서로를 보완하는 완벽한 파트너다. 상담소는 별 탈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여성 고객 틸리가 상담소를 통해 소개 받은 남성 고객 트로워에게 살해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담소에 찾아온 형사는 아이리스와 그웬에게 살인도구인 칼의 피에서 틸리의 혈액형과 일치하고 그 칼이 트로워의 침대 밑에서 발견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작 트로워는 틸리에게 만남 취소의 편지를 받고 만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담소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환불 요청이 끝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업이 망할 지경이다. 그웬은 트로워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아이리스에게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잡자고 제안한다. 


소설은 달콤한 연애 로맨스가 아니라 살벌한 미스터리였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웬은 트로워의 무죄를 확실하면 그를 면회 가기에 이른다. 그웬은 자동차가 아닌 지하철, 버스를 이용할 방법을 모르는 우아한 사모님이었다. 하녀의 도움으로 트램을 이용한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을 잃고 발작으로 힘들었던 그웬에게 상담소는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구였다. 자신이 본 트로워는 절대 범인이 아니었기에 기필코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구치소에서 자신이 기르는 금붕어를 걱정하는 남자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는가. 


아이리스와 그웬은 틸리의 주변을 탐색한다. 가명으로 미리 틸리와의 친분을 꾸미고 그녀가 근무한 여성복점과 그녀를 추모하는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해 틸리가 누구를 만나고 사귀고 은밀하게 알아본다. 그 과정에서 틸리가 조직적으로 암거래를 주도하는 무리의 일원이었음을 확인한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되지 않은 런던에서 배급받은 물품은 빼돌리거나 뒷돈을 받고 거래하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거기다 배급표를 위조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 계획과 비밀을 모두 틸리가 알고 있다면 무리에서 틸리를 죽일 동기가 충분했다. 경찰은 트로워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용의자의 등장으로 아이리스와 그웬의 활동은 더욱 대담해지고 활발해진다.


틸리를 죽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고 성장하는 아이리스와 그웬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함구하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와 연락해 위기를 극복하는 아이리스는 그웬에게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지만 부상으로 참여하지 못했으며 작전에 참여한 다른 동료가 돌아오지 못함을 말한다. 그웬 역시 남편의 전사 소식으로 충격을 받아 감금과 같았던 정신병원의 입원 생활과 현재 시어머니가 지정한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양육권을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복종하듯 지내는 시간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까지. 


아이리스와 함께 틸리가 만났던 사람을 만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서 그웬은 조금씩 달라진다. 진범을 찾는 활동에 못마땅한 시어머니와 대립하면서도 자신감을 찾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유머까지 넘치는 아이리스와 뛰어난 통찰력으로 진중하면서도 단호한 그웬의 연대는 서로를 더욱 성장시킨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대단한 활약뿐 아니라 경찰 조직이나 가십을 다루는 신문기사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보여주며 비판하는 목소리까지 담은 소설이다. 소설 곳곳에서 의견을 나누는 아이리스와 그웬의 대화는 시원하고 유쾌하다. 


“내가 너한테 이 정신 나간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한 건,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평생 남자들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리 듣는 게 아주 지겨워 죽을 것 같아서였다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 살지는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어서였다고. 그랬는데 이제 그게 다 물거품이 될 판이야. 웬 미친놈이 죄 없는 여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죄가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어.”

“죄가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여자 본인도 살인자였다면 모를까. 희망을 손에 넣어야 할 밤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는 신세가 된 건 너무나 부당해. (…) 우린 지금 궁지에 몰렸고, 난 궁지에 몰리면 싸우는 쪽이야. 그것도 아주 지저분하게, 손에 잡히는 무기는 뭐든 다 이용해서.” (178~179쪽)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미루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 절망이 아니 희망을 보려는 아이리스와 그웬의 의지는 전쟁 후 폐허속에서도 삶이 이어가는 모두의 것과 닮아 가슴이 뭉클하다. 지루함은 1도 없는 유머와 재치에 넘치는 감동까지 안겨주는 멋지고 통쾌한 소설이다.


