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은 ‘시간’이라는 체로 걸러진 일종의 사금이다. 무엇이 명작이고 무엇이 고전으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재판관은 시간이다. 시간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은 던져버리고 명작이라는 알맹이만 우리에게 남겨준다. 고전소설이 보여주는 당시 사회 모습과 그 이후에 사회가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시대를 공부하고 이해하게 된다. (프롤로그, 16쪽)
선뜻 골라 읽기 어려운 문학이 있다. 바로 고전과 세계문학이다. 사진 속 내 책장의 세계문학도 그렇다. 기필코 읽겠다고 사둔 책들, 방송에서 명사나 드라마 소개로 더 궁금했던 책들이다. 하지만 작정하지 않으면 읽기 어렵다. 왜 그런 것일까. 한편으로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과 현재가 아닌 다른 시대의 삶에 대한 이해 부족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이름만 앍고 작품은 읽지 못한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 그런 이유로 세계문학에 주저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가 있다. 박균호의 『세계문학 필독서 50』 가 그것이다. ‘셰익스피어에서 하루키까지 세계 문학 명저 50권을 한 권에’란 부제가 말하듯이 이 한 권으로 세계문학의 명저를 만날 수 있다.
우선 목차를 살피게 된다. 아마도 나 같은 독자가 많을 것이다. 내가 읽은 책을 찾는 일, 누군가 골라둔 50권에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될까. 이상하지 않은가. 독서란 가장 개인적인 동시에 내밀한 것인데 그럼에도 훌륭한 소설, 추천하는 소설을 읽기를 바라기 마음 때문이다. 저마다 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것이다. 누군가 딴지를 걸 수도 있다. 문학을, 그것도 고전을 찾아읽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말이다.
저자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시작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등 50권의 소설에 대해 작가의 이력과 소설 집필 당시의 사회적 배경, 소설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재미있는 소설, 다양한 문화와 사회상을 담은 소설, 새로운 사상이나 사회 변혁운동의 실마리를 제공한 소설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시대적 배경과 문화, 부조리한 사회고발, 그 모든 게 한 권의 소설에 담겼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어떤 소설이든 소설 속 인물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놀라운 건 그들의 고뇌가 현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노동자와 하층 계층의 삶, 기득권의 횡포, 약자와 소수를 향한 차별의 문제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그러니 위고의 《레미제라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피츠제럴드는 순수한 이상을 망각하고 오로지 경제적 성공감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1920년대 미국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 화려함 속에서 스스로 타기를 주저하지 않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 속에 움트는 사랑과 순수성이 파도와 같이 밀려들며 밀려나가는 소설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다. (106~107쪽)
《호밀밭의 파수꾼》은 강압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에 반기를 들고 혁명가나 방랑자적 기질을 자신 비트 세대의 정서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비트 세대는 홀든처럼 책과 문학을 좋아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은 산업화가 진행되기 전 시절의 자연, 인간의 존엄성, 긍정적인 세계관을 추구했다. 기성세대의 가치에 순응하지 않는 홀든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획일화에 저항하는 비트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49쪽)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책의 즐거움은 한 권의 책을 다각도로 마주하는 흥미로움이다. 가령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닿을 수 없는 인간 심연에 대해서만 집중했다면 저자는 '메이지 정신', 일본식 제국주의의 흔적에 대해 언급하다. 소설 속 K의 자살이 단순 사랑의 비애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알고 나면 소설을 더 풍부하게 일을 수 있다. 거인국과 소인국이 등장하는 동화로 인식했던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치졸함을 묘사한 소설이라니. 그뿐인가. 《돈키호테》를 쓴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전쟁에 참전하여 왼팔이 부러지고 가슴뼈와 치아가 부러졌음에도 4년이나 더 참전한 사람인 줄 몰랐다. 스페인의 많은 독자들이 기사 소설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도 몰랐다. 호탕한 기사 돈키호테와 늙은 말 로시난테의 모험기로만 알았으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평생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고 그 빚 때문에 엄청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발자크. 발자크와 커피에 대한 부분이나 《마담 보바리》가 출간되고 재판에 넘겨졌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플로베르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 무죄를 받았다는 내용도 재미있다.
발자크에게 커피는 검은 석유였다. 발자크라는 엄청난 글쓰기 기계를 작동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커피 포터도 함께였다. 그는 커피가 없으면 글을 쓰지 못했으며 커피를 타는 성스러운 작업을 그 구누에게도 맡기지 않고 직접했다. (273~274쪽)
『세계문학 필독서 50』를 읽고 나면 이전에 읽었던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카프카, 하루키의 소설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나처럼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나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것이다. 아프리카 문학이나 출신 작가의 소설이 없다는 게 살짝 아쉽지만 나만의 세계문학 목록을 작성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