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
줌파 라히리 외 21명 지음, 나탈리 이브 개럿 엮음, 정윤희 옮김 / 혜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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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오빠와 언니들, 동생까지, 나는 대가족의 일원이었다. 명절에는 다른 곳에 사는 친척들이 도착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작은 방에 테트리스를 하듯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건 찾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나만의 공간이 없었고 오빠와 언니, 남동생을 향한 관심을 나로 돌리고 싶었다. 나를 봐주고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아껴주는 이가 없다고 여겨 외로웠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나 선생님에게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22명의 외국 작가가 외로움에 대해 쓴 『ALONE』을 읽기 전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건 그때 내가 많이 외로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의 외로움을 말하는 일은 혼자만의 비밀을 말하는 일이며, 상대의 의도도 모르고 손을 내미는 격이니까. 그러니까 은밀하고 내밀한 고백 같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읽는 일은 조금 쓸쓸하다. 그러나 매우 곡진한 태도의 외로움에 대한 22명의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 깊숙이 자리한 나의 외로움에 대해 꺼내고 싶게 만든다.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내 안에 깊게 자리한 그것들에 대해 말이다.


22명의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걱정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들여주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여성이라서 이입할 수 있는 감정들이 많았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결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여성이 감당하는 외로움을 말이다. 누군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아니기에 당연한 외로움이라 치부하면 안 된다.


'에이미 션'의 「홀로 겉는 여자」는 뉴욕에서 시베리아까지 혼자 걸어가겠다고 선언하고 실행한 여성 ‘릴리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금처럼 혼자 모든 걸 하는 시대가 아닌 시절에 릴리언을 향한 세상은 그녀를 기이하고 이상한 여자로 본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온 '에이미 션'은 릴리언의 고독이 부럽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만의 삶을 시작한다. 어쩌면 남편은 끝내 에이미 션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만 그녀는 충만함을 느낀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 외로움이야말로 스스로 선택한 행복한 외로움이다.






어떤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의무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느끼는 외로움은 단절 그 자체가 된다. '마야 샨바그 랭'의 「놓아 보내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라 이내 공감하고 만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아이들을 키우고 알츠 하이머를 앓는 엄마를 돌보느라 장학금 신청서를 쓰지 못하는 그녀에겐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제목처럼 놓아 보내지 못하기에 힘들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고야 외로움에 갇혔던 자신을 놓아준다.


내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외로움이 지닌 가장 억압적인 특징이다. 상상력을 제안하고,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거라 속삭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게 스스로를 얽매는 것.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나는 혼자 걱정에 사로잡힌 채 불확실한 상황의 이면에도 좋은 결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높이 도약하기 전엔 새로운 삶이 지닌 이점들을 볼 수 없는 법이다. ( 「놓아 보내기」, 85쪽)


이처럼 돌봄이나 양육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맥락은 '헬레나 피츠제럴드'의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에서도 만날 수 있다. K- 장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 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을 부여하고 혼자 사는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혼자인 여성을 묘사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생활에 만족하지만 가족의 위한 여성의 온전한 희생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여성으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호사스러운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전제와 기대라는 틀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123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삶에 나 자신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나의 일부는 여전히 혼자 지내는 삶이 지닌 강렬한 즐거움을 향해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131쪽)


두 개의 언어로 인한 외로움, 이민을 인해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는 혼돈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왔지만 둘 중 어디에도 속하거나 버리지 못한 부모님의 태도를 글쓰기의 주제로 삼은 줌파 라히리 역시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어찌 보면 '줌파 하리리'와 닮은 듯 보이는 '진 곽'이나 '이윤 리'의 글에서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쓰기를 하는 이윤 리에게 중국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중국어로 글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평범한 것들을 영어로 쓴다며 글을 잘 쓰지 못하니 부끄럽게 여기라고 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언어는 보통의 언어, 공적인 언어라 할 수 있고 오히려 떠나온 곳의 언어, 그러니까 중국어가 사적인 언어가 될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영어는 사적인 언어라고 말한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외로움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글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뿐이다.


