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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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기록하는 일은 귀중하다.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은 물론이고 단순한 일상의 기록은 더욱 그렇다. 보잘것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하루를 돌아보는 일기는 그 하루 전체가 되고 훗날 마주했을 때 한 시절의 한 조각이 된다. 그러니 기록은 일부이자 전체가 된다. 누군가 남긴 기록을 읽으며 우리는 기록 너머의 삶을 상상한다. 소소한 일상의 나열에 웃음 짓기도 하고 상처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감춰진 감정들이 글 속에서 뛰쳐나오고 단어를 통해 어떤 결의나 다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배리 로페즈의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그것들과 화해하려 애쓰고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나가가려는 그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가 아니었다. 내게는 그랬다. 삶의 기록이 분명했지만 그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캘리포니아를 그리며’나 ‘하늘 한 조각’이란 제목처럼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이 아니었다. 나 같으면서 떼어내거나 잘라버리고 싶은 기억의 한 덩어리였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인한 폭행,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되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움이 간절한 이들에게 의사라는 지위의 선한 천사 인양 가면을 쓰고 접근한 악마의 행태를 읽는 동안 모든 욕이 쏟아져 나왔다. 그랬다. 그의 기록은 어린 로페즈가 지소적으로 당한 성폭행이었다. 어린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혼한 엄마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참는 게 어린 남동생을 보호하는 거라 믿었을 소년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자신을 지켜주고 편이 되어줄 어른인 새아버지에게 털어놓으며 그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시간이 지난 탓인지, 형사들은 이미 도주한 의사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수사의 진척을 묻는 로페즈에게 새아버지는 의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노인이 되었다고 그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까. 로페즈는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직접 그를 아는 지인을 찾아 나섰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이렇게 모든 걸 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얻은 교훈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포용을 용서나 우호적인 판단이 아니라 인정으로 받아들여 환영하는 것. 누구나 때때로 남들이 모르는 각자의 삶에서 잔혹한 역경을 맞기도 하며,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는 서로가 없다면 이 악몽은 언제든 되살아날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117쪽)


삶을 포기하지 않고 절망의 순간마다 그를 이끈 건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쓰다 나는 울컥해진다. 침잠했던 시절이 떠오르며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가족에게도 냉담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무엇인가. 나에게 무엇인가 묻게 되는 것이다. 배리 로페즈가 견디고 겪어야 했던 그 상처와 비교할 수 없지만. 살아가면서 겪게 될 상처와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으면서 조심스럽지만 로페즈에게 그것은 자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대하고 포괄적인 의미의 자연이 아니라 그가 느끼고 경험하고 생활한 장소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한 편으로는 이 책은 그가 다닌 여행의 여정을 담은 기록, 탐사 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여행,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의 여행, 선주민을 만나는, 낯선 이를 만나는 사람 여행이라고 할까.


알래스카 북부와 중부 각지를 야영한 날들, 남반구에서 머문 겨울밤, 극지 고원에 위치한 캠프, 딸과 함께 남극 크루즈 선박에서 보낸 시간, 이 모든 여행에서 그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씨를 기록하고 동물을 더 많이 보고 관찰하려 애쓴다. “여행은 매일매일 우리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무언가를 소개한다.” (276쪽)는 로페즈의 말은 그저 풍광을 보려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세계 각국의 유명 관광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객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화하는 자연,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생명을 놓치지 말라고.


내게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어렵고도 아름다운 책이다. 기록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할까. 무언가 쓰는 일, 쓰면서 생각하고 쓰면서 돌아보고 쓰면서 정리하는 일. 쓴다는 행위는 살아있다는 증명이었다. 살아내고 있다는 다짐이었다. 로페즈가 남긴 기록을 읽고 그의 생각과 느낌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흡수라니, 가당치도 않은 바람이라는 걸 안다. 그가 여행한 곳들의 지명이나 특색을 검색할 수 있으나 그 안의 고유한 감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70년 여름부터 줄곧 그가 살아온 오리건 서부 로페즈의 집은 상상할 수 있다. 아니, 그려보는 것이다. 치누크 연어가 산란하고 물수리 울음이 들리는 강, 엘크와 퓨마가 사는 숲, 흑곰의 발톱 자국을 발견하는 공간. 그리고 이런 겹쳐지는 이런 문장. 나는 이 부분이 너무 좋았다. 왜 이리 좋은지 설명할 수 없지만 알고 알려지는 교감이라니. 그것은 장소와 나의 관계가 아닌 모든 존재와의 관계에도 필요한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연의 모든 장소가 ‘알려짐’에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어디쯤에선가 인간은 자신들이 ‘알려지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렇기에 그들이 아는 장소에서 그들의 존재가 사라질 때 장소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서로가 알고 알려지는 이런 교감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197쪽)


