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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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를 읽으면서 나는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조카에게 할머니였던 엄마. 오빠네 큰 조카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지만 막내 조카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언니의 아들은 할머니를 모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태어났으니까. 엄마는 다정한 할머니가 되려고 했을 텐데. 하지만 조카에게 상냥한 태도를 보였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와 조카들이 보내 시간을 나는 알 수 없으니까. 그 시간, 그 공간에 나는 없었으니까.


엄마 연배의 어르신을 보면서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그려지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오빠로 인해 젊은 할머니가 된 엄마. 할머니란 단어를 떠올리면서 엄마를 생각한다. 할머니를 테마로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여섯 명의 여성 작가가 쓴 소설집 『나의 할머니에게』는 저마다의 할머니를 추억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할머니는 모든 걸 다 내주는 그런 존재였고 누군가에게는 무섭고 거대한 존재였을 것이다. 나에게는 후자였다. 매서운 눈으로 혼을 내는 할머니. 며느리를 흉보던 할머니. 그 며느리가 우리 엄마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작가들이 불러온 할머니의 이미지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누구나 할머니가 될 수 없고 누구에게나 할머니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빌었어.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도 해주겠다고.” (「어제 꾼 꿈」, 33쪽)


윤성희의 「어제 꾼 꿈」속의 ‘나’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여동생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나에겐 손주가 없다. 딸과 아들이 있지만 친자식이 아니다. 수영과 구연동화를 배우는 화자는 당당한 할머니처럼 보이지만 지나온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계모라는 이유로 자식들과 불화하고 친척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다. 굴곡진 삶을 감당해온 그녀의 바람이 꼭 이뤄지면 좋겠다.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에선 손주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것 같은 할머니를 만난다. 죽은 며느리를 대신해서 아들과 손주들을 보살피는 할머니.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 파리까지 동행한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프랑스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지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할머니에게 다가온 피아노 소리. 사전을 참고하면서 1층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는 할머니. 밝은 표정을 짓던 할머니에게 그 시간은 달콤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때로 누군가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떠난 자식의 핏줄, 손녀를 향한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애틋하다. 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던 할머니는 요양원에 있다. 자신이 키우고 지킨 손녀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강화길의 「선베드」속 할머니가 그렇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나’와 친구 명주에 대한 이야기. 손녀보다 친구 명주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던 할머니. 자신이 떠나고 혼자 남을 손녀를 향한 기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손보미의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깐깐하고 괴팍한 할머니였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혼자된 며느리와 손녀를 지원한다. 할머니와 지냈던 거대한 저택의 기억은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곳에서 지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엄마. 할머니의 유산을 처분하기 위해 돌아온 곳에서 할머니의 살림을 맡아주던 아주머니를 만나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


손원평의 「아리아드네의 정원」는 미래 사회에서 만나는 할머니를 보여준다. 소설 속 ‘민아’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결혼과 아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잘 살아왔지만 인공지능의 돌봄을 받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 노인 복지, 심각해지는 세대 갈등, 난민과 이민자.


최은미의 「11월행」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다. 모녀 삼대가 1박 2일의 일정으로 템플스테이를 하는 이야기다. 수덕사를 향해 출발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는 과정을 들려주는데 그 안에서 엄마와의 딸의 사소한 대화와 갈등이 참 정겹다. 엄마와는 다르다고 여겼는데 엄마를 닮아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일.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 (「11월행」, 171쪽)


나의 엄마와 나의 딸, 나의 엄마와 엄마의 엄마, 나의 딸과 딸이 낳은 딸. 내리사랑이 느껴진다고 할까. 언젠가 모녀 사대가 모여 정신없다는 나의 선생님의 문자가 생각난다. 내가 닮은 사람과 나를 닮는 사람을 볼 때 전해지는 묘한 감정.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외할머니가 궁금해지는 건 왜일까.


