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책을 읽으려고 했다. 아예 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독을 하거나 집중을 해서 읽지는 못했다. 역시 연휴에는 뒹굴뒹굴이 최고다. 2월이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벌써 절반이다. 올해 2월은 29일까지 있으니 하루를 번 셈인가. 아무튼 명절도 지나고 연휴도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느끼는 2월이다.


2월의 책은 단출하다. 단출하다고 해서 2월에 다 읽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하지 않겠다. 아무튼 2월에는 이런 책을 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의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가 벌써 50번째다. 꼬박꼬박 챙겨 읽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일까 눈여겨보는 시리즈다. 이장욱의 소설은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구매했다. 그러니까 이장욱의 소설은 오랜만이다.


나머지 두 권은 계속 리스트에 읽던 책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Hunger)』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중고로 샀다. 중고 알림 받기를 신청했지만 매번 구매에 실패했거나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은 영화로 먼저 만났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일부 장면은 기억에 담아 두었다. 소설로 읽고 싶었고 소설을 다 읽으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지금 읽고 있는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감탄하는 중이다. 작가가 생태학자라 그런 걸까. 지나친 비유가 아닌 꼭 맞는 적절한 비유와 묘사, 주인공 카야의 심리를 솔직하면서도 풍부하게 그려냈다. 습지에 흐르는 빛과 바다, 그 안에서 서식하는 모든 생물의 호흡과 성장이 눈부시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는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에서)


영화를 보았기에 사건의 전개나 결말에 대한 기대를 갖기는 어렵지만 영상이 아닌 소설을 통해서 전해지는 느낌이 있다. 소설의 감각이라고 하면 맞을까.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문장을 읽는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그 문장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싹을 틔우거나 준비하는 2월, 시골에서 2월은 아직 여유가 있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고 할까. 어쩌면 숨 고르기 중인지도 모른다. 2월은 그런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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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2-14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영화보다 소설이 훠얼씬 좋았어요 저는 소설 먼저 읽고 영화 봤는데 영화가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자목련 2024-02-15 11:55   좋아요 0 | URL
그러니 영화를 먼저 본 저는 이 소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stella.K 2024-02-1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설 연휴 마지막은 저도 암것도 안하게 되더군요. 뭐 평소 때랑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ᆢㅋ 이왕 아무 것도 못할 거 영화나 보자했죠.
가재가...는 좋다는 사람 참 많았는데 여기서 보니 정말 읽고 싶네요.

자목련 2024-02-15 11:54   좋아요 0 | URL
<가재가 노래하는 곳> 좋았습니다. 기회 되시면 읽어보세요.
남은 2월 활기차게 보내시고요^^

coolcat329 2024-02-15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서정적인 작품이죠. 작가가 생태학자 출신이라 자연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구요. 저는 영화는 안봤는데 책이 더 좋을 거 같긴 해요.

자목련 2024-02-15 11:53   좋아요 1 | URL
소설을 읽어보니 영화를 먼저 본 게 다행이구나 싶기도 해요. 좋은 소설이었어요^^

은오 2024-02-15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잉? 헝거 저도 이번달에 읽었는데 자목련님 페이퍼에서 또 보게 될 줄이야! 역시 자목련님이랑 저는 통하는 사이~! 💕 2월 3일에 읽었네요. 저도 전부터 담아놨다가 절판된 바람에 중고로....🤣🤣
저도 어쩐지 연휴가 지나니까 더 잘 읽히는 느낌이에요. ㅋㅋㅋ 연휴는 싱숭생숭....

자목련 2024-02-16 08:50   좋아요 1 | URL
은오 님 헝거 읽으셨군요. 그것도 최근에. 근데 왜 백자평, 리뷰, 페이퍼 없죠?
뭐가 그리 바쁜가요? 잠자냥 님 흠모하느라 바쁜가요? 글도 써주면 안 되나요?

