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방영을 시작한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하사극이라 기대가 컸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는 많았지만 고려를 다룬 드라마는 많지 않았기에 반가웠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룬 드라마. 드라마의 원작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며 시청할 것 같다.


길승수 작가의 『고려거란전쟁:고려의 영웅들』 을 읽으면서 자연적으로 소설 속 인물과 드라마의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저자의 『고려거란전쟁』가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을 다루었다면 소설에서는 2차 고려거란전쟁을 기록한 전쟁일지와 동시에 '고려의 영웅들'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전장의 나가 적과 맞서 싸우는 실존하는 고려인의 모습을 들려준다. 군사를 지휘하는 지도사의 모습, 병법과 전략을 세우는 모습,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복 돋우는 모습,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 전쟁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을 마주한다.


2차 고려거란전쟁은 소배압을 필두로 황제 야율융서가 직접 전장에 나온 거란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중요했다. 막대한 군사력을 내세워 전쟁을 시작했으니 거란의 쉬운 전쟁이 될 거라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소설은 1010년 11월 16일을 시작으로 날짜와 시간별로 이어가며서 공간을 바꿔가며 고려와 거란의 전투 상황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니까 흥화진, 구주성, 통주, 서경 등 곳곳에서 전투 현장을 그리며 대치하며 상대의 전략을 예측하는 고려 영웅들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놀랍고 인상적인 것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진입하는 거란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노래를 부르고 뿔나발을 불러 전혀 밀리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고려의 모습이었다. 『고려거란전쟁(상)』 에서는 특히 현종을 왕으로 세운 강조가 통주에서 거란과 싸웠지만 포로로 잡혀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모습과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조원을 도와 서역을 지킨 강민첨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장면 앞에서 강민첨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과 마필, 기계가 보통강의 얼음 위를 가득 메우며 전진해오는데, 말의 발굽과 각종 기계의 바퀴에 긁히는 얼음 조각들이 마치 안개처럼 날리며 대기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더욱이 해가 비추어 서릿발처럼 날을 세운 병장기들이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대기 중의 작은 얼음 조각들이 이 빛을 산란시켰다.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구름 위 천상의 군대가 지상에 도래한 것 같았다. (상, 432쪽)


서경을 함락하고자 하는 거란과 그에 맞서는 고려의 전술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의 약한 부분을 집중 공략하는 거란군을 막을 수 없기에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라 성 안으로 집입하는 거란군이 바닥으로 내려올 때 빠질 수 있는 구덩이를 판 것이다.


거란군에게 패해 산속으로 흩어진 아군은 모으고 포로로 잡혔지만 투항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며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은 높은 직책의 사람만이 아니었다. 성안의 평민과 노비도 군사를 도왔다. 생동감 넘치는 전투의 모습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어 긴박한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주먹을 쥐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얼마나 소수인가 알게 된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증명한다고 할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듯 지난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승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드라마를 챙겨보면서 『고려거란전쟁(하)를 마저 읽었다. 드디어 강감찬이 등장했고 양규의 용맹함을 마주했다.사실, 강감찬만 읽고 있었고 양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고려거란전쟁(상) : 고려의 영웅들』 에서 실감 나게 전쟁의 모습을 그렸다면 『고려거란전쟁(하) :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인물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고 할까.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왕순(현종)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거란에 항복하자는 이들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이들 의견을 듣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뇌의 모습.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이 무조건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왕후의 임신을 이유로 개성을 떠나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대신의 속내는 왕을 보필하며 결국 그들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식솔의 안전을 생각하면 우선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왕순은 피난을 청하는 대신 군사를 차출하여 밥을 주고 사기를 돋우라는 강감찬을 믿기로 한다. 한국의 역사 속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하는 강감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신출신이었던 이가 전쟁을 이끄는 장군이 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소설에서 묘사한 강감찬은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고집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감찬은 예부시랑이나 육십이 넘은 나이였다. 평소 말이 많지 않았고 엄격하기로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며,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관료들은 평소 강감찬과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강감찬이 심하게 원리원칙주의자인데다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강감찬은 관료들끼리 사적인 교분을 맺는 것을 싫어했고 당파를 이루는 것은 더욱 싫어했다. 문하생들의 모임 따위는 당연히 나가지 않았다. 관료들끼리 사적 교분이 있으면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 180쪽)


『고려거란전쟁(하) :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강감찬의 면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양규와 김숙홍의 활약이 가장 인상적이다. 아니,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곽주를 탈환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거침없는 행보와 거란의 포로로 잡힌 고려인을 구하고자 노력한 모습은 감동을 안겨준다. 전쟁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승전을 기약할 수 없는 전략,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절박함. 양규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곽주 탈환이 가능했다고 보인다.