참여한 작가는 모두 여성이다. 기획의도가 그랬을까. 남성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할머니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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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1-20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1때 엄마는 할머니가 되셨어요. 땡땡이할머니라고 주변사람들이 우리엄마를 부르는게 너무 싫었는데ㅠㅠ 제겐 좋은 할머니셨지만 엄마에겐 무서운 시어머니셨죠. *^^*

자목련 2021-01-21 08:59   좋아요 2 | URL
그럼 미니 님도 중1때 고모나 이모가 되셨겠네요?
무서운 시어머니, 여기도 계셨네요.
날씨가 흐리네요. 그래도 맑은 하루 보내세요^^
 
열다섯, 그럴 나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나윤아 외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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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시대를 가장 잘 읽고 잘 해석하는 이들은 십 대일지도 모른다. 유행에 민감하고 솔직하고 자기주장도 강한 십 대. 사춘기, 혹은 중2병으로 대신하는 열다섯의 나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누군가 겪는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나가면 괜찮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내 안의 어떤 상처와 슬픔은 그 시기에 형성되었다. 그 시절에 만난 누군가, 그 시절에 경험한 어떤 일들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열다섯, 그럴 나이』를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는걸.

『열다섯, 그럴 나이』는 지금 십 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있는 그대로, 심할 정도로 날카롭게 직시한다. 다섯 명의 작가가 ‘히어로, 톡방, 이·생·망, 몸캠피싱, 인싸’ 다섯 가지 키워드 중 하나를 선택해 십 대의 일상을 그렸다. 키워드만 봐도 십대가 주목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줄임말,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일상, 그들만의 세계에 진입한 것 같았다.

히어로를 주제로 한 탁경은의 「캡틴 아메리카도 외로워」에서는 가장 보통의 중학생이 등장한다.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다니고 부모님에게 살짝 반항도 하는 그런 아이들. 그리고 자발적 백수를 선택한 삼촌. 어른들의 눈에 삼촌은 루저나 실패한 삶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진정한 히어로다.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이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삼촌이 차도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했다. 공부와 성적만 강요하는 부모님, 그리고 삼촌. 우리는 어떤 어른일까. 재밌게 소설을 읽고 부끄러움만 남았다.

가장 놀랍고 가슴 아팠던 건 톡방과 몸캠피싱을 주제로 한 이야기였다. 이선주의 「앱을 설치하시겠습니까」는 제목 그대로 카톡을 소재로 다뤘다. 예전과 다르게 조별 과제가 많다. 방과 후 학원으로 가야 하는 아이들, 함께 모여 주제를 선정하고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 그래서 단톡을 이용한다. 편하고 간편하니까. 하지만 같은 조의 한 명이 카톡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앱을 깔고 참여하라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니 나머지 아이들은 그 아이를 자연스럽게 왕따시킨다. 이용자가 많다고 해서 모두 사용해야 한다고 강요를 하는 건 당연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 소설을 또래인 십 대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카톡은 어쩌면 예시였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우리는 늘 희생양을 찾고 있었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희생양들이 하나둘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누굴까? 자신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어, 윤은 두려웠다. (「앱을 설치하겠습니까」, 78쪽)

몸캠피싱에 대한 나윤아의 소설 「악의와 악의」는 읽는 내내 무서웠다. 뉴스에 나올 법한 이야기, 어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십대에게도 벌어지고 있다니.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어 화가 났다. 스마트폰 하나로 일상이 무너지고 삶이 흔들린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김태강의 동영상, 아이들에게 가십거리다. 동영상의 인물이라고 추정된 아이의 선한 얼굴을 떠올리는 ‘나’는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친구들의 수다에 동조한다.

누구도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악의와 악의」, 125쪽)

김태강에 대해 하나의 막이 생긴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든다. 소문은 진실을 뛰어넘고 새로운 가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스마트폰으로 도착한 동영상 속 아이는 ‘나’같았다. 합성이라는 걸 알았지만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모아둔 용돈을 보낸다. 끝난 일이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협박.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두려움, 학교에 퍼져 아이들이 수군대는 것 같은 공포. 그런데 놀라운 건 유학을 갔다는 김태강이 학원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나의 태도에 김태강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그런 동영상을 찍게 된 건지, 수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믿고 지지하는 친구와 부모님. 나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김태강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네 편이 되어줄 거라고 손을 잡아준다.

이 지독한 악의에 매몰되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선한 것을 바라보고, 내 편에 선 사람들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심이 선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 혹시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을지 모르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악의와 악의」, 154쪽)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선의와 악의 어느 쪽에 서는가. 무엇이 선의고 악의인 줄 모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처음에 선택하는 건 대부분 악의 쪽이다. 자세한 사정이나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한 장의 사진이나 동영상에만 관심을 쏟는다. 이 단편은 사회를 향한 강력한 외침이었다. 우리 사회의 추하고 더러운 민낯인 N번방 사건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인기 많은 아이가 실종되면서 그 애에 대해 진짜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쓸쓸함을 그린 우다영의 「그 애」, 한 번쯤 속상함을 토로하는 말로 썼을 이·생·망을 주제로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이야기 범유진의 「악마를 주웠는데 말이야 」를 통해서도 십 대 아이들의 고민과 관심에 대해 알 수 있다. 열다섯은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시기, 내가 원하는 나를 만나는 시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나이다.

