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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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을 때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읽어야 좋을까? 읽기 전에 해야 할 질문이므로 내게는 큰 의미는 없다. 읽기로 했으니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려고 한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도련님』이 아닌 『태풍』을 선택한 건 우연이다. 읽고 나니 오히려 잘 한 일 같다. 사실,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이 책을 읽었으니 다른 작품은 얼마나 즐겁게 읽겠는가 싶은 거다. 


어떤 시대를 살든 누군가는 주류가 되고 누군가는 비주류가 된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선택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 주류가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태풍』 속 세 인물은 그야말로 내 맘대로 사는 사람이니까.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야 선생, 유유자적 돈 많은 한량 나카노, 과거 도야 선생의 제자이자 나카노의 대학 친구 다카야나기. 셋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 않지만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는 말처럼 셋은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학교 선생으로 지냈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지 않고 잘 지냈을 텐데, 도야 선생은 이런저런 이유로 마찰을 빚고 결국엔 도쿄로 되돌아왔다. 생활을 위해 닥치는 대로 글을 쓰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야 선생은 자신이 추구하는 글을 쓴다. 이런 남편과 사는 아내는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부족함이라고는 하나 없는 도련님 그 자체인 나카노는 인생에 문제라고는 없다. 그러니 가난하고 병약한 친구 다카야나기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방법도 결국엔 다카야나기를 실의에 빠트리게 할 뿐이다. 그래도 친구라서 종종 만남을 갖는데 대화 도중에 과거 도야 선생을 학교에서 쫓아낸 이야기를 나눈다. 기회가 되면 꼭 용서를 빌고 싶다고 말이다.


도야 선생을 먼저 만난 건 나카노다. 잡지 기고 부탁으로 도야 선생이 나카노를 찾은 것이다. 둘 사이에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고 잡지에 쓴 글을 읽고 다카야나기는 도야 선생을 찾아간다. 가난한 살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야 선생과 다카야나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인문과 문학을 꿈꾼다는 게 그렇다. 현실적으로 밥벌이도 안 되는 번역이나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목표로 하는 방향이 갔다고 할까.


『태풍』은 세 사람이 처한 상황을 그들이 입은 옷이나 집안 묘사를 통해 설명한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방법이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다카야나기는 나카노의 결혼식에도 홀로 눈에 띄는 옷을 입었다.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다카야나기를 대하는 나카노의 태도는 묘한 부분이 있는데 뭐랄까, 다카야나기를 돕는데 악의가 전혀 없지만 이상하게 진심이 없어 보인다고 할까. 


노송나무로 만든 문짝에 은으로 만든 듯한 기와를 올린 문을 통과하면, 물을 뿌린 화강암이 깔린 비스듬한 길을 열 발자국 정도 걷는다. 포석의 끝자락에 간유리로 된 여닫이문이 좌우에서 쓸쓸하게 닫혀서, 가을이 깊어가는 저택 안이 고요하다. (46쪽)


도야 선생, 나카노, 다카야나기는 그 시대 가장 보편적인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카노가 문화생활을 누리며 병약하고 아픈 친구를 걱정하고 자신의 일상에 초대하는 일, 도야 선생이 사람을 위하고 사회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글을 쓰고 노력하는 일, 다카야나기가 문학자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누구의 삶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고 그 가치에 대해 논하기는 어렵다. 100년 전의 고민이 현재에 이르도록 같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결국 사는 일은 비슷비슷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한다. 도야 선생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를 응원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겠다.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문학자란 원고지를 앞에 두고 숙어사전을 참소해가면 머리를 흔들어대는 그런 여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원숙하고 심오한 취미를 명심하고 지키며 인간만사를 기죽지 않고 적절히 다루거나 터득하는 보통 이상의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리한 방법이나 터득한 것을 종이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 문학서가 되는 것입니다. (100쪽)


그럼에도 나와 닮은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 있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 세상을 알고 조화를 배운다. 스스로를 외톨이라 인정하며 외톨이는 숭고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도야 선생, 세상이 하나의 색이 아닌 형형색색이라는 걸 인정하는 다카야나기, 자신만의 색으로도 충분한 나카노. 세상은 그렇게 다양한 인생이 만드는 것이다. 


