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와 나눈 전화 통화에서 가을이니까 책을 더 많이 읽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 때문이겠지만 실은 요즘 나의 읽기와 쓰기는 그저 그렇다. 아주 멋진 소설을 읽었지만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이러다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지 못해 다시 앞으로 나가기도 한다. 


책을 구매하는 일도 충동이 아니 신중함으로 한 번 생각하려고 한다. 다른 물건들은 한 번 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시간을 갖고 생각하는데 책은 그게 잘 안된다. 그러니 끌리는 대로 사는 편이다. 최소한으로 구매하고 책장의 책을 읽거나 정리하는 게 항상 주된 목표지만 목표는 목표에 그친다.






단편집 한 권과 시집 한 권, 딱 좋다고 여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집 『지고 말 것을』의 제목처럼 결국 또 지고 말았다. 진은영의 이번 시집은 제목이 나를 붙잡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란 제목에서 오래된 거리를 떠올리고 저마다의 너를 찾을 듯하다.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서 기사도 많고 여기저기 언급도 많다. 그러니 시를 소개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대신  『지고 말 것을』 속 이런 문장만 살짝 소개할까 한다.


그 밤에 달이 너무나도 밝았던 게 문제였을까요. 모래가 너무나도 하얬던 게 문제였을까요. 보름달은 흰 모래밭을 공기가 없는 색처럼 맑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물방울처럼 똑바로 떨어질 만큼 조용했던 탓인지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내 그림자는 흰 종이에 떨어진 먹처럼 쌔까맸습니다. 내 몸은 흰 모래에 세워놓은 하나의 날카로운 선이었습니다. 모래사장이 사방에서 흰 헝겊처럼 빙글빙글 말려올라왔습니다. (「푸른 바다 검은 바다」 중에서)


아무튼 가을이니 소설도 좋고 시집도 좋다. 나쁠 게 없다. 나쁜 건 나의 태도, 읽는 즐거움을 미루고 사들이는 즐거움에 기대는 나의 태도다. 끌리는 대로 읽어야지. 문제는 끌리는 책이 아주 많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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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26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들이는 즐거움에 더 끌리는 저도 반성하며 ㅎㅎ 자목련 님 저도 요즘 뭔가 집중이 안 되고 중구난방입니다. 가을탓이라고 해둘까요. 가을에도 좋은 시집과 선별하신 독서로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자목련 2022-09-27 19:18   좋아요 2 | URL
가을이니 가을탓을 해도 괜찮겠지요. 프레이야 님이 포스팅 하신 김연수 신간도 조만간 사들이는 즐거움에 속할 것 같아요~~

scott 2022-09-26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진은영 시집 자목련님도 ^^

이번에 첫판 완판!
1만권 팔렸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여전히 시를 읽고 사릉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서

저도 시집 찾아 ~~@@

자목련 2022-09-27 19:17   좋아요 2 | URL
1만권이 팔렸다니 대단하네요.
아마도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 마케팅이 더 성공한 것 같기도 해요. ㅎ

책읽는나무 2022-09-26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궁금한 자목련님 책장 속 시집들은 꼭 자목련님 글 분위기와 많이 닮은 듯 합니다.
정갈하네요~
선택하신 두 권의 책들 제목.
가을에 잘 어울려 보입니다.^^

자목련 2022-09-27 19:16   좋아요 3 | URL
시집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애써보겠습니다. (정갈함과 거리가 멀지만, ㅎ)
이 두 권으로 가을을 잘 버티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9-26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써야 할 것이 있는데 계속 미뤄지네요. 벌써 2주가 넘었는데 흑흑.
두 책도 아름답지만 뒤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이 눈에 띕니다!^^
가을은 시의 계절이지요. 시를 잘 읽지는 않는데 사둔 시집이나 좀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목련 2022-09-27 19:14   좋아요 2 | URL
사진은 위장인 거 아시지요? 책장은 가장 어수선한 곳입니다. 화가 님이 사둔 시집, 궁금합니다!

mini74 2022-09-26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는 즐거움을 미루고 사들이는 즐거움 ㅠㅠㅠ 저 막 찔립니다 자목련님 ㅎㅎ 시집들 보니 오랜만에 시집 읽고싶어집니다 *^^*

자목련 2022-09-27 19:13   좋아요 2 | URL
사들이는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사실, 요즘 제일 간절합니다. ㅎㅎ
가을을 핑계 삼아 시집을 읽어볼까요?
 

