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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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을 만났을 때 바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면 시간만 낭비한다. 선택지가 하나일 때 고민 없이 선택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매번 고민한다. 더 나은 선택지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려주는 이가 없어 더 힘들다. 안내표지를 찾을 수조차 없다.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고비,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좌절한다. 2020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랬다. 처음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불안만 증폭되었다. 김혜진의 짧은 단편 소설 『완벽한 케이크의 맛』에서 만난 몇 편의 소설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나왔지만 온전히 나오지 못한 감정들이 아프다.


비염으로 인한 기침이나 재채기가 코로나에 대한 공포를 키워 결국엔 해고 사유가 아닌데도 학원 강사를 내 보내야만 하는 「강사의 자질」은 2020년의 봄을 떠올리게 만든다. 개학이 늦어지고 비대면 수업으로 모두가 힘들었던 때 특히 학원가의 피해가 컸다고 알고 있다. 오래오래 학원에서 함께 일할 좋은 강사였지만 불안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불안을 키우는 건 감염병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었으니까.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건 마음의 문제였으니까. (28쪽, 「강사의 자질」)


이처럼 증명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피해를 보는 일은 주변에 많다. 내 일이 아니기에 진실보다는 소문에 의지하게 된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 때문에 강습반 부모들과 어울리는 계기가 된 빵집 「밀 베이커리」는 ‘나’에게 좋은 가게였다. 한 아이가 빵을 먹고 탈이 난 후 모든 상황이 변했다. ‘나’는 빵집을 계속 다녔고 부모들은 ‘나’와 아이를 은근히 따돌렸다.‘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야 했을까. 무리에 속해야 한다는 강박, 주류의 뜻에 따라야 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시선이 느껴져 씁쓸하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걸 부인하지 못해서.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앞과 뒤가 있지만 우리는 때로 한쪽만 보려 한다. 목소리가 큰, 지위가 높은, 갑과 을 중에서는 갑의 쪽을 말이다. 다른 쪽도 보고 듣겠다고 생각하지만 곧 잊는다. 내 일이 아니라서. 그 모든 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김혜진은 차분하지만 조곤조곤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고 혼자서 살 수 없는 곳이라고.


그런가 하면 타인을 향한 마음이 어떤 계기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속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마주하는 가족들의 낯선 모습이 보여주는 마음이나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미란을 만난 「십 년」에서 발견한 ‘수지’의 마음이 그러하다. 잊고 있었던 본연의 마음이랄까. 그러니까 맘에 안 들고 싸우기 일쑤인 가족을 향한 애틋함 같은 것 말이다.





오늘 자신이 만난 건 미란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누군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란을 통해 실감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103~104쪽, 「십 년」)


마음이라는 건 참 어렵다.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과 글, 행동을 통해서 짐작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여도, 친한 친구여도 말을 숨기고 감추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말들도 필요하다. 「극락조」속 두 ‘수연’과 ‘희나’도 다르지 않았다. 식물을 키우고 있는 수연은 출장을 갈 때 희나에게 부탁을 하는데 희나는 이번에는 어렵다고 말하지만 수연의 걱정이 떠올라 가게 된다. 물을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다음 날 다시 가서 화분 갈이를 가다 손을 다치고 말았다. 의사는 심각한 상처라고 말했지만 희나는 수연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수연은 화분을 갈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희나가 화분을 갈면서 극락조의 뿌리를 다치게 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128쪽, 「극락조」)


