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선물 받았다. 자목련이라는 닉네임과 내 이름,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를 보냅니다란 문장이 있었다. 작가와의 만남, 낭독의 시간, 강연회는 언제나 먼 곳의 일이다. 참여하지 못하는 공간, 후기로 만나는 걸로 족한다. 한데 이렇게 그곳에서 나를 떠올린 고마운 마음 덕분에 나는 바다를, 섬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책 어딘가엔 거문도의 깊고 푸른 바다가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거문도의 바다 말이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나는 지척에 바다를 두었다. 그러나 이 바다와 그 바다는 다르다. 분명 다른 냄새를 품고 있을 것이다.

 

 

 

 

 

 

 

 가을 바다는 어떤 빛이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계절마다 같은 듯 다른 옷을 입은 바다. 다시 또 바다를 그리워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는 맥주를 곁에 두고 읽어야 할 것만 같다. 안주는 오징어로도 충분하다. 이미 바다라는 맛난 안주가 있으니까.

 

 한창훈 작가는, 바다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바다와 가장 멋진 하모니를 이루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니, 그는 바다를 흠모하는 하나의 배인지도 모른다. 파도와 연애하는 항구인지도 모른다. 읽은 책은 <홍합>과 <나는 여기가 좋다>가 전부다. 책장 속 <그 남자의 연애사>는 읽지 않았다.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여수시에서 지금도 또 만들고 있는 모형 거북선은 바다를 모른다. 배의 목적은 항해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가 휴식 뒤에 다시 일을 하러 나가듯, 해나 달이 다시 떠오르듯 배는 파도치는 바다로 나가는 게 존재의 이유이다. 만들어진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좋은 것은 무기분이다. 검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검집 속에 들어 있을 때니까.’ (88쪽)

 

 가을에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산문을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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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을 주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고 싶은 책과 살 수 있는 책, 사는 책은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동네에서 청소년 테마 소설이 나왔다. 세 권 가운데 관계의 온도를 선택했다. 관계는 어른이든, 아이든, 청소년이든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리고 어렵다. 그런 관계를 어떻게 다뤘을지 궁금하다. 주문한 책을 보니 신간보다 구간이 더 많다. 3900원(5만원 이상 구매시)이란 매우 파격적인 가격으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정약용의 산문집다산의 마음, 문화재 지킴이 전형필을 다룬 간송 전형필, 소재 때문에 선뜻 읽기가 겁나면서 관심이 가는 『고백, 모두 구간이다. 그러니까 남들 다 읽은 책을 나는 이제야 읽으려 한다.

 

 

 

 

 

 

 

 

 

 

 

 

 

 

 

 

 

 

 

 

 

 

 

 신간의 유혹은 여전히 강렬하다. 책을 좋아하는 이, 책을 소장한 이, 책을 읽는 이, 책을 모으는 이, 여하튼 책과 관련된 이들에게 장서의 괴로움은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읽고 싶은 이어령, 버리는 글쓰기가 내게 강렬한 눈빛을 보낸다.

 

 어제는 동네 어른의 부고를 들었다.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를 잃은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내일이 발인이라는데, 기상 캐스터는 폭우를 예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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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14-08-20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밥 대신 책입니다. ㅋㅋㅋ

자목련 2014-08-20 20:54   좋아요 0 | URL
아침엔, 책 주문하느라 밥 때를 놓쳤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14-08-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밥도 포기할 수 없어요 ㅎㅎ. 쌓여가는데도 책은 좋아요. 빗소리 시원한 저녁입니다^^ 동기들의 부고도 들려오곤 합니다. ㅜㅜ 그런 나이가 되었네요. 죽음이 나이순은 아니지만 ‥

자목련 2014-08-21 18:48   좋아요 0 | URL
분명 구매한 책인데 찾지 못하는 일이 늘어도, 장바구니를 계속 채우고 있어요. ㅎ
여긴 비가 그쳤어요. 흐린 듯하면서도 맑은 그런 하늘입니다.
 

 

 한 권의 책이 운명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거창하게 운명이라고 표현했지만 사랑을 주고 싶은 책이라는 말이 맞겠다. 정호승의 산문집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가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이라고 하는데 나는 칼럼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글이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었는데도 참 좋다. ‘좋다’란 말속에  따뜻함, 포옹, 기운, 안부, 토닥임, 친구 같은 뜻이 담겼다. 뭐라고 표현하면 정확할까? 아니다, 정확하지 않아도 좋겠다.

 

꽃은 왜 아름다울까. 그것은 겨울이라는 고통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지금은 묵묵히 고통을 견뎌내야 할 때다. 나이 든 중년 세대의 인생은 짧지만 젊은 청년 세대의 인생은 길다. 인생은 일회적인 것이지만 수능이나 입사 시험은 일회적인 게 아니다. 수능이나 입사 시험에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를 실패한 것은 아니다.’ (127쪽)

 

 ‘사람이든 나무든 직선보다 곡선의 삶의 자세나 형태가 더 아름답다. 새들은 곧은 직선의 나무보다 굽은 곡선의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함박눈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쌓인다. 그들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만들어져, 굽은 나무의 그늘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편이 쉰다. 사람도 직선의 사람보다 곡선의 사람의 품 안에 더 많이 안긴다.’ (201쪽)

  

