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고이는 것일까. 어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어떤 시간은 일 분이 한 무한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과거의 시간에 매여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며 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속한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일까, 죽어 있는 시간일까.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을 읽고 나는 어떤 시간에 갇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말이 되지 못하고 맴돌다 사라진 시간의 숲에서 헤매는 듯하다. 소설 속 우나처럼 준을 기다리고 찾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본에서 대구로 온 우나와 우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우나와 우연하게 친해진 배정은 화자인 나와 같은 학원에 다닌다. 우나는 집에서 준의 노래를 들으며 준을 생각하고 우미는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는 나는 걷는 걸 좋아하고 대학 시험에 세 번 떨어진 배정은 대구에서 나서 자랐다. 그러니까 네 명의 공통점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시간이 많다는 점도 같았다. 우나와 다르게 우미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미용실에 다니는 우미의 엄마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구속되지 않은 시간은 자유롭지만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우나는 죽은 아버지가 유산처럼 남긴 1954년에 태어나 1976년에 ‘돌핀’이라는 음반을 낸 가수 제니 준 스미스를 듣는다. 내가 학원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에 우나는 도서관에서 준에 대한 기록을 찾는다. 그리고 나와 우나는 함께 걷도 준에 대해 말하고 준을 상상한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거리를 걷고 걸으며. 우미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귄다. 배정은 그들 중 하나였다. 학원에서 나를 불쌍하게 봐주고 챙겨주던 배정은 우미와 사귀면서 조금 달라진다. 배정의 시간 속엔 우미가 있었지만 우미의 시간 속엔 배정이 없었다. 나의 시간 속엔 우나가 있고 우나의 시간 속엔 준이 있듯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은 꼭 그렇게 될 것이다.’ (46쪽)
소설은 같은 하나의 음악으로 채워진 음반처럼 반복하고 반복한다. 준의 음악을 들으며 그녀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나, 일본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고 단 한 사람의 연인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는 우미, 우미를 향한 마음이 커지는 배정, 집과 학원과 거리가 전부 인듯 살아가는 나. 계절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도 그들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우나의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멈춰진 것만 같은 네 명의 시간과 달리 빠르게 변화하는 대구의 시간을 통해 박솔뫼는 어떤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살다 보면 잊혀진 사람들과 어떤 날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후 우미를 통해 우나의 죽음에 들었을 때 떠오르는 준의 앨범이 발매된 1976년과 우나와 함께 준의 음악을 듣던 침대가 있던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모호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불편하거나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그렇게 수긍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박솔뫼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연약하고 연약한 10대의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약하지만 연약한다는 걸 믿지 않던 시절들 말이다. 이제는 하나의 점으로 남아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성장이라는 말이 아닌 통과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두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 어떤 날에 내가 모두를 알게 되듯이 누군가 모두를 알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나도 알아 버려도 좋고 알아줬으면 좋고 알고 마음대로 그 누군가의 마음대로 나를 완전히 이해해도 좋다 좋아요 좋습니다. 그래 줬으면 좋겠다. 아주 짧은 순간 내가 모두를 이해하듯이 누군가가 길을 혼자 걷는 나를 보면 모두를 이해한 누군가는 나를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172쪽)
묘하게 정지향의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겹쳐지는 소설이다.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걷는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어떤 시절에는 단 하나의 단어로 말해버리게 되는 시간들. 이런 문장은 그 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감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과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누군가가 존재했던 연약하게 흐르던 시간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나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전체가 좋지는 않고 아까 아침에 걷다가 다리를 지날 때쯤에 그때 바람이 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천천히 다가와서 나를 그 안에 집어넣었어. 내가 바람 안으로 들어간 건데 강제적이지는 않고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어.”
“네가 들어간 거야?”
“내가 들어간 건데 바람이 집어넣은 것이기도 해. 그러니까 바람이 커다란 장막이 되어 나를 넣은 채로 갈 길을 간 거야.”
“저절로 그렇게 된 거야?”
“어,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저절로. 내일 또 그렇게 되고 다음 날 또 그렇게 되면 잊고 지내다가 한 달쯤 후에도 그렇게 되면 바람은 자주 나를 넣는 거잖아.” (19~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