처음엔 십대를 이해하는 생각,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도움을 얻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한 소설이지만 결국엔 어른들의 부끄러운 모습만 들킨 것 같았다. ‘열다섯, 그럴 나이’에 내 나이를 대입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 키워드는 청소년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투덜대며 ‘이·생·망’을 말하는 우리, 직장과 사회에서 행해지는 은따와 왕따까지 전부 다.

제대로 살고 있는지, 삶을 향한 태도는 열정적인지, 자꾸만 질문이 많아지고 다짐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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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1-19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도서관인데, 랩탑 켜놓고 신간 둘러보다가 자목련님 리뷰에 눈 번쩍. 이 책 소장중인지 바로 확인각입니다. 소재들이 2021년, 정말 시의적절한 내용들이네요. 저도 십대 잘 몰라서 꼭 읽어야겠어요. 감사드려요

자목련 2021-01-19 16:48   좋아요 0 | URL
보통의 청소년 소설과는 결이 다른 것 같았아요. 덕분에 더 좋았고요. 얄라 님께도 좋은 책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오후 보내세요^^

2021-01-19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1-19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톡방과 몸캠피싱을 주제로 한 . 이선주의 「앱을 설치하시겠습니까」이야기는 진짜 현실 이야기네요 단톡에서 이런식 왕따는 대학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비대면 사회적 거리에 익숙해진 청소년들 감정없는 얼굴없는 앱으로만 소통하는 성인으로 클것 같네요.

자목련 2021-01-20 09:54   좋아요 2 | URL
네, 소설을 읽으면서 진짜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얼마나 무서울까.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도 있을 텐데. 걱정이 되더라고요. 말씀처럼 십 대에겐 얼굴을 마주한고 눈을 보고 깔깔대는 시간이 필요한데.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커집니다.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7인 7색 연작 에세이 <책장 위 고양이> 1집 책장 위 고양이 1
김민섭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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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함께 글을 쓰는 즐거움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글짓기 특별수업을 받았을 때였다. 일상 산문에 대한 수업으로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선생님이 주제를 정해주시면 글을 쓰고 평을 들었다. 김민섭, 정지우, 오은, 남궁민, 김혼비, 이은정, 문보영, 일곱 작가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쓴 연작 에세이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를 읽으면서 작가들도 재미있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마감 때문에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주제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로 고양이, 결혼, 방, 작가, 커피, 비, 친구로 다양하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주제, 궁금한 주제를 먼저 읽고 작가를 그렇게 선택해도 무방하다. 


시작은 고양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길냥이를 돌보는 이들도 많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고양이 탐정도 있으니까. 직접 고양이를 키우지 않더라도 고양이와 관련된 사연 하나쯤은 간직하기 마련이다. 운전하면서 발견한 고양이를 구하지 못한 후회, 친구에게 전부인 고양이를 잃어버려 찾지 못할까 조바심을 냈던 마음을 만나면서 오빠네 고양이 ‘비실이’가 생각났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줘야겠다는 다짐까지. 


한 꼭지를 읽고 나니 작가의 분위기가 보인다고 할까. 내가 좋아하는 글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사실이 더 정확하겠다. 모두 작가이니 작가에 대해 특별한 말을 들려줄 거라 기대했지만 정작 마음을 움직이는 건 김민섭의 이런 글이다. 쓰는 사람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대단한 게 아닐 것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하는 일, 나를 쓰는 일의 가치에 대해 언급해 줘서 괜히 고맙다.