 내게는 이렇게 정확하지 않아도 좋은,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그리 믿고 있는 인연이 있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이들이다. 오직 글로만, 때로는 목소리로, 문자로 만난 이들이다. 그러니 얼마나 신비롭고 신기한 일인가. 이 책을 나누고 싶은 이가 떠올랐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E 님,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즈음이 생일이다. 방금 주문을 했다. 나는 괜히 설렌다. 내가 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진다. 책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 마음이 그곳에 제대로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가장 아름다워지는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고독한 성찰의 세계에 머물 때 가장 아름다워진다. 박항률의 그림 속에 앉아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을 살게 된다. 그의 그림을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또한 내가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그림 속의 인물과 내가 하나 됨으로써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인물과 하나가 되어 한순간이나마 영원히 낙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54쪽)

 ​화가 박항률의 그림 때문에 더 좋다. 해야 할 일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졌지만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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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잡는다. 가름끈을 연다. 책을 읽는다. 아니, 잠든다. 책이라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매번 힘들다. 읽고 있다고 믿지만 책의 내용은 어디론가 흩어진다. 소설, 시, 인문, 철학, 어떤 분야든 그렇다. 약속이란 이름으로, 선물이란 이름으로 도착한 책들이 쌓인다. 그럼에도 다시 책을 주문하다. 다짐을 위한 변명과 함께 말이다.

 

 왜 이 책이냐고 묻는다면, 그저 그냥 끌림이라고 말한다. 책에 대한 정보나 소개글을 읽지 않았기에 나는 이 책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만, 제목처럼『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사라질 존재이므로. 아버지의 옷가지를 불에 태우면서 엄마의 사진도 함께 사라졌다. 큰 고모의 의도가 담긴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속이 상했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는 한강이라는 작가가 이유다. 나는 한강을 좋아한다. 한강의 글에서 만나는 차가움 속에 감춰진 뜨거움을, 절망처럼 보이는 가늘한 희망을 나는 사랑한다. 이문재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은 출판사 트윗에 올라온 글을 주시하며 기다렸던 시집이다.  

 

 예고 없이 도착한『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는 예쁜 동생의 선물이다. 깜짝 선물은 언제나 즐겁다. 다정한 동생의 마음까지 담겼기에 행복하다.  아직 읽지 못한『이제야, 비로소 인생이 다정해지기 시작한다』와『가족 문제』는 좀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인생과 가족이라는 단어의 울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2014년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내가 좋아하는 이웃에게 선물한 책이다. 그리고 내게도. 책으로 만난 사람, 책으로 깊어진 관계를 사랑한다.

 

 김훈의 『개』, 안현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도 주문한다. 김연수의 산문집도 나왔다. 하지만 이 책이 먼저다. 세계문학으로 만나는『대성당』. 그나저나, 김연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책을 잡는다. 가름끈을 연다. 책을 읽는다. 어김없이 책을 읽는 일상은 이어질 것이다. 조금은 천천히 말이다. 그리고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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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의 계절은 아직 멀리 있고, 딸기의 계절이다. 나는 딸기도 좋아한다. 한데 최근에 딸기를 먹은 적이 없다. 방울 토마토와 시든 귤만 먹었다. 식탁 위엔 딸기 사진이 걸려 있다. 친구의 선물이다. 친구는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냥 우연의 일치였다.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Some Fruit as Remembered by the Dead) 이란 부분이 있다. 책엔 몇 가지 과일이 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와 자두에 대해서도 나온다.

 

 

 복숭아

 

 우리가 먹었던 복숭아는 햇볕에 검게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뻘건 검은색이지만, 붉은 기운보다는 검은색이 더 짙었다. 시뻘겋게 달궜다가 꺼내 식히는 중이어서 여전히 뜨겁다는 경계심을 갖기 어려운 쇠의 검은색. 말편자 같은 복숭아.

 검은색이 전체적으로 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그들이 졌던 부분은 희끔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늘을 드리웠던 나뭇잎들이 제 색을 슬쩍슬쩍 칠한 것처럼 녹색이 살짝 감돌았다.

 우리 때에는 유럽의 부잣집 여자들이 얼굴과 몸을 복숭아처럼 희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집시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복숭아는 한 손에 꽉 차게 큰 것에서부터 당구공만큼 작은 것까지 크기가 상당히 다양했다. 작은 것의 껍질은 더 섬세하기 때문에 살이 짓무르거나 너무 익을 경우 보일 듯 말 듯 주름이 잡히는 경향이 있었다.

 그 주름을 보면 검게 그을린 팔뚝에서 접히는 중간 부분의 따뜻한 피부가 연상되곤 했다.

 속에는 씨가 있는데 질감은 짙은 나무껍질 같고, 모양새는 제멋대로인 게 꼭 운석 같다.

 이런 야생의 복숭아는 신이 도둑들을 위해 만든 과일이었다. (108, 109쪽)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이라는 제목인데 나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으로 읽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노란 참외를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은 당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할머니는 그랬다. 꽃을 좋아했고, 악세사리를 좋아했고, 예쁜 걸 좋아했고, 조금은 질척한 밥을 좋아했고, 누룽지를 좋아했고...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좋아했던 과일을 떠올릴 수 없고, 엄마가 좋아했던 그 무언가도 떠올리지 못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차이였을까.

 

 누군가의 과일을 생각한다. 작은 언니가 좋아하는 귤, 오빠가 좋아하는 배, 큰 언니가 잘 먹는 토마토, 과일이라면 모두 좋다는 친구 H. 어쩌면 그 모든 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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