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시선 48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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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집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좋다는 건 개인적인 느낌이라서 함부로 쉽게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집은 슬그머니 아무 데서나 펼쳐두고 싶다. 암송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만히 오래 읽다 보면 마음에 새겨지는 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정호승의 이런 시가 정말 좋다.


실패는 나의 애인이다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애인이다

나는 애인의 손을 잡지 않으려고

맨발로 도망쳐 왔으나 결국

애인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나는 전생에서도 실패했다

전쟁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나

불행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한데 무릎을 꿇고 울었다


실패한 뒤에는 꼭 비가 온다

우산을 펼치면 우산살 또는 부러져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당신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실패의 부고장은 오지 않는다

신문 부고란에 실패의 별세 소식은 없다

실패는 이제 나의 나다

사랑하지 않는 애인도 애인이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다 (「실패에 대하여」 , 전문)


아무렇지 않게 실패를 노래하는 시,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우선은 그렇게 읽는다. 한 번 그렇게 읽고 두 번에는 실패를 뚫어지고 보고 실패를 놔주고 실패를 잊는다. 나의 실패에 대하여, 내가 실패라고 여기며 속상했던 것에 대하여, 그것이 정녕 실패인가 생각한다. 실패하면 또 어떤가, 실패했기에 실패를 알고 실패를 안고 실패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실패를 노래해 보자.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이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운 때도 있었다고 (「뒷모습」 , 전문)


내가 뒷모습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는 가끔 나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는 모르는 나의 뒷모습,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그 뒷모습에 담긴 당신의 애정. 그래서 언제나 뒷모습을 노래하는 시는 반갑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 뒷모습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향해있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분명 내가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 돌아보지 않던 사람이다. 가슴 한편 이 싸해지며 아프지만 그래도 뒷모습은 시는 아프지 않다.


찻잔을 들고 고요히

마음을 담지 못하고

찻잔을 떨어뜨렸네


하늘의 마음은커녕

차를 끓인 당시의 마음조차 담지 못하고

흘러간 마음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찻잔만 떨어뜨렸네


당신을 속이는 일이

나를 속이는 일인 줄도 모르고

내 일생은 당신을 속이는 일로 무척 바빴네


오늘도 찻잔을 듣고 고요히

먼 산을 찾아가

산새의 마음도 담지 못하고

찻잔을 깨뜨리고 돌아서 우네 (「찻잔을 들고」 , 전문)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혼란스럽다면 이런 시를 따라 읽다 보면 조금 고요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고요, 닿을 수 없는 고요, 가질 수 없는 고요, 그래서 더 갈망하는 고요. 찻잔을 들지 않아도 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찻잔을 곁에 둔 것 같다. 얼핏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시, 두 손을 모아 찻잔을 받치는 순간 시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끝내 돌아서서 울지는 않겠다는 다짐. 새로운 찻잔에 마음을 담고 말겠다는 다짐.


시간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의자가 먼저 쓰러질 때가 있다

의자와 함께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때가 있다​

땅바닥에 쓰러지면 땅바닥에 쓰러지면 되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땅바닥이 되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얼른 일어나

기어이 의자에 앉으려고 한다


땅바닥에서 고요히 찾아오는 흙냄새

작은 자갈 사이로 고개 내민 어린 풀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땅바닥에 누워 있어도 듣지 못하고

얼른 의자에 앉자 의자가 되려고 한다


이제 시간의 의자에는

햇살보다 거친 폭풍우가 더 세차게 불어와 앉고

사랑보다 분노가 더 빨리 찾아와 앉고

상처와 증오의 마음이 더 오래 앉아 비켜주지 않는다


나는 아침마다 시간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말을 먹다가 화장실에서 희망의 똥을 눈다

시간의 의자는 썩지 않는다

썩어가는 것은 의자에 앉은 인간일 뿐이다 (「시간의 의자」 , 전문)


이러니 이 시집이 좋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는 의지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웃고 사유할 수 있는 시. 내가 만드는 시간이라는 의자, 나만의 의자,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낡은 의자를 부수고 새로운 의자를 만들 때를 알아야 하는데, 망가진 의자를 붙잡는 미련한 짓은 그만두리라.