9월이 되었다. 겨우 선풍기 하나만 정리했고 붙박이장에 넣어두려던 제습기는 어제 다시 사용했다. 태풍 11호 ‘힌남노’의 힘이 세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바람이 무서웠다. 창문을 닫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에 깨고 말았다. 스마트폰으로 태풍의 경로와 내가 사는 지방의 날씨를 확인했다. 다시 잠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고요한 마음을 지키려고 해도 마음이 요란하게 요동친다. 


8월의 마음이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그 마음과 나는 좀처럼 분리가 되지 않는다. 9월이니 9월의 마음이 필요한데 도통 새로운 마음이 자라지 않는다. 달마다 새로운 마음이 자라고 키울 수 있으며 좋겠다는 생각이다. 매달 지정된 마음이 내게 도착해도 좋을 지경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은 가까이 지내며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제 오후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어려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다만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생각할 뿐이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알지만 막연하게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차이가 크다. 내게 맑고 잔잔한 9월의 마음이 필요하듯 친구에게도 평온하고 보드라운 9월의 마음이 필요하다. 


9월은 어떤 마음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 저마다 애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위해 내게 9월의 소설도 필요하다. 소설이 불러올 다른 마음이 나의 9월의 마음을 다스려줄 수도 있다고 믿으니까. 때로는 한 권의 소설 속 하나의 문장이 그런 힘을 불러온다. 





9월의 소설은 공교롭게도 작가의 이름부터 기쁨과 기대를 안겨준다. 장편소설 『자두』로 만나 이주혜의 단편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단편집 『어젯밤』을 읽고 반해버린 제임스 설터의 장편 『고독한 얼굴』, 문장 하나하나 너무 아름다워 읽는 게 아까울 정도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소설 『가벼운 마음』, 보뱅의 소설은 처음이라 설렘이 크다.












‘힌남노’가 지나간 하늘은 더없이 맑고 선명하다.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냉큼 잡고 싶은 구름이다. 9월에 냉큼 잡고 싶은 마음도 이런 걸까. 8월에는 숨어 있어 찾을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었던 맑고 선명한 마음 말이다. 9월에 지니고 싶은 마음, 전부는 아니더라도 맑고 선명한 마음을 가끔씩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뿐 아니라 친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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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9-0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세 권 중에 어떤 책이 자목력님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기대됩니다. 저는 소설 읽기 소강 상태라 그만큼 스마트폰을 보게 되네요. 다음 페이퍼 기다렸다 자목력님 추천하시는 책을 읽어볼까요...

자목련 2022-09-07 15:53   좋아요 0 | URL
설터의 장편도 기대가 되고 이주혜의 단편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아요. 블랑카 님의 댓글로 즐겁게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 열심히 읽어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운 마음, 급 땡기네요.

보뱅의 다른 책들도 검색해봤습니다.
신간이 도서관이 비치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목련 2022-09-07 15:51   좋아요 1 | URL
보뱅의 에세이는 완전 추천하는데 이 소설은 아직 읽기 전이라 모르겠어요.
소설도 좋을까 궁금해서 구매했는데 읽기는 아직이라서요. ㅎ

레삭매냐 2022-09-07 16:05   좋아요 1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고 나서 어제
도서관에 가서 구판 <인간, 즐거움>
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답니다.

<가벼운 마음> 오늘 교보에 가서
샀습니다. 추석 때 읽을라구요.

바람돌이 2022-09-0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에게도 친구분에게도 얼른 9월의 마음이 찾아와 평안하시길요.
우리 마음도 쉽게 쉽게 리셋이 되면 좀 편안할텐데 늘 쉽지 않네요.

자목련 2022-09-07 15:50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댓글에 평온이 전해집니다. 감사해요.
원할 때마다 리셋되는 마음이면 좋을 것 같아요.

