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었던 지난 9일, 오후 8시를 오전 8시로 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검색했다. 온라인 서점에도 노벨문학상을 검색하기도 했다. 아무리 찾아도 수상자는 없었다. 나의 손은 그렇게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다. 연관 기사를 검색하고 읽고, 모두 손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읽고 싶은 도서나 관심 가는 도서에 대한 리뷰를 읽고 공감을 누르는 일도 손이 하는 일이다. 책을 구매하는 일, 훔치고 싶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 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나는 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오른발을 주무르고 매만지는 일도 손이 하는 일인데, 그저 발만 안아주고 말았다. 눈이 보고 놀라는 일에 대한 표현도 눈이 보고 좌절하는 일들 끝에도 손이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손을 고마움을 문득 생각한 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문장도, 소설도 결국엔 손에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세계문학이 아닌 책으로 읽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는 이제 더이상 파트릭 모니다노만의 문장이 아니다. 책은 읽은 저마다의 독자에게 새로운 문장이 되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그 문장을 썼을까. 그가 문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 손은 얼마나 봤을까. 이런 맹랑한 생각을 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명확하게 잡을 수 없는 기억과 존재,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놓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내 짐작일 뿐이다. 나는 아직 그의 다른 소설을 접하지 못했고 친절한 출판사가 제공한 글을 통해서 말이다.

 

 

 문학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시를 읽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는 어쩌면 소설로나마 타인의 내부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반대로 내가 전하지 못하는 은밀한 내부를 누군가 알아주기 바라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의 가치는 어떤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의 작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장, 태어나는 인물, 다시 살아나는 역사의 부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감춰지고 숨겨진 잘못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다시 복원된다. 개인 혹은 나라를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힘, 그들의 손은 위대하다. 그래서 『16인의 반란자들』이란 책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들, 문학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어떤 체제와 사상에 반하여 추방되고 생명까지 위협받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요.”  주제 사라마구의 말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라니, 그건 도대체 어떤 사명이었을까. 그들 중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새로운 반란자를 만나고 싶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손이 그들의 고단한 손을 감싸는 일은 그들의 문학을 읽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런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눈먼 자들의 국가』를 펼친다. 제대로 읽을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4월 16일, 나는 뉴스를 보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안산(安山)에 아는 이가 없었고 전원구조, 란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꽃같은 아이들이 꽃처럼 지고 있었다. 황정은의 손이 쓴 글처럼 어떻게 지내십니까, 누군가에게 묻는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경우 4월 16일 이후로 말이 부러지고 있습니다. 말을 하든 문장을 쓰든 마침내 당도하기가 어렵고 특히 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을 맺어본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 참에 질문을 해보라는 청탁을 받았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쓰겠다고 대답했다. 질문이든 뭐든 말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이대로는 내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력감을 어떻게든 견디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 문장을 쓰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기가 있었다. (황정은 - 「가까스로, 인간」 중에서)

 

 

 다음 주면 사건이 발생한지 6개월이 된다. 내가 사는 이곳의 아이들은 다시 수학여행을 떠난다. 그저 말간 얼굴로 조금은 들뜬 마음을 드러내며 손을 흔들며 떠날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이라는 계절이 지나고 있다. 깊은 바다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언제쯤 알 수 있을까. 나의 손은 당신의 손과 달라서 부끄럽게도 이제 세월호를 검색하지 않는다. 당신의 손이 만든 문장을 읽으며 다시 나의 손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그저 닿을 수 없는 온화한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댓글을 달고 공감 버튼을 누르는 보통의 손, 위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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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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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닿은 곳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세상은 특별한 것에 주목한다. 말을 바꾸자면 개성을 존중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기울기는 독특한 것보다 예쁘다는 쪽에 기운다. 그러니 선천적으로 얼굴에 거대한 흉터를 지닌 여자가 세상을 향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움츠리게 된다.

 

 주인공 선화는 오른쪽 얼굴을 덮은 짙은 흉터로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서른다섯 살의 여자다. 꽃집을 운영하면서 꽃을 잡고, 꽃을 만지고, 꽃과 함께 살아간다. 선화의 상처를 알지 모르는 누군가는 꽃과 보내는 일상을 아름다움의 결정체라 여기며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선화는 단 한 번도 꽃처럼 환한 미소를 보인 적이 없다.