좋은 시를 읽는 시간은 완벽하다. 혼자여도 고독하지 않다. 오히려 시가 흐르는 시간이니 얼마나 충만한가. 한 권의 시집이 내어준 말할 수 없는 기쁨. 오래 담아둘 수 있는 시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그래서 자꾸만 당신에게 권하게 된다. 당신의 시간에 당신이 만든 의자에 이런 시집은 어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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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2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된 시인데 시가 참 담백하고 좋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4-01-24 12:54   좋아요 1 | URL
즐라탄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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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나는 장류진의 소설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처음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찬사와 호평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다. 기발한 생각이라고만 여겼고 나와 다른 세대의 이야기구나 싶었고 그만큼 나는 시류를 따르지 못하는 옛날 사람인가 싶었던 거다.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코인에 관심이 없었으니 그 세계를 알 리가 없었다. 재미와 별개로 공감은 다르니까. 두 번째 단편집 『연수』를 읽으면서 그 마음은 조금 바뀌었다.


수록된 6개의 단편 가운데 표제작인 「연수」와 「펀펀 페스티벌」은 이미 읽었던 소설이었고 나머지 4편은 처음 읽는 소설이었다. 장류진 특유의 감각과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일상을 보다 가까이 다가간 내밀하게 담아낸 감정이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과 『달까지 가자』에서는 특정 세대의 이슈와 관심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할까.


「연수」는 다시 읽으니 운전 연수를 받는 '주연'의 두려움과 걱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뭐든 잘 하는 주연에게도 누군가의 격려와 응원이 필요했다는 게 보였다고 할까. 맘카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회원들의 삶에 절대 공감하지 못했던 그가 살짝 얄밉게 보였던 지난번과 다르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을 주연이 보였다.


“계속 직진, 그렇지.”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연수」, 49쪽)


잘 하고 있다는 응원과 격려는 주연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간절한다는 걸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밥이 아니라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나 인턴도 괜찮고 충분하며 잘 하고 있다는 칭찬에 인색한 시대인지 보여준다고 할까.


그런 응원은 「동계올림픽」의 ‘선진’에게도 절실했다. 작은 방송사 인턴인 선진은 추운 겨울날 동계 올림픽 취재를 위해 국가대표 선수의 집을 방문한다. 이 취재는 선진에게 중요하다. 정직원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인 것이다. 큰 방송사의 기자들 사이에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구박을 당하는 열악한 현장이지만 선진은 어떻게든 현장 취재를 하려고 노력한다.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인 선진과 다르게 부모님의 기대는 날로 커진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느낄법한 복잡한 감정을 장류진은 선진의 하루를 통해 고스란히 보여준다.


「미라와 라라」에서는 조금 다른 응원이 등장한다. 소설은 서른두 살의 나이에 국문학과에 입학해 열두 살이나 어린 나이의 동기들과 함께 소설을 배우는 ‘미라’에 대한 이야기다. 미라는 성공한 억만장자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실력은 꿈을 향한 열정과는 비례하지 않았다. 소설창작회 멤버들은 미라의 소설을 무시하고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미라를 바라보는 ‘나’는 미라가 부럽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부족할 것 없는 미라에게 소설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어떤 응원을 해야 할까.


그런가하면 제목부터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전해지는 「공모」는 장류진이 추리소설을 써도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모」에서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기업에서 부장까지 올라간 화자 ‘현수영’은 회사 직원 모두가 좋아하는 술집을 운영하는 ‘천 사장’을 싫어한다. 그래서 부장이 된 후 회식 문화를 저녁이 아닌 점심 회식, 공연 관람으로 바꾼다. 상사는 암에 걸린 천 사장 소식을 전하며 현수영에게 은밀한 부탁을 한다. 묘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라고 할까.


로드바이크 동호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라이딩 크루」는 진짜 재미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환호하는 회원의 등장으로 술렁이는 동호회. 동호회의 가입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채 지질한 인간의 면모를 장류진은 경쾌하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런 게 장류진의 장점이구나 싶다.