폭격의 흔적이 더 많이 눈에 띄었고, 2층 좌석에 앉은 덕분에 보도 쪽의 시선을 가리려고 세워둔 임시 가림벽 너머까지 언뜻언뜻 눈에 들어왔다. 폭격이 무차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남아 있는 증거에 또렷이 드러났다. 극장 한 곳은 조금도 망가지지 않는 채 우뚝 서 있었지만 바로 옆의 극장은 무너진 상태였고, 무대만 그대로 남아 다시는 오지 않을 관객들을 기다렸다. 허물어져가는 벽에 붙은 광고들은 희망찬 내용을 담고 있었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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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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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의 장편은 처음이다. 여성의 상처와 연대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다. 함께 살아가는 삶을 향한 태도가 비관과 부정이 아닌 낙관과 긍정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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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효석 수상작집을 통해서 이서수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요^^ 하이퍼 리얼리즘을 구사하더군요. 현실을 너무 잘 묘사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이 책 저도 마음 속으로 찜해놓고 있었는데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자목련 2022-07-27 14:21   좋아요 0 | URL
<미조의 시대>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그 단편이 좋아서 작가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 장편도 좋았어요^^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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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강의 초기 소설을 더 좋아한다. 최근 그녀의 소설이 사회 전반에 큰 울림을 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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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고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인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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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소유가 아니라는 걸 안다. 무조건적인 사랑도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상대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랑은 내가 원하는 사랑만 고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결혼에 이르렀지만 어딘가 잘못된 걸 느꼈을 때 그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랑수아즈 사강의 스물아홉 번째 소설로 30년 만에 부활한 『황금의 고삐』 속 뱅상과 로랑스 이야기다. 


결혼 7년 차에 접어든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사랑이었다. 부유한 로랑스의 집안에서 무명의 음악가 뱅상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뱅상과의 결혼으로 로랑스는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선택한 로랑스의 사랑은 뱅상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로랑스가 원하는 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뱅상은 움직였다. 양복 스타일은 물론이고 뱅상의 용돈, 사랑을 나누는 방식까지 로랑스가 결정했다. 뱅상은 그 사랑에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뱅상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살짝 외도를 하는 일상을 유지했다. 그가 만든 영화 음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뱅상의 성공으로 기울어진 사랑이 적어도 균형을 이루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그들의 사랑에 균열을 냈다. 뱅상의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그 돈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제껏 로랑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며 살아온 뱅상에게 돈은 내적 자유를 허락했다. 마음대로 양복을 고르고 친구와 함께 지낼 곳을 생각하고 새로운 피아노를 구입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상한 건 로랑스가 뱅상의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음악으로 받은 수입을 전부 지인이 만드는 영화에 투자하자고 제안하고 장인을 내세워 공동계좌를 만들었다. 그것은 돈을 찾을 때마다 로랑스가 서명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랑스와 뱅상의 거리는 멀어진다. 그 과정에서 뱅상은 로랑스와 자신의 사랑을 돌아본다. 로랑스는 분명 자신을 사랑했다. 하지만 뱅상은 로랑스에 대한 사랑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로랑스를 만나면서 어느새 자신을 지배한 로랑스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랑스가 뱅상을 가스라이팅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입을지 뱅상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영화 음악으로 성공한 뱅상의 뒤에 뛰어난 조력자인 로랑스가 있다는 기사와 인터뷰를 뱅상만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누가 봐도 뱅상을 향한 로랑스의 집착이었다. 안타까운 건 뱅상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랑스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의 절망의 근원에는 우선 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힘도, 신뢰감도 경쾌함도 갖지 못한 나, 유치하고 소심하고 보잘것없는 나, 마침내 나는 존재 그 자체보다 나 자신을 더 원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다른 내가 있어서, 그것은 보통 때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삶을 되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256쪽)


사강은 너무도 뻔한 사랑을 다루면서도 전혀 뻔하지 않게 사랑을 다룬다. 사강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아름답고 솔직하게 담아낸다. 로랑스와 뱅상의 교묘하게 주고받는 밀당으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게 만든다. 얼핏 『황금의 고삐』에서는 모두가 로랑스가 고삐를 쥐었다고 믿게 만든다. 사실 그렇다. 뱅상이 경마에서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일도 잠깐의 일탈처럼 여겨지니까. 뱅상이 집을 나가려 하자 로랑스는 자신의 진심을 토해낸다. 경제적인 지원이 아니면 뱅상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다고. 


나는 로랑스가 좀 지나치게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지나친 감정이 그녀에게 지옥 같은 생활과 맞먹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는 어리석고, 경멸한 만하고,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맹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그녀가 가진 어떤 그 무엇, 내가 알지 못했고,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것이며, 또 아쉬워하면서도 내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듯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을까? (301~302쪽)


독자인 나는 뱅상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 로랑스가 연기를 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 예나 지금이나 이토록 어렵고 힘든 게 사랑이다. 어쩌면 그건 로랑스가 뱅상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결말로 로랑스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했으니까. 사강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한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로랑스와 뱅상의 사랑은 어긋나버렸고 잘못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뱅상의 전부를 소유하고자 했던 로랑스의 사랑을 판단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뱅상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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