“우리는 저들보다 병력이 아주 적습니다. 적은 병력을 기책(奇策)으로 메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거란군이 물러갈 때까지는 오직 이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나라를 지키는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한 가지에 집중합시다!” (하, 94쪽)


역사의 기록을 다루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쟁을 다룬 소설이기에 내게는 낯선 말들이 많았다. 영채, 토산 같은 단어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소설을 읽으며 검색을 많이 했다. 강민첨, 양규, 김숙홍, 김종현 같은 인물을 검색하고 지식백과를 통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지역명들, 그림으로 만나는 무기, 작가가 생생하게 그려낸 전투의 모습으로 그 안에 살았던 이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이름있는 장수가 아닌 무명의 병사의 활약을 입체적으로 담아내어 그들을 우리가 기억하게 만든다. 고려서, 요사, 송사를 빠짐없이 공부하고 고려사를 기록하고 싶었던 작가의 수고에 감사하다.


드라마의 재미는 이제부터다. 그 안에서 나는 강감찬이나 양규보다는 김숙홍, 강민첨, 무명의 병사를 기한 배우들은 조금 더 애정 할 것 같다.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소설이다. 이미 읽고 있거나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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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12-01 17: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드라마 재밌죠^^ 모쪼록 끝까지 이 페이스를 유지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면 좋겠습니다. 말씀처럼 잘 아는 인물보다는 그동안 드라마화되지 않았던 인물들에 주목한다면 좋겠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관련 책을 읽어나가니 확실히 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른 5, 6부 마저 보고 이번주부터는 본방사수하려구요. 자목련님도 드라마 재밌게 즐기셔요!ㅎㅎ

자목련 2023-12-04 15:54   좋아요 2 | URL
직접적인 전쟁의 묘사를 마주하는 건 힘겹지만, 그 모든 게 역사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요.
강조의 죽음(스포일러군요..)은 안타까웠지만 그의 절개는 놀라웠어요.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인 강감찬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 같아요. ㅎ

공쟝쟝 2024-01-16 14:0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열혈 시청자 한 명, 두 명, 여기 세 명이요!~! ㅋㅋㅋ
자목련님 강감찬은 언제(?) 활약 하나요… 양규 잃은 백성은 갈피잡지 못하는 가운데… 갑자기 드라마 생각나서 댓글달러 옴ㅋㅋ

은오 2023-12-01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사극도 좋아하시는군요?! 자목련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따..
역사소설까지 읽으시는 자목련님.. 날 미치게 해..

자목련 2023-12-04 15:54   좋아요 2 | URL
나이가 드니(?) 예전과 다르게 사극도 즐겨 봅니다. ㅎㅎ
역사소설 읽기는 재미있지만 리뷰는 어렵습니다. 화가 님을 존경!

미미 2023-12-04 18:57   좋아요 2 | URL
은오님 왜이렇게 귀여운 거예요ㅋㅋㅋㅋ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따....아놔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12-05 00:12   좋아요 2 | URL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잉 그정도였나요? 이런 멘트가 미미님 취향이구나... 접수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진심을 표현했을뿐인데..

yamoo 2023-12-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려 거란전쟁을 보니, 아직도 저 지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를 봅니다.
이미 요즘 학계에서는 요하 일대에서 싸웠다는 게 각종 유물과 지형으로 증명이 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지도를 따르고 있네요. 강동6주는 평안도 지방이 아니었다는게 <고려의 북계>에 나오죠. 논문과 유물 그리고 연구물이 싸여도 우리의 한국사 통설은 요지부동이네요. 고려거란 전쟁으로 우리 강역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자목련 2023-12-04 15:57   좋아요 0 | URL
네,말씀처럼 조금이나마 드라마가 그런 역할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고려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기대합니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즐겁게 시청하고 있어요^^

도도라니 2023-12-1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보고 책을 사러 갑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12-19 15:41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즐겁게 만나세요^^

공쟝쟝 2024-01-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양규 장군님 돌아가실 때 저는…. 어흐흥…. (사실은 애국자) 그리고 김숙흥…과의 우정. 오랫동안 잊고 지낸 브로맨스 못 잃고…, 꺼이꺼이 (열혈 시청자)

자목련 2024-01-17 09:46   좋아요 0 | URL
이제 절반이 지났으니 본격적인 강감찬의 활약이 등장할 것 같아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대하고 걱정하는 분야 중 하나가 부동산이다. 이번에는 살 집을 장만할 수 있을까. 투기가 아닌 실거주자를 위한 정책을 기대한다. 눈 닿는 곳마다 아파트를 짓는 현장인데 내가 들어갈 곳은 어디에도 없어 허탈하다. 도대체 그 많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종합부동산세에 대한 뉴스를 통해 고가의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 경악한다.


