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에게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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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다는 건 물리적인 시간이 쌓인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낡아가는 몸과 마주하는 일이란 걸, 근주는 근래 들어 절실히 깨달았다. (「우환」, 25쪽)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운 문장이었다. 반가웠지만 서글픔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살아가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한꺼번에 많은 생각들이 나를 덮쳤다. 늙고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진심으로 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서러웠던가. 가장 먼저 온 노화는 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안과’에서는 노화라고 말했다. 아무 걱정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안과 검진을 가야 할 시기를 놓쳤다. 안내 문자를 받고 무시했다. 코로나를 핑계로. 하나 둘 늘어나는 흰머리를 신경 쓰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소설 속 인물에 이렇게 쉽게 동화된다는 건 좋은 걸까, 혼자 생각한다.


김이설의 연작소설집 『잃어버린 이름에게』는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전혀 모르는 이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공간은 ‘신경정신과’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공간,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작정 털어놓고 싶은 간절함에 찾은 공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마지막이라 선택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하루를 버티고 견디는 일상은 도처에 있다. 내가 아는 이도 그렇하고 누군가에게 나는 그곳을 추천하기도 했다.


소설 속 중년 여성의 삶이란 대체로 평온해 보인다. 그러니까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렇다. 돌봄이 필요 없는 아이들, 자리를 잡은 남편, 이제는 잊었던 스스로를 찾아도 좋을 시기처럼 보인다. 그때 몸이 신호를 보낸다. 「우환」의 주인공 ‘근주’는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궁경부암 ’추가 검사, 암에 대한 두려움을 시작으로 천천히 그녀의 일상과 마주한다. 자궁경부암으로 투병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를 간병했던 시절. 결혼과 출산, 육아, 살림으로 이어진 현재의 삶. 그 과정을 지나온 친구와의 대화만이 작은 위안이다. 그리고 매일 삼키는 약. 「기만한 날들을 위해」속 ‘선혜’는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약을 먹는다.


우울증 약이라는 것이 그랬다. 잘 맞으면 일상이 평온해지고 가시 돋친 마음은 무뎌진다. 화날 일도, 노여울 일도, 짜증 날 일도 없었다. 분노나 수치심, 슬픔도 사라졌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그라들고 긍정적인 감정들만 살아남았다. 남편이 혈압약을 먹듯이 나는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감기약이나 비염약을 먹듯이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면 약으로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여기면 편했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 59쪽)


이른 나이에 결혼한 선혜는 23년 차 주부다. 군대에 간 아들, 대학생활을 위해 독립한 딸.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난다. ‘빈 둥지 증후군’일까,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한 시간이 허무하다. 운전을 배우겠다는 자신을 타박하는 남편. 어쩌면 선혜가 정신과를 찾은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거기다 알게 된 남편의 추악한 행동. 이혼을 생각했지만 선혜는 이혼하지 않기로 한다. 남편과 싸우면서 살아가기로 한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란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누구에게 물어야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무기력한 날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미아」의 ‘소영’의 마음이 그러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사 온 낯선 도시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곳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남편은 알지 못한다. 남편과의 시간은 더 많아졌지만 멀어진 것 같다. 사소한 것들에 울컥하며 감정을 자제하기 힘들다. 「미아」는 김이설의 이전 단편 「손」, 「빈집」과 겹쳐진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고독, 소통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오후 3,4시만 되면 마음이 가장 힘들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안개가 짙게 가라앉고 그 안개 위에 발을 디디고 싶은 생각? 그렇게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시달릴 때가 많아요. (「미아」, 131쪽)


