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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직전의 우리 ㅣ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4
김나정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평점 :
죽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고되지 않은 죽음의 경우 남겨진 삶이 예전의 그것으로 회복될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기에 슬픔과 분노로 채워진 삶을 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생과 동시에 생성되어 자란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떤 말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어렵게 얻은 딸이 열두 살에 같은 반 아이가 찌른 칼에 숨졌다면 부모의 삶은 그 순간 사라진 것이다.
김나정의 장편소설 『멸종 직전의 우리』는 이십 년 전에 딸 나림을 잃은 부모가 나림을 죽은 선주의 아이를 유괴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얼핏 복수에 관한 소설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복수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하나의 죽음으로 연결된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은 권희자는 울부짖는다. 열두 살 김선주는 왜 나림을 죽였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잠시 나림의 죽음에 주목할 뿐 점점 잊힌다. 권희자의 눈에 비친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고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결국 이혼의 수순을 밟았다. 정말 남편은 자신의 궤도로 돌아간 것일까?
소설은 나림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차례로 들려준다. 나림을 죽인 김선주, 나림의 엄마와 아빠, 김선주의 부모, 그리고 나림의 목소리로 이십 년 전 상황을 재현하고 현재의 삶을 보여준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어떻게 그 속을 알겠냐고 선주 엄마는 항변한다. 그러다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해외를 선택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사만다가 된 선주는 여전히 두려웠고 외로웠다.
‘휘파람을 불면 개는 달려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사만다는 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들여다보았다. 밤에 악몽을 꾸면 사만다는 한 손을 뻗어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개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덩어리, 살아 있는 것의 감촉.’ 139쪽
부모도 형제도 선주의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수차례 이름과 신분을 바꿔 김선주가 아닌 윤수인(囚人)이 삶에는 아들 안도(安堵)가 전부였다. 수인과 안도라는 이름이 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런 수인에게 권희자는 이십 년 전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전하며 왜 나림을 죽였는지 묻는다. 선주는 나림의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림은 친구들을 선동해 자신을 왕따시켰다. 선주의 눈에 나림은 정말 행복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엄마의 강요에 피아노를 쳐야 하는 나림은 인형 같은 생활이 싫었다. 나림은 다른 삶을 원했고 죽음이 그 길을 인도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어둠 속에 밝음이, 밝음 속에 어둠이 띄엄띄엄 섞여 들어갔다. 운동장이 저편 멀리로 사라졌다. 천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있을 것이다. 빰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음표가 끝나고 긴 쉼표가 이어졌다. 꽃잎 한 장이 사뿐, 건반에 내려앉았다. 꽃잎은 소리 없이 건반 위로 굴러갔다. 악보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이어졌다.’ (195쪽)
평생을 분노와 증오로 살아온 권희자와 알 수 없는 형체에 쫓기듯 살아온 김선주는 고통과 불행을 등에 진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림의 죽음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자식을 잃을지도 몰라 절박한 어미의 마음이 전해진다. 지난 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할 수 시간은 끝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한때 우리 곁에서 머물러주었던 모든 것들. 빗방울이 흔들어 놓은 꽃잎들, 젖은 흙냄새와 나무 그들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는 나비들, 구름의 틈새로 보이는 햇발. 소란한 침묵. 멀리서 가까이로, 가까이서 멀리까지. 멀리서 들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256쪽)
언제 어디서든 죽음은 발생한다. 어떤 죽음은 외롭고 쓸쓸하다. 어떤 죽음은 호상(好喪)이라 불리기도 한다. 복수, 용서, 화해가 아닌 죽음을 축복할 수 있는 몫을 지닌 자의 남겨진 삶은 평온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 혹은 애도는 그저 놓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