김혜진의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완벽한 케이크의 맛』의 짧은 단편은 이전에 느끼지 못한 김혜진의 감각을 느낀 것 같아 좋았다. 흐트러진 마음을 모으고 힘들지만 꼿꼿이 서려고 애쓰며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어우러진 그림도 좋았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가 그러하지만 특히 보드라운 온기가 전해지는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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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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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는 가을이나 겨울을 원했다. 여름은 모두에게 힘들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작 그 해 여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리석게도 큰언니가 말한 가을이나 겨울에 담긴 진짜 의미를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니까 큰언니는 조금 더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이 모두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의 죽음으로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은 계획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는 일, 그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다는 건 축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할머니, 아버지와 다르게 큰언니의 죽음이 그러했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병행하면서 직장을 다녔던 큰언니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유언장을 남기고 장례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각종 서류를 변경하고 보험이나 은행 업무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연락처와 담당자의 이름이 있는 목록도 있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랐던 큰언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은모든의 소설 『안락』을 읽으면서 큰언니를 포함 돌아가신 가족이 생각났다. 가까운 미래 자율주행이 일반화되고 일정 조건에 부합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안락사의 법안이 통과되는 일이 현실이라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가족이 아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죽음을 계획할 수 있다면 차근차근 계획할 수 있을까. 친구랑 종종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소설은 화자인 ‘지혜’의 할머니가 그 법이 통과되기를 기다려 5년 후에 실행하겠다는 계획을 가족에게 알린다. 그에 따른 반응과 시간이 흐른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호사인 지혜의 언니 지경만이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상했듯 할머니의 계획에 엄마는 크게 반대한다. 지혜에게는 할머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가 아니던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이 있지만 죽음은 다르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미래에는 소설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인간의 수명만큼 삶의 만족도와 가치가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끝내 붙잡고 유지하고 싶은 이가 있는 반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 터. 소설에서 할머니는 당뇨와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떠나기 전에 남겨진 가족과 앙금을 풀고 서로를 더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소설뿐 아니라 우리네 생에도 마찬가지다. 병실에서 큰언니는 내게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울기만 했을 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큰언니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견했지만 나는 나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의 존엄과 삶의 마지막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148~149쪽)


지혜의 할머니는 자신이 계획대로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떠난다. 지혜와 같이 만든 자두주를 모두와 나눠 마신 후에 말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사실상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과 슬픔, 이별의 아픔으로 둘러싸인 죽음이 아닌 그런 죽음을 원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安樂)이란 제목처럼 우리 생의 마지막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원하는 죽음과 장례식을 그려보는 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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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6-13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을 한예리 배우 낭독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요. 대화로 맺음하는 죽음의 모습 덕분에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3-06-14 08:42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대화로 맺음하는 죽음, 우리가 바라는 죽음 가운데 하나의 형태가 아닐까 싶어요. 유수 님, 산뜻한 하루 보내세요^^

hnine 2023-06-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 읽으며 이게 소설 속의 인용문이길 바랐습니다.

자목련 2023-06-14 08:41   좋아요 0 | URL
죽음은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요.
나인 님, 환한 하루 보내세요^^

물감 2023-06-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자목련 님. 덤덤하게 쓰셨지만 과거의 아픔을 불러와 맹렬히 싸우셨을 테죠. 저도 가족들과 매우 친한 사이라서 죽음이 온다면 확 무너져버릴 거에요. 죽음이란 걸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참.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요 문장에 한 10초 쯤 머물다 갑니다.

자목련 2023-06-15 09:02   좋아요 1 | URL
가족들과 매우 친한 물감, 그 순간이 아주 멀리 있을 거예요. 죽음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죠. 죽음을 알아도 우리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요^^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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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소설에 대해 말하는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좋은 소설이 그러하다.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유는 뭘까. 나만 알고 싶은 좋음이라서, 시리고 아파서 꼭 끌어안고 싶은 소설이라고 하면 맞을까. 클레어 키건의 짧은 소설 『맡겨진 소녀』가 그랬다. 양 갈래머리를 한 소녀의 뒷모습이 아련해서,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이 왠지 슬퍼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소녀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진다. 소녀를 데려다준 아빠는 소녀와의 이별에 슬픔은커녕 안타까움도 없다. 심지어 소녀에게 필요한 짐도 내려주지 않고 트럭을 타고 떠나버린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걸까. 너무 아파서 그 모습을 딸에게 감추고 싶어서 도망치듯 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빠는 세심함과 다정함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빠로 살아가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소녀에게는 언니들이 있었고 동생도 있고 엄마는 태어날 아이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돌볼 여력이 없어서 잠시 딸을 맡긴 것이다. 다시 집으로 데리러 올 테니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나 이런 아빠라니.


