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늑대 파랑
윤이형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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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형의 소설은 두 번째다. 『셋을 위한 왈츠』은 놀라웠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만든 인물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온 그런 인물처럼 여겨졌다. 『큰 늑대 파랑』 역시 독특했고, 그녀의 상상력을 따라가기에 나는 힘든 독자였다. 소설들은  SF 소설이나 게임의 한 장면에서 볼 듯한 공간 설정과 인물이 등장한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지구, 그 먼 미래 사회의 이야기인 <스카이워커>의 사람들은 과거에 알려하지 않는다.  아니 현재만이 중요한 것이다. 주인공 지현은 트램펄린 선수다. 한 방향으로만 뛰어오를 수 있는 그녀에게 중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벽 너머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신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하나의 기준만을 보려 하기 때문에 지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하나였다.  ‘다가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열어두지 않으면 이해받을 수 없다.’ p. 47  지현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말은 미래나, 현재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첫 단편은 나를 어지럽게 했다. 문장을 읽고 있었지만,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기질 외에 원하는 성격, 능력을 튜닝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항해>, 좀비가 등장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큰 늑대 파랑>,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 힘든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자기의 본체와 분리체를 만들 수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결투>도 마찬가지다. 모두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완전한 항해>가 특히 그러했다.  

 주인공 창연은 해마다 생일을 맞이해 자신을 투닝한다. 과거의 내가 미술에 관해 몰랐다면 그 방면에 유능한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해 창연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창연이 되는 것이다.  50번 째 생일을 맞아 창연의 몸으로 튜닝을 할 대상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1cm도 안되는 ‘루’족의 창이란 여자였다. 

 창은 가보지 못한 세상을 꿈꾸었다. 달 가까이 날아가고 싶었다. 인간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해가 바뀔수록 보여지는 창연은 완벽한 사람으로 변화했지만, 그를 창연이라 할 수 있을까. 여러 인물이 통합된 모습, 진짜 나를 설명할 수 없고 나를 구성하는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삶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에 비해 미세한 생물체에 불과한 창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곧 죽음이 닥칠걸 알았지만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의 이비와 몽식,<맘>에서 엄마를 찾는 딸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 두 단편에서 작가 스스로의 이야기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아니, 대부분의 독자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미치도록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이비는 상대적으로 그런 글을 쓰는 친구 몽식이 부럽다. 부정적이고 더러운 상황 묘사를 하더라도 몽식의 글은 언제나 따뜻했고 아름다웠다. 

 그런 몽식이 이비에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 기계가 몽식의 문장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었다. 정말 이런 기계가 등장하는 날이 온다면, 기뻐해야 할까. 몽식은 자신의 글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고백하며 혼란스러워한다. 몽식에게 이비가 남긴 글은 모든 글쓰는 이에게 큰 위로를 준다. 창작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작가들에게 말이다.  

 ‘여러자기로 힘들겠지만, 몽식아, 어쨌든간에 나는 네 글을 정말 좋아한다. 너는 가짜라고, 네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가짜를 진짜게 되게 하는 게 글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고, 따지고 보면 순수하게 독창적인 것은 사실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또 뭔가를 하나 더 만들어 가만히 놓아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 266 

 <맘>은 특히 윤이형을 떠올리게 한다. 80일 동안 사라진 엄마를 찾는 과정을 담은 소설을 통해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이 단편에도 50년 후의 미래를 경험하고 돌어오는 타임머신이라는 장치가 있긴 하다. 그러나 엄마를 닮은 딸이지만, 정적 엄마가 살아온 삶과 그녀가 원하는 것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딸의 모습은 현실과 가장 가깝다. 먼 미래로 사라진 엄마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딸을 통해 어떤 상황이든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숙명이 느껴진다.  

 『셋을 위한 왈츠』에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만났다면 『큰 늑대 파랑』에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큰 늑대 파랑>이 더 좋다. 소설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중력을 지배하는 세상, 어쩌면 곧 현실이 될지 모르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한 세상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세계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읽는 동안 3D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중요한 건 환상적인 환타지로 내세운 이미지 속에 이 시대의 자화상과 이 사회의 고민들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단절된 관계, 소통을 원하는 사회,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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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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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매일 힘들다고 투덜대는 생에 빛나는 보석들이 숨겨져 있는지 알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걸까. 인생이 아름답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느닷없이 내린 소나기에 옷이 다 젖었지만, 그후에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다가올 앞날을 계획하고 혹시나 하는 사고에 예방하며 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변수가 존재한다. 문제는 그 변수의 범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힘든 건 왜 내게라는 물음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 중 그게 왜 나여야 하는지, 그 분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쓰다 답과 마주했을 때 삶은 그에게만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리라. 