『태풍』은 알려진 대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가운데 인기가 있는 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 재미가 없다. 나쓰메 소세키의 팬이 아니라면 권하지 않는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도야 선생과 아내가 티격태격하는 장면이나 나카노와 다카야나기의 만남과 대화나 그들의 분위기는 흥미롭고 나쁘지 않다. 감동의 파도가 밀려오거나 강력한 여운이 남는 건 아니지만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대신 잔잔한 지루함이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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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2-27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필이면 <태풍>을 가장 먼저 읽으셨어요! 하지만 자목련 님 말씀처럼 나머지 작품이 다 정말 재미나게 느껴질 것입니다...ㅎㅎㅎㅎㅎ

자목련 2023-02-28 09:41   좋아요 2 | URL
잘 참고(?) 읽고 나니 스스로 대견했어요. ㅎ 다음 소설은 더 큰 기대로~~

2023-02-27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8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3-02-2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세키 책들은 잔뜩
쟁여 두었으나 미처 읽지
못하고 있네요.

원 먼쓰, 원 북 프로젝트
응원하는 바입니다.

자목련 2023-02-28 09:44   좋아요 2 | URL
바로 바로 읽는 건 어렵고, 감히 전작읽기는 못해도 있는 책은 읽어보려고 해요.
응원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2-28 0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래 맛있는건 맨 마지막에 먹는거 아니겠습니까 ㅋ 순서대로 읽는것도 좋을거 같아요 ^^

자목련 2023-03-03 09:44   좋아요 3 | URL
그렇겠지요?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쓴 맛을 참아보겠습니다. ㅎ

그레이스 2023-03-0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갱부, 우미인초, 풀베개, 산시로가 기억에 남습니다.

자목련 2023-03-06 09:46   좋아요 1 | URL
폴베개와 산시로는 제 책장에 있어요.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기대가 됩니다^^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모든 것들 날마다 인문학 4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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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답을 하겠지만 그 사랑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면 주저할 것이다. 한때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에 외면당했고 사랑이라는 말에 떨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을 믿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사랑은 단순히 누군가를 좋아하는 설렘에 국한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모든 감정을 대표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우의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사랑을 안내하는 괜찮은 책이다. 


경험한 이는 알겠지만 사랑은 개별적이고 고유한 감정이다. 사랑을 느끼는 상대도 저마다 다르고 그와 사랑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노력도 다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전부를 원하면서도 나의 전부를 꺼내놓는 건 거부하는 이기심, 그 안에는 나의 결점이나 단점을 보익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랑으로 인해 다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삶을 포용하고 이제껏 가징 않았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삶의 가치를 바꾸기도 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 위대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누구가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는. 


사랑은 내 안의 기준이나 자아만 바꾸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존재하는 세계, 내가 경험하는 ‘세계 그 자체’를 바꾼다. 그 세계는 사랑 이전에는 없던, 경험할 수 없던 세계이다. (46쪽)


사랑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프고 고통스럽다. 무엇 때문에 아프고 힘든지 모른다는 게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때로는 익숙해서 그 익숙함이 권태로움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세계를 찾는다. 미래를 꿈꾸고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하찮게 보인다. 그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작가의 이런 표현처럼 ‘점’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과거에 우리였던 시절이 점에서 끝났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선을 긋고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기에 우리가 아닌 혼자가 되었다는걸. 


서로를 옆에 세워 두거나 저기 어디에 둔 ‘점’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서로의 삶으로 끌어들여 영향을 주고받는 ‘선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 사랑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역동하며 만들어 가는 우주다. (89쪽)


선을 만들지 못한 관계는 상처를 남긴다.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 이별은 큰일이 아니라는 걸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별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과제이니까. 연인과의 사랑뿐 아니라 가족, 친구, 부모 사이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별은 감당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삶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이별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이 부정당하거나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는 게 아니다. 좋은 기억, 행복했던 순간, 사랑으로 인해 성장한 자신을 남겨두어야 한다. 영원한 이별 후 우리가 끊임없이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다. 사랑은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이전의 사랑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조금 더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고 상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좋을지, 일종의 서로의 간의 협의나 계약이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사랑하는 일에 있어 무슨 계약이 필요하냐고 의야 해 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무조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의존하다면 그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투고 갈등하고 서운함을 느낀다. 사랑하는 게 맞냐고 묻고 따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협의나 계약은 중요하다. 사랑을 지속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중요한 것 협의나 계약을 위한 대화가 필수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상대를 알려 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 나에게 맞춰야 한다는 건 좋은 사랑이 아니니까.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상대에게 끊임없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나 또한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 한 명의 사람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엄격하게 규정하여 그 속에 가두기보다, 변화하는 나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두 사람이 하는 사랑이란 그런 서로에 대해 ‘열려 있음’을 유지하며 폭력적으로 서로를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164쪽)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은 철학, 문학, 영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을 말하며 사랑을 정의하고 사랑을 관찰한다. 사랑이라는 모호하면서도 확연한 감정이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줌을 통해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 소개된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안겨주는데 내게는 모드 루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내 사랑>을 보고 싶게 만들었다. 


