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가 고장 났다. 냉수 급수가 되지 않는다. 김희진의 소설 <옷의 시간들>처럼 애인이 떠난 것도 아닌데 세탁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사용했기에 고장이 난 것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 오주처럼 빨래방에 갈 수 없다. 내가 알기엔 이 소읍엔 빨래방이 없다. 내게 속한 옷들, 수건들, 양말과 속옷들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줄 수가 없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 적에도 단 한 번도 빨래방을 이용하지 않았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세탁기들과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한다. 다시 이 소설을 읽어볼까. 한데 책이 어디에 있을까.
빨랫감을 바구니에 옮겨 넣고 나름 애를 써 봤지만 세탁기는 화가 난 사람처럼 뚱하다. 검색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천했지만 요지부동이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상담을 예약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상담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엔 상담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아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상담 예약을 해야만 했다.
전화를 기다리는 일은 조급함을 동반한다. 그리고 지루하다. 상담 전화가 끝났다고 해서 고장 난 세탁기가 바로 수리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방문 기사를 기다려야 하고, 부품을 바꾸게 되면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나의 조급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급하다.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내가 받지 않는다면 다시 전화가 걸려 올 텐데 말이다. 세탁기 고장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W. G. 제발트의 소설 <현기증. 감정들>의 표지 이미지처럼 말이다.
하루 종일 세탁기가 나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단어는 세탁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