신기하게도 시대가 바뀌어도 부동산에 대한 심각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박영서의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싶으면서도 뭔가 속상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부동산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 건국 초기 공정하게 땅을 분배하고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의지, 그에 따른 세법, 상속, 집값까지 실전 사례를 들어 11부에서는 조선의 땅을, 2부에서는 조선의 집을 설명한다. 학창 시절 국사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어쩜 이러게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은 문제로 고민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 개국 공신에서 땅을 주던 공신전의 세습과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지위와 법을 악용하는 모습, 도성에서 집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 허가되지 않은 도상 밖에 집을 짓고 사는 일, 전란을 겪고 살 길을 찾아 도성으로 모여드는 백성의 모습은 조선이 아닌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 왕조 초기 토지를 나라 땅을 경작자에게 분배하고 농사를 지어 세를 받을 수 있는 과전법이 제정되지만 예외가 있었다. 양반의 토지는 건드릴 수 없었다. 언제나 특권층의 예외적 허용이 문제였다. 자신의 땅을 더 늘리면 늘렸지 줄어들 게 할 수 없이 유산에도 태클을 건다. 동등한 상속권을 보장했던 고려와 달리 여성은 제외했고 부계 중심을 주장한다. 아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던 것도 장남에게 몰아주는 게 재산을 지키는 방법이라 여기고 고수한다.


노비도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양반과 사대부가 약탈해 땅도 자식도 모두 노비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말이다. 땅을 빌려주고 부당한 소작료를 받아 부를 쌓는 양반의 모습까지. 개혁을 위한 노력은 매번 실패로 이어져 안타까웠다.


땅보다는 집에 대한 이야기가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집을 지으려면 우선 땅이 있어야 할 터. 조선 시대 신분에 따른 집터 분배 기준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왕족은 천평, 고위 관료는 600평, 마지막 서민도 80평이니 걱정할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왕족과 공신들의 수가 많아 서민의 차례까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울좋은 법이라고 할까. 1가구 1주택을 정하지만 그 1 가구가 자꾸 넓어지니 서민들은 허가받지 않은 땅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나라에서 철거하면 몰래 짓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 어쩔 수 없이 불법건축물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재의 모습과 같은 처지인 것이다.


역대급 흉작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화폐 가치 하락, 출몰하는 이양선과 세도 정권이 주도하는 답 없는 정치 상황, 뒤숭숭한 민심과 국가 개정 고갈 등 수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부동산에 투자합니다. 토지와 주택의 가치가 주목받는 거죠. ‘집값은 언젠가는 오른다’는 믿음이 그들에게도 있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안전 자산’으로의 기대가 충분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271쪽)


현재와 마찬가지로 취직과 공부를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현상은 조선에도 있었다. 과거를 보거나 관직에 올라 서울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집은 구할 수 없으니 빌려서 살아야 했다. 집주인의 막무가내식 태도는 지금 가장 큰 문제인 전세사기와 다를 바 없다. 어떻게든 한양에 집을 사기로 결심하고 구입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집을 장만하기 위한 자금 마련도 현재와 똑 닮았다. 아버지의 후원, 친척에게 빌린 돈, 사채였다. 조선 시대 사채는 은행 대출로 보면 맞겠다. 집주름(지금의 공인중개사 역할)의 교묘함이 놀랍다. 집을 제안하면서 집값을 올리는 과정(높은 수수료를 챙기려는 의도)이며 매매를 하려는데 이미 팔렸다는 일도 허다하다. 갑자기 집을 구하려 다니던 때가 생각나고 집주인이 보증금을 주지 않아 내용증명까지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집 없는 설움이란.