희선 2022-09-07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분은 자목련 님한테 힘든 일을 말한 것만으로도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희선

자목련 2022-09-07 15:48   좋아요 0 | URL
희선 님 말씀처럼 그랬으면 다행이고요. 맑은 오후 이어가세요^^
 

지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몇 시간 전에는 천둥과 번개가 쳤다. 한낮인데 깊은 밤인 것 같았다. 무섭기도 했고 어딘가 사람들이 또 이 비에 피해를 입거나 다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비는 많은 생각을 몰고 온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상념의 시간이 이어진다. 해결해야 할 일의 맨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찾기 위해 그것을 알고자 생각하고 생각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몰라서 모든 걸 끌어안고 걱정하는 건 우습지만 연속해서 불운한 일들이 닥치면 결국 그 모든 걸 끌어안게 된다. 그런데 하나하나 살피고 들어가 보면 ‘불운’이라 이름 붙인 그 시작은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이다. 단 한 번의 요행을 바라거나 누군가의 간절함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는 일은 잘못된 선택이다. 그걸 인식하는 게 어렵기에 회피하고 외면한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속상함에 파묻히는 건 어리석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나가아야 한다. 상담을 하거나 의견을 묻는다 해도 딱히 해결할 수 없는 분야의 일. 완벽한 답을 구할 수 없다. 인식의 힘이 필요하다. 부족한 인식의 힘을 기르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다. 나를 인식하는 일,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절실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일이 시작이다. 꾸미거나 치장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일. 불운하거나 불행하다며 불평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로도 괜찮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걸 주입하는 건 나쁘지 않다. 


단순하게 생각한다. 단순하게 판단하라는 게 아니다. 일의 본질은 결국 단순함이니까. 매달려있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집중하되 차분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일의 순서와 수집할 정보의 목록을 작성한다. 완료된 목록을 하나씩 지우는 일은 즐겁다. 그리고 환기가 필요하다. 심각성을 떠나 힘든 일에 함몰되어 절망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다.





충동적인 소비가 좋을 때가 있다. 책을 구매하는 경우가 그렇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책을 읽는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신간이라고 해서 다 그때 바로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신간을 바로 읽을 때 그만의 즐거움이 있다. 집중 독서를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책은 언제나 좋다. 그래서 책을 샀다. 책을 읽는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로 살기 위해서. 너무 거창한 이유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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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열렬하게 좋아하게 되면 그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진다. 유명 연예인의 팬이 그러하듯 기사를 사진을 찾아보고 기사나 인터뷰 내용을 읽고 그를 알아간다. 독자에게 소설가도 다르지 않다. 특히 나에게 황정은이라는 작가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사적이면서 내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일기를 읽으면서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기록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비밀스러운 뭔가를 감추기를 바랐다. 이상한 마음이지만 그랬다.


그의 글에서는 단조로우면서도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출퇴근을 하는 동거인과 사는 작가에게 파주의 공간은 뭐랄까 어떤 경계처럼 다가왔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나눠진 것 같았다. 산책을 하는 일상, 눈이 오면 베란다에 눈사람을 만드는 일, 화단에 식물을 가꾸는 일, 그것은 보편적인 일상이지만 그 안에 담긴 그만의 시간과 그만의 사유는 우리의 그것과 달랐다.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내부를 보여주다가 한 발짝 다시 뒤로 물러나는 그 모습이 나는 좋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나의 기분이며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뭐 어쩌겠는가.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를 읽고 그녀를 기대하는 게 전부인 것을.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이기에게 책갈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한 문장에서 나는 괜히 고마웠다. 그 역시 내게는 다른 사람이고 그가 만들어 낸 것으로 나는 위로받았고 무기력했던 어떤 시간을 구했으니까. 그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게 새삼 고맙다고 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누군가의 글, 누군가의 음악, 누군가의 영상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19쪽)