저자가 안내하는 사랑이 모두 옳은 답은 아닐 것이다. 다시 생각한다. 사랑은 무엇일까. 저마다의 답은 다를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고 고유하니까. 그러나 그 사랑 안에서 충만하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내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고 내 사랑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고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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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3-02-1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노력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입니다:-) 언제나 실천은 쉽지 않네요.

자목련 2023-02-20 09:00   좋아요 1 | URL
갱지 님은 좋은 사랑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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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도입부터 결말을 궁금하게 만든다. 대부분 추리소설이 그러한데 이꽃님의 『죽이고 싶은 아이』도 그랬다. 이런 제목을 쓸 정도면 무시무시한 내용이 아닐까 기대하게 만들었고 어떤 증오가 있기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고등학생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절친이었던 친구 ‘박서은’을 죽인 아이로 지목된 ‘지주연’. 고백하자면 정말 지주연이 친구를 죽였을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먼저 읽을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소설은 박서은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가 보여준다. 하나씩 진실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락 할까. 박서은과 지주연을 아는 이들의 인터뷰와 범인으로 지목된 주연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서은과 주연이 어떻게 절친이 되었는지부터 둘 사이가 어떻게 보였는지 정말 주연이 서은을 죽인 게 맞는지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사람들. 중학교 때 같은 반 아이, 학원을 같이 다닌 아이, 학원 선생님, 주연의 부모와 변호사까지 다양하다. 


어떤 아이는 왕따를 당하는 서은을 주연이 도와주고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은 주연이 서은을 챙겨주고 진심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어떤 아이는 그 반대로 말한다. 주연이 서은을 노예처럼 부리는 무서운 아이였다고 말이다. 살인사건으로 인해 학교 수업이나 이미지에 지장을 준다고 불편해하는 시선도 있다. 죽은 애도 안타깝지만 남은 아이들은 학업에 피해를 받는 게 싫기 때문이다.언론은 사건을 집중 조명한다. 서은이 죽은 현장에는 벽돌이 있었고 그 벽돌에 남은 주연의 지문이 주연이 범인이라 볼 수밖에 없다. 주연의 사건을 수임한 김 변호사는 무조건 자신을 믿으라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지만 주연은 사실 기억이 없다. 서은과 다툼이 있었고 만나서 사과를 하건 맞지만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다. 부모도 변호사도 경찰도. 주연을 찾아와 심리를 살피는 프로파일러도 주연을 의심한다. 주연이 연기를 하는 거라고 믿는 눈치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경제력 든든한 부모가 붙여준 변호사는 무죄 증명을 자신하니 우울증으로 밀어붙이려는 게 아닐까 정말 영악한 아이라고 여겼다.


정말 주연은 그런 아이일까. 서은을 죽여놓고 지금 너무 보고 싶고 혼자 외롭게 떠나게 해서 미안하고 서은의 엄마를 걱정하는 모습이 다 연기일까. 서은과 주연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 당일은 모의고사가 있던 날이라 학교에는 남은 아이들이 없었고 과거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사건 장소를 찾는 이는 없었다. 산산이 부서진 벽돌과 주연의 지문만이 사건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건 일부에 불과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항상 뒤늦게 알게 된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믿으면 그게 사실이 되는 거야. 팩트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65쪽) 


주연의 사건도 그러했다. 진실은 조금 천천히 드러난다. 주연을 범인이라고 단정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꽃님의 『죽이고 싶은 아이』은 십 대 아이들의 우정, 관계, 심리에 중점을 둔 청소년문학에 국한시킬 수 없다. 학교의 교실은 회사나 동네가 될 수 있으니까. 서은과 주연은 누구나 될 수 있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실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사회적 위치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획일적이고 편향적인 시선이 얼마나 강하고 무섭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어떤 문제든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 우리가 놓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 안다고 믿어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196쪽)


읽기도 전에 호기심을 불러온 소설은 읽고 난 후에는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의 진실을 보려는 이는 얼마나 될까. 여론이 흘려주는 대로 경찰이 발표하는 대로 믿고 잊어버리는 사람들 속에 나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진실을 밝히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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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
별 다섯개 줬어요~^^

자목련 2023-02-15 09:02   좋아요 1 | URL
소설을 읽기 전의 마음이 완전 달라졌어요!