조선의 주택은 ‘사는〔 live 〕 곳’으로 시작해서, ‘사는〔 buy 〕 것’으로 끝났습니다. 정부가 적절할 때 시장에 개입하지 않았고, 주거난 해소를 장기적인 해법을 고안하지 않았으며, 부동산 시장에서 벌어진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소극적이었습니다. 또한 임차인을 보호하고 투기 수요를 억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백성을 자본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시켰죠. 살 권리를 잃어버린 백성들은 불법건축물에서 간신히 삶을 영위해야 했습니다. 정부가 시민의 살 권리를 위해 끊임없이 시장 논리에 대응하지 않으면, 집을 얻는 과정이 아비규환에 이르고 맙니다. 이것이 조선의 주택사가 남긴 귀중한 경험적 자산입니다. (333쪽)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은 『전세 인생』과 『오래된 매력을 팔다』가 생각났다. 모두 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전세 인생』은 현재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부동산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된 부동산 정책을 만날 수 있을까. 김포가 서울시로 편입된다는 뉴스를 보면서 정말 그렇게 될까. 조선이나 지금이나 서울살이는 모두가 바라는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절실한 서울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서울이나 대도시, 새로운 것만 찾는 시대, 우리에겐 『오래된 매력을 팔다』 속 자온길 같은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환경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집의 의미를 생각할 때도 그렇다. 100년이 넘은 집이 주는 온기와 가치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집의 재활용 개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절실하다. 부동산 정책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이뤄져야 한다.


도시 재생이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로컬 창업과 연결되는 이야기다. 특히 소도시에서의 창업은 한가한 슬로우 라이프를 꿈꾸면서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소도시에서 창업했다가 이유도 모르는 채로 1년 안에 폐업하게 된다. 일단 인구 자체가 적은 탓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컬 창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부동산, 건축, 전문 분야, 디자인, 홍보다. 이 요소들을 갖추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오래된 매력을 팔다』, 118쪽)


정책을 세우는 건 국민을 위한 일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정부가 알아야 한다. 조선이나 지금이나 부동산 개혁은 시급하다는 걸 확인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부동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조선이나 지금이나 내 집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갈팡질팡 흔들리는 부동산 정책, 집에 대한 갈망, 그 모든 게 안정되고 누구나 내 집에서 나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품어도 될까.


흔들리지 않는 집에서 살기로 했어.

지면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그런 완벽한 장소 말이야. (『전세 인생』,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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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1-21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집 너무 갖고 싶어요 자목련님...😫😭
저도 품고는 있는데.... 하아 그날이 언제 올지....

자목련 2023-11-22 08:54   좋아요 1 | URL
은오 님 손길이 닿아 정리정돈이 잘 되어 아름다울 은오 님의 집을 그려봅니다!
 

지난주에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났다. '욘 포세', 처음 듣는 작가였다. 당연 그가 어떤 소설을 썼는지 몰랐고 검색을 하니 몇 권의 책이 나왔지만 그게 다였다. 나에게는 그랬다. 대형 출판사에서 곧 그의 작품이 출간될 것 같다. 해마다 10월이면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누굴까 궁금하고 온라인 서점의 투표 이벤트에 참여하곤 했지만 어느 해부터 시들해졌다. 기회가 닿으면 나와 만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세상에 작가는 많고 그만큼 소설도 많고 내 책장에도 적지 않는 책들이 많다.


그렇다고 책을 안 산 건 아니다. 단출하게, 두 권. 10월에 세계적으로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지만 지난 8월에는 김승옥문학상 수상 발표가 있었다. 올해의 수상자는 권여선. 내 일처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수상 소식을 듣고 나는 맘껏 기뻐했다.


소설집 『각각의 계절』에 만났던 「사슴벌레식 문답」이다. 읽었지만 다시 읽으면 더 반갑고 좋을 것이다. 거기다 작가노트가 있으니까. 권여선의 단편뿐 아니라, 손보미, 백수린, 최은미를 비롯한 여러 작가의 단편과 작가노트, 문학평론가의 리뷰도 만날 수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을 읽는 가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단요의 소설은 처음이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이다. 작가 검색을 해보니 2022녀부터 활동을 시작한 작가로 앞서 『개의 설계사』로 2023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잠깐 장강명이 떠올랐다. 단요란 이름을 자주 볼 수 있겠구나 싶다.


쓸 때에도, 살 때에도 나는 희망이 행복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느낀다. 희망은 오로지 시간과 관계하며 그리하여 결국 의미와만 관계한다. 의미의 그물이 성기거나 찢겨 아무 내용도 건져올리지 못할 때 나는 절망한다. 그렇게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뒤집힌 사슴벌레가 결정적인 그물코를 내놓았고, 나는 그걸 받아 미친듯이 들락날락 우왕좌왕하며 한 코 한 코 기워나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소설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권여선, 작가노트 중에서)


가을은 깊어가고 차가운 공기에 몸이 반응한다. 친구는 독감예방접종을 하지만 나는 독서 주사를 맞아야겠다. 긴 연휴의 탓인지 책은 뒷전이었던 날들, 이제는 단편의 즐거움에 빠져보리라. 작가노트 대신 리뷰를 쓰려면 얼른 읽어야지.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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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0-12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주사!! 좋은데요 ㅋㅋ 저도 딱히 노벨문학상 수상했다고 읽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더구나 이번 작가는 취향이 아니라는 분들이 여럿 보여서..