 1992년 동명의 영화로 개봉한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우리 생에 그런 비밀을 숨겨져 있음을 말해준다. 소설은 1985년 12월 인생의 허무함으로 힘들어 하는 에벌린은 시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에서 만난 노부인을 통해 그녀의 시댁인 스레드굿가와 막내 시누이 이지의 삶에 대해 들려준다.  

 그러니까 두 개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1985년 에벌린과 스레드굿의 깊은 우정과 1920~1930년대를 시작으로 활달한 이지와 아름다운 루스를 중심으로 앨리배마 주 휘슬스톱 카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미국 남부 시골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겨운 일상을 말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시대, 열차사고가 빈번했고 전쟁이 일어났던 시대다. 그리하여 사회는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경제불황까지 몰려왔지만 앨리배마 휘슬스톱엔 언제나 따뜻함이 가득했다. 꼬집어 말하자면 그곳에 이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사려깊은 이지로 인해 마을은 생동감이 넘쳤다. 그녀는 사람들을 웃게 했고, 사람들은 감동시켰다.  그녀를 사랑하는 루스와 가족과 이웃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삶이었다. 

 가장 모범적으로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사회생활만이 중요한 남편을 보며 우울한 에벌린에게 노부인이 들려주는 휘슬스톱 이야기는 누구나의 삶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한 쪽 팔을 잃은 아이를 바라보며 슬픔 대신 웃음을 짓는 모습, 전쟁터에 간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도,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는 소망,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슬픔이 함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에벌린은 시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노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처음엔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지만 노부인과 만나면서 그녀는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여든이 넘은 노부인의 눈에 이제 겨우 마흔을 넘긴 에벌린의 분노와 두려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과정일 뿐이었다. 이미 그 모든 감정을 지나온 노부인은 에벌린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용기를 준다. 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노부인이 남긴 편지를 에벌린이 읽는 장면에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야기로 들었던 휘슬스톱 카페와 사람들이 떠나버린 마을을 돌아보며 과거를 상상하는 에벌린처럼 나도 그곳을 상상한다. 

 아름답디 아름다운 소설이다.  마치 내 어머니가 전해주지 못한 말들을 듣는 기분이랄까.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올리브 키터리지』나 『사우스 브로드』를 떠올린다. 아니, 그 소설들을 읽고 앨리바마의 휘슬스톱 카페의 이지를 떠올려야 맞다.  
 
 이지와 루스가 서로에게 열린 문이었듯이 우리의 곁에도 분명 그 문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더 큰 문을 바라는 욕심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리라. 너무도 식상하고 진부한 경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스레드굿 부인의 말을 옮겨둔다.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 두신답니다.’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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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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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진행중이거나 사랑이 끝났음에도 그 사랑의 그늘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 객관성을 잃는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아주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사랑이 끝난 뒤에 그 사랑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마나 다행이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된 관찰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내가 아닌 타인의 사랑에 대해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함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백처럼 말이다. 그 고백이 쓰디 든 답장으로 돌아온다면 짝사랑으로 분류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표현과 소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보이지 않았던 상대의 단점이나 결점은 그 사랑이 커지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 그 과정에서 결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어떤 경우는 그것으로 인해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그것은 소통의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 남자가 사랑한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인 『너를 사랑한다는 건』은 결국 소통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 아니, 알랭드 보통이 스물 셋에 썼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기 형식을 띈 소설이자 에세이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해 논한다고 해야겠다. 소설은 흥미롭다. 스물 셋의 청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를 생각할 때 그는 아주 생각이 많은 청년이었겠구나 싶다. 소설 속 ‘나’가 사랑한 이사벨의 이미지는 내게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물론, 내가 그 시절과 아주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가 해온 사랑은 우리 욕구의 진화 과정을 드러낸다.’ p. 170

