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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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엄마는 꿈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희미한 존재가 엄마가 아닐까 하는 그런 등장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엄마를 만나는 꿈이라 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큰언니는 뚜렷한 존재로 꿈에 나왔다. 이상하게도 큰언니의 꿈을 꾸고 나면 뭔가 위로 받거나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 큰언니가 엄마의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해진의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으면서도 엄마가 아닌 큰언니가 생각난 것도 그 때문이다.


큰언니의 부재는 여전히 크다. 큰언니가 선택한 살림살이와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남은 가구와 화분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다.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나는 큰언니의 존재를 느낀다. 그러니까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이다. 조해진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다. 곁에 없지만 여전히 곁에 있는 것, 남겨진 것들에서 전해지는 사랑과 온기 말이다.


소설에서 화자인 ‘정연’은 엄마의 마지막을 지키고자 애썼다. 일을 정리하고 엄마 곁으로 내려왔고 엄마의 통증을 지켜보며 어루만질 뿐 통증의 고통을 줄일 수 없고 함께 느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아니, 일상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일상, 엄마가 보낸 하루를 정연은 살게 된다. 엄마가 돌보던 '정미'란 이음의 개와 길고양이의 밥을 챙기며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만들어 팔던 칼국수를 만들었다. 엄마의 손길이 남은 식당, 냉장고에 남은 엄마의 김치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정연이 엄마의 털신을 신는 것을 시작으로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의 화장품을 바르고 정미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일, 엄마의 가까운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하는 일, 그것을 통해 엄마의 일상을 짐작한다. 엄마가 운영하던 ‘정미식당’을 아는 사람들, 손님들,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들, 엄마가 만든 칼국수의 맛을 아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사소한 대화, 그 안에 존재하는 엄마.


정연은 엄마의 맛을 재현할 수 없지만 엄마의 레시피대로 칼국수를 만들어 그 맛을 아는 이들과 함께 먹으며 엄마를 느낀다. 상실의 기억이 아닌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모과나무 아래 작고 둥근 봉분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 상실의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애써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을 것이다. 정미식당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정연은 현재의 삶이 충분하다고 느낀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면서, 슬픔으로 짜여졌지만 정작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그 결핍이 이번 슬픔의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걸 가까스로 깨달으며……. (132~133쪽)


부모의 부재는 언젠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부모뿐일까. 가까운 이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상실과 이별은 삶의 수순이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 감당할 수 없는 이별의 고통은 삶의 일부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동지冬至로 시작해 대한大寒을 지나 우수雨水로 끝나는 조해진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삭막하고 황폐한 상실과 슬픔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따뜻한 동행자가 된다. 그들이 나가지 못할 때 가만히 멈춰 그들을 기다려주고 다시 걷기 시작할 때 함께 걷는다. 날카로운 추위가 끝나고 곧 입춘이 온다는 걸 가만히 알려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을 지나고 환하고 포근한 봄이 온다는걸. 그리하여 다시 만날 겨울은 조금 덜 쓸쓸하고 조금은 덜 추울 거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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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2-0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컥해요. 인생이니 당연히 상실이 있는데, 나이들수록 더 무서워져요.

자목련 2024-02-07 14:08   좋아요 0 | URL
평범하면서도 담담한 내용인데, 경험한 바가 있어 더욱 공감하는 소설이었어요.
저도 큰언니의 옷을 입고, 물건을 사용하고 있거든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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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만들어졌다는 말은 좀 이상하고 나를 채운 것들은 무엇일까라고 말하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어린 나를 돌본 손길,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알려준 이들, 개인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알아야 할 것들,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나는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까? 가장 가까운 이들의 영향은 언제나 막강하다. 그냥 지나칠 정도의 소소하고 사소한 것, 습득하지 않으면 끝내 모르고 말 작은 예절 같은 것, 그리고 선과 정의에 대해서 나는 누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삶의 기본적 존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아름답지만 비참하고 평범하지만 비범하다. 그저 중년의 가장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잔잔하고도 평온한 삶의 풍경이면서 추악한 삶의 이면을 들쳐내는 목소리다. 그렇다고 지독하게 불편하거나 괴로운 소설은 아니다. 그래서 더 훌륭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이제 소설을 들여다보면 주인공 펄롱은 착실한 가장이다. 석탄 목재상을 하는 그에겐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이 있다.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살림, 건강하고 예쁜 딸이 있으니 충분하다. 그럼에도 쉼을 위한 여유는 없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마저 내일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리하고 무엇이 필요한가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냥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상념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 쫓기듯 살아온 삶, 무언가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ㅡ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29쪽)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44쪽)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였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다. 어머니와 자신을 거두고 돌봐준 미시즈 윌슨 덕분에 잘 성장할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에겐 그런 의무가 있었던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펄롱은 그분의 돌봄에서 시작되었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펄롱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고 도우며 살았다. 자신은 운이 좋았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마주친 소녀를 지나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상관없는 소녀를 그냥 모른 척 지나쳐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펄롱은 아버지였고 자신의 딸들을 떠올렸다.