나는 모두가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당신의 일상은 이미 몸에 깊게 새겨져 있다.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누가 읽어주겠냐고 그것을 옮겨 적지 않지만, 그건 이 세계에서 당신만이 길어올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무엇이다. 나는 계속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당신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작가 - 50쪽, 김민섭)


아, 쓰다 보니 또 김민섭의 글이다. 친구에 대한 글에서 나는 언제나 나를 응원하는 친구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친구, 10년 후가 기대된다는 친구, 잘 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친구. 저자는 작가로 자신이 책을 낼 때마다 이야기하기가 꺼려진다고 한다. 누구나 책을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논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한 친구는 논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읽어줬고 오타를 발견해 줬다고. 정성을 다해 읽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김민섭이 말한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그의 어색한 다가옴을 우리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해야 한다. 축하한다, 어디에서 그걸 살 수 있니, 어디로 가면 그걸 볼 수 있니,라는 말에 더해, 나는 너를 읽었어, 너를 보았어, 나는 이 부분이 좋았어, 다음에도 꼭 너를 나에게 보여 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친구를 많이 두고 싶지만, 언젠가는 꼭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누구라도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보일 수 있고 나는 그것을 그의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언젠가는 정말로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진 친구가 되고 싶다. (언젠가, 친구 - 88~89쪽, 김민섭)


학창 시절에 단짝처럼 붙어 다녔지만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는 이은정 작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한 친구들에게 잘 살라고 안부를 전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나 역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그런 마음을 전하다. 


비와 커피를 좋아하기에 이 주제는 더 가깝게 다가온다. 공평하게 내리는 비지만 그 비를 맞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 언급하며 나중에라도 비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는 김민섭 작가, 비 오는 날 두 번의 교통사고로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은 작가, 커피를 좋아하는 언니를 언니가 떠난 후에야 커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이은정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먹던 큰언니가 생각나 먹먹해졌다.


어쩌면 아침마다 식사 대신 커피를 마시며 출근하는 사람들은 하루의 무게를 들이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이겨내려고, 오늘까지는 버텨 보려고, 최대한 제정신으로 일터에 나가기 위해 쓰디쓴 각성제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커피 한 잔의 무게는 살아 내야 하는 하루치의 무게인 걸까. 언니가 떠난 뒤에야 이따위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면, 언니가 살아있을 때 느꼈더라면 언니에게 모닝커피를 한 번쯤 건넸을지도 모르는데 늘 그렇듯 깨달음은 늦고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커피 - 314쪽, 이은정)


기억 속 삶의 한 장면이 달려든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던 비 오는 날의 풍경,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스무 살 동생에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던 큰언니.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마셨던 오늘 아침의 커피 한 잔. 잊었던 기억, 잊었던 사람, 지나친 일상을 끄집어 낸 책이다. 일상의 순간, 보통의 날들을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 책에서 발견한 따뜻하고 다정한 문장을 기록하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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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개정판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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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가족 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잘 볼 수 없는 것들, 너무 멀리 있어서 정확하게 볼 수 없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느낄 수 있다. 강화길의 「음복(飮福)」에서 우리가 놓친 건 무엇일까. 적절한 거리는 아니었을까. 그건 배려, 존중, 예의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목 그대로 제사를 지내는 풍경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대화. 그 풍경은 익숙한 어느 시절의 모습이었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가족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일상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암묵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시간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오빠나 남동생의 삶이 먼저였다. 강화길은 직접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소설에 흐르는 그 무겁고도 서늘한 분위기.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그런 마음이 점차 선명하게 보인다. 그게 내가 여자라서, 나에게도 그런 고모가 있었기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린 시절 오빠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보살핌과 정성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나를 마주하는 건 장류진의 연수의 이런 문장에서다. 운전 연수를 받는 과정을 상세히 들려주는 소설이다. 화자 ‘주연’은 일상의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맘카페를 통해 도로연수를 해줄 강사를 만났다.


엄마의 삼십 평생, 사십 평생에 가장 기쁜 순간들은 나로 인해 만들어졌다. 내가 반에서 일등을 하고,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고, 장학금을 받고,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회계법인에 입사할 때마다,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차례로 갱신되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217쪽)


소설에서 ‘주연’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주체적인 삶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존재한다. 화자가 맘카페의 올라온 게시글과 댓글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그곳에서 도움을 받는 것처럼. 신상에 대해 묻고 조언을 하는 강사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점점 그녀가 연수 방식이 정말 유용하며 강사가 전해준 자신감이 엄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장류진 식의 연대를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까.


