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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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소설에 대해 말하는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좋은 소설이 그러하다.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유는 뭘까. 나만 알고 싶은 좋음이라서, 시리고 아파서 꼭 끌어안고 싶은 소설이라고 하면 맞을까. 클레어 키건의 짧은 소설 『맡겨진 소녀』가 그랬다. 양 갈래머리를 한 소녀의 뒷모습이 아련해서,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이 왠지 슬퍼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소녀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진다. 소녀를 데려다준 아빠는 소녀와의 이별에 슬픔은커녕 안타까움도 없다. 심지어 소녀에게 필요한 짐도 내려주지 않고 트럭을 타고 떠나버린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걸까. 너무 아파서 그 모습을 딸에게 감추고 싶어서 도망치듯 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빠는 세심함과 다정함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빠로 살아가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소녀에게는 언니들이 있었고 동생도 있고 엄마는 태어날 아이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돌볼 여력이 없어서 잠시 딸을 맡긴 것이다. 다시 집으로 데리러 올 테니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나 이런 아빠라니.


낯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소녀. 킨셀라 부부는 그런 소녀를 극진하게 보살핀다. 극진하게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성을 다해 아이를 대하고 사랑을 준다. 잠자리에서 실수를 한 소녀를 혼내는 대신 부끄러울까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사소한 것까지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오는 사소한 심부름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와 지내면서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애정과 사랑을 받는다.


소녀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나하나 챙겨주는 킨셀라 부부. 처음에 소녀가 친척 집에 맡겨졌을 때 나는 소녀가 학대를 받으면 어쩌냐 내심 걱정했다. 그러니까 일손을 돕기 위한 하녀처럼 맡겨진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걱정 대신 다른 걱정이 생겼다. 소녀가 집으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방치와 무관심에 가까운 집이 아닌 그냥 여기 이곳에서 킨셀라 부부와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내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돈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69~70쪽)


그러나 소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라는 이유만 있을 뿐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은 찾을 수 없는 냉랭한 분위기의 집으로 말이다. 자매들의 반응도 마찬가지. 소녀의 부모의 마음을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애틋함을 찾을 수 없다. 물론 다자녀를 돌보는 일은 버겁다. 그러나 버거움과 사랑을 주고 표현하는 일은 다르다. 소설을 읽으며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5명의 자녀를 둔 내 엄마. 농사일로 바빠서 등교 옷차림이나 준비물을 꼼꼼하게 살피지는 못하셨지만 나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 큰언니가 그 역할을 해주었다. 마냥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힘든 직장 일을 안쓰럽게 여기고 아픈 동생을 위해 주말마다 병실을 찾았다. 엄마와 큰언니 모두 떠났지만 그들의 사랑이 나를 지켜준다.


이처럼 지난 시절의 따뜻했던 돌봄은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사랑을 받은 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처럼 소녀는 그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담담한 슬픔은 벅찬 아름다움이 된다. 차곡차곡 쌓아둔 소녀의 마음이 터지는 순간엔 나도 울컥하고 만다.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하며 초를 재던 시간,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배우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며 모든 걸 함께했던 포근했던 순간들. 부끄러움도 비밀도 없던 그 집에서 보낸 시간, 그 짧은 시절이 소녀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지켜줄 사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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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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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상실과 슬픔을 배운다. 아니, 배우는 게 아니라 체득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상실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는 이가 없다. 자신의 슬픔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고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른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의 감정을 돌볼 여력이 없다. 아이는 눈치껏 감정과 말을 숨긴다. 사랑하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거짓말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누군가 그게 성장하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아지고 괜찮아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 곁에서 그 슬픔을 어루만지고 달래줘야 한다. 『눈부신 안부』속 어린 ‘해미’는 스스로가 그런 역할을 자처했다. 1994년 가스 폭발 사고로 중학생이었던 언니를 잃고 엄마와 아빠는 슬픔에 침잠한다. 해미와 다르게 동생 해나는 마냥 즐겁다.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했고 해미는 유학을 결정한 엄마와 해나와 함께 ‘행자’ 이모가 있는 독일 G시로 향한다. 행자 이모는 파독 간호사로 일하다 지금은 의사가 되었고 같은 처지의 다른 이모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곳에서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를 만나고 조금씩 독일 생활에 적응한다. 언니를 잃은 슬픔이나 낯선 독일에서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건 엄마가 아닌 행자 이모다. 해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건 엄마가 아닌 행자 이모다. 한 번씩 산책을 하면서 해미를 웃게 하고 본연의 모습을 찾게 만든다.