다채로운 재미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소설집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나를 붙잡은 건 표제작 「연수」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네는 응원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까 잘 하고 있다고, 그대로 나가도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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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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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소설 속 인물의 상황이 지난 어느 날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게 소설이나 현실이나 비슷하니까. 지나고 보면 사소한 문제가 당시에는 큰 문제였고 별거 아니라고 여겨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일들이 제일 중요했다는 걸 알게 된다. 뭘 원하지는 몰라서 헤매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 힘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시간을 『방황하는 소설』에서 마주한다.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의 단편을 통해 방황을 생각한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제목 그대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정체성에 대한 방황, 가장 근원적인 방황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느 날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존재의 증명」 속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카페의 청년 말로는 단골이라며 그가 좋아하는 커피까지 알려준다. 이상한 건 ‘그’는 이름과 주소 이런 건 생각나지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는 정확히 생각난다. 커피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니까 확고한 취향을 지닌 사람이라는 거다. 결국 파출소에 가서 지문을 조회하지만 실패하고 주변 CCTV를 통해 그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는다. 놀랍게도 그의 취향대로 꾸며진 집이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그였다. (「존재의 증명」, 37쪽)


문득 나를 증명하는 건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꿈꾸는 게 무엇인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방황의 시간이며 아름다운 방황일 것이다. 물론 소설처럼 기억은 사라지고 취향만 남으면 큰일이겠지만 말이다.


좋아하고 잘 하는 걸 단번에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라서 선배의 조언에 무조건 따르기도 하고 주변 환경에 이끌려 결정하고 후회한다. 그 과정을 혹독하게 보낸 이라면, 아니 자신도 모르게 그 과정을 지나고 있다면 박상영의 「요즘 애들」속 ‘남준’과 ‘은채’가 남 같지 않을 것이다. 과거 잡지사 인턴으로 일했던 남준과 은채에게 주어진 업무는 커피를 내리는 일, 고무나무에 물 주기, 정해진 시간에 트위터 업로드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작 4살 많은 선배는 정확한 업무를 알려주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결국 남준은 회사를 나온다.


선배 있잖아요, 저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어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이나 알리고 싶어 하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방사능을 맞고 조증에 걸린 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요. ( 「요즘 애들」, 79쪽)


이 자리까지 오면서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을 종류의 눈물이 차오르는 날도 있었다. 나는 내 눈물의 방향을 정할 수 없어 가끔은 화가 났고 대게는 고독했다. ( 「요즘 애들」, 88쪽)


그 시절 남준이 선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 '요즘 애들'로 불리는 사회 초년생의 마음일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지나왔으면서 정작 배려하고 포옹하지 못한다. 이해는커녕 서로 오해만 쌓인다.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 요즘 애들이란 말이 참 무색하게 느껴진다.


살다 보면 방황은 여러 번 내 앞에서 길을 막는다. 한 번이면 충분한 방황은 없다. 후련하게 떨쳐 버리고 어떤 흔들림도 없다고 다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는 혼란, 후회, 미련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니 방황을 테마로 한 『방황하는 소설』 은 청소년을 위한 소설로 추천하지만 여전히 성장하는 어른에게도 좋다.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 갈등, 타인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조차 알지 못하는 순간, 상실의 슬픔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까. 그래서 최은영의 「파종」은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외삼촌의 죽음 후 조금씩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딸 '소리'와 그런 소리를 지켜보는 화자가 천천히 괜찮아지는 과정은 그와 닮은 우리를 가만히 위로한다.


소리는 언제부터인가 더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인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소리의 그 모른 척이, 침묵이 좋았다.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고,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파종」, 232쪽)


누군가 후회와 미련의 시간을 잘라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있기에 조금 덜 방황하고 조금 덜 후회하는 건 아닐까. 방황했기에 조금 더 단단해졌을지 모른다. 나를 찾아가고 알아가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소중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의 방황은 여기서 끝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삶은 방황의 연속이며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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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사능 맞고 조증에 걸린 애. 이런 표현 좋습니다. 책 표지도 마음에 드네요 ^^

자목련 2024-01-12 14:17   좋아요 1 | URL
박상영 작가의 단편을 좋아하실 것 같네요^^
언급을 못했지만 박민정의 단편도 참 좋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 어떤 공주 이야기
연여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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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왕관만 눈에 들어왔다. 왕관 뒤편으로 여성의 얼굴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형체가 사라지는 그런 이미지라고 하면 맞을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왕비나 공주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왕관과 멋진 드레스가 따라온다. 왜 이런 이미지가 각인되었을까? 어린 시절 왜 그런 공주를 꿈꿨을까? 아름다운 판타지라고 해도 돌이켜보면 창피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구해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주의 이야기. 전설이나 동화 속 주인공은 내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의존적 성향을 보인다. 언제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정말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여기 새로운 공주가 있다. 한국 여성 작가 6명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는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시대에 맞게 자신만의 옷을 입은 공주를 보여준다.


