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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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계단 가장 아래에 있었다. (15쪽)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소설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범인일까, 목격자일까. 궁금증을 불러오는 이 소설은 넷플릭스 전 세계 1위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의 원작자 세라 본의 신간이다. 『레퓨테이션: 명예』 란 제목과 살인사건, 명예를 위해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일까, 명예를 위해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뜻일까.


당당한 커리어 우먼을 상징하는 표지 속 인물, 소설 속 엠마 웹스터(이하 엠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주목을 받는 정치인, 최근에는 여성 인권을 위해 ‘리벤지 포르노’ 법안을 통과시키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성공한 여성 정치인의 실제는 달랐다. 온갖 협박과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악플과 살아가는 일상이란 어떨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혼 후 사춘기에 접어든 딸 플로라와 보내는 시간도 부족했다. 엠마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재혼한 캐럴라인과 더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엠마는 하원의원이 되기 전 교사였다. 그때 동료였고 플로라의 음악 선생이었던 캐럴라인은 남편의 외도 상대였고 현재는 재혼한 상태다. 완벽한 정치인이자 엄마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정치인의 삶이란, 기자와 협력해야 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과도 잘 지내야 했다. 지역구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충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한순간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하는 삶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딘가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 여성 정치인의 삶은 험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 플로라가 왕따를 당하고 있었고 자신을 괴롭히는 레아의 나체 사진을 찍어 남학생에게 보낸 것이다. 자신을 돕고 협력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기자 마이크는 플로라의 기사를 쓰겠다고 말한다. 어제까지 동지이자 친구였던 남자가 적으로 돌변한 셈이다. 정치인이자 엄마인 엠마 웹스터는 이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야만 한다.


내 원칙을 지켜야 했다. 품격을 잃으면 도대체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단호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협조할 마음이 없다고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1권, 181쪽)


내 직업만 아니었다면 플로라의 행동은 가파른 곡선의 일부이자 대단히 유감스러운 10대의 비행, 한심한 실수쯤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내 명예 때문에 아이의 명예가 달린 문제가 타블로이드 신문에 기사화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1권, 199쪽)


엠마를 향한 관심과 공격은 끊이지 않는데, 그녀가 사는 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바로 마이크였다. 엠마는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그녀가 진짜 범인일까? 엠마가 두 명의 여성 의원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발견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여론은 엠마를 집중 공략했다. 기자였던 마이크가 왜 그곳에 왔는지, 살인사건의 실체보다 엠마와 마이크 둘 사이의 관계를 파고드는 선정적인 기사가 쏟아진다. 알려진 바로는 마이크는 엠마가 보낸 메시지, 그러니까 집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타고 그 집에 도착했다.


엠마의 주장은 달랐다. 마이크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없고 집에 들어왔을 때 무단 침입을 한 그를 발견했고 나가라고 소리쳤으며 둘 사이의 다툼이 있었지만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두려고 무서운 마음에 정당방어로 그를 밀쳤을 뿐이다. 마이크가 플로라의 일을 언론에 보도하려고 온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증거는 엠마를 향하고 있었다. 마이크와 협력하던 사이가 아니라 좋은 감정을 갖고 밤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심지어 엠마는 처음에 거짓말을 했다. 열쇠 꾸러미로 얼굴을 가격하고 세라믹 그릇으로 마이크의 머리를 내리치고 증거를 버렸다는 것을 숨겼다. 부검 결과, 문자 메시지 내역, 주변의 증언으로 엠마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집에서 만나자는 문자는 보낸 적이 없었다. 경찰에서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치열한 법정 싸움이 시작된다.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배심원을 앞에 두고 엠마가 마이크를 고의로 살인했다고 주장하는 왕립기소청과 우발적 살인이라는 변호사 톰. 자신을 걱정하는 플로라, 엠마를 응원하며 재판을 참관하는 캐럴라인.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은 중요했다. 엠마에게 우호적인 증인과 그렇지 않은 증인, 그들의 증언이 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재판정에서 매번 팽팽하게 맞서지만 유죄 쪽으로 조금 더 가깝다.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의 중간을 건너 뛰어 결말을 먼저 보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힘들었다.


