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은 꽃이 빨리 피어서 축제를 기획한 이들이 무척 당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3년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꽃들이 열렸다고나 할까. 기후 위기의 증거로 자연 생태계에는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 사실은 망각하고 꽃에 취하고 만다. 어쨌거나 그에 발맞추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 무리에 끼는 일은 어렵고 아파트 한쪽에 동백나무가 꽤 크게 자란 걸 확인하는 날들이다.


봄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다. 각자의 겨울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그 겨울 속 추위를 견딘다. 한 겹의 옷을 벗고 바람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하는 것처럼 조금씩 겨울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다 보드라운 바람에 슬그머니 마음을 내려놓는다. 봄이구나, 봄이니까, 봄이라서 마음은 자꾸 느슨해진다.


나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실패한 봄이 나를 지나간 후였다

꽃이 혼자 지던 날


무게중심은 어디서나 숨길 수 없다

저기 막 사라진 사람들

고개를 숙인 사람들

앞 촉이 닳은 신발을 신은 사람들

치욕 같은 맨발을 내 보인 사람들


울고 있는 동안은

눈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미 나를 지내간 내 거짓말


나는 가볍고

구름은 금세 몸을 바꿔 흩어져

한 번도 우리는 우리를 관통한 적 없었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것 아니라

막 안개를 지나온 것이거나

안개와 섞여본 적 없음을 알았을 뿐

지나가던 눈물을 훔쳐 살 뿐


그리하여 매번 너무 늦게 울었거나

안개에 얼굴을 묻는

발 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 「안개 속의 거짓말」, 전문)


아무리 지우려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긴 줄을 세우는 그런 사월이다. 나를 지나간 거짓말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었을까. 만우절로 시작된 4월이라 그럴까. 거짓과 눈물이 나뒹구는 4월이다. 새로이 탄생할 거짓과 슬픔이 자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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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안개비가 내렸다. 화요일 밤부터 시작된 비는 수요일에는 흠뻑 내렸고 어제는 안개비로 오늘은 미세먼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아침 일찍부터 도착한 안전 안내 문자는 일상이 되었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친근한 건 아니다. 황사용 마스크를 챙겨서 사용해야 한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라고 가족에게 말했다.


며칠 전 언니가 마스크를 정리했다. 모든 물건이 그렇듯 마스크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이미 많은 개수의 마스크가 유통기한이 지났고 그래도 순차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한 것들을 식탁에 꺼내 놓았다. 나도 방에서 마스크를 찾았다. 책장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여기저기 마스크가 가득했다. 여유분이라고 하기엔 많았다. 아마 가방에도 하나쯤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사용하려고 챙겨둔 마스크. 예고 없이 끈이 떨어지거나 주변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눠주려고 한 것들.


마스크 한 장 사려고 요일에 맞춰 약국에서 대기하던 시간들, 방문한 약국에 품절된 마스크 안내문을 보고 다른 약국으로 찾아 빠르게 이동하던 순간들. 3년 전 봄은 그랬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삼가고 병원 방문도 자제하라던 그 시간이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이제는 패션아이템으로 자리잡은 마스크. 생각난 김에 뉴스 기사를 검색했더니 필터 효율이 떨어지지만 밀봉된 상태면 큰 차이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면 마스크는 딱히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3년이라는 시간 한 몸처럼 사용했으니 이제는 마스크가 없는 상태가 이상할 정도다. 나 역시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열심히 화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름에는 마스크를 쓰기 힘들 테니 그때는 화장을 하게 될 것 같다.


3월 중순부터 마스크 필수가 아닌 권고 사항이 되었고 최근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친구는 마스크를 벗는 아이들이 낯설게 느껴졌다고 한다. 초롱초롱한 눈빛만으로 표정을 확인하는 것과 얼굴 전체를 보는 일은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고. 그만큼 눈빛이 중요한 것일까.