나는 제법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치유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상처와 반갑게 인사할 수 을 정도로 무감해진 것도 맞다. 그러나 여전히 삶이라는 게 버겁고 힘들다. 살아가는 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페즈의 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용기와 위로를 건넨다. 삶의 모든 것과 화목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그 앎을 우리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미지의 것이 두렵지 않다. 이곳의 많은 동물들이 집에서 몇 발짝 벗어나면 죽음이, 때로는 더 무시무시한 것이 도사린 가운데 살아가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과 화목하다. 이 앎이 있기에 나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각오를 얻는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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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3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 줄 타인이 필요하다”는 구절 저도 참 좋았어요! 그 타인이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글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던…

자목련 2024-03-31 14:17   좋아요 1 | URL
네, 글쓰기는 그런 힘이 있어요.
나를 쓰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 쓰고 싶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우아 2024-03-3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생명으로 보면서 삶을 구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나침반이었습니다.

자목련 2024-03-31 14:18   좋아요 0 | URL
나침반이자 어둠을 밝혀주는 등대 같은 책이었어요.
 
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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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할 때 드라이브는 괜찮은 일이다. 직접 운전하지 않더라도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복잡했던 머릿속을 단순하게 비워준다. 어쩌면 욘 포세의 장편소설 『샤이닝』 속 남자도 그런 걸 바랐을지도 모른다. 초겨울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를 가르며 운전을 하고 돌아오면 지루함이 사라질 거라고. 그러나 그는 깊은 숲속 눈밭에 갇히고 말았다. 처박힌 차를 꺼낼 수가 없었다. 차를 꺼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를 도와줄 누군가 말이다. 모든 게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이 숲에서 나가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생각하다 길을 되짚어 나가기로 한다. 그러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고 어딘가 마을이 있으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점점 어두워지는 숲을 헤매는 기분을 상상하자니 나에게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제발 이 남자가 숲을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야생동물의 위협을 피하고 조난이 아닌 생존으로 끝나기를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묘하다. 아니 욘 포세의 글이 묘하다고 하는 게 맞다. 쉼표로만 길게 이어진 문장으로 독백이나 다름없던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느꼈던 것처럼. 소설을 이끄는 한 남자, 그는 마치 연극 무대에 올라서 배우 같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고, 거기에 몽환적인 눈 내리는 숲 속이라니. 알 수 없는 흰빛과 우연하게 발견한 바위에 앉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고립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어떤 편안을 발견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주 조용히 서 있다. 사방이 완전하고 고요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내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나는 들을 수 있다. (59쪽)







더 놀라운 건 홀로 있던 숲속에 느닷없이 등장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노부부다. 분명 이건 환영이어야 맞다. 심지어 노부부는 남자의 부모였다. 그렇다면 신이 그를 구하기 위해 그들을 보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어떤 감격이나 기쁨을 보이지 않는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 죽음이 따라온다. 그가 맞이한 세계는 죽음이 아닐까. 사실, 이 소설은 뭔가 해석하기보다는 욘 포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그의 문장에 물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정말 그것은 가능할까. 그럼에도 부단히 나를 찾기 위해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게 생이라는 사실.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나는 반짝이던 그 존재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지금 그 존재는 더이상 순백색 빛을 발하지 않지만, 그렇다,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다,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79~80쪽)


우리는 맨발로 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한 숨 또 한 숨, 어느 순간 숨이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호흡하는 무를 빛처럼 뿜어내는 반짝이는 존재뿐이고, 어느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우리다, 각각의 순백색 속에서. (80~81쪽)