지역의 수녀회와 수녀원의 힘은 막강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그 소문의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미혼모와 그들의 아이들을 수녀원에서 어떻게 대하는지 말이다. 그저 소문과 무관하기를 바라며 살았고 자신의 딸들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그게 가장 현명하다고 믿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펄롱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단지 딸 다섯을 둔 아버지라서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고 배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펄롱처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119쪽)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소녀와 함께 둘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펄롱은 가볍고 당당함을 느꼈다. 펄롱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냉대에 가깝다. 그러나 펄롱은 집으로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아내 아일린과 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없다. 어떤 내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받아온 것들을 소녀에게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다. 대단한 것들이 아닌 사소한 것들로 자신을 이끌어 준 미시즈 윌슨처럼. 아마도 그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나아갈 것이다.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펄롱이라는 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세상을 따뜻하다고 믿는 펄롱의 믿음과 행동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이다. 그의 손길에 모두의 손길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그의 뭉뚝하고도 다정한 손길이 시리도록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전한다. 그 온기가 당신에게도 닿았으면 한다.


『맡겨진 소녀』에 이어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영화로 만나는 벅찬 감동을 기대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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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제작되었군요!
이런류의 영화는 텍스트보다 좋기가 여간 쉽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문장 사이에 담겨있는 의미가 많은 소설이란 생각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4-02-05 11:56   좋아요 1 | URL
<맡겨진 소녀> 영화로도 좋았다(저는 영화로는 못 봤어요)는 호평이 많으니 아마 이 영화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물감 2024-02-05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되게 짧던데 영화로 가능한 분량인가보네요. 신기...
그나저나 저는 아일랜드 문학하고 영 코드가 안맞는데, 키건의 작품은 좀 다를까요?
자목련님 보시기에 타 아일랜드 문학 풍하고 비스무리한지요?

자목련 2024-02-06 09:01   좋아요 1 | URL
단편도 영화로 만들어지는 경우를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음, 저는 아일랜드 문학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물감 님도 키건의 작품은 좋아하지 않으실까 싶어요.
분량이 많지 않으니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한 번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고요^^

blanca 2024-02-05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작가 대단하죠. 아주 짧은데 문장 하나하나가 고도로 응축된 뭔가가 있고 그게 탁 마음을 건드려요. 이 소설도 영화로 제작됐군요.

자목련 2024-02-06 09:03   좋아요 1 | URL
이 작가의 소설이 계속 많이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그의 소설은 분량이 짧아서 그런지 꼭 두 번 읽게 되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4-02-05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얼마 전에 K문고에 갔을
적에 만났어요.

벌써 18쇄나 찍었더라구요.
여차하면 예전에 아니 에르노의
책처럼 서서 볼 기세였답니다.

아마 앉아서 읽을 자리만 있었다
면, 실행에 옮겼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예 시작도 안해 보는 것보다
시도해 보는 게... 안되면 이어서
읽기라도. 오늘 가면 한 번 시도해
보려구요.