마음의 마스크는 어떨까. 외부로부터 오는 무언가를 막아낼 마스크. 함부로 쉽게 터져 나오려는 것을 막아주는 마스크. 나는 그런 마스크가 필요한가. 이미 마음에 착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내 마음을 보호하고 싶은 것일까. 지금은 잡념으로부터 보호하고 싶다. 쓸데없는 생각들, 의미 없는 사고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마음의 마스크를 쓴다. 평온을 위해.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일도 마스크 역할을 한다. 몇 권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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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4-07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너무 좋은 책이 많이 나와요. 저도 다 읽어볼래요.

자목련 2023-04-10 09:24   좋아요 0 | URL
수이 님과 함께 읽게 될 책, 신나요!!

희선 2023-04-08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마스크 안 해도 된다니... 그래도 저는 그냥 나가지 못하는군요 코로나가 아주 사라진 게 아니기도 하니... 가끔 공기가 안 좋기도 하고 어제는 황사도 온다고 했군요 오늘도 공기 안 좋다고 한 듯합니다 마음에 쓰는 마스크... 있으면 좋겠네요


희선

자목련 2023-04-10 09:24   좋아요 0 | URL
미세먼지가 심각한 요즘은 계속 마스크를 착용하게 되더라고요. 희선 님,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예배를 드리고 점심엔 짜파게티를 끓여먹었다. 일요일엔 내가 요리사는 아니고 맛있는 파김치가 생겨다. 어려서는 파김치의 맛을 몰랐다. 어디 파김치뿐이랴. 모르는 것투성이고, 편견에 먹어보지도 못하고 상상의 맛에 갇혀지냈다. 현재까지 이어져서 아직도 나는 굴을 먹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자란 내가, 어린 시절 엄마가 굴을 조새로 까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정작 영양가 넘치는 굴의 맛을 모른다. 그리고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엄마가 굴을 팔아야 해서 한 번도 먹어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엄마에겐 어린 딸에게 굴의 맛을 알려주는 것보다 그걸 모아서 팔아야 하는 이유가 더 컸을 거라고. 


냉장고에 어리굴젓은 아직 밀봉된 상태 그대로다. 아마도 나는 그것을 먹지 않을 것이고 작은언니가 먹거나 다른 누구에게 주게 될지도 모른다. 기억 속 엄마는 김치를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나는 김치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막걸리를 마시고 동네 친구들과 노래를 흥얼거리고 어깨 춤을 추는 그런 모습을 나는 지독하게 싫어했다. 창피했다. 철없던 나는 엄마의 그 작은 여유를 인정할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밤 독서를 했다. 밤 독서라는 말이 괜히 근사하다. 봄밤 독서라고 해야겠다. 추워도 봄이니까. 이주혜의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를 읽고 있는데 너무 좋은 거다. 좋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보다 더 좋다. 엄마의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한 번도 볼 수 없는 늙은 엄마의 모습을 잠깐 상상해 봤다. 나는 엄마를 닮았고 내가 늙는다면 그게 엄마의 얼굴이 될까. 책을 읽다가 에드리언 리치의 책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을 꺼냈다.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글에서 언급하는 비비언 고닉의 책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주혜는 내가 자신의 글을 읽고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책을 통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 말이다.


이주혜가 글에서 이름에 대한 부분이 등장하는 데 그 게 참 좋았다. 사실, 다른 부분도 넘 좋다. 내 이름은 아빠가 지었다고 기억하는데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지 않았다. 큰 오빠는 아명까지 있었다. 세상에 그 시절에 아명이라니. 세 자매의 이름은 돌림이 있고 언니와 작은 언니의 이름의 한자는 그나마 뜻이 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큰 오빠를 낳고 아들을 하나 더 바랐지만 내리 딸을 낳은 엄마. 큰 언니와 작은 언니까지는 괜찮았지만 나도 딸이라서 그랬을까.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남동생의 이름은 항렬자를 넣어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이 나쁘지 않았고 어떤 이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나 할머니의 이름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끼고 자면서 항상 자신의 이름을 외우게 했다. 그래서 엄마 이름보다 할머니의 이름을 먼저 알았다. 나를 명명하는 이름, 나의 존재를 부여하는 이름. 여성이 이름을 갖게 된 시점, 오직 남성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던 존재, 그 이전에는 여성은 이름이 없는 존재였다는 게 너무 아프다. 고모의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작은엄마의 이름은 한참후에 떠올린다. 