누군가 엠마를 함정에 빠드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정치인의 몰락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배심원의 판결이 무죄로 나왔을 때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엠마의 본심을 알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무죄를 선고받고 나온 속내, 그러니까 정치인으로의 엠마의 마음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어느새 정치인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그 의심을 종식시키는 소감을 겸손한 태도로 전달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열여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생각하면서. (2권, 242쪽)


입을 떼며, 내게는 선택권이 있음을 깨달았다. 참회와 감사를 표하며,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게 가르쳐 준 공인의 삶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냐, 아니면 반항적이지는 않되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여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힘쓰겠다고 말할 것이냐. (2권, 243쪽)


『레퓨테이션: 명예』는 이처럼 여성 정치인이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겪게 되는 복잡한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정치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재미있게 술술 읽히지만 복잡한 심경을 마주하는 소설이다. 인간의 욕망과 야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권력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영상화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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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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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이 나쁜 일에 국한된 건 아니다.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오지 않았을 뿐, 말하고 싶은 때가 오면 말하게 되는 것들이다. 누군가 그 말을 재촉한다. 누군가 그 말을 강요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안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좋은 의도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그게 전부라는 걸 사람들은 의심한다.


이주란의 단편집 『별일은 없고요?』은 그런 마음을 안다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어도 괜찮다고, 과장된 표현을 요구하거나 속내를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이주란의 단편은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가라앉은 마음이나 지그시 누른 슬픔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소설집을 읽는 게 답답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주란의 소설은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사고, 이별을 암시할 뿐 자세한 내막은 들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아직은 때가 오지 않는 말들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를 포함한 8개의 단편 가운데 몇 편은 두 번째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단편도 있고 중반 이상 읽고서 기억한 단편도 있다. 이주란 소설의 특징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그리는 것, 그 안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 전반적으로 상실을 다루지만 지독한 슬픔을 뿜어내지는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돌림노래나 도돌이표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반복적인 돌림노래와 비슷하지 않는가. 관계는 늘 어렵고 쉽게 오해하는 대신 오해를 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 상대를 안다고 생각한 마음이 얼마나 오만한가, 얼마나 부족한가 깨닫기도 한다.


이주란의 소설은 그런 마음을 인정하라고 괜찮다고 위로한다. 마음이 기우는 대로 말하고 싶은 때가 오면, 지금이 아니라 그때 말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에서 수연은 연인과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가 일하는 지방의 원룸으로 온다. 낯선 동네를 오가며 산책하고 엄마가 밥을 해주는 곳에서 일하는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두 번째 읽으면서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새집이어도, 아무튼 언젠가 그 방에서도 누군가는 죽을 수 있어.” (25쪽)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는 건 모두가 죽을 수 있다는 것, 죽음과 상실이었다. 「별일은 없고요?」의 뒷이야기처럼 여겨지만 인물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은」에서는 얼마 전 엄마를 잃은 은영의 집에 직장 동료였던 은영이 며칠 신세를 지겠다고 연락이 온다. 집 주인인 은영이 일하러 나간 사이 은영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나중에 은영의 엄마도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상실을 겪은 이에게 잦은 안부를 묻고 괜찮냐고 묻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정말 그럴까. 혼자만의 방식과 애도의 기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은영이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애도를 하는 「어른」 속 경아의 곁에는 아줌마가 있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관계지만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고 시골 동네를 산책하고 두부를 사러 가고 곁에 머물러 주는 어른이다. “울고 싶은 만큼 울었어?”(103쪽)라고 물어주며 아줌마는 돌아가신 고모 이야기를 꺼내며 경아에게 “마음 놓고 울라는 거야”(104쪽)란 마음을 건넨다. 아줌마와 지내며 아줌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인해 경아는 위로를 받는다.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함 때문이었다. ( 「어른」, 114쪽)


그런가 하면 남편을 잃고 대학 후배의 집에서 지내는 「파주에 있는」 현경은 매일 후배가 전하는 안부와 염려를 받는다. 집 밖을 나가지 않는 현경은 첫사랑이었던 재한의 메일을 받고 외출을 한다.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며 사람들의 분주함을 마주한다. 재한은 소소한 일상을 건네며 그저 곁에서 걸어준다. 그리고 헤어질 때 잘 살라고 말한다. “잘. 잘 살아야 돼.” (275쪽)라는 그 말에 담긴 진심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이주란의 소설은 밋밋하다고 할 수도 있다. 사건의 개요나 핵심 설명은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폭풍이 몰아치는 순간이 아닌 그 이후의 감정들에 집중한다고 할까. 그 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보내야 할 삶이고 버티고 견뎌내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 부족한 애도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그것이 지독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들은 말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말하지 않고.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는 것 같아.

