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박물관 붉은 박물관 시리즈 1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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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잡기 위해 활약하는 형사들의 사건 일기를 다룬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마다 형사의 끈기에 놀라고 감탄한다. 반면 법망을 피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증거를 조작하는 범인의 노력에는 기가 찬다.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있다고 믿는 생각이 딱할 정도다. 지금처럼 증거를 데이터로 정리하지 않았던 시절의 사건이 최근 범죄 이력을 통해 범인을 잡게 되는 경우엔 함께 안도하고 공소시효가 끝나 범인을 잡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남는 경우는 허탈함에 속이 상한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붉은 박물관』은 그런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소설에서는 모두 범인을 찾을 수 있어 후련했다.


제목인 '붉은 박물관'은 일본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나 형사사건의 수사 서류와 증거품이 일정 기간 지나면 모이는 곳이다. 일정 기간이 지났다는 말은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뜻과 동시에 미제라는 것이다. 박물관의 주요 업무는 사건 관련 정보를 등록된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사건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그러니까 보관과 관리를 담당할 뿐 사건을 해결하는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조수 데라다 사토시에게 사건 기록을 읽게 만든다. 붉은 박물관의 직원은 단 두 명이다. 사건 현장에서 실수를 해서 박물관으로 온 사토시는 수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사에코는 사건 재수사를 지시한다. 해결이 된 사건의 재수사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게 바로 이 추리소설의 재미다. 마침표를 찍고 끝낸 사건을 다시 살펴보며 허점을 찾고 진짜 범인을 찾는 일. 독자는 스스로 형사가 되어 소설 속 기록을 읽고 범인을 추리할 수 있다. 모두 5개의 사건을 만날 수 있는데, 나는 단 한 사건도 범인을 지목하기는커녕 도대체 왜 그런지 혼란스러웠다. 재미와 동시에 허탈감을 안겨주는 추리소설이다.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 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물론 검토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어. 그런 관점을 바탕으로 사건을 바라보면 해결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거야.“ (51쪽)


바늘을 넣은 빵이 유통되고 사장에게 돈을 준비하라는 협박 전화가 와서 장소에 도착했는데 돈 가방만 남고 사장은 사라진 「빵의 몸값」, 헤어진 여자친구가 상담을 요청해 만나기로 한 후 시체로 발견되고 범인을 추리해 복수를 하는 「복수 일기」, 교통사고 현자에서 25년 전 교환 살인을 했다고 고백하며 죽은 남자의 진실을 파헤치는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유치원에서 1박 2일 캠프를 떠난 사이 부모님과 이모가 화재에 목숨을 잃은 「불길」, 26년 전 사건과 동일한 방법으로 일어난 살인사건 「죽음에 이르는 질문」까지 5편 모두가 기발한 트릭이 숨겨져 있다.