정확함이 이름 붙이기의 기본이라면 이름 바꾸기의 전제는 애정이다. 오직 애정으로 붙이고 또 붙인 이름만이 길어질 수 있고, 우리는 마음을 다해 긴 이름을 부르는 수고로움을 자처할 것이다. (「이름에게」, 중에서)


최근 아끼는 동생은 자신의 이름을 개명할 거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휴대폰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개명할 이름으로 바꿔 저장했다. 그리고 통화를 할 때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 이름으로 부르려 노력한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인가 생각한다. 자목련이라는 이름, 내가 지은 이름이 좋다. 블로그의 존재를 아는 친구들은 나의 다른 이름, 자목련을 안다. 


이주혜의 산문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가 좋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순간이 이어지고 있다고. 당신도 읽었으면 좋겠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해도 연결되고 어느 순간 어떤 지점에서 마주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근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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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3-06 0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올리고 싶은데, 안 올라간다. ㅠ.ㅠ

수이 2023-03-06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재, 북플 다 이상하던데요. 저도 사진 한장 올리는데 8분 걸렸어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 맘으로. 알라딘 일 제대로 안 하네요 😡

자목련 2023-03-07 08:34   좋아요 0 | URL
노화된 제 컴퓨터 때문인가 싶었는데 아니었군요. ㅎ

유수 2023-03-06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주혜는 내가 자신의 글을 읽고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저자지만 저도 그랬어요. 연결의 느낌과 글, 저도 흠뻑 공감하고 갑니다.

자목련 2023-03-07 08:37   좋아요 1 | URL
뭔가 깊게 연결된 느낌이었어요. 신기하면서도 반갑고, 아무튼 이 산문집 좋습니다!

얄라알라 2023-03-06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자목련님 글, 문장은 짧은데 어느 한 문장도 흐름 안에서 뺄 수가 없이 정교하게 짜여짐...
자목련님의 기억에 저절로 같이 빠져들다 나왔습니다^^

자목련 2023-03-07 08:40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돌아가신 엄마와의 시간이 아쉽고 그랬어요.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싶은...

페넬로페 2023-03-06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는 굴을 싫어했는데 요즘에사 굴맛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해 먹은 굴떡국이 그렇게 맛나더라고요.
우리의 어머니들은 여유가 별로 많지 않은 세대였잖아요.
저는 엄마가 그렇게 돈을 떼이면서도 계모임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사나운 애착도 읽고 이주혜의 산문도 읽어야겠어요^^

자목련 2023-03-07 08:43   좋아요 1 | URL
굴떡국을 먹어도 저는 슬그머니 굴을 건집니다. ㅎ 아마도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입맛인 것 같아요. ㅎ
맞아요, 계모임. 엄마에게 그건 절대적인 무언가였을지도 모르는데.
즐겁게 만나세요^^

레삭매냐 2023-03-06 14: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 전, 술을 진탕
퍼먹고 난 다음날 아침
친구들과 채석강에 나가서
굴 따시는 분에게 사 먹은
굴 생각이 납니다.

그 굴맛을 잊을 수가 없네요.

생뚱 맞지만 굴전이 먹고
싶네요.

자목련 2023-03-07 08:47   좋아요 1 | URL
기억과 맛은 멋진 조합 같아요.
음, 주말에 굴전을 추천합니다!!

구단씨 2023-03-06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주혜 작가님, 소설이 아니라 산문으로 신간을 만나게 하는군요. <자두>도 좋았는데요. ^^
<사나운 애착> 그렇고,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 좋네요...