한 편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고 한 편의 웅장한 시 같은 소설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욘 포세의 문장에 빠져들고 그 숲에 혼자 남은 그 남자는 곧 나 자신은 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 가만히 눈을 갚고 순백색이란 뜻의 원제(kvitleik)를 떠올리며 숲속을 그리게 될 것이다. 내게는 무대의 막이 내리고 배우가 퇴장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 우리의 인생에서 산다는 것과 죽음이야말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책에 수록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 침묵의 언어>를 통해 욘 포세가 추구하는 소설에 대해 만나고 나면 『샤이닝』을 다시 읽고 싶을 것이다. 두 번 읽는다고 더 쉽게 다가오고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글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가 듣고자 하는 게 무언인지, 나는 무엇을 듣고자 노력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불가해한 것으로 채워진 삶을.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 (95쪽)


그리고 고요를 생각한다. 묵연한 그것. 어쩌면 순백일지도 모를 그것을 생각한다. 80쪽의 짧은 소설이 품은 웅장하고 깊은 고요를, 오직 고요함만이 낼 수 있는 신비로운 소리를 마주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고요를, 이제껏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고요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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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3-22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 그리고 저녁>의 분위기가 느껴지는데요.
욘 포세의 소설을 읽으면 왠지 북유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 속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아요^^

자목련 2024-03-25 13:28   좋아요 1 | URL
네,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까요.
눈으로 가득한 숲 속의 명징한 차가움, 말씀처럼 북유럽의 풍경을 떠올립니다.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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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가 빠르면 편하다. 하지만 눈치가 느리다고 불편해할 일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각자 행동의 속도가 다르듯 이해의 속도도 그렇다. 상대의 농담이나 유머에 즉각 반응하는 이가 있으면 한참 지나야 그 숨을 뜻을 알고 혼자 웃거나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속도는 왜 아니 그렇겠는가. 삶의 시차를 인정하는 순간 눈치 없음에 대해 불평할 일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의도를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게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 권여선의 작품이 대상을 수상한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어떤 의도를 파악하는 일, 말하지 않은 말들과 숨겨진 뜻에 대해 생각한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의 사정이나 미뤄두어야 했을 말들에 대해서도.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다시 읽어도 좋다. 아니 읽을수록 소설의 진위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까지 든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친구, 서로를 위한다고 여겼지만 결국 내 삶을 살기에 급급한 현실에 오해하고 상처 주는 일은 소설 속 네 명의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0년 전 대학을 입학하면서 같은 하숙집을 시작으로 서로의 청춘을 응원하고 조언하며 지낸 그들. 한 친구의 생일을 맞아 떠난 여행지에서 민박집에 들어온 사슴벌레를 보며 나누던 대화는 ‘사슴벌레식 문답’이 되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 방황과 좌절 때문인지 죽음을 선택한 한 친구의 20주기 추모 모임에 남은 셋 중 홀로 참석한 화자는 ‘사슴벌레식 문답’ 속에 숨겨진 의도를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지키고 싶었던 신념의 형태도 달라지고 점차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을.


어디로든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화자처럼 어떤 일은 뒤늦게 해답을 안겨준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 같은 일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오해가 쌓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 생긴다. 그럼에도 그 시절 함께했던 순간은 맨 처음 나누던 ‘사슴벌레식 문답’의 그리움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 문답처럼.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사슴벌레식 문답을 아는 이를 만나면 반가울 것이고 좋아질 것이다. 그는 권여선의 이 단편을 읽었다는 것이니까.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혼잣말로 중얼거릴 것 같다.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최진영의 「썸머의 마술과학」 은 열여섯 언니 이봄과 아홉 살 동생 이여름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봄과 여름이 화자가 되어 시를 쓰는 모임에 나가는 엄마와 해장을 위한 모임에 나가는 아빠. 아빠의 주식 투자로 생긴 빚 문제로 아파트를 두고 싸움을 하는 엄마 아빠를 피해 근처 할머니 댁에서 비공식 모임을 하는 자매. 자신을 여름이 아닌 썸머라 불러달라는 사랑스러운 썸머는 환경에 관심이 많다. 배우는 대로 흡수하고 실천하려는 어린이다. 지구와 미래를 걱정하는 썸머를 보고 있자니 어른인 나는 심히 부끄럽다. 그런 썸머를 보는 봄의 마음과 믿음을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것이다.


