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를 가야 하는데, 아직 일정을 잡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안 했다는 게 맞겠다. 치과는 예약을 하면서 안과는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눈이 많이 나빠졌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을 게 뻔하다. 안경을 새로 구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안경 말고 평상시에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안경.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거나 눈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안과 진료는 미뤄진다. 우선은 예약된 치과부터 다녀온 후에 결정하자고. 


그저 12월일 뿐인데 여러 개의 마음이 충돌한다. 정리 차원에서 뭐든 버리고 싶은 마음과 나를 위해 뭔가 들이고 싶은 마음. 올해가 가기 전에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핑계로 긴 수다를 나누고 싶은 마음과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으니 별일 없다고 그냥 짧은 문자 정도로 끝내야 한다는 마음들. 


가족을 위한 맨투맨 티셔츠를 구매하다 같은 걸로 나도 하나 살까 하다 관두고 책을 샀다. 티셔츠보다 책이 더 비쌌다. 조만간 티셔츠를 구매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12월을 위한 선물은 책이다. 에세이 한 권과 단편집 한 권과 장편소설. 대단하거나 근사한 선물이 아니지만 연말의 나를 가득 채워줄 이야기들이니 충분하다. 나는 충분히 충만해질 수 있을 것이다.





황시운의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읽기도 전에 괜히 마음이 뜨겁다. 황시운이라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다. 작가의 등단작을 프린트했던 내가 생각났고 사고 소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의 근황에 대해서는 자세하게는 몰랐고 이후에 발표한 소설이 무척 반가웠다. 그는 나 같은 독자가 있다는 걸 모르겠지만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은 절판을 만날 수 없었던 단편과 국내 초역작이 담긴 책이라고 한다. 단편 읽는 즐거움을 안겨줄 소설집, 읽기도 전에 기대가 앞선다. 짧은 이야기에 강하고 진한 울림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게 단편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삶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전율을 느끼는 것처럼. 좋은 소설을 읽고 그에 합당한 좋은 리뷰를 쓰고 싶다. 


김혜진의 소설은 첫 장편인 『중앙역』으로 만났다. 그 소설은 인상적이었고 좋았다. 그리고 나는 곧 그녀의 소설을 기다렸고 읽었다. 발표하는 작품과 출간되는 소설집과 장편들이 하나같이 다 좋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느낄 수 있는 어떤 아쉬움이나 반복적인 느낌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소설을 언제나 기다리고 기대한다. 이번 장편소설 『경청』도 마찬가지다. 출판사의 브이로그를 통해 조금 더 기대가 상승했다. 


소설을 읽은 일은 내가 몰랐던 마음을 알아가는 일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일부를 만나 그곳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일이다. 소설에서 만난 삶은 결코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의 일이 아니기에 소설을 통해 다른 삶을 생각한다.


어제보다 훨씬 더 추운 날이다. 눈보라는 치지 않지만 눈이 내리고 쌓인다. 쌓였던 눈이 녹는 모습과 단단하게 얼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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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2-14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ㅋㅋ 이번 책장샷은 왼쪽 제 소설 책장인 줄 🤣🥹

자목련 2022-12-15 09:25   좋아요 1 | URL
아, 정말요? 반갑고 신기해라~

새파랑 2022-12-14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으려면 눈건강이 필수이신데 ㅜㅜ
진료받으시고 나아지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목련 2022-12-15 09:26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감사해요!
읽기에 어려움이 깊어지기 전에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ㅎ

미미 2022-12-14 2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개해 주신 책들도 궁금하고 저 북앤드 볼때마다 탐납니다. ㅎㅎ
어제 눈보라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두려웠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의 방향들..

자목련 2022-12-15 09:27   좋아요 2 | URL
제가 북앤드를 좀 좋아합니다. ㅎㅎ
이곳은 연일 눈이 내립니다. 지금도 소복소복 쌓이는 중이에요.
이 맘때 마음이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인생을 아는 나이가 오긴 할까. 그런 기대를 갖고 살아도 괜찮을까. 일정 나이가 되면 모든 걸 다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 같은 걸 품고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숨기고 사는 일이 상대에게는 괜찮은 걸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 숨겨왔던 나의 상처와 조금씩 대면할 수 있는 것, 이곳으로 오기 위해 떠나왔던 그곳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 인생은 정말 알 수 없고 쉬운 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는 건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은 앞에 언급한 그런 것들로 채워진 소설이다.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무엇인지, 버려야만 했던 것들이 무언인지.