자목련 2023-03-07 08:51   좋아요 0 | URL
<자두> 참 좋죠, 이 산문집도 좋습니다.
구단씨 님의 댓글도 좋고요!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걸 안다. 하지만 1인 극이 아닌 이상 연극에서는 조연도 단역도 지나가는 행인도 필요하다. 때로 주연보다 단역이나 조연의 말이 깊은 울림을 주고 다시는 볼일 없는 행인의 말 한마디가 평생 남기도 한다. 그만큼 사는 일은 혼자만 잘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혼자만 잘 하기도 어렵다. 가깝게는 가족, 지인, 친구도 잘 지내야 하고 멀게는 사회와 나라도 잘 살아야 한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인생에 스며들면 좋겠지만 불행은 어디서든 슬그머니 찾아오기 마련이다. 때로는 어떤 암시로 때로는 어떤 기척으로. 


평온했던 일상이 깨지는 건 한순간이다. 한순간은 방금이 아니리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해서 당혹스럽다. 어떻게든 순간을 모면하면 괜찮을 거란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안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이가 빠진 그릇을 내동댕이치지만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처럼. 저마다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게 인생이라고, 그러니 어쩌겠냐고 카버는 말한다.





단편 소설집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에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11편의 단편은 그런 이야기다.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게,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이야기. 너무 딱해서 그만 놔버리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이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삶, 그러다가 내가 어찌 감히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표제작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는 새벽 세 시에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한다. 재혼한 중년의 부부는 그 전화 한 통으로 잠을 설쳤다. 전화를 건 여자는 낯선 이름의 남자를 찾는다. 남편은 전하기 코드를 빼는 게 아니라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부부는 다시 잠들 수 없다.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로 대화를 시작한다. 전 남편이 등장하는 아내의 꿈,에 대해 죽음이 다가왔을 때 생명유지 장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아내는 남편이 그것을 빼주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남편은 끝내 유지하기를 바란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떤 형태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우리는 미쳤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게 언젠가 나에게 돌아오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이건 중요하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다.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123쪽)


귀찮은 전화 한 통을 누가 받을지 서로 다투고 잠을 설치고 커피를 타주기를 미루는 마음, 피곤함을 안고 출근을 하고 일상은 이어진다. 하지만 그 밤에 부부가 나눈 대화는 남편에게 어떤 선을 넘은 것 같고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장소에 도착한 듯한 느낌이다. 다시 전화기가 울리고 같은 목소리의 그 여자는 새벽의 일을 사과한다. 여자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부부는 죽음에 이르는 그런 심오한 대화를 나눴을까.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불쾌한 경험을 카버는 인생의 중심으로 끌어다 놓는다. 산다는 건 시시콜콜한 것들로 채워지고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내 앞에 놓인 문제들 때문에 속 썩을 필요가 없는 걸까. 고민한 만큼 소멸된다면야 모를까. 