「경년」속 ‘나’에게 중년은 시련인 것만 같다. 고교입시를 위해 만난 학부모 모임에서 들은 아들의 이야기. 열다섯 아들이 여자아이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놀라운 건 스트레스 해소라는 아들의 입장과 그런 아들을 두둔하는 남편. 이제 초경을 시작한 딸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복잡하다. 얼마나 더 놀라운 일들을 견디고 지나가야 할까.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 예고 없이 다가오는 몸의 변화는 더욱 힘들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갱년기를 겪는 걸까. 그건 마땅히 겪고 참아내면 되는 시간일까. 폭풍우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석류 음료나 마시면서, 호르몬제와 여성 비타민제를 찾아 먹고, 어떻게든 친구들을 만나 맛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시기는 끝나는 걸까. (199쪽) (「경년」, 199쪽)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그들처럼. 김이설 작가가 불러낸 네 명의 여자, 우리는 그들 중 하나로 살고 있을 것이다. 사춘기를 통과했듯 건너야 할 시기, 지나야만 알 수 있는 인생의 과정. 그래서 더욱 이 소설집이 애틋하다. 주변의 언니, 동생, 내가 아는 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엄마, 아내로 살아내느라 잃어버린 이름을 가만히 부르며 ‘괜찮냐’고, ‘너는 어떠냐’고 물어봐 주는 이들. 서로가 서로를 챙기며 기댈 수 있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녀들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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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것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2
서유미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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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산다는 게 그 접힌 페이지를 펴고 접힌 말들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라는 걸, 아무리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여도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도 알 수도 없다는 걸, 하루하루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다 가끔 같이 괜찮은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1쪽)


깊은 밤에 읽었더라면 나는 어느 순간 울고 말았을 것이다. 소설이 그렇게 슬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냥 어떤 서러움이 몰려왔다고 할까. 잘 모르겠다. 지난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그런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제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유미의 소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처음엔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조금씩 일렁이는 감정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나는 좀 울컥했다.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나만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 그 마음의 끝에 내가 있는 것만 같아서.


소설의 주인공 ‘경주’는 매일 카페 ‘제이니’에서 구직활동을 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때까지 취업 사이트를 방문하고 이력서를 쓴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경주는 카페로 나온다. 집이 아닌 다른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육아와 집안 일과는 구분된 경주 자신만의 시간 말이다. 결혼과 출산으로 다니던 직장은 휴직에서 퇴사로 이어졌다. 지우를 낳았을 때는 바로 복직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게 불안했다. 동료나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선택은 경주의 몫이었다. 지우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경주는 다시 일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경단녀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경주는 카페 제이니에게 자신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때로는 과거 어느 시절을 돌아보고 현재의 일상을 생각한다. 아이와 남편이 있는 안온한 삶이었지만 경주는 우울했고 외로웠다. 지우가 어렸을 때 힘들었지만 그 시간은 지났고 남편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남편 주원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했고 영화도 보았다. 하지만 한정된 주제였고 확장되지 않았다.


친구와의 관계도 그러했다. 모든 걸 공유했던 친구들과의 간격은 어쩔 수 없었다. 기혼자는 경주뿐이었다. 경주의 결혼 후 자연스레 뜸해졌다. 서로가 나눌 수 있는 삶의 가치가 달라진 것일까. 경주는 종종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혼자라고 느꼈고 단톡방을 나온 후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우연하게 만난 대학 동기 J가 더욱 친근했던 건 지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주가 취업에 대해 속상해하자 J는 경주의 고민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니까 배부는 투정을 하는 양으로 치부하며 가까운 곳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나 편의점, 마트를 찾아보라고 말한다. 내밀한 마음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던 J와도 멀어졌다.


경주는 자신의 이런 마음들을 카페 제이니에서 정리했다. 처음에는 구직 활동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곳은 안식처였다. 카페 제이니가 특별했던 건 카페 사장이 선택한 음악과 그녀에게 전해지는 분위기 때문이다. 카페의 세심한 소품에서 경주는 과거 자신의 취향과 만난다. 점점 더 그녀가 궁금했고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고 자신의 모든 걸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카페 제이니가 영업을 중단하면서 아쉬움은 커졌다. 경주가 결혼으로 인해 단절된 건 경력과 사회적 활동만이 아니었다. 일에 대한 자신감과 경주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무너졌다. 카페 제이니는 경주에게 새로운 통로처럼 보였다. 그건 세상과의 소통이 아니라 경주 자신과의 소통이었다.