응?

결국엔 자기가 결정하는 거지.

뭘?

행동, 태도, 반은, 그러니까…… 모든 것.

모든 것?……

거의 대부분.

마음이 어떤 쪽으로 아주 많이 기울면 어쩔 방도가 없잖아. (서울의 저녁」,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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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장면들 -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
민바람 지음, 신혜림 사진 / 서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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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대단하다. 달래는 정도가 아니라 괜찮은 상태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가 아니니까. 어떤 이는 지나간 과거에 오래 매달려있고 어떤 이는 사람들과의 부침에 힘겨워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괴롭다. 『낱말의 장면들』 의 저자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힘들고 관계에 지치고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는 게 고달팠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사전을 찾았다. 잘 알려지지 않고 많이 쓰지 않는 순우리말을 외우고 마음을 기댔다. 그렇게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었다. 그런 단어들이 주는 힘을 일상과 함께 녹여낸 글이 모인 책이 『낱말의 장면들』이다.


이런 발상을 하다니, 색다르고 특이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금세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차분하고 가만하게 들려주는 일상과 그에 맞는 낱말의 어울림에 스며들었다. 지친 마음을 쓰다듬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낱말은 저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어서 그랬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감정들, 치료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상처들, 서로가 다른 게 당연한데도 부딪히는 마음들에 대한 조용한 고백이라고 할까.


어떤 사람은 순간 감정을 바로 다른 감정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혼자 삭히느라 끙끙대는 동안 감정은 더 크게 곪아간다. 자기 마음의 문지기란 저자의 표현에 공감하며 나는 문을 얼마나 열고 닫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한 번 닫히면 끝까지 열리지 않는 마음의 문을 지닌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의 문지기다. 스스로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감정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문다.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일찍 보내줘야 병이 되지 않는다. 부정적 감정을 쉽게 통과시키지 않는 마음은 긍정적 감정 앞에서도 문을 활짝 열지 못했다. (31쪽)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를 하고 대학교에서도 교수를 돕는 업무를 본 사람을 떠올리면 소심보다는 당당한 이미지가 따라온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정한 일상을 지키느라 힘들었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선을 넘어도, 기준이 무너져도 큰일이 생기지도 일상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어야 별일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더 좋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걸.


마음에도 흐트러진 공간을 두려 한다. 불만족을 하나하나 붙잡아 바꾸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땅으로 나를 들여놓는 연습을 한다.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이 멀어지기를 바란다. (63쪽)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기쁨과 감동을 느끼는 순간도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이다. 저자가 지난번에 놓친 과일 트럭 아저씨를 만나 맛있는 제철 과일을 사서 먹는 것처럼 단순하다. 성장은커녕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뒷걸음질 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 앞으로 나갈 준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견디는 시간만큼 곰비임비 쌓이는 게 있으니까. 그건 어떤 업무나 계획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생각과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실수나 실패란 경험이 있어야 같은 경험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깨단한 것들로 배우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반복된 어리석음만큼 깨단한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삶의 무게중심이 되어줄 것이다. 무게가 묵직한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남은 삶에서 균형을 잃지 않게 도와주기도 한다. 주변에 아픔 대신 살아에 가까운 감정들을 옮길 수 있게. (128쪽)


책에서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부분은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후각장애를 갖고 계신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저자가 느끼는 마음, 본가에 갈 때마다 엄마와 다투고 돌아오는 속상함. 가장 가깝다고 여기고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한 사이, 바로 가족이다. 적당한 거리의 맞은바라기에서 서로를 보고 있다면 더 잘 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가까이 있어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더 선명하고 더 환하게.


저자의 마음을 따라 읽으면서 그가 들려주는 곱고 다정한 낱말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성실히 정성껏 고르고 골랐을 낱말일까 상상한다. 이전에 몰랐던 낱말이 반갑게 건넨 인사가 반갑다. 나만 아는 나의 낱말 목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에게 가만한 위로를 건네준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단순하고 편안하게 이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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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1-14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주 오래 전에 낱말의 뜻을
모를 적에 아버지 책장에 있던
두터운 국어사전 찾던 기억이 나네요.

자신만의 단어로 치유를 하다니 발상
이 참신하네요.

자기 나름의 패턴을 지키는 일도 사실
일상에서 쉽지 않나 싶네요.
게다가 더 좋은 것이 행복으로 귀결되
지 않는다는 것도 새로운 깨달음이구요.