자목련 2023-10-14 11:29   좋아요 2 | URL
노벨문학상은 인연이 되어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책장에 읽지 않은 수상작도....
건강하고 즐거운 독서주사, 맞아보아요!

페넬로페 2023-10-12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여선 작가 좋아하는데 읽고 싶어져요.
좋아하는 작가가 수상해서 기분이 좋아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한 권정도는 읽어보려해요.
재작년에 새로 만난 구르나 작가의 작품이 좋았거든요^^

자목련 2023-10-14 11:30   좋아요 2 | URL
저도 권여선 작가의 수상이 정말 반갑고 좋았어요.
수상 발표 후 바로 읽으신 분들도 많더라고요. 저도 기회가 되면 만날 수 있겠지요^^

망고 2023-10-12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각의 계절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얼른 읽어야 겠어요ㅜㅜ 나름 아껴 읽고 싶은 마음에^^ 책장에 잘 모셔두고 있었는데 벌써 가을이 왔네요ㅋㅋㅋㅋ

자목련 2023-10-14 11:31   좋아요 1 | URL
나름 아껴 읽고 싶은 마음, 알아요!
리뷰 잘 쓰고 싶어 결국은 쓰지 못하는 ㅎㅎ
이 가을, 권여선의 단편과 즐겁게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3-10-12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권여선 작가님이 받으셨군요?
권작가님 축하드립니다.
보시려나요?ㅋㅋㅋ
독서주사! 오....미리 건강해지는 느낌입니다^^

자목련 2023-10-14 11:32   좋아요 2 | URL
아프지 않은 독서주사, 마음의 양식을 맘껏 취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여전히 소파에서 뒹굴거립니다. ㅎㅎ

yamoo 2023-10-13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욘 포세...저도 첨 듣는 작가라 어떤 작품일지 대표작은 일어봐야 겠다싶어 주문을 했는데 기다려야 하네요..ㅎㅎ

권여선 작가가 받았군요. 근데 박지리 작가는 누군지...이름을 딴 상까지 있네요..2010년 무렵부터 한국소설은 안 읽는지라 누가 무슨 상을 받고...화제의 책이 뭔지 전혀 몰라요. 문학의 경우 외국 작가들의 검증된 책을 읽기도 너무 벅차요. <나는 고백한다>와 같은 작품을 읽으면 한국 작품 읽는 건 정말 시간 낭비 돈 낭비처럼 여겨져요...문학에서는 한국은 여전히 아프리카 문학보다 못하다는 생각이에요. 미술과 문학은 정말 세계의 주변부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해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자목련 2023-10-14 11:38   좋아요 0 | URL
욘 포세의 대표작, 주문하셨군요.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박지리 작가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로 팬들이 많은 것 같아요. 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아직이에요. 언급해주신 <나는 고백한다>는 서재를 통해 읽어봐야지 하는 소설입니다. 말씀처럼 어떤 소설은 책값이 아깝기도 하지요. 다양한 문학의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은오 2023-10-13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민음사에서 욘 포세 작품이 바로 나왔더라고요. 어쩜 타이밍도 ㅋㅋㅋㅋㅋ
사슴벌레식 문답! 각각의 계절 읽었는데 반갑네요. ㅎㅎ
독서주사 ㅋㅋㅋㅋㅋ 좋네요!! 저도 그럼 자목련님 따라서 독서의 계절에 독서 주사 1차 2차 5차 10차 열심히 맞겠습니다 ㅋㅋㅋㅋ 😆

자목련 2023-10-14 11:39   좋아요 2 | URL
민음사의 타이밍^^
어떤 부작용도 없는 독서주사, 열심히 맞은 은오 님의 독서기록 기대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훨씬 크고 장엄하고 고귀한 것이다. 나 하나는 세계의 최소 단위이자 세계의 모든 것이기도 한 존재다. 희망의 단서端緖인 나 하나를 지켜내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경외하고 함께 걸어가는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척박한 광야에서도 작은 올리브나무 하나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으면, 그러면, 나무는 나무를 부르고 숲은 숲을 부르며, 다시 천 년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런 시대에 작은 올리브나무 같은 나 하나로부터 우리 삶을 지키는 푸른 방패가 되고 소리 없이 세상을 지탱하는 푸른 기둥이 되어갈 것이니. 여기 천 년의 올리브나무 아래 기대어 그대 안의 신성한 빛과 강인한 빛을 길어 올리기를. (11쪽, 「서문」 중에서)


오래된 나무를 보면 경건해진다. 그 나무가 품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냥 거기 나무가 있구나, 꽃을 피우면 예쁘고 열매를 맺으면 고마웠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내는 일의 고단함과 위대함을 깨닫게 된 게. 거대한 자연 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들이 인간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면서다.