썸머를 생각하면 미래를 무한하게 긍정하고 싶다. 팬데믹, 미세먼지, 전염병, 홍수, 침수, 가뭄, 꺼지지 않는 산불, 식량난, 기후 난민, 토양오염, 해양오염, 종의 멸종처럼 암울한 일들로 가득한 미래가 아니라…… 탄소 중립 실현, 미세먼지 없는 대기, 자연 분해 가능한 플라스틱, 재생 에너지, 수소에너지, 전기자동차, 대체 식품 등으로 채워질 미래를 상상하고 싶다. 엄마 아빠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겐 당연해질 것들을 사람들이 계속 만들어낼 거라고 믿고 싶다. (「썸머의 마술과학」 중에서)


서유미의 「토요일 아침의 로건」 은 주말마다 스터디 룸에서 영어를 배우는 ‘로건’의 이야기다. 오십 대 남자인 그는 미국지사 발령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다. 목표에 가까이 왔다고 여긴 시점에 그는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 강사인 젤다에게 영어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 하지만 4주 내내 말하지 못한다. 그건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장모님의 생신 모임에서는 오히려 미국 생활을 기대하고 있을 정도다. 마침내 젤다에게 의사를 전달했을 때에도 젤다 역시 축하할 일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주말마다 마주한 풍경들, 한강공원의 모습들이 로건에겐 어떤 의미일까. 토요일마다 로건이었던 그는 김성호로 살아갈 것이다. 쓸쓸함이 가득 묻어난다. 소설의 마지막이 하나의 장면이 되어 박힌다.


카페 밖으로 나온 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그를 지나 자전거도로로 나아갔다. 그는 헬멧과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의 옆모습과 군더더기 없고 날렵한 뒷모습을 보았다. 무언가 그의 앞으로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아팠다. ( 「토요일 아침의 로건」 중에서)


담담하고 차분한 슬픔은 ‘나’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큰이모의 딸 인주 언니 이야기를 그린 백수린의 「빛이 다가올 때」에서도 비슷하다. 시력을 잃은 큰이모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직업마저 큰이모가 바랐던 교수가 된 인주 언니가 대학생 때 과외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 간호사로 해외취업을 한 나는 교환교수로 뉴욕 온 인주 언니와 재회한다. 뉴욕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인주 언니는 큰 존재였지만 자신처럼 누군가 좋아하며 설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마흔 넘은 인주 언니가 스무 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일, 언니의 감정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인주 언니의 나이가 되어 과거 사춘기 시절 교생선생님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인주 언니도 그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 생각대로 감정을 판단했다는 미안함.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 「빛이 다가올 때」 중에서)


의 감정과 의도를 알아차리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 눈치챘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눈치와 상대가 느끼는 눈치가 같다는 보장은 없다. 나머지 세 편의 소설도 그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재난에 대비하는 과정을 그린 것 같지만 위기 상황에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도와주는 최은미의 「그곳」,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노동의 현실을 그려낸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 아내의 고통을 안다고 여긴 남편의 제안으로 시작된 요트 여행에서 요트 난파로 위험한 상황에 이르고 그 순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손보미의 「끝없는 밤」.


상대의 모든 말과 행동을 눈치채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통과 다른 어떤 표정이나 감정을 살피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아닌 문자, 쉼표, 이모티콘에 담긴 표정을 읽는 일 어렵지만 노력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는 일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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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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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은 매주 복권을 산다. 복권을 살 때 내가 옆에 있으면 그중 하나는 나를 준다. 내 돈 주고 복권을 사지도 않으면서 그 복권이 당첨되었는지 은근 기대를 한다. 혹시나, 혹시라도 하면서 QR코드를 확인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동생에게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 바란다. 물론 동생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그저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으로 복권을 산다.