 서로 다른 환경의 두 사람은 단순한 호감이나 첫 느낌에 반해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 느낌은 누구는 웃는 모습에, 누구는 커피를 든 손가락의 형태에, 누구는 목소리에, 누구는 입고 있는 옷 색깔처럼 다양할 것이다. 관계는 만남의 횟수나 대화의 양에 따라 확장된다. 중요한 건 대화의 소재가 무엇이냐에 따른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듯 보편적으로 어린시절, 집안, 가족, 과거의 연인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뤄질 것이다. 피상적인 대화가 아닌 깊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구하고 끌어내는 정보의 양은 절정에 이른다.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 동료, 일, 유년, 삶의 철학, 사랑의 역사 등의 주제를 탐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전되면 불행한 상황이 전재되기 시작한다. 친밀감이 점점 심오해지는 주제에 관한 더 긴 대화의 촉매가 되기는 커녕, 외려 정반대의 시나리오를 펼쳐놓는다.’ p. 328~ 329

 경험자들은 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믿음이 얼마나 얕은 판단인지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다.  나와 당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말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이라서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과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다는 건,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계속되고 지속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어쩜 그건 모든 관계에 해당되는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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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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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읽기 힘들다. 가장 최근에 만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비롯하여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대표적이다. 해서, 페루 태생의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엔 기대와 동시에 두려움이 있었다. 염소의 축제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과 첫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염소의 축제』는 열네 살에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난 후 35년 동안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산 주인공 우라니아가 병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고향에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우라니아가 들려주는 1996년 현재 시선과 독재자 트루히요가 정권을 잡던 과거 시절, 그리고 그를 암살을 시행하던 날(1961년 5월 30일)의 시선으로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우라니아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친척에게 들려주고, 나머지 두 개의 시선은 과거에 머무르는 무척 흥미로운 흐름이다. 

소설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 개의 이야기는 모두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과연 서사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주인공 우라니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궁금증이 제일 크다. 트루히요 측근으로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독재자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그로 인해 우라니아가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진실은 사라지고 아부와 아첨이 가득했던 시절, 언제 독재자의 눈 밖에 날까 두려운 정치인들이 존재했다. 허수아비 대통령을 내 세우고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를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또한 트루히요를 제거하는 거사를 완벽하게 해냈지만, 그들이 원하던 세상으로 변화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리라. 수 십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체제가 하루 아침에 달라질 리 없었다. 1인자가 죽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여전했고 사람들에게 공포는 습관처럼 존재했다. 암살자가 되버린 그들은 숨겨주고 보호해 줄리 만무했다. 그들은 살고 싶었으니까. 순간의 선택의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올 수 있는 시대였다.   

 “주요 음모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는 스스로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트루히요의 시체는 거기에 있었지만, 트루히요는 계속 그들 안에 살아 있었던 것이지요.” p. 377 - 2권  바르가스 요사의 인터뷰 중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쓰여졌기에 서사는 탄탄했다. 염소로 불리던 트루히요가 벌이는 축제에 대한 묘사는 생생했다. 헤서, 더 잔혹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오만과 성에 대한 혐오스러운 집착은 너무도 끔찍했다. 우라니아가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일흔의 독재자가 열네 살 소녀를 범하는 장면은 차마 읽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랬다. 독재자가 가진 힘은 그토록 강했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역사속 잔인한 독재자들의 이름이 떠오른건 자명한 일이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자체가 중요했다. 우라니아가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이유도 그러하리라.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했고, 공부해야 했고, 아버지와 고향, 조국을 잊어야만 했다. 그러나 잊혀질리 없었다. 35년이란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자신을 남에게 맡긴 채 눈만 뜨고 살아남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독재자에게 딸을 바친 아버지를 그만 용서하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과거는 잊고 현재의 성공한 삶을 누리며 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신 있게 말하지만, 날 부러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오히려 난 너희들이 부러워. 그래, 그래. 나도 알아. 고모와 너희들도 문제가 있고, 힘든 시기를 보냈고, 실망하고 절망하기도 했어. 그러나 가족이 있고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친척도 있고 조국도 있어. 그런 게 바로 인생이겠지. 하지만 아빠와 총통은 나를 볼모지로 만들었어.” p. 365 - 2권 

 우라니아에게 사촌들과 고모가 누렸던 인생은 없었던 것이다. 한 여자의 인생은 열네 살에 머물러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라니아는 도미니카 공화국를 비롯한 독재 정치의 희생양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타의 인물들과 배경, 역사적 기록들과는 다르게 우라니아는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권력의 횡포의 대상은 언제나 약자와 여성이었다는 것을. 잔혹한 축제는 도미니카 공화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여전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이 높이 평가받는 점은 아마도 그런 점이 아닐까 한다. 그곳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꺼낼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의 뚜껑을 과감하게 열어버린 것이다. 해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고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황과 위치에 따라 사람들은 변화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독재자가 사라지고 발라게르 대통령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안정을 되찾아가는 과정과 조금씩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의 모습을 통해 위정자들과 권력의 집행자들이 무언가 느끼기를 바란다.   