박노해의 포토 에세이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그런 마음이 쌓여 인간을 어루만지는 사진을 만났다.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에서 담은 37장의 사진. 제목 그대로 이 사진집은 올리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눈물과 고단함을 품은 나무와 삶이 있다. 올리브나무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올리브나무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올리브나무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 어쩌면 토속 신앙처럼 보이기도 하는 몸짓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진집을 펼치며 마주한 첫 번째 사진. 올리브나무가 품은 시간은 과연 얼마일까. 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나무와 인간의 시간은 과연 같은 것일까. 자꾸만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서 가만히 사진을 매만진다. 마치 올리브나무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처럼. 그러데 올리브나무뿐일까. 인간 곁에서 인간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은 얼마나 많은가. 어리석은 인간만이 그 놀랍고도 귀한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올리브나무가 바라본 풍경을 알지 못한다. 올리브나무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바람과 어떤 고난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시인의 글귀를 따라 올리브 나무와 사람들을 생각할 뿐이다. 올리브나무처럼 남은 사람들, 올리브나무처럼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사람들을 말이다.


한때는 올리브 숲이었으나, 세월이 흘렀다. 거친 바위 산에서 살아남은 올리브나무 세 그루.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저 나무들은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굳건하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른 채 하나의 비밀스러운 기둥이 되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30쪽)


인간의 잔혹한 손길에 잘려나가고 파괴되고 무너졌을 모든 것. 시인이 마주한 풍경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시인의 시선을 붙잡은 건 올리브나무 가지에 담긴 애도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쟁이 끝나는 순간에도 삶은 이어진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그렇게 살아남고 살아간다. 처절하게 소리치고 울부짖는 대신 기도를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을 누가 허락했단 말인가. 이 한 장의 사진을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당신들에게 전쟁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냐고. 그 죽음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쟁 그 후이다. 파괴는 한순간이지만 재건은 긴 가난과 노동이고, 죽은 자는 산 자의 가슴에서 매일 다시 죽는다. 살아남은 이들은 마을 묘지를 조성해 올리브나무 가지를 바치며 경전을 읽고 기도한다.

“죄 없이 죽은 자는 높은 자리에 있으리라.”

신의 손길을 대신하듯 올리브나무 가지가 차가운 묘지를 푸른 숨결로 어루만진다. (80쪽)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치는 감사와 기도 앞에 나도 두 손을 모은다. 항상 부족하다고 불평하며 살았기에 부끄럽다. 하루를 마치고 내일을 맞이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하나하나 따지지 않아도 모든 것이 감사한 일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알 자지라 신화에서 창세기로 전해진 노아의 방주 이야기. 노아는 비둘기가 올리브 새잎을 물로 오는 것을 보고 홍수의 시대는 끝났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임을 알았다. 이로부터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전란의 땅에 노을이 물들고 오늘도 긴 아잔 소리가 울릴 때 하루 일을 마친 농부는 올리브나무 사이에서 기도를 바친다. 파괴된 대지에 가장 먼저 피어났던 저 올리브 새싹처럼. 사무치는 마음으로 삶에 대한 감사를 드린다. (92쪽)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삶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니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분쟁과 전쟁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반복되는 역사 앞에서 재생되는 삶의 폐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축소되고 세상과의 단절은 더욱 확대되는 세상.


박노해 시인은 사진을 통해 묻는다. 편리함이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고. 우리가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내 안의 나무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올리브나무 하나가 내게로 와 가만히 옆에 선 느낌이다. 눈과 마음을 보는 사진들, 오래 담아두고 싶다.