연여름이 선택한 공주는 엄지 공주로 「스왈로우 탐정 사무소 사건 보고서」는 작은 동물의 세계로 인도한다. 배경은 먼 미래 시대로 각종 소행성이 등장한다. 그 시대에는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 존재한다. 화자인 ‘나’는 새의 유전자를 지닌 탐정으로 실종된 클론 ‘마야’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마야를 찾아 나선 곳에서 나는 무자비한 학대의 현장을 마주한다. 그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실상과 다름없었다.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고 협박한다. 마야(엄지 공주)를 비롯한 작은 동물과 미래의 변종 인류의 시선에서 본 세상은 불합리 그 자체였다. 작고 귀여운 엄지 공주를 떠올리다 동화 속 엄지 공주가 바랐던 행복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배명은 작가의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은 라푼젤을 한국의 가부장제와 동성애 혐오로 풀어낸다. 출장을 온 동해는 대학시절 은사인 교수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교수의 집으로 가던 중 ‘동해’는 한 여자를 만나 부탁을 받는다. 교수의 딸이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교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진실은 이랬다. 교수인 아버지가 딸의 동성애를 반대하며 딸을 가두는 모습은 탑에 갇힌 라푼젤이다.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의 딸이 변했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사랑하는 일, 남들과 다른 사랑을 선택하는 삶에 대한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회, 가능할까. 소설 속 동해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고 싶다.


동해는 이를 악물고 돌담을 붙들었다. 집 뒤쪽 측백나무에는 축대가 있어 가시철조망을 하지 않는 듯했다. 다행인가, 아닌가. 겨우 위로 올라선 동해는 밭은 숨을 내쉬며 집 가까이로 다가섰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위를 보는 순간, 2층 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너무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엔 표정조차 없었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86쪽)


문녹주의 「백설의 기고」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로 나는 계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소설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비틀었다고 할까. 거기다 혼혈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정체성과 이민자의 삶에 대해 다룬다. ‘백선희’는 인기 작가다. 엄마는 미혼모, 혼혈이지만 이름에서 짐작하듯 하얀 피부를 지녔다. 그런 백선희도 미혼모가 되었고 혼혈을 낳았다. 자신과는 다른 까만 피부의 딸에게 ‘흑설’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과 딸에 대한 에세이를 쓴다. 백설공주는 계모가 건넨 독이 든 사과를 먹었지만 「백설의 기고」에선 친모인 백선희는 흑설에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준다. 흑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장 기발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이었다.


호박마차, 유리구두의 신데렐라를 외계 존재로 재해석한 모래의 「변신」과 김치 회사를 배경으로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전설의 김칫독으로 변형시킨 류조이의 「고들빼기 공주와 전설의 김칫독」 은 유쾌하며 통쾌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공주는 찾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동화나 전설을 통해 여성차별과 수동적 태도를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이 나도 멋진 왕자가 구원해 줄 삶을 기대했으니까.


이제 모두 안다. 세상 어디에도 나를 구원해 줄 왕자는 없다는 걸. 삶이란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세상이 변하듯 이야기도 변하고 재창조되는 게 당연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변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시선도 변화한다. 안여름의 말처럼 의심과 반항의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행복이 아닐 수 있으며 행복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러니 이런 소설집은 반갑다.


오래된 공주 이야기가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공주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반항도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안여름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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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1-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왕자

잠자냥 2024-01-10 14: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1-11 09:33   좋아요 1 | URL
음, 저 왕자 된 건가요? ㅋㅋ

은오 2024-01-11 14:58   좋아요 0 | URL
아 저거 화살표 아니고 부등호여써요!! ㅋㅋㅋㅋ 왕자 따위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자목련님이 좋은 제 마음을 표현해봤습니다.