노벨 문학상 수장 작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을 읽으면서 복권을 사는 마음이 생각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찌질하다고 해야 하나,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주인공 윌헬름 때문에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소설을 발표한 1956년이나 지금이나 사는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 윌헬름을 마냥 응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44세의 중년 남자 윌헬름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답답하기도 하고 어쩌자고 정신을 못 차리나 싶기도 하다가 오죽하면 저럴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도 인생이 이리 흘러갈 줄 몰랐을 것이다. 대학 때 배우가 될 줄 알고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그에게 배우란 타이틀은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했더라면 과거 배우 활동은 멋진 에피소드가 되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도 못하는 상태로 집을 나와 아내에게 두 아들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지금 해야 하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애인도 있다. 아내와 언제 이혼할지 알 수 없는 윌헬름를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줄지 모르지만.


회사를 그만둔 이유만 해도 그렇다. 기대했던 승진을 사장 사위에게 빼앗기고 회사를 나와버린 것이다.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박차고 나오다니. 어쩌면 윌헬름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의사인 아버지였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현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수는 있겠지만 현재로는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 두 부자 같은 호텔에 머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하루를 잘 알고 누굴 만나는지도 다 안다. 윌헬름는 자신의 경제 상황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을 기회를 엿보는데 호락호락하지 않다. 두 부자 사이를 아는 늙은이들의 말을 듣기도 싫고 자신을 아이 대하듯 잔소리하는 아버지도 싫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어울리는 탬킨 박사라는 작자가 영 수상해서 멀리하라고 해도 윌헬름은 통 들어먹지 않는다. 사기꾼이 분명한데 아들은 그걸 모르고 있다. 그러나 윌헬름은 탬킨 박사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화려한 언변과 확인할 수 없는 과거 이력에 이미 빠져 돈을 맡기고 선물 투자를 시작했다. 그들이 투자한 종목은 하락세를 보여 윌헬름은 돈을 빼고 싶은데 탬킨은 걱정하지 말라고 여유를 부린다. 탬킨 박사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공감가는 말인가.


“우리한테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미래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고.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 ’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 (97쪽)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탬킨이 진짜 사기꾼이면 어쩌냐 싶어서 그의 느긋함이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진짜 잘 아는 게 맞나 싶어서 제발 윌헬름에게 아버지 말을 듣고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한데 설령 말이 전해진다 해도 윌헬름이 결단을 내려야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의 진심도 모르는 아들이지 않은가. 그렇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나 대신 선택과 결정을 하겠는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예상이 맞아떨아졌다. 탬킨은 사라졌고 윌헬름은 그를 찾아 나선다. 작정하고 달아났다면 어떻게 그를 찾겠는가. 복잡한 뉴욕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탬킨 같은 남자를 따라가다 모르는 이의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남자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오열하고 만다. 윌헬름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 없다. 그가 그 순간 얻은 깨달음을 알 수 없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는 윌헬름의 눈앞에서 꽃다발과 불빛이 황홀하게 어우러졌다. 바다처럼 웅장한 음악소리가 귀까지 차올랐다. 그는 눈물이 가져다주는 위대하고 행복한 망각의 힘으로 군중 한복판에 숨어들었지만 음악은 거침없이 그의 내면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윌헬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슬픔보다 더 깊게 가라앉았고, 애끓는 울음을 뚫고 마침내 무엇보다 절실했던 마음의 안식을 찾아 더 깊이 내려갔다. (172쪽)


이 모든 게 단 하루의 일이다. 그렇다면 윌헬름은 오늘을 잡지 못한 것일까. 잡은 것일까. 그가 남은 인생은 진짜 오늘을 잡고 오늘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현재의 오늘을 살아가는 윌헬름에게도 해당된다.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오늘의 그것과 닮았고 투자 시장도 다르지 않다. 중년 남자의 고민과 윌헬름이 뉴욕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비슷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오늘을 사는 일, 녹록지 않다는걸. 인생이 그렇다는 걸 거듭 확인한다. 남동생은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복권을 샀을 것이다. 주말까지 확인할 수 없는 기쁨을 기대하고 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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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3-12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가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아요 ....