나 혼자라면 괜찮다. 그게 아니라서 어려운 거다. 그놈의 가족, 그 관계 때문에 지치고 영혼은 낡고 닳아버린다. 모든 게 불평불만인 어머니가 이사를 가기 전 아들 내외와 저녁을 먹게 그릇을 챙겨오라는 「상자들」과 “동생에게 그 돈을 주는 게 실수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코끼리」를 읽는 내내 나는 내내 불안했다. 뭔가 폭발할 것 같아서, 단편 속 누군가가 죽거나 다칠 것만 같아서 말이다. 작년 8월에 아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온 후 이삿짐을 샀지만 반년이 지나도록 이사를 가지 않는 어머니. 아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말하며 상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와 재혼한 아내 사이에서 아들은 어머니를 저버릴 수 없다.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코끼리」도 마찬가지다. 형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동생, 생활비를 안 줄까 봐 걱정하는 어머니, 이혼한 전처에게 지급되는 돈, 학비를 부탁하는 아들, 일을 구할 때까지만 도와달라는 딸. 피곤에 찌든 중년의 육체노동자를 떠올린다. 내 주변이 누군가와 닮은 듯한 그. 철들지 못하고 자립하지 못한 가족들. 경제적인 지원이 당연한 줄 아는 그들에게 화는커녕 단 한 번의 소리도 지르지 않는 남자. 그가 마침내 삶을 포기할까 봐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카버가 그런 결말을 맺지 않아서 이상하게 고맙고 안도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이런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새삼 생각하고 지난 삶을 돌아본다. 익숙함에 길들여져 놓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떠나야 할 이유를 편지에 썼지만 그걸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아내가 왜 떠나는지 짐작도 못하는 「블랙버드 파이」의 남편처럼 우리도 그런 실수를 한다. 어쩌면 예측할 수 없고 짐작할 수 없기에 지랄맞은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무너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암시를 찾으려 노력하고 귀를 기울여 낮은 기척에 반응하려 부단히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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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2-17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서점갈 때마다 눈에 띄던데...자목련님 리뷰를 읽으니 또 스르르~ 책 읽고 싶네요.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자목련 2023-02-17 11:52   좋아요 1 | URL
서점에 가셨을 때 꼼꼼히 살펴보시고, 단편 하나 정도 읽고 결정해셔도 좋을 듯해요^^
 

신간 알림을 설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온 걸 몰랐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갔다가 알게 되었다. 장바구니에 담고 구매를 클릭하려는 순간, 나는 주저했다. 구매를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배송료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신간 무료 배송이나 만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정책이 바뀐 것이다. 나는 종종 책을 한 권씩 사며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누렸다. 책이 도착하면 빨리 읽어야지, 그 책을 읽고 또 다른 책도 주문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을 쌓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줄어들 것 같다. 배송료 인상은 예상된 일이었다. 먼 거리 음식 배달에 추가 배달료가 생긴지 오래고 쇼핑몰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때 모르는 사이 배송료가 인상되었음을 발견하곤 했다. 그래서 무료배송을 조건으로 월 가입비를 받는 쇼핑몰로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고 구매하는 쇼핑몰은 단연 서점이다. 신간이 아닌 중고로 책을 구매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조금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책을 사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서글프다. 그래서 지금 책을 사야 할까, 고민한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서점 가운데 하나(예스24)는 오늘부로 배송료가 인상되었고 알라딘은 16일부터 인상된다. 이제는 고객센터 공지글도 살펴봐야 한다. 오늘 구매하려고 한 책은 무료 배송 정책에 포함되는 가격이 아니었고 무료 배송을 받자면 한 권 더 구매해야 하고 그러면 가격은 더 늘어난다. 눈 딱 감고 이번만 배송료를 결제해야 하나.


서점의 마케팅은 더 놀랍고 용의주도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적립금이나 포인트를 지급하고 사용기간을 설정한다. 어떤 날은 너무 반갑고 고마운 포인트지만 어떤 날은 그 적립금(겨우 1000원)이 아까워 사고 싶었던 책이라는 이유로 충동구매를 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없었던 적립금이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계정에 들어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숫자는 참으로 유혹적이다.


이제는 산 책이 아니라 사고 싶은 책 목록이 늘어나겠구나. 책탑 사진과 책 읽는 소녀의 등장도 뜸할 것이다. 사고 싶은 책들은 이렇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에세이 『흰 옷을 입은 여인』, 아무튼 시리즈 중 홍한별의 『아무튼, 사전』, 김경미 시인의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시집 한 권씩 가볍게 기분 좋게 사는 일이 어려울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획 소비를 진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현명한 소비자로 성장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 권의 책이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건 슬프다. 이 슬픔을 달래려 알라딘에서 책을 한 권 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다 오른다. 촘촘한 생활을 요구하고 아끼는 일상으로 완전하게 전환해야 한다. 알고 있지만 실천이 어렵고 아끼는 일상은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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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2-14 1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늘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비를 하게 되더라고요.
적립금 천 원, 편집장의 퀴즈로 받은 500원 아까워서 결국 몇 만 원 더 쓰는;;; -_-