나는 종종 글쓰기가 공허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도,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이란 자신만의 사적인 언어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공허함은 공적인 언어나 감성적인 관계를 통해 채울 수밖에 없다. (「두 개의 언어」, 305쪽)


우리는 경계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건너가고 싶은 곳, 속하고 싶은 곳에 다다르지 못할 때 속상해한다. 다르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딘가 소속되었다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외로움을 알기에 함께하는 간절함을 안다. 외로움은 온전히 쓸쓸한 게 아니며 나쁜 게 아니다. 외로움을 설명하는 일은 때로 비굴하고 귀찮을 수 있지만 외로움 그 자체로도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꾼다.


두 번의 이민자 생활을 겪은 사람으로서 나는 인생 대부분을 외롭게 지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여러 버전으로 나 자신을 설명해왔지만 아직도 주변 사람들과 내가 조금은 다르다고 느낀다. 우리 모두는 언어와 문화,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들은 우리는 짓누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존엄을 부여하기도 한다. (「영원한 이방인」, 272쪽)


아름다운 책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할 외로움과 고독의 순간에 꺼내보면 좋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 혼자만의 시간과 감각을 원한다면 『ALONE』을 만나보길 바란다. 나의 외로움과 당신의 외로움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다정함이 거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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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언어로 대화할 수 없는 상태, 그 공허함은 공적인 언어나 감성적인 관계를 통해 채울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고 다 알아지는 관계는 그 공허함이 사라질까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자목련 2023-06-23 08:15   좋아요 1 | URL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이윤 리‘가 무척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여전히 외로운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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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감정이 있다. 당연하다. 애써 숨기려 해도 어떤 틈새로 감정이 새어 나온다. 참 이상하다. 글이 주는 위로와 위안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위로를 전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떤 글은 슬그머니 내가 기대게 만든다. 유진목의 『슬픔을 아는 사람』도 그런 책이다. 누군가 이 책이 많은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사람 꽤 있다. 그러니까 슬픔 따위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 슬픔이 없는 사람, 그래서 상대의 슬픔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절로 따라온다.


'유진목'이란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그의 시집이나 책은 읽은 적이 없다.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제목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여행 에세이를 나는 즐기지 않아서다. 코로나 시국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세 번의 여행을 글과 56컷 사진을 담아낸 책을 베트남 하노이 여행기 대신 ‘유진목의 감정 여행, 마음 여행’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지나고 있을 때, 의지와 상관없는 일로 고통받을 때 우리는 도망치고 싶다. 나 자신도 외면하고 싶은 순간 말이다. 어디론가 달아날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짐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유진목에게는 하노이가 그랬다. 그는 아침 약, 저녁 약을 먹어야만 견딜 수 있는 날들, 약을 먹기 전에는 술을 마시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알코올이 아닌 약으로 대체되었지만 이제는 약을 먹지 않고 잠들기를 기도한다.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라 하노이에 가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떠났다. 하노이에서 돌아왔는데도 자꾸 하노이에 가고 싶어서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나고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서 또 한 번 하노이에 다녀왔다. 한 번 본 커피 가게 사장이, 오토바이 기사가, 호텔 직원이 이제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글을 읽으며 같이 침잠하고 웃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산책을 하고 기차에서 잘못 내리고 비를 맞고 하다 보면 하노이에는 뭐가 있냐고 묻는 이들에게 하노이에는 내가 있어요라고 답하는 그처럼 나도 하노이에 있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그는 힘든 소송을 진행했다. 무려 육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분노, 미움, 슬픔과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마침내 소송에서 이겼고 끝이 났다. 하지만 그에게 육 년의 시간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


삶이 기다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이 경험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일을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락하고 병들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90쪽)


모든 감정과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곳이 필요했다. 그에게 하노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곳에 가면 웃을 수 있고 그곳에 가면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곳. 나를 잡아끄는 상념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것. 맘껏 신나서 맘껏 기쁘게 지낼 수 있는 곳. 낯선 이에게 무표정이 아닌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 거리낌 없이 사진을 찍어도 되는 곳.