은오 2024-02-16 21:11   좋아요 0 | URL
계속 글 안쓰는 은바오에게 점점 단호해지시는 자목련님ㅠㅋㅋㅋㅋㅋㅋㅋㅋ제가 요즘 읽느라 바빠서 쓰는 게 귀찮아졌습니다.. 다 읽고서 빨리 또 다음 책 읽고 싶은 다급한 마음......인데 이제 정말 써야 할 시기인가봐요? ㅠㅠ
 

2월이라서 그런가, 1월보다는 한결 포근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날씨가 풀려서 그런 것 같다. 곧 입춘이고 설날이다. 2월은 왠지 빨리 흐를 것 같다. 똑같은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느껴지는 건 나이가 들어서다. 지겨울 정도로 시간이 가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던 날도 있었으니까. 빠르게 달리는 시간과 반대로 나의 1월은 게으름이 차오르는 날들이다. 차오르는 게으름을 잠재우는 2월이면 좋겠다.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집 『레티파크』를 읽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을 샀다. 나에게는 그녀의 단편집이 두 권 더 있다. 아직 읽지 않았다. 그 사실이 참 기쁘다. 내게 읽어야 할 그녀의 책이 있다는 게, 그녀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말이다. 물론 내가 읽은 이 소설집에서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유디트 헤르만의 글에 매력을 느꼈고 그가 던지는 그 말투, 그가 바라보는 시선, 그러니까 특정한 인물이 아닌 어떤 풍경이나 먼 곳을 바라보는 게 좋다. 그뿐이다.


『알리스』, 『여름 별장, 그 후』는 어떤 계기로 구매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읽은 이의 글을 읽고 구매했거나 추천하는 글을 보고 구매했을 가능성이 크다. 놀라운 건 내가 정리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근에 나는 책을 소장하는 마음이 아닌 버리려 노력 중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게 그때그때 달라서 어떤 날은 다 버리고 싶고 어떤 날은 버린 날을 후회한다. 그러니 어떤 책의 운명은 갈팡질팡한 나의 마음 때문에 그 존재 가치를 알리기도 전에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책은 알 수 없는 끌림이 계속 내 곁에 남는다.





순간의 감정, 나를 붙잡는 한 문장, 기어이 상상하게 만드는 풍경과 인물, 그런 것들이 내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또 누가 알겠는가. 어느 날엔 그 문장이 그저 그렇고 시시하다고 느낄지. 아무튼 나는 지금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공교롭게 앤드루 포터의 소설과 유디트 헤르만의 최근 소설은 읽었지만 이전의 단편은 읽지 않았다. 또한 두 작가의 이번 소설은 모두 40대 이후의 삶을 그렸다. 그러니까 젊음의 감각이나 소비, 열정 같은 것을 지나온 이야기, 사라진 것들과 잊힌 것들, 상실과 죽음 같은 것들에 대한 글이다.

나 역시 그만큼의 시간을 지나왔기에 두 작가의 소설에 깊이 빠져든다. 소설의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헤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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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0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엔 2월도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초봄입니다. 모르긴해도 다음 주면 또 달라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올 2월은 하루가 더 있어서 조금 길다고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무려 24 시간입니다. ㅋㅋ

자목련 2024-02-02 12: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2월은 완전 겨울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따뜻해서 봄 같아요. 2024년의 2월은 조금 더 특별하겠어요. 29일이 있어서^^

꼬마요정 2024-02-0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지 유령일 뿐>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자목련 님 글보니 확 땡깁니다. ㅎㅎ 저도 점점 책을 쌓아두는 게 버거워져서 비우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요ㅠㅠ 일단 읽어야 정리가 될텐데...ㅠㅠ 많이도 사 모았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행복한 2월 함께 보내요^^ 제발 극한 한파는 안 오면 좋겠어요. 추운 거 너무 힘들어요ㅠㅠ (부산 사는 주제에... 라고 생각합니다만 ㅋㅋ)

자목련 2024-02-02 12:54   좋아요 1 | URL
<단지 유령일 뿐>, 저는 없어요. 나머지 두 권을 어서 읽어야~~
부산 사시니 한파가 더 강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따뜻한 오후 보내세요!

은오 2024-02-0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 앤드루포터 읽고있는데 왤케좋아요?ㅠ미쳤어요ㅠ

자목련 2024-02-02 12:54   좋아요 1 | URL
진짜 진짜 진짜 좋죠?

독서괭 2024-02-03 12:57   좋아요 1 | URL
저도요. “라인벡” 읽고 크아~~ 했어요 ㅎ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말이다. 처음 맞다. 그러니까 2024년 1월의 처음. 처음은 얼마나 좋은가. 다음이 있으니까. 처음에는 실수해도 좋고 처음에는 미완성도 좋다. 뭐든 처음에는 일정의 배려가 있고 수용이 있다. 처음에 잘해야 나중에도 잘 한다는 생각, 처음부터 잘못하면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누군가 더 주의 깊게 지켜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024년의 처음인 1월도 끝이 보인다. 계획 같은 거 세우지 않지만 나름 하루의 할 일들을 한 날도 있고 그렇지 못한 날도 있다. 조금 게으르고, 조금 느리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날들이 있다. 누군가 1월은 더 가열하게, 더 빠르고, 더 빡빡할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1월을 살고 있다.