낯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소녀. 킨셀라 부부는 그런 소녀를 극진하게 보살핀다. 극진하게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성을 다해 아이를 대하고 사랑을 준다. 잠자리에서 실수를 한 소녀를 혼내는 대신 부끄러울까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사소한 것까지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오는 사소한 심부름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와 지내면서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애정과 사랑을 받는다.


소녀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나하나 챙겨주는 킨셀라 부부. 처음에 소녀가 친척 집에 맡겨졌을 때 나는 소녀가 학대를 받으면 어쩌냐 내심 걱정했다. 그러니까 일손을 돕기 위한 하녀처럼 맡겨진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걱정 대신 다른 걱정이 생겼다. 소녀가 집으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방치와 무관심에 가까운 집이 아닌 그냥 여기 이곳에서 킨셀라 부부와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내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돈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69~70쪽)


그러나 소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라는 이유만 있을 뿐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은 찾을 수 없는 냉랭한 분위기의 집으로 말이다. 자매들의 반응도 마찬가지. 소녀의 부모의 마음을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애틋함을 찾을 수 없다. 물론 다자녀를 돌보는 일은 버겁다. 그러나 버거움과 사랑을 주고 표현하는 일은 다르다. 소설을 읽으며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5명의 자녀를 둔 내 엄마. 농사일로 바빠서 등교 옷차림이나 준비물을 꼼꼼하게 살피지는 못하셨지만 나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 큰언니가 그 역할을 해주었다. 마냥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힘든 직장 일을 안쓰럽게 여기고 아픈 동생을 위해 주말마다 병실을 찾았다. 엄마와 큰언니 모두 떠났지만 그들의 사랑이 나를 지켜준다.


이처럼 지난 시절의 따뜻했던 돌봄은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사랑을 받은 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처럼 소녀는 그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담담한 슬픔은 벅찬 아름다움이 된다. 차곡차곡 쌓아둔 소녀의 마음이 터지는 순간엔 나도 울컥하고 만다.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하며 초를 재던 시간,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배우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며 모든 걸 함께했던 포근했던 순간들. 부끄러움도 비밀도 없던 그 집에서 보낸 시간, 그 짧은 시절이 소녀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지켜줄 사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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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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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상실과 슬픔을 배운다. 아니, 배우는 게 아니라 체득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상실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는 이가 없다. 자신의 슬픔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고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른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의 감정을 돌볼 여력이 없다. 아이는 눈치껏 감정과 말을 숨긴다. 사랑하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거짓말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누군가 그게 성장하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아지고 괜찮아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 곁에서 그 슬픔을 어루만지고 달래줘야 한다. 『눈부신 안부』속 어린 ‘해미’는 스스로가 그런 역할을 자처했다. 1994년 가스 폭발 사고로 중학생이었던 언니를 잃고 엄마와 아빠는 슬픔에 침잠한다. 해미와 다르게 동생 해나는 마냥 즐겁다.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했고 해미는 유학을 결정한 엄마와 해나와 함께 ‘행자’ 이모가 있는 독일 G시로 향한다. 행자 이모는 파독 간호사로 일하다 지금은 의사가 되었고 같은 처지의 다른 이모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곳에서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를 만나고 조금씩 독일 생활에 적응한다. 언니를 잃은 슬픔이나 낯선 독일에서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건 엄마가 아닌 행자 이모다. 해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건 엄마가 아닌 행자 이모다. 한 번씩 산책을 하면서 해미를 웃게 하고 본연의 모습을 찾게 만든다.


해미가 독일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안정이 되기 시작한 건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와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를 만나고부터다. 가족끼리 만나고 왕래를 하면서 서로가 독일어와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서 친해진다. 그러다 한수의 부탁으로 셋은 단단한 사이가 된다. 한수의 엄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달라고 한 것이다. 아픈 엄마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고 싶은 한수의 부탁에 레나와 해미는 적극 동참한다. 광부로 일하며 엄마와 결혼하고 이혼한 아빠가 아닌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엄마의 첫사랑. 단서는 ‘K.H’란 이니셜 하나다.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몰래 읽으며 이모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연애 소설을 쓸 거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기 위한 해미의 거짓말에 다른 이모들은 선자 이모에 대해 아는 걸 알려준다.