루시가 자신의 첫 번째 남편 윌리엄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퍼즐의 조각으로 지난 삶을 반추한다. 어떻게 만나 사랑하고 살아왔는지 왜 서로를 떠나 이별했고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 담담하게 들려준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이 단지 두 사람만의 만남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루시와 윌리엄도 그랬다. 세계는 하나로 합쳐질 수 있고 충돌할 수 있다. 그리하여 루시와 윌리엄은 이혼했다. 루시와 오랫동안 살았던 두 번째 남편 데이비드는 죽고 없다. 윌리엄에게는 세 번째 아내가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있고 상처가 회복된 건 아니지만 각자의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좋은 관계를 지속했다. 이상하게도 루시에게 윌리엄은 유일한 집이었고 윌리엄에게 루시는 자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노년의 나이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을까 싶은 정도로 소설 속 루시와 윌리엄은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그러니 윌리엄의 세 번째 아내가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갔을 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은 루시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나이를 먹고 살 만큼 살았다 해도 치유될 수 없는 상실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이는 얼마 없다. 그저 괜찮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상처를 꺼내 실체와 마주하는 일은 지우고 싶었던 과거,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일부와 대면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게 삶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윌리엄이 돌아가신 어머니 캐서린에 대해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 루시가 떠나온 고향(특히 어머니)의 모든 것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우리를 과거의 한 지점으로 불러 모은다. 저마다의 상처, 혹은 환희의 순간이다. 소설에선 윌리엄이 세 번째 아내에게 받은 ‘조상찾기’가 그 매개체다. 자신에게 이부누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루시와 동행하는 그 여정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알게 된다. 꽁꽁 숨기려 감추었던 내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슬픔의 덩어리들. 철저하게 차단하고 선을 긋고 싶은 지점,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인간의 처절한 간절함에 대해. 


우아하고 완벽하게 보였던 캐서린이 나고 자란 그곳은 루시가 떠나온 곳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루시에게 보였던 그 모든 행동이 조금씩 이해됐다. 과거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사람, 어린 딸마저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간절히 바랐던 사람. 자신의 어깨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죄책감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던 캐서린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엄마에게 위로받았던 루시는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윌리엄에게는 두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아주 먼 존재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깨달음을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윌리엄과 캐서린과 루시의 관계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몰랐던 것들의 대부분을 지금에야 알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 때까지 모른다는 것.” (257쪽)란 문장처럼.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진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며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전부를 알 것 같은 이들에게 마음을 연다. 루시가 윌리엄에게 귄위를 느꼈고 데이비드를 통해 위로를 받은 것처럼. 인생은 결핍과 상처로 시작해 그것을 채우고 위로받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생은 얼마나 많은 결핍과 상처로 가득할까. 숱한 경험과 상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저마다의 상처와 슬픔은 고유하고 차별적인 것이니까.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빼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298쪽)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소설을 통해 조금이나마 배우고 알게 된다. 인생이 뭔지 여전히 모르지만 그래서 그 비밀을 알아가기 위해 살아간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용서하고 성장하며 상대를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애쓴다는걸. 그게 인생이라는 걸 말이다.‘루시’가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조금 더 많이 읽고 싶다. 자신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소설들. 우리는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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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출발해 주말에 도착한 친구와 보낸 시간은 짧게 지나갔다. 왜 이리 좋은 사람과의 시간은 아쉽고도 아쉬울까. 11월의 선물처럼 다녀간 친구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시각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지 않는 친구가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는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서로에게 취해 서로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취한 모든 것들이 좋은 건만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당도한 어려움은 나무늘보의 속도보다 더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나의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나가고 있다는 것, 미세한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는 것, 퇴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는 주말의 도로 사정도 그러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이동했다고. 막히는 차들과 피곤한 몸으로 졸음이 몰려와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도 그 시간과 공간을 지나왔고 통과했다. 