희선 2023-02-1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은 그런 게 없기도 하네요 그저 어떤 일이 있었다 누가 범인이다 하는 것만 말하는군요 그런 게 정말일 수도 있지만 아닐지도 모를 텐데... 뭔가를 잘 보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도 하죠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희선

자목련 2023-02-15 09:04   좋아요 0 | URL
뭔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참 중요하구나 싶어요.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묵직한 무언가를 남겼어요.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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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을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러면서 내가 이들의 소설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에 조금 냉철해져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소설 하나 읽는데 냉철까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익숙하다는 건 좋은 것일까. 익숙함은 관대함을 불러오고 관대함은 그저 좋은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떠올리면 따라오는 이미지와 분위기가 있다는 건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독자도 마찬가지라고.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어떤 기류를 발견할 수 있다. 수상작 편혜영에게 갖고 있던 단순히 공포라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괴기나 크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고, 정한아에게 보았던 마냥 따뜻했던 느낌이 아닌 복잡하고 심상함이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김연수가 한층 더 깊어지고 백수린은 섬세해진 것 같았다. 수록되지 않은 구병모의 소설도 심사평을 보면 이야기의 짜임이 더 촘촘해진 게 아닐까 싶다. 


수상작인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는 여상을 졸업한 네 명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여고가 아닌 여상에서 짐작할 수 있든 그들은 대학이 아닌 취업을 했다. 은행에 제일 먼저 취업에 성공해 근무 전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던 ‘한오’는 일을 하면서 야간 대학에 다녔다. 그러나 졸업은 쉽지 않았고 본사로 발령을 받아도 은행 업무보다는 고졸이라서, 자격증이 있다는 이유로 손글씨 쓰는 일만 주어졌다. 


“제대로 된 일을 배워야지. 은행이니까 여신도 배우고 대출도 배우고 외환도 배워야지. 그래야 성공하지.”(「포도밭 묘지」, 17쪽)


은행에서 한오를 고졸사원으로 여기며 대우를 해주지 않는 사정은 성적은 제일 좋았지만 외모 때문에 화자인 ‘나’가 일하는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들어온 ‘수영’이나 무역회사에서 막내라는 이유로 잘못을 떠 앉은 ‘윤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해 해도 한오가 성공할 기회는 보이지 않았고 판매직인 수영과 나에게 사무직을 바라는 것보다 백화점을 나가는 게 빨랐다. 수영은 공무원 공부를 선택했고 윤주는 직장에서 친절했던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들에게 어떤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한 시도 쉬지 않고 자기 계발에 애쓴 한오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백화점에 판매사원인 나, 공무원 시험에 성공하지 못한 수영, 아이를 가지 않냐는 시댁의 시달림과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으로부터 시들어버린 우울한 윤주. 오래전 넷이서 남이섬에 놀러 갔던 일과 소설 말미에 한오의 기일을 맞아 셋이서 그의 무덤을 찾는 과정이 하나로 겹쳐지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뭔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기대와 바람이 오래전 나와 내 친구의 것인 양 울컥해진다.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 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포도밭 묘지」, 34쪽)


그런 감정은 백수린의 「아주 환한 날들」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남편은 죽고 딸은 가정을 이루고 과일가게를 정리하고 노년을 보내는 ‘나’는 수필 강의를 듣는다. 하지만 다른 수강생처럼 수필을 쓰지는 못한다. 강의가 끝나고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모임도 참여하지 않는다. 혼자 살지만 혼자 사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기에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핑계를 댄다. ‘나’는 혼자서도 잘 지냈다. 그런데 사위가 앵무새를 가지고 오면서 달라졌다. 한 달만 맡기로 한 앵무새가 나의 일상을 조금씩 변화 키셨다. 앵무새에 대해 검색하면서 잘 돌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과거 생계를 위해 어린 딸을 살피지 못한 죄책감으로 시작된 딸과의 관계까지 돌아보며 사느라도 잊고 있던 좋은 기억을 떠올린다. 나쁘기만 했던 삶의 기억이 아닌 웃고 행복하게 만든 순간들을 말이다. 


사위가 앵무새를 데리고 갔지만 함께 보낸 시간은 데려가지 못했고 뭔가 쓰려는 마음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수필 강사의 말에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무서워’(「아주 환한 날들」, 235쪽)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뭔가 쿵 하고 내 마음에 내려앉는 걸 느낀다. 살면서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얼마나 될까.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했던 게 맞나 싶은 거다. 소설 속 ‘나’가 노년이 이르러서야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지 알게 되는 것처럼 나는 아직 그 무서움을 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백수린의 단편은 읽고 난 후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데 「아주 환한 날들」은 특히 더하다. 일상을 흔드는 놀라운 일만이 우리 생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배운다고 할까. 