 

 존재만으로도 가족에게 짐이었던 선화였다. 할머니는 선화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험한 말을 내뱉었다. 언니 연화는 흉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선화를 증오했다. 결국 선화가 연화의 얼굴에 엄마의 화침을 던지면서 엄마의 사랑은 거둬진다. 더이상 엄마의 꽃집은 선화에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칠 때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제발 이 자리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짝, 짝, 짝, 짝, 소리가 반복될수록 짝, 짝, 짝, 짝, 감각은 무뎌지고 짝, 짝,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멀리 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샌가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흔드는 것 같았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절망스러웠다.’(45쪽)

 

 자신의 흉터에는 눈길조차 닿지 않았지만 언니의 상처를 매만지는 가족들, 선화는 세상의 모든 불운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거기다 두 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서른다섯 살의 엄마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도 선화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휴학을 반복하며 대학을 졸업했고 이력서를 냈지만 선화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세상은 나 같은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 쳐다볼 이유조차 없는 존재, 신경쓸 겨를도 없는데다, 필요도 없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었다.’(95~96쪽)

 

 아무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절망과 분노는 선화의 감정을 앗아갔다. 사랑, 연애, 결혼은 선화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꽃을 향해 열렸다. 옛 연인에게 꽃을 보내는 영흠, 농장에서 나무를 키우는 병준을 통해 선화는 다시 세상을 보려 한다. 어쩌면 선화에게 꽃은 선화가 되고 싶었던 유일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특정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꽃은 특별한 의미니까.

 

 김이설의 소설 <선화>는 우리에게 수많은 선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한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누구도 보려 하지 않았던 흉터 뒤에 가려진 깊고 상처를 말이다. 또한 선화 스스로가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과 먼저 대면하게 만든다. 꽃보다 아름다운 얼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한 선화라는 이름의 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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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대상을 흠모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여전히 그 대상은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애정의 온도는 식지 않았다. 하지만 끓는점을 향해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지근한 온도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무엇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무엇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열정이 끓는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적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싫다. 괜한 투정이다. 억지스러운 마음이다.

 

 10월이 되었고 끼니처럼 불안이 몰려온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절망이 나를 감싼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핑계로 삼았다. 옅어지는 간절함을 당연하게 담았다. 어떤 움직임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절감한다. 그러니 이 마음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면 다짐은 사라지고 만다. 부서질 다짐이라도 말이다.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의 열정이 소모되지 않았다면 다시 끓어오를 수 있을까. 거창한 도전이라는 이름이 아닌 부단한 노력만이 그것과 맞닿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10월은 자책의 시간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사랑 연서인 <정확한 사랑의 실험> 뒤적이며 (알았더라면 구매 여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집을 둘러본다. 제목이 매혹적이다. <죄책감>, <우울은 허밍>이라니. 지난 시간을 허투루 보낸 내가 읽어야 할 시가 될 것 같다. 그날을 잊지 않기로, 그날을 새겨야 하는 이유를 작가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이언 매큐언의 신간 <이노센트>, 친구에게 선물할 김동률의 <동행>까지.

 

 

 

 

 

 

 

 

 

 

 

 

 

 

 

 

 

 겨우 오늘 아침에 여름 이불 빨래를 끝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꺼내는 이불처럼, 생각의 두께도 달라지면 좋겠다. 바람의 크기와 냄새에 맞는 적당한 이불처럼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저마다 열심을 내는 치열한 삶 속에서 정말 읽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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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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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하고 기록한 것은 역사가 된다. 나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란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6.25 전쟁을 경험한 할머니의 기억이 내게는 역사다. 그러니 위대한 역사의 기록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실제 사건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기막힌 픽션인 최민석의 <풍의 역사> 도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삶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손자 이언이 들려주는 할아버지 이풍의 이야기다. 1930년 8월 15일에 태어난 할아버지 이풍은 미소년의 외모와 큰 키로 또래 소녀부터 유부녀까지 사랑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풍의 눈에 들어온 여인은 수선, 이풍은 그녀를 밤이라 불렀다. 그녀와 이풍의 사랑을 질투한 앞잡이의 계략으로 강제 징집된다. 이렇게 이풍의 삶은 15년 뒤 광복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 전쟁, 격동의 80년대를 지나 현재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풍의 삶엔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적 사건의 중심엔 항상 풍이 있다. 물론 그 옆엔 항상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 앞잡이가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장소에 둘은 언제나 함께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밤에게 돌아가기 위해 풍은 최선을 다했지만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도 앞잡이는 그를 막고 있었다. 앞잡이가 풍을 위기로 몰아넣는다면 풍을 위로하고 동행하는 오 중사가 있다. 오 중사는 군대에서 알고 지냈던 후임으로 포로수용소에서도 함께 지낸이다. 고통과 기쁨을 나눈 사이다.