경주는 자신이 두 달 동안 시간을 보냈던 카페를 새삼스레 다시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미지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고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지만 여기서 보낸 한 시절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건 분명했다. (160쪽)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경주의 생각과 감정의 기록은 중요한 일기처럼 다가온다. 그 일기는 경주가 쓴 것이지만 동시대의 수많은 경주가 쓴 것이다. 그중 하나는 내가 아는 경주라는 걸 안다. 소설 속 경주의 삶이 그려본다. 그녀의 하루가, 크게 변화 없는 그녀의 표정이, 그녀의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들이, 그녀가 다시 움직이는 모습이 선명해진다. 삶이라는 긴 여정의 어느 시절과 이별하고 잠시 멈췄고 다시 이동한다. 목표를 정해둔 건 아니다. 다만 후회와 미련은 접어두고 나아갈 것이다.


#현대문학 #핀시리즈 #핀소설 #월간핀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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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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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달에 울다」9쪽)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달에 울다」의 시작이다. 달과 갈대, 법사의 모습을 묘사한 병풍. 그리고 그 병풍을 바라보는 화자는 열 살 소년이다. 강렬한 아름다운으로 잘 알려진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한 편의 서정시 같았고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지녔다. 소년이 사는 산골마을, 사과나무가 가득한 골짜기, 소년과 한 몸처럼 지내는 늙은 백구, 그리고 소년을 미혹하는 소녀 야에코.

야에코의 아버지는 촌장의 곳간을 털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었다. 어떤 이유인지, 왜 그들은 야에코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가장 앞장선 이가 소년의 아버지. 하나의 사건으로 앞으로 소년과 야에코의 관계는 결정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가 병풍의 풍경이 바뀌고 화자는 성장한다. 그러니까 계절이 달라지면 열 살 소년은 스무 살, 서른 살, 마흔이 된다. 자연이 사과를 재배하는 마을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누군가는 마을을 떠나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물에 빠져든다. 오직 소년만이 부모님과 함께 그 자리, 그곳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 소년이 성장하면서 느끼는 감정, 사랑, 욕망은 때로 솔직하게 때로 거칠게 드러난다. 소녀 야에코를 향한 마음, 아버지에 대한 분노.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달에 울다」, 34쪽)

여름은 병풍의 모습처럼 생동감 넘친다. 스무 살의 청년도 그러하다. 야에코와의 관계는 깊어가고 부모님과의 갈등도 생긴다. 아버지를 잃은 야에코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사과농사를 짓는다. 야에코네 사과는 달고 맛있다. 야에코와 화자는 사랑을 나누지만 결혼을 하지도 함께 마을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 투성이 비파를 등에 멘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에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달에 울다」, 67쪽)

세상은 변했고 작은 산골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마을의 최고 권력자였던 촌장도 약해졌다. 화자의 진정한 벗 백구도 죽었고 야에코의 어머니도 죽었다. 야에코와의 사랑도 끝났고 그녀는 비누 공장에 나간다. 나만 오롯이 산골 마을에 남아 사과농사를 짓는다. 야에코에게는 아이가 있고 그녀는 마을을 떠난다. 그녀를 배웅하는 건 나의 몫이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달에 울다」, 92쪽)