처음 만난 문지혁의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안겨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소설과 논문 주제로 다룬 화자는 소설은 논문 같고 논문은 소설 같다는 평을 듣는다. 논문 같은 소설은 이미 등장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렇게 소설에 녹여 고민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현실적이라 반갑고 공감하게 된다. 기회가 되면 문지혁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익숙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그들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읽으면서 불편했던 기억, 너무 좋아서 문장을 기록하고 기억하려 노력했 기억, 작가의 다른 소설을 찾아서 읽던 기억. 익숙함이 길들여져 나중에는 뒤로 미뤄두었던 작가의 소설들. 시간이 지나 익숙함이 아닌 낯섦으로 찾아오기도 하는 소설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도 맞다. 한없이 쓸쓸한 것 같지만 그 안에 환하고 다정한 것들이 숨겨져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것처럼. 소설을 읽는 일은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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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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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란 제목을 보고 사랑에 관한 단편집이 아닐까 기대했다면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여 작가의 이름만으로 이미 사랑에 대한 뻔한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자이언트북스의 앤솔러지 시리즈, ‘자이언트 픽’은 장르의 경계를 없애고 자유로운 소설로 독자를 유입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뭐, 그렇다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속 다섯 편의 소설은 SF 장르를 취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겹치는 부분이 없는걸 보면 작가의 개성을 확실히 파악된다고 할까. 


표제작 이유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그에 대한 사랑을 감정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할까. 완벽한 이별을 위해 필요한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감정을 사고파는 소재를 다룬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기에 산뜻하거나 기발하지는 않았다. 다만 감정을 제공하고 받은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연인과 이별을 한 ‘수진’이 고양이 순대의 치료비를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친구 ‘영인’에게 전이하기로 결정한다. 남편이 불륜으로 힘든 영인에게는 그 감정이 필요하니까. 


감정전이센터를 방문하며 진행되는 과정은 흡사 장기를 이식받는 수술과 닮았다. 감정전이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듣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까지. 감정 샘플을 배양해서 만든 감정 기체를 보여주는 장면은 묘한 기분을 불러온다. 사랑을 구체화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직원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기체라더니, 신기하게도 뚜껑을 열었는데도 그것은 새어 나오지 않고 분홍빛 구름처럼 상자 안에 둥둥 떠 있었다. 서로 눈을 한번 마주 본 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체온보다 사오도 높은 정도일까.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에다 꼭 베개 솜 안에 손을 쑥 집어넣은 듯 몽글몽글한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33쪽)


수지의 감정을 받은 영인은 남편 민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마냥 행복해한다. 그러나 그런 아내를 보는 민후는 뭔가 불편하다. 그러니까 영인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운 거다. 민후 입장에서는 자신이 알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을 것 같다. 그리고 곧 수진도 그 마음을 알게 된다. 소개팅으로 만난 영욱이 헤어질 때마다 감정전이를 한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걸 보곤. 어떤 감정은 쓸모없다고 여기는 미래가 온다면 고유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고 획일적인 감정으로 모두를 대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정을 전이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피부를 바꾸는 인간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김초엽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인간을 구성하고 정의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똑같은 피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피부를 만들어 이식한 상태의 모습은 분명 나와는 다르지만 그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사실을 고지하기 전까지는 힘들 것이다. 외형이 주는 믿음이 이토록 확고한 것이라는 걸 확인한다. 도영 언니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하는 소설로 들어가 보면 화자는 인공 피부를 만드는 곳 <솜솜 피부 관리숍>에서 일을 한다. 고객이 원하는 피부를 설계하고 배양해서 이식하는 일이다.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소설에서 마주하고 내 안의 내제된 욕망은 무엇일까, 깊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스쳤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 혹은 진짜 내가 되고 싶다는 갈망은 대체 뭘까요? 그것은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서 한 사람의 뼈를 이루게 되는 걸까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손끝에 닿은 두툼한 인공 피부의 감촉을 느낄 때면 알 수 있었죠. 아, 갈망은 분명 여기 실재하는 것이구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134쪽)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모든 피부는 가능했다. 금속을 이식해달라는 고객이 나타났고 그가 바로 수브다니였다. 녹슬고 싶다’는 수브다니의 갈망 앞에 사장은 불가능하다고 말렸지만 결국 수부다니의 확고한 결심에 피부 이식을 하게 된다. 수브다니가 직접 피부 재료인 금속을 가져왔는데 이게 훔친 물건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솜솜 피부 관리숍>과 사장은 곤욕을 치른다. 알고 보니 수브다니는 인간이 아닌 최첨단 안드로이드였다가 반 인간화 시술을 받은 상태였다. 그가 녹슬고 싶은 금속 피부 이식을 원했던 건 다시 기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안드로이드로 존재했을 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과 만든 작품을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브다니의 사건과 별개로 인형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화자는 말하는데 이상하게 서글퍼진다. 남들과 다른 외형을 갖는 일은 정체성으로 이어지는데 소수이고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므로. 