해미가 독일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안정이 되기 시작한 건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와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를 만나고부터다. 가족끼리 만나고 왕래를 하면서 서로가 독일어와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서 친해진다. 그러다 한수의 부탁으로 셋은 단단한 사이가 된다. 한수의 엄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달라고 한 것이다. 아픈 엄마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고 싶은 한수의 부탁에 레나와 해미는 적극 동참한다. 광부로 일하며 엄마와 결혼하고 이혼한 아빠가 아닌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엄마의 첫사랑. 단서는 ‘K.H’란 이니셜 하나다.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몰래 읽으며 이모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연애 소설을 쓸 거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기 위한 해미의 거짓말에 다른 이모들은 선자 이모에 대해 아는 걸 알려준다.


선자 이모를 비롯해 이모들이 처음 독일에 왔던 이야기, 각자 독일로 온 사연, 독일에서 일을 하면서 겪은 서러움과 향수병, 휴일마다 고추장, 간장을 차에 싣고 이모들을 찾아온 파독 광부들. 그 안에서 단서를 찾으려 온갖 추리를 하고 상상하는 하면서 해미는 레나와 한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국의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해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엄마와 아빠의 별거는 끝났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들다. 당연 한수와 레나와의 연락도 끊기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 기자 일을 하다 그만둔 해미는 우연히 사진작가 전시회에서 대학 동기 우재를 만나다.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약국을 운영하는 우재와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만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낸다. 우재는 오래전 해미가 이모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는 기억을 꺼낸다. 해미는 우재의 말에 독일 G시에서의 시간과 선자 이모와 한수를 떠올린다. 선자 이모의 죽음과 한수가 보낸 택배, 독일에서 걸려온 한수의 전화를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한수가 보낸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상자에 넣어둔 채 잊고 있었다. 선자 이모를 위해 ‘K.H’를 찾았다는 거짓말과 ‘K.H’인 척 편지를 보낸 사실까지.


해미는 다시 하나씩 이모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국회도서관에서 1970년대 독일로 건너간 간호사의 기록을 찾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독일로 온 사연, 취업과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 이들도 많았지만 선자 이모는 아니었다. 선자 이모는 본인이 원해서 독일을 선택한 것이다. 해미는 선자 이모의 고향인 인천과 다녔던 교회를 수소문하면서 ‘K.H’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그러다 이모가 문학잡지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독일에서 처음 읽었을 때 그냥 지나친 문장이나 선자 이모의 감정을 온전히 읽게 된다. 선자 이모가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속 문장(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의 의미를 말이다.


『눈부신 안부』는 독일 파독 간호사를 통해 그 시대의 여성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와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가 중요한 소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상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어린 해미가 사고로 언니를 잃고 언니의 나이를 지나 어른이 되면서 겪은 감정은 큰언니를 떠나보내고 언니의 나이를 지나 살고 있는 나와 겹쳐졌다. 선자 이모가 첫사랑과 이별하고 독일에서 지낸 시간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일, 그 모든 걸 나누며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해미가 언니에게 전한 말처럼. 서툴다고 여기며 전했던 그들의 안부와 위로가 이제 와 보니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109쪽)


백수린은 여전히 고요하고 담담한 어투로 다정함을 건넨다. 그 다정함은 마냥 부드러운 건 아니어서 때로 모나고 뭉툭하다. 그건 내가 그 다정함을 어루만져 누군가에게 건네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이별과 작별을 맞이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에 있어 그런 다정함이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k.h의 존재가 짐작을 벗어나지 않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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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0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아쉬움 때문에 별 하나 빼신 건가요? 스토리는 보니까 재밌어 보여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3-06-03 15:20   좋아요 1 | URL
네, 첫사랑의 존재는 예상한 대로 흘러서요.
재미도 있었고 백수린의 문장이 좋았어요. 이모와 친구들과 보내는 해미의 일상이 아름다웠어요.

책읽는나무 2023-06-0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함이 마냥 부드러운 건 아니어서 때로 모나고 뭉툭하다!
오....갑자기 더 기대 상승입니다^^

자목련 2023-06-03 15:21   좋아요 1 | URL
다정함에 대한 문장은 개인적인 느낌을 표현한 거라 ㅎ
책읽는 나무 님도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

책읽는나무 2023-07-26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시 자목련 님의 리뷰를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정성가득한 글로 새롭게 다가왔어요.
근데 자목련 님은 K.H의 존재를 짐작하셨군요?
전 짐작을 못해 그 부분에서 와 반전!! 그리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자목련 님의 유추하는 섬세함에 놀랐습니다.^^