주말 밤에 내린 비로 저만치 겨울이 빠르게 걸어오는 게 보이는 것 같다. 서울의 도로처럼 낙엽으로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밤에 빗소리와 바람 소리는 약간의 공포를 조성했다. 그 밤이 지나고 찾아온 아침엔 따뜻한 것들을 찾게 된다. 끓여놓은 보리 차를 한 번 더 데워 마시거나 커피가 빨리 식을까 봐 손에 꼭 쥐고 온기를 느낀다. 친구와 맥주에 취했던 시간은 책으로 바뀌었다. 무언가에 취하는 날들, 깊어가는 가을에 취하기 좋은 건 이런 장편소설은 아닐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오, 윌리엄!』과 한은형의 『서핑하는 정신』은 두 권 모두 흠뻑 취하고 싶은 소설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처음 만난 『올리브 키터리지』는 무척 좋았던 기억이 있다. 실은 그 뒤로 그녀의 소설을 몇 권 더 읽었다. 아니, 읽으려고 시도했다. 이상하게 집중하기 못했다. 그래서 중도에 덮은 책도 있다. 그리고 『다시, 올리브』를 읽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다. 리뷰를 쓰려고 이런 글을 임시저장하기도 했으니 결국 리뷰는 쓰지 못했다. 언제 다시 읽고 리뷰를 쓸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 윌리엄!』은 리뷰에도 취하는 날들로 이어져야 한다. 


어떤 소설은 소설이 아닌 지척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시, 올리브』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한 동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행복을 생각한다. 좋은 소설이다. (임시저장의 일부)


문학동네와 한겨레 출판사로 화려하게 등단한 한은형은 장편소설 『거짓말』가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모두가 좋았다. 그녀의 상상력이 좋았고 당돌하면서도 단단한 문장이 좋았다. 그런데 그 뒤로는 이상하게 읽은 글이 없다. 소설, 산문 모두 그러했다. 이번 『서핑하는 정신』을 읽고 한은형을 향한 나의 마음도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다. 


짧게 내려앉은 햇살에 취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 햇살이 곧 사라질 거라는 걸 알기에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좋은 글에 취하고 전부를 내던지는 몸짓의 붉은 단풍에 취하고,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에 취한다. 무언가에 취하는 날들, 무심하지만 다정한 당신의 마음에 취하는 중이라는 건 비밀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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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1-1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계속 따라 읽고 있어요. 나이 들어가는 작가가 노년의 이야기로 진화하는 과정이 좋아요. 나도 이 정도 나이면 이런 생각을 하겠구나, 이런 상상이 가능해져서요. 오랜만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군요! 늦가을에 어울리는 만남입니다.

자목련 2022-11-15 16:49   좋아요 0 | URL
작가와 함께 나이를 든다고 할까요. 김연수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들을 소설을 통해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어쩌면 한 해가 기우는 계절이라 그럴지도 모르고요!

책읽는나무 2022-11-15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트라우트 소설은 ‘다시 올리브‘ 까지 너무 좋아서, 정말 아껴 읽고 싶어 전 소설을 구매해 두었습니다. 근데 아직 다른 소설은 집중하지 못하고 있네요. 그런데도 읽기만 한다면 올리브 책들처럼 취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 ‘오 윌리엄‘ 책 제목 종종 눈에 띄어 이 책도 조만간 선 구매부터 해야겠어요^^
친구분과의 만남도 왠지 스트라우트 소설 속 장면 같습니다^^

자목련 2022-11-15 16:51   좋아요 1 | URL
너무 좋아서! 그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전 소설을 다 구매한 나무 님이 있다는 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좋은 책에 흠뻑 취하는 나무 님의 시간을 응원해요^^
 

가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들고 있다. 환기를 시킬 때 창문을 열어두는 짧은 시간에 느끼는 바람은 가을이 곧 떠날 거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니 집 밖을 나갈 때는 단단히 옷깃을 여미게 된다. 드러나 맨살을 꽁꽁 숨길 기세로 말이다. 