아무튼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사라진 것들』, 조해진의 중편소설 『겨울을 지나가다』, 김소연의 시집 『촉진하는 밤』까지 세 권이다. 문득 한 작가의 글을 계속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들과 나의 첫 만남에 대해서. 그 만남의 느낌의 여부에 따라 그다음이 결정되었으니까.


그렇게 보면 앤드류 포터는 완벽한 첫 만남을 떠올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음을 기대했고 다음인 이 소설집을 읽고 좋구나, 이런 글이 우리에겐 필요하구나 생각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에 반해 조해진의 첫 만남은 불투명한 슬픔이었다. 너무 맑고 너무 아름다웠다면 오히려 그의 소설을 계속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다. 앤드류 포터의 짧은 이야기와 조해진의 조금 긴 이야기는 쉽고도 따뜻하다. 애틋하고도 아련하다. 먹먹하고도 포근하다.







김소연의 시집은, 시집은 그냥 좋기도 하고, 닿을 수 없어서 더 끌리기도 하고, 시집은 묘하다. 김소연의 시집은 대체로 길고 어렵구나! 읽다 보면 어려움이 조금 사라질 것이다. 아니, 계속 어려워도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나는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사고 싶은 책이 또 있지만 참고 있어야지.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참은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 더 크니까. 나는 그걸 아니까. 그래도 사고 싶은 책을 말하자면 이 책이다. 곧 살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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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26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책을 샀어요! 며칠전에도 그랬듯이, 지난주에도 그랬듯이..
그중 겹친 책이 있어 반갑습니다. 훗.
:)

잠자냥 2024-01-26 12:13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퀴폐들 지켜보는 재미에 책도 안 사고 있어요!!! (순기능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1-29 09:15   좋아요 0 | URL
오늘도 책을 사실 것 같은!!
겹친 책은 언제나 반갑죠^^

망고 2024-01-26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꾸준히 사고 읽으시는 자목련님. 시를 못 읽는 저는 그저 자목련님의 좋은 리뷰로 늘 대리만족을 하고 있습니다ㅜㅜ

자목련 2024-01-29 09:17   좋아요 1 | URL
시집에 대한 마음은, 알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인 것 같습니다. ㅎ

2024-01-26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9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4-01-2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리뷰는 산문시라는 생각^^ [아무튼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이 부분은 자목련님 책 내실 때 제목, 아니 최소 챕터 제목으로 쓰셔도 되실 것 같아요^^

자목련 2024-01-29 09:19   좋아요 0 | URL
얄라 님의 응원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날이 많이 풀린 것 같아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힘겹게 읽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힘겹게 읽은 것 같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이야기다. 11편의 단편을 다 읽으면서 이전에 읽은 단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제목을 보고는 어떤 내용인지 몰랐는데 그 결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머지 10편은 처음 읽었고 그 가운데 가장 특별한 건 역시나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였다. 이 단편집에서 레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정체성과 자신만의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여성에게 말이다.


소설 속 1960년대가 아닌 현재와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여성의 일과 공간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지만 현실에서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결혼 생활을 하는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에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뭐가 부족하냐고. 당신은 넓은 저택에 건강한 아이들과 든든한 남편과 살고 있지 않냐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수전과 매슈에겐 무엇이 필요했던 것일까.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었다.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남편의 외도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수전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정원을 가꾸고 집안일을 하는 기쁨을 얻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알아야 한다. 우리는 수전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수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가족들이 엄마의 방을 만들어주고 그곳에서 쉬라고 배려했을 때 그녀가 왜 그곳에서 오롯이 혼자임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수전의 내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내가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을 위해 돈을 지불하면 된다고, 설령 외도를 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식의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감정이 별게 아니라는 무관심과 뻔뻔함이다. 수전은 아무렇지 않게 외도를 인정한다. 가상의 남자를 만들고 직업을 정한다. 호텔에서 아내도 엄마도 아닌 익명의 존재로 충분했던 수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9호실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수전에겐 필요했다.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수전의 말에 나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겹쳐들린다. 40대인 수전이 느끼는 그 감정은 뭐라 불러야 할까. 고독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그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죽음.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러나 나는 수전의 선택은 존중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만이 그녀가 만족하는 유일한 것,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밖에. 다만 수전에게 공감하면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거리 두기, 상담, 같은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수전도 몰랐을 리 없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와 문화가 여전할 걸 보면 말이다. 차별, 편견, 위선과 싸우며 고통받는 여성의 삶이 이어진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가 생각났다.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만의 방을 갖는 일은 말이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주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도 필요할 때마다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격려할 이도 있어야 한다. 수전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고 연대할 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40대의 수전은 50대, 50대의 멋지고 당당한 수전으로 살지 않았을까.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의 중년 여성 조앤도 다르지 않다. 조앤이 느낀 공허. 어쩌면 애써 그것을 부정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여행 중 의도하지 않게 사막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그녀는 달라질 것을 결심한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는 거라고.