그레이스 2024-02-05 15:22   좋아요 1 | URL
가능하다고 봅니다^~

자목련 2024-02-06 09:0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의 댓글처럼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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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먹은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은 변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믿음과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이 삶이며 그게 필요하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20~30대에는 말이다. 2년마다 건강 검진을 받을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울 거라 그때는 짐작했을까. 늙어간다는 게 어떤 건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이나 했겠냐는 거다. 내가 도달한 나이에도 삶은 여전히 어렵고 알 수 없는 게 많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소설을 만나면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든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 장의 사진과 기억들. 몇 달 전 정리하다 발견한 사진을 친구에게 문자로 보냈더니 친구는 “오래전이네” 란 답을 보내왔다. 오래전 내 곁에 있던 친구와 머리 염색에 대해 건강에 대해 농담 어린 대화를 나눈다. 아무렇지 않던 그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친구는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같은 지역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곳곳을 어울려 다니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배우에 열광하며 영화를 보던 시절. 그 시절을 추억하기에는 여유가 없고 삶의 일선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은 애틋한 동질감을 불러온다. 그들은 모두 사십 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영화나 음악 등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한다. 직장에 매여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가정을 이루고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중년의 나이라는 게 그렇듯 선뜻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도 두려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예전과는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하고 나 아닌 가족이나 연인에게 집중해야 한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오스틴」의 나가 겪은 감정들.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이런 기분을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쇼팽 음악에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곳이었다. 녹턴.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 「오스틴」, 21쪽)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하게 세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굼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 「오스틴」, 24쪽)


누군가 마치 자신의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움찔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안도할지 모른다. 괜히 적적해지고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다양성에서 점차 줄어드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일이며 선택에 있어 주저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인, 가족, 동거인의 감정에 무뎌지고 비밀 아닌 비밀을 간직하는 것,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공유하지 못하고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이상한 마음.


그런 마음을 예술 단체에서 일하는 아내 칼리와 말이 프로젝트 진행이지 백수로 지내는 나와 아파트 아래층에 거주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 히메나의 관계를 그린 「히메나」 속 부부에게서 만난다. 서른여덟 동갑 부부에게 히메나는 특별한 의미로 존재한다. 아내나 남편과는 나눌 수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 그러면서도 베일에 싸인 것 같은 히메나를 통해 부부가 찾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어떤 나이가 되었을 때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았던 삶은 오히려 살면 살수록 불투명 그 자체라는 걸 알려준다. 뭔가 잃어버리고 결국 사라지게 만든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분노하고 통곡한다. 어떤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음을 받아들지 못해 고통스럽다. 과거의 내가 아니듯 상대도 그때의 그가 아니라는 걸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도착한다. 어디 마흔세 살뿐일까? 그 이후의 시간이 와도 미래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지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 「라인벡」 , 127쪽)


사라진 친구의 집을 친구의 연인과 정리하는 표제작 「사라진 것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실종될 거라 상상하겠는가.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연락을 하면 나중에 만나면 된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 사라져 영영 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그러니 죽은 친구의 연인과 같이 수영장 물 위에 뜬 채로 보내는 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소중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며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사라질 거라는 자명한 사실. 도저히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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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1-30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하면 이 책이 와 있을 듯 합니다. 까오~~ 빨리 읽고 싶네요!!

자목련 2024-01-31 16:47   좋아요 0 | URL
어젯밤은 이 책과 함께 보내셨을까요?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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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독자를 책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고 어떤 책은 책 밖으로 보낸다. 어느 경우가 좋고 나쁘냐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책을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안과 밖으로 자유자재로 이끄는 책도 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은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이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고도 가까운』 를 읽으면서 그런 확신이 더 강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리베카 솔닛의 책을 많이 읽은 줄 알겠지만 나는 겨우 2권 읽고 계간지에 실린 글을 읽었을 뿐이다.


『멀고도 가까운』 은 우리에게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왜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하는지 말하는 책이다.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엔 서로에게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나비효과가 아니라 우리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태어남과 죽음, 돌봄과 희생,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이 모든 것이 현재를 살아가게 만든 가장 기본적인 힘이자 지탱해 주는 강력한 힘이라고.


누군가 그저 살구로 시작된 이야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그저 살구로 시작된 이야기. 어머니가 살지 않는 어머니의 나무에서 따온 살구. 처지 곤란의 살구 더미. 솔닛의 살구가 누군가 김치로, 누군가 양말로, 누군가 책으로, 누군가 여행으로 바뀌고 확대된다. 그것이야말로 이야기의 힘이고 치유다. 그렇게 솔닛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고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아픔, 시련, 상처, 분노가 향하는 곳에는 공감과 연대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닿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솔닛과 어머니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와 당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렇다.