2023-07-2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7-26 16:36   좋아요 0 | URL
전 완전 샛길로 새어 혹시 우재 아버지인가? 엉뚱한 생각을 했었네요.ㅋㅋㅋ
여성, 연대....선자 이모의 성격으론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었겠구나! 공감은 가는데...막상 여자였다는 결론을 확인하고 나니까, 조금 맥이 빠지긴 했어요. 더군다나 그 분은 평범하게 잘 살아왔었기에 선자 이모의 삶이 비교가 되어 좀 더 시원섭섭한 마음도 들었었구요.
뭔가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있었더라면? 그런 아쉬움도 들었네요.
이제 첫 장편이었으니 다음 장편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가 큽니다.
 
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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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흐릿한 기억과 풍경이라고 할까. 새 학년, 새 학교에서 느꼈던 설렘과 불안. 친해질만한 아이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며 서먹한 공기의 흐름을 읽느라 정신없던 학기 초의 모습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다를 바 없다. 어느 시절, 어느 반이든 모두가 친구로 지내고 싶은 존재 곁에는 어떤 무리가 있었다. 반대로 아무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는 존재도 있었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아이는 뭔가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에 등장하는 ‘고요’가 그러하다. 평범한 고등학생 ‘수현’과 다르게 고요는 그런 존재였다.


고요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아이들과 거리를 두었고 결국엔 그 아이 무리에게 왕따를 당한다. 책상을 더럽히고 사물함의 체육복까지 입지 못하게 만든다. 고요는 신경을 쓰지 않고 공부를 할 뿐이다. 수현은 그런 고요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반장인 ‘정후’가 항상 고요를 챙기는 모습에 수현은 더욱 정후가 좋아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후만큼 자꾸 관심이 가는 아이가 있다. 항상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 조용한 성격의 ‘우연’이다. 오랫동안 정후를 짝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데 왜 우연을 살피는 것일까. 그러다 우연이 보고 있는 sns 계정을 알게 된다.


비공개 계정으로 사용자가 승인을 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이디는 ‘고요의 바다’로 프로필의 보름달은 미술 시간에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달의 뒷모습을 그렸던 우연을 떠올리게 한다. 고요의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소수였고 달과 관련된 아이디를 지녔다. 수현은 그 계정이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으로 친구를 신청한 수현은 수현이 아닌 익명의 존재로 고요의 바다와 마음을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현은 고요의 바다가 고요라는 걸 확신한다. 그리고 고요의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계정을 둘러보다 정후와 우연의 계정에 댓글을 단다.


정후와 우연은 학교에서 보고 알았던 모습과 달랐다. 항상 모든 일에 앞장서고 모범적인 인기를 얻는 정후에게는 아픈 누나가 있었고 우연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을 접고 힘들어했다. 고요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지만 sns에서는 아주 솔직하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같은 존재였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는 다른 모습이었다. 수현도 다르지 않았다. 소심하고 주저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정후, 우연, 고요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위로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오프라인인 교실에서는 여전히 먼 존재였다. 정후, 우연, 고요에게 자신이 그 계정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관계가 끊어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찍 등교해서 고요의 책상을 정리하거나 우연이 돌보는 길냥이를 산책하며 찾아보고 정후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익명으로 존재해야만 관계를 지속하고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다니.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은 십 대의 복잡한 마음과 관계를 sns로 보여주고 존재와 정체성을 달로 비유하고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수현은 자신만의 개성이자 특별함을 지닌 정후, 우연, 고요를 지켜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존재, 수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건 정후, 우연, 고요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깊은 고민이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 수현은 우리가 보는 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달의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들도 같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들은 달을 올려본다고만 생각하지, 달이 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달인데 말이야.” (229쪽)


대부분 수현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수현은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고 관심을 갖고 마음을 건넸다. 그걸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쓸모없는 게 아니다. 나의 뒷면을 궁금해하고 알고자 노력하는 누군가의 마음,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일까. 마음을 나누고 건네며 보이지 않는 어떤 걸 알아가는 일이야말로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달의 뒷면을 꿈꾸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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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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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가까운 가족, 친구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독립적인 존재다. 사회적 관습과 문화에 길들여지는 동시에 반항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고 창조하는 존재, 그리하여 내면은 항상 들끓는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내면을 주목한다. 『그 후』를 읽으면서 확실해졌다. 『산시로』, 『그 후』, 『문』을 차례로 읽으면 좋을 것 같지만 딱히 그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 읽어보니 그렇다.