사막에 온 건 그것 때문이다. 이 맑고 무지막지한 빛줄기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은 그녀도 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 『봄에 나는 없었다』 중에서)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소설 밖 현실에서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제도적 보완과 정책이 간절하다. 소설은 그저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 『봄에 나는 없었다』의 조앤은 그렇게 거울이 된다. 여성만 비추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


우리에게 저마다의 19호실이 필요하다. 산다는 건 궁극적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를위해 사는 삶,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인 삶이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만의 방을 위해 비상금을 모으고 가족이 아닌 절 처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애써도 괜찮다. 나를 아는 일, 나를 돌보고 알아가는 시간은 필요하니까. 나와 만나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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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변모하다. 그러니까 표지나 디자인을 달리한 개정판과 특별판도 나오고 일부는 작가가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대체로 책을 구매하는 시기는 그 책이 출판되었을 즈음이 가장 많다. 어떤 책은 뒤늦게 재발견의 기쁨으로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만남도 있다. 미루고 미뤄서 이제야 손에 잡은 책, 읽으려고 펼치니 앞 부분에 가름끈이나 책갈피가 꽂힌 책. 이런 책은 읽다가 멈춘 책, 읽다가 멈추었다는 사시조차 잊은 책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읽다 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거다.





내가 미니 책장이라고 이름 붙인 책장에 그런 책을 수납하고 읽으려 한다. 그러니까 읽기에 치중하려는 사진과 기록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는 10년 정도 책장에 있었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곧 10년 가까이 될 것 같다.








그나마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들』은 겨우 3년인다. 도대체 나는 어떤 책을 읽느라 이 책들을 모른척하고 지냈을까. 먼저 읽은 이들의 좋은 리뷰를 보며 나, 나도 이 책이 있는데 생각만 했다.






최근에 앤드퓨 포터의 단편집 『사라진 것들』을 보고 그의 다른 소설도 읽다 말았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번 단편집에 자꾸 눈이 간다.







적어도 한 권 이상은 읽으려고 한다. 책장에 안긴 책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나를 잘 알기에 그건 장담할 수 없다. 1월이 가기 전에 한 권이라고 읽으면 나름 뿌듯할 것 같다. 그래서 가장 먼저 책장을 탈출한 책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다. 살구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여정이 단단하고 부드럽다. 일상에서 빚어올린 은유와 상징이 아름답다.


눈과 비, 그리고 안개의 지배로 열린 하루다. 이 하루를 닫는 순간를 지배하는 건 무엇일까.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들로 열린 하루의 끝은 내 의지대로 마감할 수 있도록 주어진 하루를 알차게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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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1-18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미니 책장 탐나요!!ㅎㅎ
제가 물건 욕심이 없는 편인데 (노력도 하고요)
저건 하나 갖고 싶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던 책에 레이먼드 카버의 저 책이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신기하네요^^

자목련 2024-01-19 12:49   좋아요 1 | URL
예스에서 구매했어요. 알라딘에서 이런 기획을 해주면 좋겠어요. ㅎ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3181775

미미 님이 어떤 책에서 카버를 언급했을까 궁금하네요^^

청아 2024-01-19 13:23   좋아요 0 | URL
<책상 생활자의 요가>란 책에 글 쓰기 이야기하며 언급됩니당^^

거리의화가 2024-01-1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니 책꽃이 너무 이쁘네요. 색깔이 월넛인가요? 그윽한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세 권 중 솔닛의 책이 들어 있어 반갑네요. 신간인 포터의 책은 당장은 읽지 못할 것 같고 올라오는 후기로 일단은 만족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욕심은 왜 사라지지 않는 건지ㅎㅎ 저도 병렬로 지금 몇 권을 읽고 있는데도 자꾸 눈길이 다른 데로 갑니다ㅋㅋ