처음에 말했던 가족 간의 거리를 인정하는 일은 장희원의 소설 「우리[畜舍]의 환대」 속 재현과 아내에게도 필요하다. 호주에 있는 아들 영재를 삼 년 만에 만난다는 설렘과 기대.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건 당혹스러움이었다. 영재가 함께 살고 있는 공간과 사람들. 문신을 한 여자애, 흑은 노인과 한 가족처럼 지내는 일상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아들이 지향하는 삶과 재현의 그것은 너무도 달랐다. 소설 속 구절처럼 영재의 삶이 이쪽이라면 재현의 삶은 건너편이었다. 이곳과 그곳의 경계는 분명했다.


마당엔 가로등도 하나 없었다. 건너편에서 집집마다 노란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저런 곳 중 한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너무나도 저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절히 저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 난 분명히 용기를 냈어. 그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畜舍]의 환대」, 259쪽)


소설을 읽은 일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나와 똑같은 마음을 만나 반갑고 전혀 알 수 없는 마음을 만나면 주춤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현실의 누군가의 삶이 그 안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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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김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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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퀴어는 많아요. 동성애자가 전체 인구의 2~5% 정도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굉장히 많은 숫자거든요. 한국에만 100만 명에서 250만 명쯤 되니까요. 그들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당연히 사회의 일부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앗, 방금 지나친 그 사람! 동성애자일 수 있습니다.” (200쪽)

나와 다른 삶을 이해하는 일은 때로 간단하다. 그렇구나,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타인이 아닌 가족, 지인, 친구라면 좀 다르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관계의 폭이 좁아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식으로 변한다. 김규진의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를 읽으면서 나도 그랬다. 아, 이들의 사랑은 존중받아야 하고 축복해야 한다.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뉴스에 나온 장면을 봤다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무엇이 대단한가?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인데.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편견 아닌 편견의 틀에 그녀의 삶을 가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이 보통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두려워해야 할까. 여기서, 보통의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그렇다. 그게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문화,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게 기준일까. 다양성을 중요시한다고 사회적 제도를 만들어가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레즈비언 커플에 대해 잘 모른다. 소설에서만 만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 알 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김규진의 에세이는 내가 만나지 못하고 몰랐던 다른 삶을 들려준다.


제목을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에서 법적인 결혼은 이성에 한해 가능하다. 김규진과 그녀의 와이프는 혼인신고를 하러 구청에 갔지만 접수는 반려됐다. 담당 공무원도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민원인은 마냥 기다려야겠다. 예상했던 결과를 듣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솔직하고 발랄한 유머로 일상을 공개하고 있지만 부모님이 참석하지 못한 결혼식은 정말 속상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응원했지만 결혼식을 하는 일에는 반대한 저자의 아버지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과거 부모들도 동성동본으로 힘들었다는 말을 하면서 응원했던 아버지였기에. 처음에 관계가 나빴던 엄마는 자신의 카드로 혼수를 준비하라고 할 정도가 되었지만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거기다 딸이 공개적으로 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아버지는 절연을 선택하고.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104쪽)

저자는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한국의 가장 기본적인 결혼식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준비를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검색을 하고 자료를 찾다가 직접 블로그를 열기로 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공유하는 일, 누군가에겐 절실하게 필요한 정보라 여긴 것이다. 결혼에 대한 자세한 준비과정은 그녀와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된다. 어디 그뿐인가.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면서 커밍아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는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진정한 팁이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면서 그냥 전하라는 말, 공감한다. 친구가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놀랄 수도 있지만 켜켜이 쌓인 우정이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이해하는 건 어렵더라도 말이다.

어쩌다 보니 시끄럽게 일을 벌이게 되었다. 실명과 사진을 걸고 레즈비언의 삶과 결혼에 대한 얘기를 블로그에 연재하고, 회사에서 신혼여행 휴가를 받은 일 가지고 요란 벅적대게 인터뷰를 해 포털사이트 메인에 올리고, 공중파 뉴스에 출연하여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사명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활동들을 이어간 동력은 대의보다는 나 개인의 편의였다. 그냥 내가 좀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175쪽)

“그냥 내가 좀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란 말이 오래 남는다. 책으로 만난 김규진은 귀여웠고 솔직했고 멋졌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당당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친구, 동료, 혹은 아는 사람,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나 친구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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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1-12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엄청 멋있다고 생각하고 동경하는데, 내 남자는 안 피웠음 좋겠는 이중적 마음..ㅠㅠ 멀리 있는 사람을 수용하기고 응원하기란 정말 쉬운 거 같아요~

자목련 2021-01-12 11:25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걸요. 그래서 이런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여전히 추운 날이에요. 붕붕툐툐 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