『그 후』란 제목이 『산시로』 그 후의 이야기를 뜻하는 의미도 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 후』가 의미하는 바는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 맞이하는 특정한 시기를 지나 그 후가 아닌가 싶다. 이제 『그 후』의 주인공을 만나보자. 주인공 ‘다이스케’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해 본가의 도움을 받아 하녀와 서생을 두고 생활한다. 몇 번의 휴학을 반복하며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후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즘 청년들의 시선에는 아마도 팔자 좋은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스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서생의 눈에는 공부를 많이 하는 주인으로 보인다. 본가에서도 다이스케에게 일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선을 보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와 형이 하는 사업에 도움이 되는 그런 가문의 사람과 만나기를 주선한다.


다이스케는 결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가문을 위한 조건을 내건 만남이 싫다. 유유자적 산책을 하고 그림을 보고 책을 읽고 생각이 닿는 대로 상념에 빠지는 게 좋다. 그런 다이스케 앞에 대학 시절 친구가 등장한다.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로, 다른 친구 스가누마가 죽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해 다른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3년 만에 도쿄로 돌아온 것이다. 히라오카와와 그의 아내 미치요의 결혼을 성사시킨 게 바로 다이스케였다. 도쿄에서 만난 부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미치요는 아이를 잃고 건강도 좋지 않았고 히라오카는 새 직장을 구해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빚이 있어 어려움에 처한 상태였다. 대학 시절 절친이었던 친구의 부부에게 상대적으로 풍족한 다이스케는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사실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친구의 부인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예상했듯 사랑이다. 그 마음은 막 시작된 것이 아닌 대학 시절부터 지속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히라오카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소설은 본격적으로 다이스케의 어지럽고 복잡한 마음을 보여준다. 소세키는 미치요를 향한 다시스케의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아내를 도와주려는 마음부터 미치요를 만나기 위해 히라오카의 집에 방문하고 히라오카와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토론을 하고 부부의 관계가 어떤지 탐색하는 다이스케의 모습은 때로 안타깝고 때로 딱하다. 동시에 본가에서 결혼을 하라는 압력을 받아 심적으로 힘든 상태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용기도 없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시간을 벌자는 게 다이스케의 생각이자 전략이다. 그러나 미치요를 향한 마음이 확고해지면서 본가에 자신의 의견을 전해야 할 때가 왔다.


미치요에게도 마찬가지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아내 미치요를 홀로 내버려 두는 히라오카가 아닌 지신을 택할 수 있냐고 확인해야 했다. 집안을 위해 집안에서 정해주는 이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말이다. 상대가 유부녀이며, 친구의 부인이라 말할 수 없으니 그 마음이 지옥인 것이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자신이 원하는 것, 내면에 충실하기로 한다. 놀랍게도 그는 히라오카에게 자신과 미치요의 관계를 말한다. 진짜 대단한 다이스케다. 히라오카의 반응도 만만치 않다. 알겠다고 말하며 미치요의 몸 상태가 나아지면 보내겠다고.


누가 봐도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관계는 뻔뻔한 불륜이고 순수함을 찾을 수 없다. 소세키는 그 사랑을 고결한 순백의 사랑으로 표현한다. 비가 오는 날 백합으로 방을 장식하고 미치요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백합은 미치요와 다이스케에게 중요한 꽃으로 과거 둘 사이의 감정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빗속에서, 백합 속에서, 다시 살아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 어디에도 욕망은 없었다. 이해관계도 없었다. 자신을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260쪽)


비는 여전히 거침없이 세찬 소리를 내며 내렸다. 두 사람은 비로 인해, 빗소리로 세상과 분리되었다. 같은 집에 사고 있는 가도노와 할멈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두 사람은 고립된 책 백합 향기 속에 갇혀 있었다. (263쪽)


세상의 질타, 걱정 근심, 본가와의 단절은 다이스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마음과 본질, 그것이 중요했다. 『그 후』를 담백하고 아름다운 연애소설로 읽었다. 다른 이들은 1900년대 일본 시대의 경제와 근대화, 산업화에 집중해서 읽을 수도 있다. 다이스케와 주변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 소세키가 생각하는 일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으니까. 소세키는 다이스케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 인간의 내면과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안정된 직장, 풍족한 경제력, 시류를 따라 사는 일은 누가 봐도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모두에게 똑같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뜻대로 나갈 때 진실한 행복을 느낀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몫을 감당해야 한다. 다이스케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그 후의 삶까지 끌어안고 감당할 자신 말이다.