 

 ‘사람들이 풍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저 풍이 빚어내는 세계가 자신들이 그간 처하고 겪어 온 세계와 맞닿아서 익숙하면서도 왠지 새로웠고, 매일 보는 것이면서도 이상하게 못 본 것 같아서 좋았다.’ (119쪽)

 

 작가 최민석은 너무나도 아픈 역사를 재치와 해학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는 게 미안할 정도다. 풍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다. 계획한 대로, 소망한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권력에 농락당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풍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알 수 없다. 그저 수많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존재했기에 현재가 있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가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면 최민석의 <풍의 역사>는 한반도를 너머 아시아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한다. 거대한 역사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풍의 이야기로 말이다. 최민석은 익살스럽게 건넸지만 허풍만 남은 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삶은 이야기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계속된다.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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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기행 -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김봉규 글.사진 / 담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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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판으로 문패를 만든 적이 있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문패를 만드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아파트 현관 앞에 붙여 두었는데 볼 때마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내 집이 아닌 아파트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 책의 현판과는 다른 의미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 문패가 자꾸만 생각났다. 물론 그 기억을 살려 다시 문패를 만들 수 있겠지만 그때 그 시절의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건 그때 그 마음이다. 어쩌면 저자가 현판을 통해 전하고 싶은 건 그 마음이 아닐까 싶다. 정성을 다해 쓴 작품 속에 담긴 마음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붓글씨를 배우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 때때로 내가 쓴 손글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필도 정성을 들여 연습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현판 기행이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정자와 누각, 선비의 정신이 이어온 서원과 강당,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사찰,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의 현판 이야기를 들려준다. 잘 알려진 사찰이나 서원에 걸린 현판뿐 아니니 어떤 것이든 사연을 담고 있으면 남다르게 다가온다. 서예가로 잘 알려진 이의 글씨뿐 아니라 역사 속 인물이 쓴 글씨를 볼 수 있다. 책 한 권으로 전국 곳곳의 현판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한 현판은 마치 살아있는 듯 힘이 넘치는, 도를 닦는 듯한 정갈한 마음이 전해지는, 왕이 쓴 글씨와 최초의 한글 현판 등 정말 다양하다. 

 

 

필암서원 앞 경장각 정조의 초서 편액인 ‘경장각(敬藏閣)’

 

포항 출신 서예가 운봉 금인석의 ‘큰법당’, ‘방적당’ 편액 ​

 

 

 개인적으로 무척 눈에 뜨고 인상적인 현판은 화암사 극락전 편액이다. 나무에 한 글자씩 따로 만들어 걸었다. 역시나 누가 쓴 글시씨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절로 아름답다, 란 말이 나온다. 그러니 직접 마주하면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를까. 숱한 화재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작품들이 사라졌을까. 정말 안타깝다. 우리가 후세에 전할 우리의 문화재를 관리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화암사 ‘극락전(極樂殿)’ 현판

 

‘글씨는 훌륭한 편액 체인데 그것을 새긴 편액 나무는 가장 소박하다. 그런 데다 나무판을 똑같이 세 등분한 뒤 글자의 형태에 맞춰 두 개는 세로로 새기고 하나는 가로로 새긴 점이 참으로 많을 것을 생각하게 했다. 글씨를 쓴 이도 아마 좁은 공간에 맞는 크기로 최대한 잘 썼는데, 세 글자 모두 같은 규격으로는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것을 굳이 다시 쓰게 하지 않고, 하나는 글씨를 다담기 위해 편액 나무판의 방향을 달리해 새기고 다른 두 개와 달리 엉성하게 보이더라도 그냥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로 멋과 여유가 느껴지는 일품의 편액으로 다가왔다.’(191쪽)

 

 현판이라는 게 쓰고 싶다고 쓸 수 있었던 건 아닐 터. 화재의 중심에 선 숭례문의 현판은 과연 누가 쓴 것일까? 책의 의하면 추사 김정희도 한양에 올라올 때마다 숭례문 현판 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낙권도 없고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글씨를 쓴 사람은 후세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글씨를 두고 논쟁을 했을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동안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건축 양식이나 공간에 담긴 사연이 아닌 오롯이 글씨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떠나는 여행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제는 무심코 지나쳤던 현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게 돌 것이다. 저 글씨를 쓸 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과연 저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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