선자 이모를 비롯해 이모들이 처음 독일에 왔던 이야기, 각자 독일로 온 사연, 독일에서 일을 하면서 겪은 서러움과 향수병, 휴일마다 고추장, 간장을 차에 싣고 이모들을 찾아온 파독 광부들. 그 안에서 단서를 찾으려 온갖 추리를 하고 상상하는 하면서 해미는 레나와 한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국의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해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엄마와 아빠의 별거는 끝났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들다. 당연 한수와 레나와의 연락도 끊기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 기자 일을 하다 그만둔 해미는 우연히 사진작가 전시회에서 대학 동기 우재를 만나다.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약국을 운영하는 우재와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만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낸다. 우재는 오래전 해미가 이모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는 기억을 꺼낸다. 해미는 우재의 말에 독일 G시에서의 시간과 선자 이모와 한수를 떠올린다. 선자 이모의 죽음과 한수가 보낸 택배, 독일에서 걸려온 한수의 전화를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한수가 보낸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상자에 넣어둔 채 잊고 있었다. 선자 이모를 위해 ‘K.H’를 찾았다는 거짓말과 ‘K.H’인 척 편지를 보낸 사실까지.


해미는 다시 하나씩 이모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국회도서관에서 1970년대 독일로 건너간 간호사의 기록을 찾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독일로 온 사연, 취업과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 이들도 많았지만 선자 이모는 아니었다. 선자 이모는 본인이 원해서 독일을 선택한 것이다. 해미는 선자 이모의 고향인 인천과 다녔던 교회를 수소문하면서 ‘K.H’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그러다 이모가 문학잡지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독일에서 처음 읽었을 때 그냥 지나친 문장이나 선자 이모의 감정을 온전히 읽게 된다. 선자 이모가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속 문장(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의 의미를 말이다.


『눈부신 안부』는 독일 파독 간호사를 통해 그 시대의 여성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와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가 중요한 소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상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어린 해미가 사고로 언니를 잃고 언니의 나이를 지나 어른이 되면서 겪은 감정은 큰언니를 떠나보내고 언니의 나이를 지나 살고 있는 나와 겹쳐졌다. 선자 이모가 첫사랑과 이별하고 독일에서 지낸 시간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일, 그 모든 걸 나누며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해미가 언니에게 전한 말처럼. 서툴다고 여기며 전했던 그들의 안부와 위로가 이제 와 보니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109쪽)


백수린은 여전히 고요하고 담담한 어투로 다정함을 건넨다. 그 다정함은 마냥 부드러운 건 아니어서 때로 모나고 뭉툭하다. 그건 내가 그 다정함을 어루만져 누군가에게 건네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이별과 작별을 맞이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에 있어 그런 다정함이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k.h의 존재가 짐작을 벗어나지 않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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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0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아쉬움 때문에 별 하나 빼신 건가요? 스토리는 보니까 재밌어 보여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3-06-03 15:20   좋아요 1 | URL
네, 첫사랑의 존재는 예상한 대로 흘러서요.
재미도 있었고 백수린의 문장이 좋았어요. 이모와 친구들과 보내는 해미의 일상이 아름다웠어요.

책읽는나무 2023-06-0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함이 마냥 부드러운 건 아니어서 때로 모나고 뭉툭하다!
오....갑자기 더 기대 상승입니다^^

자목련 2023-06-03 15:21   좋아요 1 | URL
다정함에 대한 문장은 개인적인 느낌을 표현한 거라 ㅎ
책읽는 나무 님도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

책읽는나무 2023-07-26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시 자목련 님의 리뷰를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정성가득한 글로 새롭게 다가왔어요.
근데 자목련 님은 K.H의 존재를 짐작하셨군요?
전 짐작을 못해 그 부분에서 와 반전!! 그리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자목련 님의 유추하는 섬세함에 놀랐습니다.^^