특히 교환 살인을 다룬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생소하면서도 놀라웠다. 살인 청부가 아니라 상대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주는 교환 살인, 사건이 일어날 당시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면 용의선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치밀함까지. 그저 화재로 인한 사망 사건으로 끝날 수 있었던 「불길」의 진실은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두 차례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 소설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OTT에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추리에 자신이 있다면 즐겁고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완벽한 범죄는 없으며 반드시 범인은 잡힌다는 범죄 심리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보고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 추리소설에만 필요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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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인생 앤드 앤솔러지
권제훈 외 지음 / &(앤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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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집을 갖는다는 건 인생 성공을 의미한다. 그만큼 집을 갖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집에 대한 생각과 의미는 저마다 다르지만 온전한 내 소유의 집을 장만하는 일은 집의 크기나 가치와 상관없이 대단한 일이다. 언제부터 집을 가는 게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아니,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었을까.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전세사기 뉴스에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앤드 앤솔러지 시리즈 『전세 인생』에셔 현재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수록된 5편의 이야기는 마치 내 이야기이거나 친구나 지인의 사정처럼 다가온다. 각 단편마다 작가의 집에 대한 생각과 추억을 들려준다. 집이란 무엇인가, 거주할 공간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저 맘 편히 쉴 곳을 원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내가 살아온 나의 집들이 떠오른다. 집이 아닌 방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임장이 취미가 된 부부가 절대 살 수 없는 고급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느끼는 욕망과 상대적 박탈감을 그린 권제훈의 「오꾸빠 오꾸빠」에서 부부는 빈집에 들어가 48시간을 버티고 있으면 경찰도 어쩔 수 없다는 스페인의 ‘오꾸빠’를 언급하며 빈집 놀이를 이어간다. 같이 온 부동산 업자는 내보내고 집 주인인 양 방문객을 받기도 한다. 누군가는 지하를 겨우 면해 살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는 혼자서 프라이빗 한 고급 아파트에 사는 게 우리 부동산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닿을 수 없는 고가의 집은 필요 없고 그저 내 몸 하나 누울 곳을 찾는 소시민의 모습은 고시와 공무원 준비를 하는 고시생들이 모인 노량진의 고시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김성준의 「유령들」과 전세사기를 당해 입주민들과 매일 대책 회의를 하는 아파트 주민의 안타까움을 담은 박생강의 「O션파크 1302호」에서 만난다. 고시생의 전유물이었던 고시원이 이제는 누군가의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는 점은 언급할 조차 없다. 전세사기로 인해 삶의 벼랑에 내몰린 주민들과는 상관없이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임대인에게 집은 돈을 버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유령이 된 전셋집 주인과 함께 지내게 된 이선진의 「보금의 자리」의 ‘나’는 언제라도 돌아갈 본가가 있는 애인과 달리 좁은 집이 전부였다. 평생 부족함이 없이 지내온 애인과 0,1평의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가능할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며 잦은 다툼으로 인해 잠시 떨어져 있기를 제안했고 건축을 전공한 애인은 철근 누락으로 인해 아파트 붕괴 현장에서 죽었다. 이 소설은 건설 현장을 고발하면서 집은 무엇인가 묻는다고 할까. 내게 가장 아픈 소설이었다.


집 같지 않은 집에서 삶 같지 않은 삶을 살다 보니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 가는 건가. ( 「보금의 자리」, 128쪽)


참 신기하지.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있어야 하는 자리를, 자신이 위치한 좌표를 정확히 알고 그보다 앞으로 나가가기 위해 안달복달했다. 더 나은 집과 더 나은 삶을 향해 갔다. 그러는 사이 나는 더 나은 사람은커녕 더 나인 사람이 되었다. (「보금의 자리」, 140쪽)


전 연인이 LH 임대 주택에 당첨되었다며 같이 살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생기는 갈등을 자세하게 그린 임국영의 「옵션, 없음」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전 연인이 마련한 집의 방 한 칸에서 갈게 되었지만 집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전 연인에겐 애정의 공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집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전 연인에게 집은 욕망의 대상이었다. 현실적인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집, 그게 전부였다. 집을 대하는 태도가 같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머물 곳을 찾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만에 하나 행운이 깃들어 마음 편히 자리 잡을 장소를 발견한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장을 작성할 것이다. 아주 많은 종이에 글씨를 적어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하고 싶다. 이제야 조금은 안전해졌노라고. (「옵션, 없음」, 작가의 말 중에서)


내 집을 장만한다는 목표가 아닌 거주할 곳을 찾는 이야기,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려는 몸부림, 끌어모를 수 있는 대로 끌어모아 얻는 전세가 사기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모습, 집에 대한 의미가 다른 이와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은 소설이 아닌 내 이야기, 우리의 사연이었다,


그래서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화가 나고 가슴 속 어디선가 치밀어 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전세사기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세입자들도 생각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나의 애정은 무엇일까 돌아보기도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하고 멋진 house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쉴 곳 인 home 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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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매력을 팔다 - 자온길, 시골 마을 재생 프로젝트
박경아 지음 / 포르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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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하우스가 유행이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의 나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는 여유를 꿈꾸는 이가 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5도 2촌의 생활을 실천하는 이도 많다. 일상의 벗어나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반색할 곳이 있다. 바로 부여의 ‘자온길’이다. 이미 다녀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부여의 규암 마을에 자온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왕이 놀면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졌다는 설화에서 착안해 사람들의 온기로 스스로 따뜻해지는 길, 자온길이란 이름이 탄생했다.