사실 황정은의 글에 대해 더 많은 걸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더 안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 그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작은 기쁨 같은 것들에 대해 그게 맞냐고 질문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글은 때로 아무 말도 필요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저 거기 있어 읽고 읽은 후 가만히 후련해지고 뻐근해지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황정은의 하루하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글들이 그러하다. 세월호 사건 이후 거리에 나가 집회를 참여하고 목포항에서 바다에서 건져올린 처참하고 녹슨 세월호를 보는 시간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함께 그 순간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붙잡고 간직하려 애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76쪽)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듣고 같은 걸 겪는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전혀 같지 않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과 나를 같게 둘 수는 없다. 코로나를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지내온 시간은 곧 삶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피할 수 없는 천둥과 번개처럼 다가오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황정은이 추천사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소설이나 동생들의 동의를 얻고 꺼내놓은 상처의 기억들. 나는 그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소설이 무언인지 알 수 있었고 그가 언급한 책들의 목록을 잊기 않기로 했다. 어쩌면 그는 삭제하고 싶었을 말들이 저 깊은 곳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독려한 그것이 바로 그런 책이니까. 글이 힘이니까. 내가 황정은의 글에서 얻는 그것처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160쪽)


알 수 없는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지켜보는 일은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거기다 여전한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치를 행한 기대일 수도 있고 예술을 향한 마음일 수도 있고 한 줄의 문장을 붙잡는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루를 견디며 하루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버팀목이 되면 좋겠다. 황정은의 글은 아마도 그 버팀목 가운데 든든한 하나가 될 것이다. 앞으로 계속 그의 글을 읽고 살아갈 것이다. 함께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기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될 수 있으니 얼마나 반갑고 좋은 일인가.


더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읽기를 바라면서도 어떤 글은 나만 읽고 싶은 욕심을 부린다. 이런 우습고 보잘것없는 서툰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 수줍게 고백해 본다. 고백이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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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5-24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작가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한 권도 읽은 책이 없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아래 책들은 혼자서만 읽고 싶은 욕심나는 책들인가요?😁

자목련 2022-05-25 14:39   좋아요 1 | URL
네, 황정은 작가와 그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끌리는 대로 만나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페이페에 언급된 책 목록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네요. 이 책에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낮에는 많이 덥네요. 시원한 오후 보내세요^^

2022-05-25 0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5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2-05-25 0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작가님
고백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 올려주신 책표지가, 록산 게이 <헝거>여서 참 좋습니다! 저는 <헝거> 읽은 후, 팬심 생겨 몇날 며칠 덕질하였는데 자목련님께서는 황작가님 인터뷰를 찾아 읽으시며 음미하셨네요^^

자목련 2022-05-25 14:41   좋아요 3 | URL
좋아하는 작가를 말하는 마음의 떨림이 전해집니다. 즐겁고 신나는 오흐 이어가세요^^

공쟝쟝 2022-05-26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만 알고 싶지만 나만 알아서는 안되는 황정은의 에세이가 자목련님에게도 도착했군요. 건강하세요.

자목련 2022-05-27 09:08   좋아요 3 | URL
나의 황정은은 우리 모두의 황정이어야 해요! 공쟝쟝 님, 남은 5월 눈부시게 보내세요~

mini74 2022-06-10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정은작가님 좋아해요 자목련님 ㅎㅎ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2-06-10 17:19   좋아요 1 | URL
황정은 작가, 진짜 좋죠!

새파랑 2022-06-10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홈페이지로 들어오니까 또 색다른 기분이 드네요.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6-10 17:18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6-10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6-10 17:17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저도 축하드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6-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6-11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좋아하는 유희경의 시 「심었다던 작약」은 아니지만 내가 주문한 작약이 월요일에 도착했다. 첫날은 꽃봉오리 5개였는데 하루가 지나고 환하고 탐스러운 작약으로 피어났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자꾸만 같은 듯 다른 작약 사진을 찍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찍어도 실물을 그대로 전할 수 없도 담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어느 해부터 작약을 보러 가는 대신에 작약을 주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은 이렇게 뒤늦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작년에 가까이 지내는 선배 언니가 보낸 작약이 아니었다면 나를 위한 작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과 친구에게는 해마다 작약을 보냈지만 나에게는 인색했다. 가까운 곳에 수목원이 있지만 여러 사정으로 갈 수 없으니 이제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작약을 주문하는 것이다.