이건 뭐 거의 덤으로 책을 한 권 읽은
그런 느낌이네요. 마음은 항상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런 어딘가에...

자목련 2023-11-16 14:41   좋아요 1 | URL
제게도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낱말의 뜻을 찾고 기억하려 애쓰던 시절이 있어요.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는 방법을 안다는 것만으로 차분한 마음의 길에 접어들 수 있겠다 싶어요.

비가 오는 목요일, 매냐 님의 마음이 평온하게 머물기를 바라요.
 
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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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는 일은 대단하다. 건강을 위해 걷기, 명상, 기도 등 쉬운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 간절하지 않아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간절함이 부여되면 상황은 변한다. 간절함은 아주 작은 자극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남들은 신경 쓰지 않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순간 발화한다.


내장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필성슈퍼’ 를 운영하는 가족 이야기, 권여름의 장편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에서는 다양한 간절함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보여준다. 급한 마음에 언급하자면 소설은 재미있고 따뜻하고 뭉클하다. 슈퍼로 바쁜 부모님, 집안 살림을 챙기는 할머니, 고등학생 언니, 중학교 3학년 은동, 동생 은율, 여섯 식구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소설이다.


화자인 은동이 할머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비밀은 할머니가 한글을 모른다는 것. 은동은 할머니의 한글 선생님이 되어 용돈을 받는다. 은동이 용돈을 모으는 이유는 연기 아카데미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은동의 꿈은 배우다. 은동은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한 번식 슈퍼 배달을 돕는다. 은동 가족에게 변화가 생긴 건 대형마트가 오픈하면서다. 부모님은 두부 한 모도 배달을 시작했고 김장철에는 절인 배추를 팔았다.


소설은 대형마트에 대응하는 필성슈퍼의 모습과 연극을 향한 은동의 열정, 그리고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통해 실패와 그에 굴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일어서는 어떤 마음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은 안쓰럽고 애틋하며 대견하다. 손님이 없어 애타는 마음을 숨기고 태연하게 하루하루 슈퍼 문을 열고 대책을 세우는 부모님, 떨린 마음으로 친구 석희와 아카데미 면접을 보지만 석희에게 연기를 권해 속상한 은동, 배움의 열정만큼 실력이 늘지 않아 속상한 할머니의 모습은 소설이 아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문을 여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새벽 여섯시 차가운 셔터 끝을 잡아 힘차게 올리는 아빠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여느 시간 여섯시, 닫는 시간 열두시는 법으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었고, 우리 슈퍼만의 신성한 약속이었다. (169~170쪽)


슈퍼가 힘들어져 트럭을 몰고 섬으로 물건을 팔러 가는 아빠, 아카데미에 다녀온 후 절친 석희와 멀어진 은동, 조금이나마 힘이 되겠다고 시위를 하듯 대형마트에 가는 할머니. 그 마음을 알 것 같고 내일처럼 여겨졌다. 간절함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외면받는다고 느낄 때 얼마나 속상할까. 하지만 은동이는 연기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을 슈퍼를 그만두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한글 배움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문예대회에 나가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써서 상금을 받고 은동은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이 그곳만 있는 게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간당간당. 엄마의 입에서 최근에 많이 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 단어는 마치 종소리 같았다. 간당간당…… 간당간당.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 종소리를 들으며 확신했다. 내일도 우리 필성슈퍼는 망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문 열기를 선택할 거라고 말이다.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양팔을 벌린 것처럼 슈퍼의 양쪽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259쪽)


소설 속 은동이네 가족에게 닥친 위기처럼 우리네 일상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위태롭게 휘청거린다. 모두 쓰러지지 않으려고 간절함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실패하면서 배우고 그 과정에서 다른 방법을 찾는다. 단 번에 성공하거나 행운에 당첨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믿고 나아간다. 간절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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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eol 2023-12-2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소개해주시는 책들 리스트에 담고 갑니다.

자목련 2023-12-27 11:11   좋아요 0 | URL
biseol 님,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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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 존재의 이유를 찾으며, 닿을 수 없는 목표를 좇아서, 반복된 하루를 살아간다. 아침이 오면 눈을 뜨고 저녁까지 일하고 밤이 오면 잠이 든다. 그 많은 날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언젠가 마주할 죽음, 인생의 끝이 있다는걸. 쓰고 보니 인생이 별게 아닌 것 같다. 정말 그럴까?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욘 포세의 장편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통해 아주 소소한 것들로 채워진 인생을 만났다.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는 걸 배운다.