자목련 2023-02-15 08:5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오늘은 내내 고민할지도 모르겠어요. 한 권이라도 사야 하나 하고요. ㅠ.ㅠ

은오 2023-02-14 12: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적립금 6만원 받고 15만원어치 구입한자 뜨끔하고 갑니다.... 배송료도 배송료지만 책값이 너무 비싸요 ㅠㅠ 하 두세권 담으면 5만원이 훌쩍. 저는 한권씩 받는 것보다 여러 권 담긴 박스를 받을 때 더 쾌감(?)을 느껴서, 오히려 사고싶은 책이 한권씩 생기면 기다렸다가 여러 권씩 한 번에 주문하는 것 같아요. 이 점은 자목련님이랑 다르네요 ㅎㅎㅎ

잠자냥 2023-02-14 12:17   좋아요 3 | URL
그래서 책탑은 언제 올려요?
-저도 한번에 왕창 산 박스 뜯는 게 더 좋아요. 꼼꼼한 알라딘 박스 뜯기 귀찮은 인간.....-

은오 2023-02-14 12:27   좋아요 2 | URL
책탑 올리기 귀찮은데.... 오늘 다 오긴 합니다만 올릴지도 패스할지도 ㅋㅋㅋ
근데 우리 결혼하면 되겠네요 잠자냥님!! 박스 취향도 맞아!! 🤭

잠자냥 2023-02-14 14:13   좋아요 3 | URL
맞아요. 그거 엄청 귀찮죠. 귀찮으니까 하지마요.

독서괭 2023-02-14 21:15   좋아요 3 | URL
무엇이 귀찮은지 생략함으로써 은오님의 박스뜯기 귀찮음에 공감하는 동시에 청혼을 거절하는 잠자냥님의 지능적 대댓…

은오 2023-02-14 21:22   좋아요 1 | URL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ㅠㅠ 저 댓글 읽고 하루종일 울고있습니다 흑흑

독서괭 2023-02-14 21:37   좋아요 1 | URL
아 은오님의 귀찮음은 박스뜯기가 아니라 책탑올리기군요 ㅋㅋ 은오님 맨날 차이는 은오님…

자목련 2023-02-15 08:5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책값이 너무 비쌉니다. 중고를 매의 눈으로 지켜볼 수도 없고.
은오 님의 책탑이 궁금하지만 올리기 귀찮으시니,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자목련 2023-02-15 09:07   좋아요 2 | URL
우리 은오 님, 넘 귀여워요!
근데 책 주문 성향이 맞다고 결혼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ㅎ
그러지 말고 냥이를 키우는 집사가 되면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이것도 아닐까요?

은오 2023-02-15 15: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자목련님 팩폭 😫 잠자냥님 이미 육고집사라 냥이 키운다고 결혼 안해줄거같아요 ㅜㅜ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후....

잠자냥 2023-02-15 16:24   좋아요 0 | URL
냥이를 키우는 집사가 되면 공쟝쟝이 결혼해줍니다.
홉스를 한번 같이 키워보아요~

거리의화가 2023-02-14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얼마 전 무료배송 금액이 인상된다는 글을 보기는 했었는데^^; 시집을 한 권 담기에는 배송료 때문에 사기에는 애매해지겠습니다. 저는 한 권씩 사진 않고 장바구니에 너무 많이 담겨져 보기 싫을 때 한꺼번에 사는지라 어차피 의미는 없습니다만...ㅠㅠ
적립금의 유혹은 저도 공감합니다. 다만 500원, 1000원이라도 그게 넘어가게 되더라구요.