꽃을 주문하고 택배 송장을 따라 꽃의 움직임을 확인하면서 그때부터 나는 행복했다. 꽃이 도착하는 순간, 화병에 물을 붓고 꼭 다문 5개의 봉오리를 보는 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어나듯 기지개를 켜는 작약들. 밤에는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더 피어났을까 궁금하고 기대해서다.


아주 짧은 이 시기가 내게는 작약이라는 계절이 되었다. 꽁꽁 숨겨왔던 자태를 조금씩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좋다. 작약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좋다. 저마다의 색마다 향기도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제 지는 모습을 보는 일만 남았는데 그것이 하나도 아쉽거나 속상하지 않다. 꽃이 피고 지는 걸 가까운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이제 곧 작약의 계절은 사라질 것이고 나는 또 내년을 기대할 것이다. 작약의 자리에는 수국이 도착할지도 모른다. 작년에 꽃술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라서 올해는 수국을 주문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작약을 보고 나니 올여름에도 수국을 주문할 것 같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우는 소쩍새처럼 이 작약을 만들고 키우고 위해 농장주의 손길은 얼마나 분주했을까. 내가 장바구니에 담고 쉽게 클릭하여 내게로 올 수 있도록 도와준 그 모든 손길을 기억하고 싶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키우고 보살피는 일은 아름답고도 숭고하니까.





나만의 계절, 작약이라는 계절을 산다. 작약을 보는 내내 나는 달콤한 기분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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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5-18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약 정말 예쁘네요. 저도 저를 위해 작약을 주문하고 싶어질 만큼...

자목련 2022-05-19 17:17   좋아요 1 | URL
블랑카 님을 위한 작약 주문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라로 2022-05-19 0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약이라는 이름만 듣다가 미국에서 작약 정원으로 유명한 곳을 가게 되었는데 완전 뿅 갔어요. 그 이후로 누가 무슨 꽃 좋아하냐고 하면 작약이라고 말하네요. 아주 이쁘네요. 작약의 계절이 지는 군요. 뭐가 이리 바쁜지 꽃 제대로 못 보고 지나네요.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2-05-19 17:15   좋아요 2 | URL
아, 작약 정원이라는 말만으로도 뽕 갈 것 같아요!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요.
라로 님과 함께 작약을 볼 수 있는 봄이라 좋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5-19 08: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약 사랑합니다.
작약을 처음 본순간 우아함에 할말을 잃은 후, 저도 그 후부터 좋아하는 꽃은? 하면 작약이라고 서슴없이 말하죠. (아..때론 다른 꽃이름도 말하긴 하지만요. 이를테면 수국, 라넌큘러스등등이라고!!! ㅋㅋㅋ)
작약은 너무 좋아서 그림으로 그려서 지지 않는 작약을 소장중이기도 합니다.
요즘 <서른 아홉>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거기서도 손예진이 작약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선물하고, 선물받고 식탁에 한 송이 꽂아 두던데...아, 예뻤어요^^
작약은 역시 서서히 피는 생화 작약이 제일 이쁜 것 같아요^^
덕분에 눈호강을 아침부터 하고 가네요. 저도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5-19 17:13   좋아요 3 | URL
작약과 수국은 사랑입니다!
맞아요, 세상에는 너무 아름다운 꽃들이 많아요. 저는 이름을 외우지도 못해요. ㅎ
나무 님의 그림 작약 궁금하네요. 작약처럼 고운 시간 이어가세요^^

페넬로페 2022-05-19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약이 넘 예쁘네요^^
꽃을 배송받으면 작은 꽃몽우리만으로 도착하는데 점점 꽃망울이 커지며 꽃이 피는게 신기하더라고요^^

자목련 2022-05-19 17:12   좋아요 2 | URL
그쵸? 생명이 있다는 건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요!

mini74 2022-05-19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약이 이렇게 예쁜 꽃이군요. 여리고 청초하고 ~~ 저는 좋아하는 꽃이 수국 불두화 등등인데 작약도 이제 들어갈듯 합니다.

자목련 2022-05-19 17:38   좋아요 1 | URL
작약 만나고 수국을 만나요. 꽃들은 다 곱고 예쁘지만 그래도 작약과 수국은 정말 매력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