가을이, 인사도 없이 사라질 가을이 아쉬워서 이런 단편을 곁에 두었다. 단편을 읽는 시간이라는 제목이 괜히 근사하다. 단편 읽는 시간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나 차분한 음악이 있었으면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김연수의 단편집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란 제목도 좋다. 사실, 뭐가 안 좋겠는가. 김연수를 기다린, 그의 단편을 기디란 독자라면 다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사인 인쇄본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김연수의 사인본에 약간의 사연이 있다. 김연수의 소설과 그런 에피소드(나만이 아는)가 있다는 게 좋을 뿐이다.책 사이에 스며든 엽서에는 “가을이 되자,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당신에게”라는 인사말이 있다.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계절마다 좋은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되자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우리는 곧 겨울이 되면 눈 내리는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계절이 오고 가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봄에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있다면 가을에는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있다. 이 작품집에 김연수의 단편도 있다. 오랜만에 김애란의 단편도 만난다. 문지혁 작가의 단편은 처음이지 싶다. 아니 작가의 소설 자체가 처음인 것 같다. 작년 대상 수상자의 이름을 보고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가을에 읽는 단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양식 같다고 할까. 단편을 더 즐겁게 읽을 이유를 찾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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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10-25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사진에 등장하는
책 읽는 소녀를 제가 좋아합니다 ㅎㅎ
가을에 읽는 한국 단편 좋으네요.
편혜영 작가도 반갑고요**

자목련 2022-10-27 11:58   좋아요 1 | URL
저도 많이 좋아합니다.책장에 소녀가 몇 명 더 있습니다. ㅎ

scott 2022-10-2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왼쪽 한낮 우울 부터 맨 오른쪽 끝과 시작 까지 전부 저의 최애작들!ㅎㅎ 올해 젊은 작가 수록작중에 백수린 작가 단편이 인상 깊었습니다. 연수옹의 <진주의 결말>은 우수상작 ^^

자목련 2022-10-27 11:59   좋아요 1 | URL
우와 정말요? 백수린의 단편은 아직입니다. 편혜영와 김연수만 읽었어요!

blanca 2022-10-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김연수 단편 중에 뭐가 제일 좋으셨어요? 궁금해요. 저는 아직 아껴두었죠. 가을이 가는게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정말 이 가을 하늘, 햇살을 어디에 비할 바 있을까요?

자목련 2022-10-27 12:00   좋아요 0 | URL
아직 다 읽지는 못했어요. 블랑카 님처럼 아끼는 이유도 있고 한 편씩 읽다보니 조금 천천히 읽고 있어요.
쏟아지는 햇살을 한 줌 나만의 공간에 숨겨두고 싶은 날들입니다. 이 가을 충만하게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2-10-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보고 금방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을이 곧 떠나갈까 두렵네요. 단풍이 제법 많이 떨어졌더라구요ㅜㅜ 은행잎은 아직 물들기 전이긴 합니다만^^;;;
저도 김연수 작가의 싸인 문구를 보고, 음🤔
했습니다. 좀 섭섭할 정도로~ㅋㅋ
근데 이승우 작가님 싸인본 신간 책을 보고 헉!!!!! 차라리 김연수 작가님 싸인 문구가 친절하셨어요^^
김스옥 문학상 표지의 편혜영 작가님 넘 예뻐서 늘 입꼬리가 올라가던데, 이 사진이어 더 반가운 책입니다.^^

자목련 2022-10-27 12:01   좋아요 1 | URL
가을을 데리고 돌아오셨을까요? 사인본에 대한 매력이 크게 없습니다. ㅎ
편혜영 작가의 표지 사진 좋아요. 저도 따라해보고 싶은 ㅎㅎ

coolcat329 2022-10-2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읽는 단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양식‘
아 너무나 와닿는 말입니다.
저도 책장에 있는 단편을 찾아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2-10-27 12:02   좋아요 1 | URL
우리 가을 밤에는 단편을 읽어보아요!
 

며칠 전 친구와 나눈 전화 통화에서 가을이니까 책을 더 많이 읽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 때문이겠지만 실은 요즘 나의 읽기와 쓰기는 그저 그렇다. 아주 멋진 소설을 읽었지만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이러다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지 못해 다시 앞으로 나가기도 한다. 