자목련 2024-01-19 12:51   좋아요 0 | URL
월넛입니다. 솔닛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화가 님 덕분이에요.
화가 님의 리뷰를 보고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래도 포터의 책은 곧 장만할 것 같고요. ㅋㅋ

stella.K 2024-01-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버의 책이 제법 두껍네요.
올핸 카버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싶네요. 저도 솔닛
의 책 가지고 있는데 올핸 읽어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누구는 사놓고 3, 4년내 읽지 않으면 처분하라고 하던데 정말 10년만에 발견하는 책 있거든요. 말 듣고 처분했으면 어쩔 뻔입니까? 읽고 버릴 셈 치고 천원에 샀던 책도 넘 좋아 못 버리는 책도 있던데 말입니다. ㅎ

자목련 2024-01-19 12:52   좋아요 1 | URL
올해 카버와 솔닛의 책을 읽으시길 바라요!
맞아요,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ㅎㅎ

blanca 2024-01-1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미니책장 넘 사랑스럽네요. 딱 읽고 싶은 책만 선별해서 꽂아두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앤드루 포터 책 사놓았고 지금은 <미들마치> 읽고 있어요. 갑자기 읽고 싶은 책들이 쏟아져서 행복합니다. ^^ 올해 신간 출간 계획 훑어보니 김연수 작가가 없어서 섭섭했어요.

자목련 2024-01-19 12:54   좋아요 0 | URL
딱 말씀하신 그런 용도로 구입했어요.
읽고 싶은 책들이쏟아져 행복한만큼 자꾸 뒤로 미뤄지는 책도 쌓이는 것 같아요. ㅎ
김연수 작가는 작년처럼 깜짝 출간을 하지 않을까 기대를~~

잠자냥 2024-01-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님에게도 이런 면이 있군요?
십년묵힌책 읽기 ㅋㅋㅋㅋㅋㅋㅋ
신간인 포터 책까지 포함해서 4권 다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꼭 읽으세요!!!! ㅋㅋㅋ

자목련 2024-01-19 12:55   좋아요 0 | URL
차마 말하지 못하는 묵은 책들 많아요. ㅎㅎ
솔닛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권 읽기를 하고 싶은데.

은오 2024-01-1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미니책장 딱 서너권만 들어갈 사이즈인게 진짜 좋네요!! 저렇게 폭이 좁은 건 첨보는 것 같아요. 탐납니다....🤤
명랑한 은둔자가 자목련님을 어서 만나길 ㅎㅎㅎ
아.... 저도 미룬 책 진짜 많은데 중간중간에 한권씩 끼워서 읽어야겠어요 ㅠㅠ

잠자냥 2024-01-18 21:05   좋아요 1 | URL
“물욕” 반성한 지 몇 시간 안 지났다.

은오 2024-01-19 04:52   좋아요 0 | URL
탐은 좀 날수도있는거 아닌가요
ㅠㅠ

자목련 2024-01-19 12:57   좋아요 1 | URL
요기서 샀어요!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3181775

<명랑한 은둔자>옮긴이의 말만 몇 번째...

망고 2024-01-1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명랑한은둔자 나오자마자 사서 안 읽고 있어요!ㅋㅋㅋㅋ제 책장엔 10년쯤 새책으로 묵은 것들 뿐아니라 그 이상도 많아요ㅋㅋㅋㅋㅋ큐ㅠ

자목련 2024-01-19 12:5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묵은 책들을 꺼내 읽어야 하는데.
망고 님도 올해엔 <명랑한 은둔자>를~~

다락방 2024-01-18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미니책장을 자목련 님과 같은 용도로 사게 된다면 하나만 사면 안될 사람이므로 안사는 걸로..

명랑한 은둔자 저도 가지고만 있어요. ㅋㅋ

잠자냥 2024-01-18 21:06   좋아요 0 | URL
넌 가지고만 있는 게 대체 몇 천 권이냐.

자목련 2024-01-19 12:59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은 어마무시한 책들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압니다.
없는 게 없는 잠자냥 님의 책장과 비슷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