2023-07-2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7-26 16:36   좋아요 0 | URL
전 완전 샛길로 새어 혹시 우재 아버지인가? 엉뚱한 생각을 했었네요.ㅋㅋㅋ
여성, 연대....선자 이모의 성격으론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었겠구나! 공감은 가는데...막상 여자였다는 결론을 확인하고 나니까, 조금 맥이 빠지긴 했어요. 더군다나 그 분은 평범하게 잘 살아왔었기에 선자 이모의 삶이 비교가 되어 좀 더 시원섭섭한 마음도 들었었구요.
뭔가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있었더라면? 그런 아쉬움도 들었네요.
이제 첫 장편이었으니 다음 장편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가 큽니다.
 
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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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흐릿한 기억과 풍경이라고 할까. 새 학년, 새 학교에서 느꼈던 설렘과 불안. 친해질만한 아이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며 서먹한 공기의 흐름을 읽느라 정신없던 학기 초의 모습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다를 바 없다. 어느 시절, 어느 반이든 모두가 친구로 지내고 싶은 존재 곁에는 어떤 무리가 있었다. 반대로 아무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는 존재도 있었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아이는 뭔가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에 등장하는 ‘고요’가 그러하다. 평범한 고등학생 ‘수현’과 다르게 고요는 그런 존재였다.


고요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아이들과 거리를 두었고 결국엔 그 아이 무리에게 왕따를 당한다. 책상을 더럽히고 사물함의 체육복까지 입지 못하게 만든다. 고요는 신경을 쓰지 않고 공부를 할 뿐이다. 수현은 그런 고요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반장인 ‘정후’가 항상 고요를 챙기는 모습에 수현은 더욱 정후가 좋아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후만큼 자꾸 관심이 가는 아이가 있다. 항상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 조용한 성격의 ‘우연’이다. 오랫동안 정후를 짝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데 왜 우연을 살피는 것일까. 그러다 우연이 보고 있는 sns 계정을 알게 된다.


비공개 계정으로 사용자가 승인을 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이디는 ‘고요의 바다’로 프로필의 보름달은 미술 시간에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달의 뒷모습을 그렸던 우연을 떠올리게 한다. 고요의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소수였고 달과 관련된 아이디를 지녔다. 수현은 그 계정이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으로 친구를 신청한 수현은 수현이 아닌 익명의 존재로 고요의 바다와 마음을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현은 고요의 바다가 고요라는 걸 확신한다. 그리고 고요의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계정을 둘러보다 정후와 우연의 계정에 댓글을 단다.


정후와 우연은 학교에서 보고 알았던 모습과 달랐다. 항상 모든 일에 앞장서고 모범적인 인기를 얻는 정후에게는 아픈 누나가 있었고 우연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을 접고 힘들어했다. 고요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지만 sns에서는 아주 솔직하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같은 존재였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는 다른 모습이었다. 수현도 다르지 않았다. 소심하고 주저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정후, 우연, 고요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위로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오프라인인 교실에서는 여전히 먼 존재였다. 정후, 우연, 고요에게 자신이 그 계정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관계가 끊어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찍 등교해서 고요의 책상을 정리하거나 우연이 돌보는 길냥이를 산책하며 찾아보고 정후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익명으로 존재해야만 관계를 지속하고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다니.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은 십 대의 복잡한 마음과 관계를 sns로 보여주고 존재와 정체성을 달로 비유하고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수현은 자신만의 개성이자 특별함을 지닌 정후, 우연, 고요를 지켜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존재, 수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건 정후, 우연, 고요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깊은 고민이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 수현은 우리가 보는 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달의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들도 같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들은 달을 올려본다고만 생각하지, 달이 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달인데 말이야.” (229쪽)


대부분 수현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수현은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고 관심을 갖고 마음을 건넸다. 그걸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쓸모없는 게 아니다. 나의 뒷면을 궁금해하고 알고자 노력하는 누군가의 마음,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일까. 마음을 나누고 건네며 보이지 않는 어떤 걸 알아가는 일이야말로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달의 뒷면을 꿈꾸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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