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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애도 : 그건 (어떤 빛 같은 것이) 꺼져 있는 상태, 그 어떤 “충만”이 막혀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애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 상태다: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웅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1977. 12. 8)
애도 : 꼼짝할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상황. (1977. 12. 9)
어쩌면 강력한 애도의 말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슬픔의 나열을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의 슬픔은 나의 슬픔과 같을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다. 아니, 결코 같을 수 없다. 어머니를 잃고 쓴 2년의 일기. 계절이 변화를 견디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일은 경험을 통해서도 쉽게 설명될 수 없다. 아주 짧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기록 속에서 발견한 부재는 아주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아프다. 그래서, 말을 잃는다.
모두가 그렇듯 젊고 눈부셨던 20대, 철없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죽음과 마주했다. 장례를 치르고 당시 살아계신 할머니를 도와 마늘을 엮는 일까지 끝냈다. 그러나 직장이 있던 도시로 돌아온 나는 밤마다 술을 마셔야 했다. 술이 아니면 잠들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직장을 그만두고 도시를 떠났다.
젊지 않은 나이,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나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난 5월 아버지는 이별할 겨를도 주지 않고 떠나셨다. 중환자실에서 잠깐 맑은 의식을 찾으셨을 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간은 사라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어머니의 그것과 달랐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 그렇다고 젊었던 시절처럼 술을 마시거나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부르고 싶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구부정하게 앉아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보고 싶다. 롤랑 바르트의 감정을 빌려 먹먹해진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눈이 내렸다. 파리에 폭설이 내렸다. 참 드문 일이다.
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그 혼잣말이 나를 아프게 한다:그녀는 결코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으리라, 이 눈을 보기 위해, 이 눈 소식을 나로부터 듣기 위해서. (1978. 2. 12)
일상 속에 들어 있는 말없는 가치들과 함께 지내는 일(부엌, 거실, 옷들을 청결히 하고 늘 바르게 정리하기, 물건들 안에 들어 있는 과거와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일) ―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비록 곁에 없어도, 나는 그녀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다. (1978. 8. 18)
내게 속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물건을 생각한다. 어머니와 찍은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아버지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버지의 낡은 신발도, 옷도, 담배 냄새가 가득했던 방도 사라졌다. 사진 속에 표정이 없는 아버지가 있다. 이제 아버지는 우리들의 대화 속에 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대화 속에서만 살아 움직인다. 내가 몰랐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는 그들의 형제뿐이다. 롤랑 바르트처럼 꿈에서라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아직 꿈에서 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어머니는 겨우 두 번 정도.
그녀의 꿈을 꾸는 건 (나는 그녀의 꿈만을 꾼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생생하게 다시 만나고 싶어서인데, 그러나 꿈에서 보는 그녀는 언제나 그와는 다른 마망, 나로부터 잘려나간 그녀의 모습일 뿐이다. (1979. 3. 18)
누군가의 부재를 인정하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가혹한 말이다. 누구에게나 가족과 연인의 마지막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어떤 이에게는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긴 시간이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찰나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 책을 집어 들었지만 여전히 슬프다. 어쩌면 슬픔을 달래려는 건 나의 못된 이기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