마흔 살이 된 나에게 남은 건 사과나무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차례로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화자 그의 쓸쓸함이 전해진다. 마을을 떠났던 야에코는 돌아왔지만 눈 속에서 죽은 그녀를 발견한다. 상징과 은유로 채워진 소설, 인간의 심연과 고독을 병풍 속 법사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니까 법사는 곧 화자인 것이다. 삶은 이처럼 허무한 것일까.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에서도 마찬가지다. 검둥이를 데리고 고향인 M 마을로 돌아온 화자는 직장을 잃었고 가족과 헤어졌다. 심지어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이가 있는 건 아니다. 쇠락한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 화자는 모든 걸 버리려 그곳을 찾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욕망과 마주한다. 홀리듯 들리는 피리새의 소리. 어린 시절 집집마다 조롱을 매달았던 기억.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마을을 헤매다 노인을 발견한다. 너무도 잘 차려진 밥상과 피리새. 화자는 피리새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노인에게서 강제로 빼앗는다. 그 노인에게 딸이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빨간 하이힐을 신은 딸이 노인을 돌보고 화자에게서 다시 피리새를 가져간다. 노인에게도 피리새는 중요했다. 피리새는 「달에 울다」속 사과나무 같은 존재다. 삶의 이유가 되는 존재.

생각해 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 년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혔다.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151쪽)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묘한 전개. 환상을 통해 화자의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빨간 하이힐의 여자를 미행하고 마을의 온천에서 노인과 마주하고 혼잣말을 하는 화자. 그가 정말로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아니, 마루야마 겐지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채우려 해도 결국엔 공허만 남는 게 삶이라는 사실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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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01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이 너무 좋네요! 마치 한폭의 동양화가 머리속에 그려 집니다!ㅎ 즐거운 한주되십시요!

자목련 2021-02-02 16:05   좋아요 2 | URL
계절따라 묘사한 동양화를 생각나게 해요. 그 부분이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싶어요. 막시무스 님 포근한 오후 보내세요^^
 
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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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의 소설을 기다렸다. 규칙적인 모호함을 즐기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모호함은 안개처럼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김엄지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문자나 기호로 존재하는 누군가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그러니까 김엄지의 인물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일상의 한 부분을 포착해 그는 세밀하게 분석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장면들, 그리고 복잡한 내면의 세계.


작가정신 <소설, 향> 시리즈로 만나는 김엄지의 『겨울장면』은 단숨에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R로 지칭되는 남자와 아내, 회상 동료와 상사. 누군가의 죽음과 독백과 방백을 오가는 듯한 말들. 그것들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그건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독의 몸부림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아내와의 불통.


그는 알지 못했다. 얼음호수의 끝을. 겨울의 시작과 끝을. 제인해변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을. 그 누구의 것, 자기의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마음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고. 기억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다.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R은 생각했다. (75쪽)


친절하다고 볼 수 없는 김엄지의 문장은 몰입도를 높인다. 겨울장면이라는 제목처럼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복한다. R에게 동화된다. 그와 아내는 제인해변에 갔고 식당에 갔고 그들에게는 폭죽이 있었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인물 묘사는 거의 없다. R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연령도 직업도 알 수 없고 성격도 모른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 혼잣말을 하거나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사람일 것 같은.


사람들이 호수 둘레에서 서서 하는 마지막 결심. 그건 결심이 아니다. 어떤 마음도 아니다. 다 지나간 후, 이미 끝난 것이다. 끝난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소리가 남고, 가라앉는 것은 물뿐이다. (131쪽)


어쩌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은 문장들. 마지막을 위한 여행을 떠난 부부의 모습, 혹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떠난 이들의 흔적들. 하여 독자는 나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모든 것이 R의 착각이거나 꿈이었다는, 남겨진 R의 쓸쓸한 후회. 날카롭고 차가운 겨울의 얼음호수에 혼자 선 남자. 삶에 대한 환멸, 살아 있음을 통증으로 확인하는 R. 그가 모르는 마음을 우리는 알까. 안다면 제대로 아는 걸까.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삶이다.