욘 포세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마침표를 찾을 수 없는 쉼표로 길게 이어진 문장이 당혹스러웠다. 혼잣말로 이루어진 그런 소설처럼 느껴졌다. 사실 소설은 간단하다.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요한네스'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세세하게 그려지는 건 아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들려주고 있으니까.


평생 어부로 살아온 요한네스는 아내가 죽은 후 혼자 산다. 7명 자녀는 각자의 삶을 살고 막내 딸 싱네가 근처에 산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을 맞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볍다고 느낀다. 혼자 맞는 아침은 익숙하지만 가벼움은 낯설다. 평소대로 커피를 끓이고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는다. 산책을 할까, 낚시를 할까 생각하다 산책을 나선다. 그리고 페테르를 만났다. 고기를 잡고 서로의 머리를 잘라주던 친구다. 그런데 그는 죽었다. 이쯤 되면 독자는 요한네스의 죽음을 직감한다. 그의 영혼과 페테르의 영혼이 만났다는걸. 다만 요한네스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걸 말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등장하는 뻔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페테르가 등장하고 그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고 젊은 시절 한때 좋아하고 편지를 보냈던 여자를 만나고 힘겹게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삶을 소중함에 대해 전하는 소설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다르다. 죽음에 중심을 두었다고 할까. 아무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 지닌 소설이다. 왜냐하면 요한네스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울먹이고 있었으니까.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요한네스의 죽음을 처음 마주한 건 싱네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의사와 남편에게 소식을 전한 후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낯설고도 당황스러운 것.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들만이 아니라 죽은 요한네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그런 요한네스에게 페테르가 모든 걸 알려준다. 그는 죽음의 선배인 셈이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132쪽)


죽음을 맞는 순간 지난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했던가. 욘 포세는 그런 생을 하루에 비유했다. 소설의 제목처럼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욘 포세는 철학적인 사유로 죽음을 말하는 대신 습관처럼 하루를 맞이하는 것으로 잠을 자다 조용하고 편안하게 요한네스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누구나 바라는 죽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요한네스가 느낀 것처럼 우리가 겪을 죽음이 저마다 다르지만 차이가 없고 고요한 것이라면 좋겠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134쪽)


먹먹한 감정을 뒤로하고 생각한다. 나의 저녁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그 저녁을 어떻게 맞이할지 내가 떠난 후 나는 무엇을 남기게 될까.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43쪽)란 문장을 떠올린다. 가장 선명하게 죽음을 표현한 문장이다. 내가 사랑한 이들이 남긴 것들, 버리지 못한 물건들, 그 안에 그들이 있기에 쉽게 정리하지 못한다. 영원히 정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그런 것이니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욘 포세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첫 시작으로 『아침 그리고 저녁』을 만나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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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1-07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소설을 읽고 같은 느낌을 갖는다는게 너무 좋고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해요.
저도 이 소설 넘 좋았어요.
별 것 아닌데 많은 것이 떠오르고
결국 저의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힘!
정말 맞아요.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자목련 2023-11-08 14:16   좋아요 1 | URL
처음엔 읽기 힘들었어요. 작가의 호흡을 따라가기도 어렵고요.
완독을 목표로 하자 싶었는데 어느 순간 눈이 아파와서 놀랐어요.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이 문장 안에 죽음이 다 담긴 것 같고. 두려움이 조금 사라졌다고 할까요. 묘한 소설이었습니다.



새파랑 2023-11-07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분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이책을 욘 포세의 1번으로 찜해봅니다~!!

페넬로페 2023-11-07 19:19   좋아요 1 | URL
아마 제가 새파랑님보다 나이가 많아 이 소설에 더 깊은 공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목련 2023-11-08 14:17   좋아요 2 | URL
다른 책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새파랑 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자목련 2023-11-08 14:18   좋아요 2 | URL
저도 페널로페 님처럼 청년 새파랑 님보다 나이가 많고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을 경험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니데이 2023-11-0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 많이 추웠는데, 따뜻한 하루 보내셨나요.
내일이 입동이라는데, 이번주 계속 추울 것 같네요.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는 전에 읽어본 책이 없어서 소개 먼저 읽어보고 찾아볼 생각이예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11-08 14:19   좋아요 1 | URL
진짜 겨울이 시작된 것 같아요. 바람도 차고 낮에 만나는 햇살이 귀합니다.
서니데이 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