주식회사 세간 대표 박경아의 『오래된 매력을 팔다』는 ‘자온길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 취해 새롭게 만든 문화 공간이라고 할까. 전통 콘테츠를 활용해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시골 재생 프로젝트라고 해도 좋겠다. 아무리 기획이 좋다고 해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자온길 프로젝트는 비어 있던 규암리의 상가 거리의 헌 집 십여 채를 매수하여 리모델링하고 공예 문화 거리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다. 건물을 새로 짓는 게 아니라 옛 건물을 최대한 살려 전통이 가지고 있는 멋을 그대로 간직하려 노력했다. 공예 작가들은 새로운 콘텐츠를 선보이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한국 전통 공예의 매력을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지역 전체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도록 기획했다. (5쪽)


공예를 전공한 저자는 20대 초반부터 쌈지길, 인사동, 삼청동, 파주 헤이리 등지에서 아트숍을 운영했다. 서울과 부여를 오가며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외부인에 대한 편견과 따가운 시선, 쉽지 않은 지원과 투자까지, 저자를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저자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공예를 전달하는 사람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빈집들은 비록 지금은 손길이 닿지 않아 폐허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눈앞에서 치워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소중한 유산들이다. 으리으리한 한옥과 고운 비단만 보존해야 하는 유물일까? 무명도, 모시도, 광목도, 가난한 시절에 삐뚤빼뚤한 목재로 만든 한옥도 모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유물이고 자원이다. (79~80쪽)


책에는 저자의 열정과 사업 전반의 노하우, 지역 주민과의 상생을 위한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골의 헌 집을 매입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집 주인을 찾아 설득하는 일,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부지로 팔인 집을 매입하는 일, 멸실 신청이 되어 있는 집의 취소 과정까지 저자가 직접 뛰어다닌 것이다. 헌 집이 지닌 매력과 물건을 정리하여 맨 처음 만든 곳은 ‘책방 세:간’이다. 인구 소멸의 시골에 책방이 과연 인기가 있을까 싶지만 부여의 관광지를 들른 이들이 마주한 ‘책방 세:간’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를 시작으로 오일장 한가운데 주막이 규방 공예공방· 스테이 '청명'으로, 선술집을 도예가의 잔을 선택해서 마시는 찻집 '수월옥', 100년이 넘은 고택은 멋진 공연을 볼 수 있는 공간 '이안당'으로, 과거 양조장이었던 곳은 전통주를 소개하는 펍인 '자온양조장'으로 재연했다.


저자는 현재의 아름다운 자온길이 되기까지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도시 재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항으로 부동산은 무조건 많이 봐야 하며 건축은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하며 전문 분야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디자인과 홍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록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한 전통 공예가 어려운 게 아니라 일상으로 쉽게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며 ‘자온길’이 온라인 쇼핑이 발달된 시대에 온라인으로 할 수 없는 일, 직접 문화를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커다란 쇼룸이자 전통을 체험하는 백화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빌딩 숲을 잊고 잠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창 너머의 대나무 숲을 들여다보고,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듣는 곳. 옛날에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래된 공간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돌아가서도 이곳에서의 장면들을 꺼내어 숨 쉬고, 그것이 문득 위로와 힘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146쪽)


이 책은 자온길 프로젝의 모든 과정을 담고 있지만 나만의 콘텐츠로 사업을 구상하는 이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의 솔직한 경험과 노하우는 청년 사업가에게 현장의 진행사항을 들려주고 조언을 받을 수 있어 유용하다. 더불어 전통 공예라는 세계의 놀라운 가능성도 만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내가 자란 시골의 풍경을 떠올렸다. 집 뒤에 있던 대나무 숲, 대청마루, 정월 대보름과 추석에 동네를 돌던 사당패의 꽹과리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했다. 부여의 자온길이 궁금해졌다. 계절마다 품은 자연의 소리를 상상하며 자온길을 걷고 그 거리에 스며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가을, 그곳에서 오래된 매력에 취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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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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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생을 생각하면 모든 게 의미 있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을 외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 절실하게 매달렸던 것들이 무너지고 믿고 사랑했던 이가 배신하는 건 다반사다.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다 죽고 사는 게 아니라면 삶에 얽매일 필요 없이 단순하게 살는 게 제일 현명하다는 결론을 맺는다. 단순하게 사는 게 가능한가 싶지만 말이다.