자목련 2023-02-15 08:55   좋아요 1 | URL
신간 무료 배송 정책이 사라지는 게 무척 아쉬워요. 적립금 사용 기한도. 당분간은 책장 읽기를 이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ㅎ

물감 2023-02-14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1만원 이하의 책 한 권을 무료배송으로 구매했는데요, 어떤 책들은 배송비가 붙더라고요.
이게 책마다 다른건지 정책이 다른건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배송비 아까워, 오프라인에서 중고로만 사고 있습니다.

자목련 2023-02-15 08:56   좋아요 1 | URL
물감이 구매하신 책은 신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까운 곳에 중고매장이 있다면 이용할 것 같은데 제가 사는 이곳은 작은 읍이라서..

레삭매냐 2023-02-14 1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악! 그랬단 말입니까 -
책 배송료가 붙는 걸 몰랐네요.

전 오늘 만료되는 적립금이
무려 5,500원이나 돼서 결국
조지 오웰 시리즈 하나 질렀
습니다.

앞으로 더 책을 사라는 건가
요... 점점 더 각박해지네요.
우주매장에서 중고책을 더 사
게 될 것 같아요.

자목련 2023-02-15 08:57   좋아요 1 | URL
무려 5,500원!
조지 오웰 시리즈, 리뷰로 기대할게요^^
책을 살 때 진짜 신중해질 것 같습니다 ㅠ.ㅠ

북깨비 2023-02-14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좀 전에 배송료 때문에 고민하다가 다른 분이 사셔서 중고책 놓쳤어요 😭 아직은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면서 셀프위로중입니다.

자목련 2023-02-15 08:57   좋아요 0 | URL
그럴 땐 진짜 속상하죠. 읽을 때가 아니다, 저도 그런 마음 키워보겠습니다. ㅎ

blanca 2023-02-14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몰랐어요. 충격이네요.

자목련 2023-02-15 08:58   좋아요 1 | URL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왜 서운한 마음이 드는 지 모르겠어요.

blanca 2023-02-15 09:00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그건 이런 것 같아요. 예컨대 김연수 작가가 신간을 냈어요. 나는 설레며 김연수 작가의 책 한 권을 바로 주문하고 그걸 기다리는 설렘을 이젠 경험할 수가 없는거죠. 반드시 다른 사고 싶은 책들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자목련 2023-02-15 09:05   좋아요 0 | URL
당장에 읽지 않더라도 그 책을 옆에 두고 바라보는 일도 정말 좋은데. 책값 맞추려고 가격 맞는 책을 고를지도 모르겠어요.

독서괭 2023-02-14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배송료 오르는군요. 몰랐어요 ㅠㅠ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는 말씀이 공감가네요.

자목련 2023-02-15 08:59   좋아요 1 | URL
우울할 때, 기분 전환으로 책 한 권씩 지르는 일은 자제해야 할 것 같아요. ㅎ

희선 2023-02-1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알라딘은 신간은 한권도 무료라고 나오는데... 다른 곳은 만원 넘어야 무료고... 그런 게 없어지고 배송료가 올랐군요 택배를 많이 이용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 일하시는 분들 힘들겠지요 고맙기는 해요 그런 분들이 있어서 편하게 사는군요


희선

자목련 2023-02-15 09:00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택배기사님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지 싶어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ㅎ

yamoo 2023-02-1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 권만 거의 구매하지 않아요. 한 권을 구매하려면 여러권 구매합니다. 만일 신간알림이 떠서 존 르 카레 미출간 작품이 뜨면 평소 찜해뒀던 책과 같이 구매합니다. 근데 신간은 좀처럼 구매하지 않고 중고서점가서 가끔 충동구매합니다. 어제는 괜히 예스 목동점 갔다가 카잔차키스 전집 나온거 보고 걍 바로 결재를...ㅜㅜ

자목련 2023-02-16 09:26   좋아요 0 | URL
충동 구매의 유혹 피하기 어려워요. 지금이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이상한 마음도 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