이 가을, 박노해 시인의 에세이를 읽으며 올해 남은 날들을 헤아려도 좋겠다. 바쁘면서도 뭔가 이루지 못해 늘 아쉽고 불안한 시간, 정작 무얼 위해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멈추지 않는 전쟁, 나는 괜찮다는 부끄러운 안도, 삶은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누군가 내게 알려주면 좋겠다.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는 세상, 희망은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기댈 존재는 내 곁에 있는 인간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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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11-20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었네요^^;;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저도 마침 어제 벵갈고무나무가 10m는 크게 가로수로 서 있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었던 터인지라 자목련님 말씀하신 ‘경건함‘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꿈 속에서 저도 그 나무가 너무나 신기해서 계속 봤거든요

자목련 2023-11-20 11:38   좋아요 1 | URL
얄라 님, 감사합니다.
크고 웅장한 나무가 가로수로 있는 길, 그 길에서는 경건하고 신비로운 삶을 마주할 것 같아요.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작년 9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했다. 세계적인 추모 행렬이 이어졌고 영국 왕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영국의 드라마 시리즈 ≪다운튼 애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는 영국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세계나, 문화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반대로 나처럼 ≪다운튼 애비≫에 대해 모르거나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 후 왕실 일원에서 물러나고 영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정도의 관심이 있는 이라면 매력이 적을 수도 있겠다.


영국을 생각하면 신사와 귀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책에서 소개하는 상류계급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어퍼 클래스’라는 계급은 작위가 있는 귀족뿐 아니라 ‘젠트리’라 부르는 지주도 포함된다고 한다. 시작부터 우리의 조선 시대의 가계도가 함께 겹쳐지는 건 왜일까. 아니나 다를까, 영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제도가 많았다. 귀족의 칭호도 무척 복잡하다. 이름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칭호는 그 사람이 공작, 후작, 백작의 장남인지, 차남 이하의 아들인지, 그 아래의 작위를 가진 집안의 아들인지, 귀족의 딸인지, 아내인지, 이혼한 아내인지를 드러내는 구조로 되어있다. ‘정식’작위와 ‘예의상의’ 작위의 차이점도 사실은 영어 표지로 알 수 있다. ‘정식’작위는 The Duke of Devonshire라고 ‘The’가 어두에 붙는 반면, ‘예의상의’ 작위는 Marquess of Hartington이라는 식으로 ‘The’가 붙지 않는다.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 19쪽)


물론 그들 세계에서는 체계적이겠지만 말이다. 귀족과 지주의 작위와 토지, 재산은 전부 장남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어퍼 클래스’는 장남이고 차남 이하의 아들들인 ‘미들 클래스’에게는 작위는커녕 토지 상속도 불가능해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러니 딸은 아예 찬밥이 아닐까 싶은 생각.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 속 사교 모임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이 이해가 되면서도 무척 안타깝게 다가온다. 조선 시대의 조신한 양반가의 모습이라고 할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퍼 클래스’에게도 고충은 있었다.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어퍼 클래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소유하고 있던 저택과 토지를 관리하는 것,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이웃 주민들의 삶을 지키는 것, 그리고 저택과 토지를 온전히 다음 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주민들이 좀 더 가까운 길로 다닐 수 있도록 자신의 토지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는 ‘통행권’을 발급하고, 토지와 저택을 1년에 몇 번씩 공개하는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무다.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 90쪽)


상속받은 것을 유지하는 일, 사교 모임을 게을리하지 않고 주말마다 하우스 파티를 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귀족과 대지주들에게 재력이 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미국 부호의 딸이 영국 어퍼 클래스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시대적으로 ‘올드 머니’가 주름잡던 미국 사교계의 신참인 ‘뉴 머니’는 런던으로 건너와 영국 귀족들과 사귀고 결혼한 것이다. 귀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이미지가 바로 그들이 살았던 집, 그러니까 성이나 컨트리 하우스다. 어퍼 클래스는 같은 계급의 사람이라면 직접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부재중이라도 저택과 정원을 가정부와 집사에게 안내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 관광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종가의 고택을 지키는 종손을 떠올리면 쉽겠다.


원래 그들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대저택이기는 하나,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으면 가짜처럼 인식되고 만다. 물론 20세기 이후의 컨트리 하우스 관광에는 어퍼 클래스의 생활을 엿보고 싶다는 관음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소유주가 살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어퍼 클래스에 대한 기대도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 140쪽)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어퍼 클래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변한 과정과 대학에서 생활하는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현재 어퍼 클래스는 여전히 영국의 문학과 문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묘사된다. 그들과 만난 적 없고 접한 적 없는 이들에게 궁금증으로 가득한 존재인 건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누군가에게는 영국의 문화와 어퍼 클래스에 대해 알아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영국의 ‘어퍼 클래스’의 흐름이나 변화에 대한 제인 오스트의 소설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처럼 다양한 작가의 소설이나 회고록을 통해 설명한다 게 인상적이다.. 영국 문학을 많이 접한 이들이라면 이 접점이 흥미롭게 작용해 풍부한 독서로 이어져 만족할 것이다.