책을 구매하는 일도 충동이 아니 신중함으로 한 번 생각하려고 한다. 다른 물건들은 한 번 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시간을 갖고 생각하는데 책은 그게 잘 안된다. 그러니 끌리는 대로 사는 편이다. 최소한으로 구매하고 책장의 책을 읽거나 정리하는 게 항상 주된 목표지만 목표는 목표에 그친다.






단편집 한 권과 시집 한 권, 딱 좋다고 여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집 『지고 말 것을』의 제목처럼 결국 또 지고 말았다. 진은영의 이번 시집은 제목이 나를 붙잡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란 제목에서 오래된 거리를 떠올리고 저마다의 너를 찾을 듯하다.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서 기사도 많고 여기저기 언급도 많다. 그러니 시를 소개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대신  『지고 말 것을』 속 이런 문장만 살짝 소개할까 한다.


그 밤에 달이 너무나도 밝았던 게 문제였을까요. 모래가 너무나도 하얬던 게 문제였을까요. 보름달은 흰 모래밭을 공기가 없는 색처럼 맑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물방울처럼 똑바로 떨어질 만큼 조용했던 탓인지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내 그림자는 흰 종이에 떨어진 먹처럼 쌔까맸습니다. 내 몸은 흰 모래에 세워놓은 하나의 날카로운 선이었습니다. 모래사장이 사방에서 흰 헝겊처럼 빙글빙글 말려올라왔습니다. (「푸른 바다 검은 바다」 중에서)


아무튼 가을이니 소설도 좋고 시집도 좋다. 나쁠 게 없다. 나쁜 건 나의 태도, 읽는 즐거움을 미루고 사들이는 즐거움에 기대는 나의 태도다. 끌리는 대로 읽어야지. 문제는 끌리는 책이 아주 많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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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26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들이는 즐거움에 더 끌리는 저도 반성하며 ㅎㅎ 자목련 님 저도 요즘 뭔가 집중이 안 되고 중구난방입니다. 가을탓이라고 해둘까요. 가을에도 좋은 시집과 선별하신 독서로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자목련 2022-09-27 19:18   좋아요 2 | URL
가을이니 가을탓을 해도 괜찮겠지요. 프레이야 님이 포스팅 하신 김연수 신간도 조만간 사들이는 즐거움에 속할 것 같아요~~

scott 2022-09-26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진은영 시집 자목련님도 ^^

이번에 첫판 완판!
1만권 팔렸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여전히 시를 읽고 사릉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서

저도 시집 찾아 ~~@@

자목련 2022-09-27 19:17   좋아요 2 | URL
1만권이 팔렸다니 대단하네요.
아마도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 마케팅이 더 성공한 것 같기도 해요. ㅎ

책읽는나무 2022-09-26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궁금한 자목련님 책장 속 시집들은 꼭 자목련님 글 분위기와 많이 닮은 듯 합니다.
정갈하네요~
선택하신 두 권의 책들 제목.
가을에 잘 어울려 보입니다.^^

자목련 2022-09-27 19:16   좋아요 3 | URL
시집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애써보겠습니다. (정갈함과 거리가 멀지만, ㅎ)
이 두 권으로 가을을 잘 버티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9-26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써야 할 것이 있는데 계속 미뤄지네요. 벌써 2주가 넘었는데 흑흑.
두 책도 아름답지만 뒤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이 눈에 띕니다!^^
가을은 시의 계절이지요. 시를 잘 읽지는 않는데 사둔 시집이나 좀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목련 2022-09-27 19:14   좋아요 2 | URL
사진은 위장인 거 아시지요? 책장은 가장 어수선한 곳입니다. 화가 님이 사둔 시집, 궁금합니다!

mini74 2022-09-26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는 즐거움을 미루고 사들이는 즐거움 ㅠㅠㅠ 저 막 찔립니다 자목련님 ㅎㅎ 시집들 보니 오랜만에 시집 읽고싶어집니다 *^^*

자목련 2022-09-27 19:13   좋아요 2 | URL
사들이는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사실, 요즘 제일 간절합니다. ㅎㅎ
가을을 핑계 삼아 시집을 읽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