지난 7월 사망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며 관계에 얽매여 사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존재,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확인하려 애쓰다 생을 마감하는 존재. 소설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때로 무겁게 때로 가볍게 생을 살아간다. 아니, 영영 알지 못한 채 번민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여기며 다른 삶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여 길을 잃는 사람들, 사실 잘 모르겠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소설에 등장하는 네 남녀의 사랑이 닿고자 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우선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을 보면 둘 사이 관계의 주도권은 의사인 토마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여자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토마시는 우연한 만남으로 그를 찾아온 테레자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토마시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테레자가 승자라 할 수 있다. 토마시의 특별한 여자 친구 사비나를 통해 출판사에서 사진을 찍게 된 테레자는 끝내 토마시와 결혼에 성공한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둘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소련의 침공으로 체코를 떠나 스위스로 간다.


스위스에서 테레사는 자신의 사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다. 체코에서 전쟁의 현실과 참상을 다루었지만 스위스에서는 선인장이나 장미를 찍어야 한다니. 테레사는 토마시와 상의 없이 프라하로 돌아오고 토마시는 그녀를 찾아온다. 토마시에게 테레사의 부재는 자유 그 자체여야 하지 않을까. 더없이 가볍고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었을 텐데. 토마시는 병원 일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신문에 기고하게 된다. 이념이나 정치를 떠나 그저 순수한 의견이었다. 그 일로 토마시는 감시와 회유의 대상이 되었고 테레사와 시골로 향한다. 의사가 아닌 창문을 닦고 나중에는 트럭 운전사가 된다. 테레사와 반려견 카레닌과 함께 살아간다. 마냥 가벼울 수는 없었다. 누군가 그들을 감시한다는 걸 알았기에.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골 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남녀는 어떤가? 토마시의 오랜 연인이었던 화가 사비나는 그와 헤어지고 스위스에서 교수 프란츠를 만난다. 프란츠 역시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둘 사이의 사랑도 평탄하지 않다. 사비나는 헤어졌지만 토마시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동시에 그녀를 붙잡는 건 역사였다. 그렇다고 그 무게에 짓눌리지는 않았다. 토마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가벼움을 누렸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으로 공산주의를 미학적으로 저항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말로 표현하면 배신이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조국을 배신했다. 그런 사비나를 프란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교수가 되고 과학자로 평탄하게 살아가는 프란츠는 사비나의 조국인 체코를 향한 동정심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모든 것을 책과 이론으로 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리에서의 투쟁이나 시위, 자유를 외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이상적인 존재로 다가왔던 것이다.


네 남녀에게 삶의 변곡점은 작게는 서로를 만난 것이고 크게는 외부 작용인 역사의 소용돌이로 볼 수 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마침내 토마시와 살게 된 테레자에게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고 토마시는 그래야만 한다는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토마시가 테레사를 거부하고 하던 대로 가벼운 삶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소설을 이끄는 건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1960년대 체코란 역사를 떼어놓을 수 없다. 그 두 가지를 실존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묘사하기에 어려운 소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거움을 따지기 이전에 존재 그 자체를 참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존재, 그것은 사랑, 이념, 역사,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63~64쪽)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네 사람의 사랑과 삶을 끊임없이 가벼움과 무거움을 저울질하면서도 한쪽으로 기울기를 거부한다. 마치 독자에게 어느 것을 선택할 거냐고, 어떤 게 더 나은 삶이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시작부터 화자는 내게 너무도 궁금한 존재였다. 네 명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작가 밀란 쿤데라라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는 걸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은 저마다 자신의 생을 사랑하고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다. 그 과정이나 결과가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보일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디에 의미를 두냐에 따라 그 삶은 지나치게 가벼울 수 있고 걷잡을 수 없이 무거울 수 있을 뿐이다.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9쪽)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단 한 번뿐이라는 것, 영속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역사를 마주할 때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다. 1960년대 프라하를 떠올리지 않아도 종교와 이념을 포기하지 못해 일어난 전쟁의 무게는 얼마일지. 우리가 한 번만 살 수 있다는, 그 분명하고 명확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존재의 경중을 떠나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설령 우리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하더라도 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존재 그 자체는 위대하다는 사실에 감동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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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10-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어야지읽어야지 하면서 수년째 안 읽고 있어요 자목련님 글 읽고 또다시 읽어야지 하고 다짐하고 갑니다ㅋㅋㅋㅋ