여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고혹적인 백합을 곁에 두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라면 더욱 완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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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27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를 읽어낼수 있다는 말씀 동의합니다. 또 읽게되면 저도 다르게 읽을것 같아요~

자목련 2023-05-30 09:09   좋아요 1 | URL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레삭매냐 2023-05-3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는다고 수배해
두었는데... 못 읽고 있네요.

6월에는 다시 소선생을
읽어야지 싶습니다.
여름에 읽으면 좋은 소설
이라고 하니 기대가 됩니
다.

자목련 2023-05-30 11:57   좋아요 1 | URL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혹은 휴가에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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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가만히 표지를 바라보았다. 앙리 마팅스의 포옹이었다.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 『그냥 믿어주는 일』이란 제목과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제목을 바꾼 출판사의 의도가 있겠지만 <생명의 그릇>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냥 믿어주는 일』는 미야모토 테루가 청년 시절이었던 30년 전 1983년에 펴낸 에세이다. 저자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제목을 거창하다 말하지만 생명을 담은 그릇은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생명을 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대단하고 거장 하지 않은가.


이 책에는 미야모토 테루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어떤 성향을 지닌 작가인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분위기, 어떤 기저라고 할까. 쉰 살 가까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려주는 글에서는 애틋한 그리움이 전해진다. 아버지란, 부모란 그런 존재니까.


수록된 55편의 에세이는 일상의 기록을 다룬 짧은 메모나 일기 형식부터 발표한 소설이나 구상 중인 소설을 소재로 사회와 삶에 대한 미야모토 테루의 생각이 담겼다. 1부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광고 회사에 다녔던 일을 다루고 2부는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칼럼 형태가 많고 3부는 작가 데뷔 후 이야기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연인을 들려준다. 그가 바라본 일본 사회, 문학,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준 평론가와 편집자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제때 표현하지 못해 한탄하며 소설가는 대단한 직업이 아니라는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경마장에 다니던 아버지,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온 어머니와 함께 찾은 유명 사찰에서 느꼈던 우울감, 특정 인물을 마주하면 나쁜 일이 생겨 일부러 피하려 했던 시절, 소설가가 뒤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실패만 맛보던 시절, 기르던 개의 죽음을 통해 절대 개를 기르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계속 개를 기르고 사랑한 개들의 기억을 간직한 이야기. 두 아들에게 사랑할 대상을 주고 싶고 생로병사라는 엄연한 법칙을 자연스레 인식시키고 싶어 개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미야모토 테루. 결핵에 걸려 2년 정도 요양을 했을 때의 심경은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그 시간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삶에 대한 의지를 결연하게 했다는 게 전해졌다.


55편의 에세이 가운데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책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큰돈을 지불해 사주신 문고판에 대한 것으로 열 권씩 끈으로 묶어 팔고 있었는데 어린 미야모토 테루는 주인이 묶어 놓은 열 권의 다발을 다 풀고 좋아하는 열 권을 고른 후 다시 묶었다고 한다. 그 열 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열 권의 문고본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몇백, 아니 몇천 명의 인간이 품은 괴로움과 기쁨을 알았다. 몇백, 몇천 개의 풍경으로부터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몇백, 몇천 개의 작은 대화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52~53쪽)


나는 아무 장점도 없는 인간이고, 머리도 나쁘고 완력도 없으며, 제멋대로에 겁쟁이에 질투가 심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내가 조금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살짝 낮춰 대답할 것이다. 대답한 순간 나의 마음에는 틀림없이 그 열 권의 손때 묻은 문고본 다발이 스쳐갈 것이다. (53쪽)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미야모토 테루의 글엔 다정함이 있다. 그 다정함이 조금은 부끄럽고 수줍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진다. 삶을 사랑하는 뜨거움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려는 노력이 있다. 단풍나무를 보며 금수(錦繡)라는 말에서 자신의 생명 또한 금수인듯하다는 미야모토 테루의 아름다운 문장이 강렬하고 짙은 울림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올해도 또다시 단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단품은 나에게는 이제 식물의 잎이 단순히 변색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며 뿜어내는 금錦의 불꽃이다. 아름답다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 있는 자연 현상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나다. 그것은 생명이다. 오락, 야망, 허무, 사랑, 증오, 선의, 악의, 그리고 한없는 청청함까지 남몰래 지닌, 혼돈한 우리의 생명이다. 어느 시기, 어느 땅, 어느 경우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모두 금수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205~206쪽)


30년이 지난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저마다 금수의 나날을 살다는 걸 확인한다. 때로 우리를 흔드는 모든 감정과 우리를 채우는 모든 감각의 숭고함을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 그 모든 시간이 금수의 나날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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