SF 장르를 읽다 보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고민이 된다. 그러다 결국 미래에도 인간은 살아남을 것이고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 그러니까 사랑이 가장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서해의 「폴터가이스트」에서 과거 사건으로 인해 어떤 소리를 듣는 ‘세인’이 왕따 당하는 학교에 전학을 온 수영 선수 ‘현수’가 세인이 듣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일도 결국은 사랑이다. 세인이 듣는 소리는 불길한 구의 등장과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판타지 요소와 함께 성장 소설의 느낌을 더해진 소설이다. 설재인의 「미림」도 비슷하다. 주인집이라는 거대한 성, 그 안에서 가정 폭력으로 오직 학교에서만 안전할 수 있는 ‘주경’은 지구 종말의 사태로 학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지하의 ‘미림’을 만나 위로를 받는다. 그런가 하면 발표하는 소설마다 인간보다 더 따뜻한 감성을 지닌 로봇으로 감동을 안기는 천 선 란의 「뼈의 기록」에서는 염을 하는 안드로이드 ‘로비스’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는지. 


쓰다 보니 사랑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게 어떻게 우리를 살게 만드는지, 차별과 혐오를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사랑이라는 걸 말이다. 어떤 미래는 내게 남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고 곁에 머물러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리석고 불가능할지라도 생각이야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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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2-0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을 보자마자 왜 장혜리의 노래가 떠오를까요?^^
학창시절 누가 저더러 장혜리 닮았다고 자꾸 저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닮지도 않았고, 음치라 내빼다 얼떨결에 불렀는데...응? 노래가 참 부르기 쉽더군요? 그래서 종종 불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책은 제목과는 다른 sf물이군요?
작가들 이름만 봐도 재밌겠어요.^^

자목련 2023-02-09 09:14   좋아요 1 | URL
이유리의 단편은 그 노래의 제목에서 따온 게 맞습니다. 저도 사실 그랬거든요. ㅎ
와, 제 기억을 떠올리면 나무 님이 장혜리를 닮으셨다면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5편의 단편은 작가의 개성을 담고 있다고 할까요. 특정 독자가 아닌 모든 세대가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었어요.

책읽는나무 2023-02-09 10:17   좋아요 0 | URL
아, 그 노래에서 따온 게 맞나요?^^
그리고 저 장혜리 안 닮았는데, 유독 장혜리 가수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만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 다른 친구들도 아닌데? 안 닮았는데? 라고 얘길 해도 그 친구 하나 때문에 닮았나 보다?라고 되어가지구선^^;;;
그래서 친구들이 나 놀린다고 노래방 가면 니 노래다! 라고 마이크까지 건네주고 지네들끼리 내가 얼굴 빨개진 거 쳐다 보고 웃고~~그랬었던 적 있었네요.
그것도 추억이 되었네요.ㅋㅋ
저 닮진 않았으니, 상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목련 2023-02-10 10:04   좋아요 1 | URL
음, 책나무님을 생각하면 올리브 색과 키위, 그리고 장헤리까지 키워드 추가합니다. ㅎ

희선 2023-02-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을지도 모르겠네요 영인은 남편과 이야기를 해 보면 더 나을 것 같은데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것도 쉽지 않겠지요 언젠가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 피부를 이상하게 만든 사람 있더군요 악마처럼 한다고... 지금보다 과학이 더 발달하면 피부를 여러 가지로 이식해주기도 할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형이라는 걸 하고 좋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겠네요


희선

자목련 2023-02-10 10:06   좋아요 1 | URL
점점 SF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에 대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말씀처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일도 무언가 더하거나 변형시키는 일도 그 사람의 고유한 결정이니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2023-02-10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3-03-1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03-15 08:24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