나는 멀리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연구하고, 파악하려 했다. 어머니의 풍경을 그려 보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는 일에 나의 생존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영웅이다. 다른 이야기라는 무대에 우리를 세워 놓고 그렇게 작아진 스스로를 보는 것, 당신과 관련이 없는 세상의 광활함을 보는 것도 바라보기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능력을 보고,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나가고, 다른 사람의 삶을 만들고 혹은 그것을 부수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되기보다는 우리가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이다. (50~51쪽)


가족이지만 가족보다 못한 사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왜 굳이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 않음 마음,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의 문제만으로 버거워 모든 게 다 귀찮을 지경이니까. 그러나 솔닛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 남동생과 자신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 아픈 어머니를 바라보는 마음을 읽다 보면 그것과 지독하게 닮은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솔닛이 대단한 건 개인적인 것을 시작해 문학, 영화, 지리, 역사까지 매끄럽게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 없이 오직 글로써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무 의심 없이 그녀의 글에 감탄하고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책이라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99쪽)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던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 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100쪽)


나는 그녀의 책이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멀고도 가까운』 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살구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아이슬란드의 작은 섬에 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의 친구 앤이 만든 작품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구를 아는 사람이고 솔닛의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이에게 이 책을 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사람이며 나만의 이야기의 소중함과 그것이 갖는 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몰라서 실수하고 불경해지는 것에 대해 안도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생각이다. 타인의 고통과 상처는 어느 순간 내 것이 될 수 있고 감당해야 할 몫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예외란 없다는 걸 우리는 아픔을 겪어야만 아는 무지한 인간이다. 그러니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할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솔닛이 감정이입에 대한 글을 그래서 더 좋고 훌륭하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과 당신과 아무 상관없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 (157쪽)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이입을 생각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나와 동떨어진 삶이라고 여겼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고독을 즐기되 서로의 고독을 돌아봐 한다. 나의 아픔만 존재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꽤나 어렵다. 고백하자면 여러 차례 수술실 입구에서 두려움에 빠졌던 시간이 있음에도 나는 종종 그것을 잊고 별거 아니었다고 여긴다. 물론 나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지금 수술실 입구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기억을 헤집어 그 두려움과 공포를 달래주고 괜찮다고 용기를 건네야 한다. 내가 아무에게도 건네받지 않은 마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새삼 깨닫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멸종해 버린 과거의 어머니와 여전히 다투고 있고, 과거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너무 작아졌지만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과거의 어머니와 과거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낸다. (339쪽)


솔닛의 글은 나의 그런 감각을 깨우고 나의 어머니와 큰언니를 불러왔다. 돌이켜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내는 일은 정녕 기껍다. 그녀의 책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삶에도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259~250쪽)


똑같은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지겹고 더디게 가는 삶은 얼마나 특별한가. 이 모든 게 우리의 이야기다. 나와 멀고도 가까운 당신의 이야기가 된다. 나만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감탄하고 감격할 준비를 말이다. 어딘가에서 당신은 어떠냐고 솔닛이 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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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4-01-2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닛의 글이 개인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고 그것을 사회로 확장했을 때 연대의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자목련님 말씀처럼 누군가에게는 살구로, 저에게는 김치로... 소중하거나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의 기억과 예민한 감각을 깨울 줄 아는 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리뷰 감사히 잘 읽었어요^^

자목련 2024-01-26 10:29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솔닛의 글은 뜨개질을 하듯 하나하나 연결해서 하나의 다른 작품을 만드는 것 같았어요.
화가 님 덕분에 읽게 되었어요, 제가 더 감사해요^^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시선 48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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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집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좋다는 건 개인적인 느낌이라서 함부로 쉽게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집은 슬그머니 아무 데서나 펼쳐두고 싶다. 암송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만히 오래 읽다 보면 마음에 새겨지는 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정호승의 이런 시가 정말 좋다.