자목련 2024-03-13 12:53   좋아요 1 | URL
달자 님,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나 연극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 모르고 이미 나왔을지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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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좀 더 크고 넓은 도시 같은 곳. 한때 그런 곳에서 살았고 지금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산다는 건 매한가지니까.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남고 그게 삶의 이치라는 걸 알지만 떠나고 남는 마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고 남고 싶어서 남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실, 내 마음 하나도 벅차니 당연한 일이다. 어떤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가능할까. 문진영의 『딩』 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딩』은 아버지가 죽고 집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 K로 돌아오는 지원을 시작으로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이다. 작은 어촌 마을인 K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스치고 지나가며 연결된 사람들, 특별할 것 없는 다섯 명의 사연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가만히 쌓이고 스며든다. 지원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을 하면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를 위한 목적으로 내려왔다.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연락처를 받은 주미에게 연락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주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모텔(지금은 호텔로 이름을 바꾼)에서 일을 하면서 언젠가 고향을 떠나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에 남았다. 첫사랑과 결혼을 기대했던 연인도 지원을 떠났다. 지원도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K는 서핑으로 유명해져 주미의 호텔을 찾는 이도 많다. 똑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장례식에서 만난 지원이 연락을 하고 둘은 만난다.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둘은 소주를 마시며 지원의 사정과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함께 지원의 집에 와서 잠까지 잔다. 지원을 위해 북엇국을 끓이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호텔로 향한다.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주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72쪽)






지원이 떠난 사람이면 주미는 남은 사람이었다. 마치 돌아온 이를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지원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주미가 있기에 지원은 언제들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남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주미의 호텔에 묵은 재인이 그러하다. 재인은 호텔에서 죽은 연인 P가 묵었던 방에서 지낸다. 재인과 P는 하와이에서 만났다. 재인은 어학원 강사였고 P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다. 둘은 곧 연인이 되었고 P는 서핑을 즐겼다. 그랬던 P가 K의 호텔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재인은 지금 그곳에 있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영식의 포장마차에 들른다.


영식의 포장마차는 지원, 주미, 재인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한때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영식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었다.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어린 주미 덕분에 살았고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 쑤언이 포장마차 일을 돕는다. 술과 안주만 파는 게 아니라 식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밥을 팔았다. 혼자 포장마차를 찾는 재인이 그런 손님이었다. 쑤언은 배를 타는 일을 했지만 일이 없을 때 영식을 도왔다. 함께 일했던 마수드가 죽고 쑤언은 남았다. 베트남을 떠난 쑤언이 돌아갈 곳은 베트남이었다. 한국의 겨울과 눈을 딸 누에게 들려주지만 눈이 없는 그곳이 돌아갈 곳이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게 삶이라면 어떤 이별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삶은 돌아오지 못하고 어떤 삶은 떠나지 못한다. 어딘가 부유하다 머물기도 하고 어딘가 부유하다 상처가 나기도 한다. 돌아갈 그곳이 있어 이곳을 버틸 수 있는 삶, 떠날 그곳을 기대하기에 이곳을 견딜 수 있는 삶,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안아주는 남겨진 삶. 『딩』의 지원,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삶이었다. 떠날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단속하는 게 아니라 머무는 동안 마음을 기대고 나눠줄 수 있는 삶. 쑤언이 등대 계단참에 둔 귤 하나가 지원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P가 재인에게 알려준 국물 맛을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드에 뭔가가 부딪혀 상처가 나면 부른다는 ‘Ding’을 가만히 따라 읽는다. 상처가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산다는 건 상처를 받는 일 투성이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테니까. 그런 상처가 무섭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P가 재인에게 한 말처럼 당연한 거니까. 상처가 남긴 흉터는 때로 성장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앞으로 나갈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 ……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86쪽)


문진영의 『딩』은 삶이라는 파도에 뛰어드는 모두를 응원한다. 큰 소리로 모두가 외치는 함성은 아니다. 가만가만 지켜보며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괜찮냐고 말해주는 그런 목소리다. 슬그머니 귤 하나를 쥐여주고 뜨근한 어묵 국물을 한 컵 담아주는 그런 마음. 작지만 사라지지 않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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