왜. R은 지쳤던가? R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R은 R에게 지졌다. 매순간 R은 R을 버리지 못한다. (136쪽)


독특한 고유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는 김엄지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삶에 대한 무한대의 물음. 삶이라는 매섭고 날카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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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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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게 “소설 쓰고 있네” 란 말을 한다. 하지만 그건 적절하지 않다. 허무맹랑하거나 기가 찬 일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고 있으니까. 소설은 때로 누군가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고 소설은 누군가가 꿈꾸는 삶이니까. 기욤 뮈소의 『인생은 소설이다』은 그런 생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다소 복잡한 구성의 이 소설은 뭐랄까. 소설가의 고충을 들려주는 자기 고백서 같기도 하고 수많은 거장들을 위한 오마주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국엔 소설로 귀결된다. 픽션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존재와 고독 같은 것들은 현실로 고스란히 이어지니까.


소설에는 두 명의 소설가가 등장한다. 한 명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는 신비주의 작가 ‘플로라 콘웨이’,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로맹 오조르스키’. 소설은 플로가 콘웨이가 딸 캐리와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캐리가 실종된 사건으로 시작한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는 딸, 플로라 콘웨이는 절망한다. 캐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캐리를 데려간 범인은 누구일까.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대하게 만든 작가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맹 오조르스키의 등장이다. 그는 이 소설의 진짜 화자다. 그의 현재는 고통 그 자체다. 전 부인 알민은 이혼 후 아들 테오의 양육권까지 빼앗았다. 테오만이 그에게 전부다. 소설은 답보상태다. 그렇다. 플로라는 로맹의 소설 속 주인공인 것이다. 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하는 액자 소설. 하지만 보통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로맹이 소설 속 세계에 진입하고 인물들과 대화를 한다. 브루클린과 파리,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로맹은 알민이 테오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사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설정으로 주인공을 만들었지만 소설 속 캐리를 향한 플로라의 고통은 모른 척한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 실종된 캐리에 대한 행방까지 미스터리와 판타지의 결합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때문에 어떤 독자는 혼란스럽기 충분하다. 어떤 독자는 바로 나다. 소설 곳곳에서 고백하는 소설 쓰기의 괴로움은 작가 기욤 뮈소의 진심으로 다가온다. 소설가로의 삶과 고뇌, 한 권의 책을 발표할 때마다 견뎌야 하는 어떤 시간들, 출판사와 출판계, 비평, 언론을 언급한 부분이 그러하다. 창작의 고통과 새로운 것을 쓰고자 하는 욕망. 아마 대부분 작가들의 숙명일 것이다. ‘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활동하고 ‘페르난두 페소아’가 수많은 필명으로 존재한 이유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소설 쓰기를 통해 나의 세계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다가 생을 마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55쪽)


글쓰기가 나에게는 단 한 번도 심심풀이로 하는 여가 활동이었던 적이 없었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했고, 열정과 노력을 쏟았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기를 ‘아주 특별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98쪽)


우리는 종종 소설을 읽다 소설 속 인물에 동화된다. 그의 입장에서 소설이 전개되기를 원하고 그에게 닥친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캐리를 빨리 찾기 바랐던 간절한 마음이 점차 플로라가 삶을 견딜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로맹과 테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동한다.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와 결말, 독자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하나의 완벽한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욤 뮈소의 팬이라면 즐겁게 빠져들 것이다. 팬이 아니더라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스스로에게 묻을 것이다.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소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그동안 읽은 소설에서 내가 붙잡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받은 위로, 때로는 함께 분노하고 절규하며 느끼는 카타르시스, 때로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피난처가 된다. 그러니 『인생은 소설이다』란 제목은 적절하다. 어쩌면 소설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소설로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별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토록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대단히 모호하다고 생각해왔다. 픽션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건 없으니까. 인간이 현실 속에서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픽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마치 실존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결과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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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1-27 0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매력에 한번 빠지면 뫼뵈우스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독서광들의 즐거운 변명 ㅎㅎ

자목련 2021-01-27 16:05   좋아요 1 | URL
맞아요. 한데 이 소설은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설정이라 더 힘들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