이 책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귀족 문화』를 같이 읽어도 좋겠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 그러니까 여왕으로 살아온 삶을 조금이나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 빅토리아 여왕과 그를 둘러싼 영국 왕실과 귀족 문화에 대해 알려준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적인 일상이 전부는 아니다. 당대의 모든 기록을 동원하여 설명하는 세계사 책이라 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쓴 일기, 당대의 기록인 신문기사, 여왕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자서전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들려준다. 영국사이자 세계사인 것이다.


책은 ‘제1장 즉위준비 1819-1837’를 시작으로 대관식, 빅토리아 왕국, 여왕의 결혼, 만국박람회와 전쟁, 남편의 죽음과 여왕의 마지막 ‘제9장 끝날 때’까지 시간별로 소개한다. 고백하자면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일기를 썼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면 왕조 실록처럼 여왕을 보필하는 누군가의 기록이 아닌 여왕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다는 점이 무척 남다르다. 18세의 나이에 자신이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결의에 찬 다짐을 자세하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커닝엄 경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아버지, 국왕께서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숨을 거두셨으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커닝엄 경은 무릎을 꿇고, 내 손에 입맞춤을 했다. (빅토리아의 일기 (1837년 6월 20일), 12쪽)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위에 오른 이상, 나는 전력을 다해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전부라고까지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진정한 선의와 열의를 품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빅토리아의 일기 (1837년 6월 20일), 41쪽)


이처럼 책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를 만나는 일은 흥미롭다. 일기뿐 아니라 여왕과 관련된 각종 삽화와 초상화로 그 시대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공간에서 지냈는지 세계사를 이해하는 재미를 더해준다.


즉위 3년 후 독일의 작은 연방국 군주의 차남 앨버트와 결혼한 여왕. 어머니의 오빠의 자식, 사촌 오빠와의 결혼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빅토리아는 핸섬하고 지적인 앨버트에게 반했다. 여왕이면서 한 남자의 아내로 모두 아홉의 자식을 둔 빅토리아 여왕.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아이보다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컸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혈우병이 유전자가 있어 영국 왕실에 퍼트렸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빅토리아와 아이들의 관계는 복잡한데, 시기에 따라, 연령에 따라, 그녀 자신의 상태와 기분에 따라 변화해 간단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생후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는 ‘개구리 같다’면서 귀엽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아이보다 남편의 존재가 훨씬 컸고, 그와 단둘이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144쪽)


앨버트는 왕궁 개혁을 착수했는데 명령 계통을 정리하고 권한을 강화했다. 사용하지 않는 양초의 교환 구매나 허위 인원을 위한 와인 구입비 청구를 폐지시킨 것.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줄줄 새는 비용이 있다는 게 놀랍지도 않다. 여왕이 신경을 쓰지 못하는 부분을 앨버트가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아마도 영국의 공식적 여왕은 빅토리아였겠지만 여러 곳에서 앨버트의 영향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일중독자였던 앨버트는 런던 만국 관람회 당시 쓰러질 정도였으며 산업계, 군대, 교육계를 비롯한 노동자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다방면에 참여했다. 치통, 두통, 위통을 달고 살았고 1861년 12얼 14일 생을 마감했다. 남편의 사망 후 빅토리아가 일상을 찾는 일을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여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빅토리아는 남은 생애 40년을 원칙적으로 과부의 복장으로 지냈다고 한다.


1832년 7월, 13세일 때, 어머니가 일기장을 준 일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가족의 죽음 등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재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또 언니, 숙부, 아이들, 가족과 친척에게는 대량의 편지를 썼다. (21쪽)


빅토리아의 치세는 길었다. 경험을 쌓은 그녀의 의견은 존중되었고, 발군의 기억력을 기초로 제시되는 과거의 지식은 대신들에게도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편지나 총리와의 회견을 통해 매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에는 의회의 영향이 우선시되었으며, 정치나 외교, 군사에 관한 커다란 문제에 여왕 개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입장으로 서서히 물러났기 때문에, 수많은 군주제 그 자체가 폐지되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66쪽)


이 책은 분명 영국사, 세계사를 다룬 게 맞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맞다. 목차를 통해 시대별뿐만 아니라 관심이 가는 특정 시간을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64년 동안 여왕으로 존재한 사람, 굳건하게 군주제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 그녀의 생애가 곧 역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일기를 통해 그녀의 감정과 개인적인 생각, 가족과 친척과의 관계까지. 풍부한 사료와 사진으로 영국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영국으로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 같은 독자는 이런 책도 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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