자목련 2024-01-12 14:18   좋아요 1 | URL
앗, 부등호였나요?
뒤늦은 감동으로 따뜻한 오후입니다!

잠자냥 2024-01-10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설에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준 거 때문에 궁금한데... ㅠㅠ 이 책 전체는 읽기 싫고... ㅠㅠ
비밀 글로 좀 알려주세요. 궁금해요ㅠㅠ

2024-01-1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1-11 09:4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요.
 
외로움의 습격 - 모두, 홀로 남겨질 것이다
김만권 지음 / 혜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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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예능 프로에 출연한 연예인이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인공지능이 아닌 고유한 인격을 지닌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무섭기도 했다. 어떤 미래에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물론 인공지능 챗봇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기술이 모두에게 제공되는 건 아니니까.


철학자 김만권의 『외로움의 습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예능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편리함으로 위장하고 가려진 사회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만연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가 강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내용은 철학적 사유가 아닌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다.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다.


단순히 외로움만 생각하자면 고립, 단절, 소외로 연결되는 노년층이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일 거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계가 말하는 건 달랐다. 20대가 느끼는 외로움과 좌절이 자살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을 안겨줬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외로움에 점령당했을까. 디지털의 시대, 초연결망의 세기를 살고 있기에 그렇다. 아마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일상을 살고 있을 테니까. 터치 한 번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굳이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다 알아서 해주는 편리함.


저자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건 그것이다. 디지털, 데이터,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플랫폼 노동자로 적락한 사람들. 빅데이터의 수많은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는 인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빅데이터로 만들어진 정보가 어떻게 차별을 만들고 생성하는지. 그저 내가 원하는 정보를 검색 한 번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


외로움의 시대에서 인공지능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연예인의 사례처럼, 정보와 조언을 구하는 사이. 그러나 책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인간과 관계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 이해나 배려를 모르는 채 인공지능(기계)와 관계를 맺을 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쉽게 폐기할 수 있다.


인간을 대신한 AI 면접은 공정할까? 여러 책에서 읽었지만 인공지능이 수집한 수많은 데이터의 근원이 우리의 정보이며, 생성형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난 시대 인간이 답습해 온 편견과 차별, 혐오가 그대로 축적된 데이터로 활용된다는 것. 그러니까 좋은 인간관계의 데이터가 있어야 좋은 인공지능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인공지능이 사용하고 있는 딥러닝이라는 학습법은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한마디로 인공지능은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보호하고 아낀다면, 그런 우리의 모습이 빅데이터에 담겨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에도 영향을 미칠 거예요. (196쪽)


저자가 외로움과 능력주의에 대한 접점을 설명할 때 특히 외로움의 심각성이 와닿았다. 지난 코로나 시대를 돌아보면 비대면 시대에 사회적 약자의 삶은 말 그대로 곤궁 그 자체였다. 비대면 학교 수업에 필요한 전자기기(인터넷, 스마트폰)이 없는 이들에게 디지털의 시대는 하나의 벽이었다. 얼핏 공정으로 인지하기 쉬운 능력주의에 숨겨진 이면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기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정보를 수집할 능력, 고시나 시험만 집중할 수 있는 비용만 생각해도 그렇다. 거대 플랫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빅데이터와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은 상위계층이며 그들은 그것을 대를 이어 상속하고 싶어 한다. 계층은 사라지지 않고 격차는 심해진다.


어떻게 하면 외로움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빅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과 고유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해답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아빠가 된 그가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듯 써 내려간 글에는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아빠인 나는 묻는다. “왜 우리는 자식들에게 타인을 먼저 배려하라고 선뜻 말해주지 못할까?”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이 세상이 ‘각자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가운데도 각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모순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있다. 아빠가 된 나는 이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 내 아이에게 이런 ‘외로운’ 세계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가 외롭지 않으려면 내 아이와 어깨를 맞대도 살아갈 다른 이들도 외롭지 않아야 한다. (346~347쪽)


두서없이 정리하고 말았지만 좋은 책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외로움과 직면한 문제를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외로움을 설명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고 디지털과 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인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외로움의 습격』을 만나 인공지능이 아닌 진짜 친구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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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1-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4년 갑진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4-01-04 12:3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오후 따뜻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