실패는 나의 애인이다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애인이다

나는 애인의 손을 잡지 않으려고

맨발로 도망쳐 왔으나 결국

애인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나는 전생에서도 실패했다

전쟁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나

불행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한데 무릎을 꿇고 울었다


실패한 뒤에는 꼭 비가 온다

우산을 펼치면 우산살 또는 부러져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당신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실패의 부고장은 오지 않는다

신문 부고란에 실패의 별세 소식은 없다

실패는 이제 나의 나다

사랑하지 않는 애인도 애인이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다 (「실패에 대하여」 , 전문)


아무렇지 않게 실패를 노래하는 시,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우선은 그렇게 읽는다. 한 번 그렇게 읽고 두 번에는 실패를 뚫어지고 보고 실패를 놔주고 실패를 잊는다. 나의 실패에 대하여, 내가 실패라고 여기며 속상했던 것에 대하여, 그것이 정녕 실패인가 생각한다. 실패하면 또 어떤가, 실패했기에 실패를 알고 실패를 안고 실패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실패를 노래해 보자.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이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운 때도 있었다고 (「뒷모습」 , 전문)


내가 뒷모습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는 가끔 나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는 모르는 나의 뒷모습,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그 뒷모습에 담긴 당신의 애정. 그래서 언제나 뒷모습을 노래하는 시는 반갑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 뒷모습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향해있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분명 내가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 돌아보지 않던 사람이다. 가슴 한편 이 싸해지며 아프지만 그래도 뒷모습은 시는 아프지 않다.


찻잔을 들고 고요히

마음을 담지 못하고

찻잔을 떨어뜨렸네


하늘의 마음은커녕

차를 끓인 당시의 마음조차 담지 못하고

흘러간 마음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찻잔만 떨어뜨렸네


당신을 속이는 일이

나를 속이는 일인 줄도 모르고

내 일생은 당신을 속이는 일로 무척 바빴네


오늘도 찻잔을 듣고 고요히

먼 산을 찾아가

산새의 마음도 담지 못하고

찻잔을 깨뜨리고 돌아서 우네 (「찻잔을 들고」 , 전문)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혼란스럽다면 이런 시를 따라 읽다 보면 조금 고요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고요, 닿을 수 없는 고요, 가질 수 없는 고요, 그래서 더 갈망하는 고요. 찻잔을 들지 않아도 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찻잔을 곁에 둔 것 같다. 얼핏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시, 두 손을 모아 찻잔을 받치는 순간 시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끝내 돌아서서 울지는 않겠다는 다짐. 새로운 찻잔에 마음을 담고 말겠다는 다짐.


시간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의자가 먼저 쓰러질 때가 있다

의자와 함께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때가 있다​

땅바닥에 쓰러지면 땅바닥에 쓰러지면 되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땅바닥이 되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얼른 일어나

기어이 의자에 앉으려고 한다


땅바닥에서 고요히 찾아오는 흙냄새

작은 자갈 사이로 고개 내민 어린 풀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땅바닥에 누워 있어도 듣지 못하고

얼른 의자에 앉자 의자가 되려고 한다


이제 시간의 의자에는

햇살보다 거친 폭풍우가 더 세차게 불어와 앉고

사랑보다 분노가 더 빨리 찾아와 앉고

상처와 증오의 마음이 더 오래 앉아 비켜주지 않는다


나는 아침마다 시간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말을 먹다가 화장실에서 희망의 똥을 눈다

시간의 의자는 썩지 않는다

썩어가는 것은 의자에 앉은 인간일 뿐이다 (「시간의 의자」 , 전문)


이러니 이 시집이 좋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는 의지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웃고 사유할 수 있는 시. 내가 만드는 시간이라는 의자, 나만의 의자,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낡은 의자를 부수고 새로운 의자를 만들 때를 알아야 하는데, 망가진 의자를 붙잡는 미련한 짓은 그만두리라.


좋은 시를 읽는 시간은 완벽하다. 혼자여도 고독하지 않다. 오히려 시가 흐르는 시간이니 얼마나 충만한가. 한 권의 시집이 내어준 말할 수 없는 기쁨. 오래 담아둘 수 있는 시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그래서 자꾸만 당신에게 권하게 된다. 당신의 시간에 당신이 만든 의자에 이런 시집은 어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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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2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된 시인데 시가 참 담백하고 좋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4-01-24 12:54   좋아요 1 | URL
즐라탄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