 이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나처럼 도미니카 공화국 를 검색했을 것이다.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의 그 도미니카 공화국이 분명한데, 전혀 다른 느낌이다. 카리브해 이스파니올라섬의 동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한때 트루히요 시로 불리었던 우라니아의 고향 ‘산토 도밍고’에 더이상 어떤 식으로든 염소의 축제는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회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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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의 사태 - 김도언 소설집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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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소설가와 소설의 주인공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한데 말이다. 소설가와 주인공의 동성이거나 같은 연령대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소설을 통해 소설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뿐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 역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해서, 자전소설이나 산문집을 통해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리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신경숙의 『외딴방』이 그 예가 아닐까 한다. 작가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랑의 사태』를 읽으면서 작가 김도언이 아니라 ‘그 남자 김도언’을 읽는 듯했다. 이건『불안의 황홀』의 여파인지 모른다.  

 『불안의 황홀』에서 만난 김도언은 밝음 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가볍지 않고 무거운, 투명하기 보다는 불투명에 속해있었다. 해서, 그의 소설을 읽기 전 어떤 긴장감이 몰려왔다. 한데,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나 <악취미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랑의 사태>는 내게 평이했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단편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그건 곧 드러낼 냉소이며 광기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 말은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란 말이다.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 연보>,<백하동 가는 길>을 제외한 나머지<권태주의자>와 <랑의 사태>,<다큐멘터리 가족극장>,<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다크블루, 시간의 풍경>은 작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화자는 소설가이거나, 출판사의 편집장, 시인, 시를 읽거나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권태주의자>와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설 속 인물이나 배경이 같은 <권태주의자>나 <랑의 사태>는 마치 연작소설으로 읽힌다. <권태주의자>는 제목 그대로 권태로운 삶을 사는 이야기다. 뚜렷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그러나 한 편으로 보면 무언가에 집착하듯 보인다. 소설엔 화자가 벤자민 나무와 대화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벤자민 나무의 답에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위협받는 포로처럼 우울해요.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 우울해요. 한쪽 발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울해요.”  p. 118  

 벤자민 나무도 화자처럼 권태주의자였던 거다.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이라니.누군가는 지루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자 탁구장 주인인 화자 삼촌이나 화자는 모두 권태주의자답게 살고 있다. <랑의 사태>는 랑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도서관에서 삼촌의 시집을 읽고 있는 랑을 만난다. 랑은 모텔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랑에게 부모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녀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면 살아낼 수 없는 여자다. 화자는 기꺼이 랑의 환상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삶, 때때로 누구나 바라는 권태로운 삶이 아닐까.

 <다큐멘터리 가족극장>,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장남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저버린 큰 형과 쌍둥이 형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에서는 평소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아버지의 삶을 빌어 우리 생에 가져야 할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안과 밖을 나누면서 모두들 따뜻한 내부를 갖기를 원한단다. 우리는 밖이 아닌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것이지. 그런데 나에게는 이 세상이 온통 까다롭고 사나운 바깥 같구나. 사는 것이 참으로 두렵고 어려워. 어떻게 저 밖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 p. 203~ 204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삶은 무엇일까. 한 가족의 가장이며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온 삶 속에 이같은 생각들이 가득했을 꺼라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하니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생이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단할까.  이는 서른 아홉의 출판사 편집자인 화자가 열두 살 아래의 그림작가를 사랑하는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은퇴를 앞둔 야구 선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인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에서도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소통에 대해 말이다. 

 9편의 소설에서 김도언은 이런 삶을 지향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소설들은 하나의 특정한 에피소드를 통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죽음이라든지 존재의 이유처럼 다소 철학적인 것들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쉽게 꺼내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 일들 말이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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