자목련 2023-10-24 14:52   좋아요 1 | URL
저도 대학 때부터 시도했다가 멈추기를 반복, 이제서야 겨우 읽었습니다.
망고 님도 곧 만나시길 바라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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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세상을 살고 있다. 삶의 기준은 무너지고 당장 오늘만 버티겠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혼란의 시대를 구원할 무언가를 기다린다. 구원자의 등장이거나 신의 계시가 있다면 믿고 따를 기세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을 것 같다. 단요의 장편소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의 수레바퀴처럼.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다. 인간의 정수리에 동그란 수레바퀴가 떠올라 정의를 상징하는 청색과 반대의 부덕을 상징하는 적색 영역으로 이분된다. 모두가 각자의 정의와 부덕을 보여줄 수 있다. 청색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하면 천국, 반대는 지옥이 결정된다.


수레바퀴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변한다. 덜 쓰고 나누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마음일까. 아닐 것이다. 종교와 철학에 대한 관심은 늘어나고 수레바퀴의 지배를 받는다. 정의와 부덕을 누가 결정하는지 모른 채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위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보편적인 개념의 도덕과 정의는 시시때때로 바뀌고 범죄 이력이 없는 이의 수레바퀴에도 적색이 존재한다. 혼란을 기회로 삼은 이들은 곧 등장한다. 수레바퀴 컨설팅 회사다. 대학 입시처럼 정의와 부덕을 컨설팅하는 세상이라니.


‘나’는 수레바퀴가 출현한지 1년 되는 시점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인터뷰하는 르포작가로 수레바퀴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을 들려준다. 수레바퀴의 등장을 반기는 윤리학자, 수레바퀴에 적대적인 수학과 교수, 수레바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불법 도박업체를 운영하는 재력가. 죄를 지은 이를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는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가. 작가는 소설의 형식을 빌린 토론의 장에 독자를 참여시킨다. 당신의 머리 위에 수레바퀴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거냐고.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겠냐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소설과 어떻게 다르냐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살다가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가, 수레바퀴를 따라 청색을 유지하려 애쓰다 천국에 갈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은 존재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온다. 이 시대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정의를 구현할 의지가 있는가. 수치와 테이터로 모든 걸 표현하는 세상, 인간적인 감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추억하며 살 수도 없고 다가올 미래의 불안을 껴안고 사는 인간 군상의 모습.


우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시간이 완전히 잘려나간 시대에 살게 되었다고.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사람들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사위어가는 중이라고. 음울하지만 조금은 낭만적이다. (169쪽)


내일은 오늘보다 초라할 것이고 모래는 다시 내일보다 볼품없을 것이다. (186쪽)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이라고 감탄하고 치부할 수 없다. 극단적인 상상이라고 말하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좋아질 거라는 믿음 대신 모든 게 망해가고 있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작가는 살고 싶은 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상을 조금 더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고 스스로 느끼고 깨우치기를 바란다. 정의와 도덕이 사라지는 시대, 청색과 적색 이분법적인 색의 등장은 아닐지라도 뭔가 바뀌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수레바퀴 같은 존재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가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는 디스토피아이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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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10-18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작가의 다른 소설 ‘다이브‘를 읽어본 적이 있어요. 오늘날 기후위기와 죽음, 의료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 소설도 현재의 위기를 작가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싶네요.

자목련 2023-10-20 18:01   좋아요 0 | URL
언급하신 기후, 죽음, 의료가 작가가 관심을 갖는 분야인 것 같아요.
작가의 시선 끝에 닿은 삶이 결코 소설에 국한 된 게 아니라는 게 서글프고요.

레삭매냐 2023-10-18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와 도덕이 실종되었다는 말에
왜 이렇게 공감이 가는지요...

오늘보다 나을 내일 혹은 모레를 기대
하기가 난망하다는 현실이 오늘을 사는
이들의 비애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한 시절
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목련 2023-10-20 17:59   좋아요 0 | URL
소통은 단절되고 불통으로 향하는 미래가 무섭습니다.
어디선가 다른 형태의 수레바퀴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