과거의 단단한 끈에서 폴려난 나는 바로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폴짝폴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꾸만 하노이에 오는가 했더니 내 두발을 묶은 지긋지긋한 과거를 끊어내려고 그랬구나. 잘했다. 잘했다. 나는 나에게 잘했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134쪽)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말을 생각할 때, 유진목의 다른 글을 만나면 하노이가 떠오를 것이다. 뜨거운 열기와 커피와 담배와 사람들의 웃음으로 채워진 하노이 말이다. 누군가 슬픔에 힘겹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책은 그만의 하노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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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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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을 만났을 때 바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면 시간만 낭비한다. 선택지가 하나일 때 고민 없이 선택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매번 고민한다. 더 나은 선택지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려주는 이가 없어 더 힘들다. 안내표지를 찾을 수조차 없다.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고비,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좌절한다. 2020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랬다. 처음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불안만 증폭되었다. 김혜진의 짧은 단편 소설 『완벽한 케이크의 맛』에서 만난 몇 편의 소설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나왔지만 온전히 나오지 못한 감정들이 아프다.


비염으로 인한 기침이나 재채기가 코로나에 대한 공포를 키워 결국엔 해고 사유가 아닌데도 학원 강사를 내 보내야만 하는 「강사의 자질」은 2020년의 봄을 떠올리게 만든다. 개학이 늦어지고 비대면 수업으로 모두가 힘들었던 때 특히 학원가의 피해가 컸다고 알고 있다. 오래오래 학원에서 함께 일할 좋은 강사였지만 불안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불안을 키우는 건 감염병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었으니까.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건 마음의 문제였으니까. (28쪽, 「강사의 자질」)


이처럼 증명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피해를 보는 일은 주변에 많다. 내 일이 아니기에 진실보다는 소문에 의지하게 된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 때문에 강습반 부모들과 어울리는 계기가 된 빵집 「밀 베이커리」는 ‘나’에게 좋은 가게였다. 한 아이가 빵을 먹고 탈이 난 후 모든 상황이 변했다. ‘나’는 빵집을 계속 다녔고 부모들은 ‘나’와 아이를 은근히 따돌렸다.‘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야 했을까. 무리에 속해야 한다는 강박, 주류의 뜻에 따라야 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시선이 느껴져 씁쓸하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걸 부인하지 못해서.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앞과 뒤가 있지만 우리는 때로 한쪽만 보려 한다. 목소리가 큰, 지위가 높은, 갑과 을 중에서는 갑의 쪽을 말이다. 다른 쪽도 보고 듣겠다고 생각하지만 곧 잊는다. 내 일이 아니라서. 그 모든 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김혜진은 차분하지만 조곤조곤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고 혼자서 살 수 없는 곳이라고.


그런가 하면 타인을 향한 마음이 어떤 계기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속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마주하는 가족들의 낯선 모습이 보여주는 마음이나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미란을 만난 「십 년」에서 발견한 ‘수지’의 마음이 그러하다. 잊고 있었던 본연의 마음이랄까. 그러니까 맘에 안 들고 싸우기 일쑤인 가족을 향한 애틋함 같은 것 말이다.





오늘 자신이 만난 건 미란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누군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란을 통해 실감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103~104쪽, 「십 년」)


마음이라는 건 참 어렵다.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과 글, 행동을 통해서 짐작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여도, 친한 친구여도 말을 숨기고 감추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말들도 필요하다. 「극락조」속 두 ‘수연’과 ‘희나’도 다르지 않았다. 식물을 키우고 있는 수연은 출장을 갈 때 희나에게 부탁을 하는데 희나는 이번에는 어렵다고 말하지만 수연의 걱정이 떠올라 가게 된다. 물을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다음 날 다시 가서 화분 갈이를 가다 손을 다치고 말았다. 의사는 심각한 상처라고 말했지만 희나는 수연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수연은 화분을 갈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희나가 화분을 갈면서 극락조의 뿌리를 다치게 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128쪽, 「극락조」)


김혜진의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완벽한 케이크의 맛』의 짧은 단편은 이전에 느끼지 못한 김혜진의 감각을 느낀 것 같아 좋았다. 흐트러진 마음을 모으고 힘들지만 꼿꼿이 서려고 애쓰며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어우러진 그림도 좋았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가 그러하지만 특히 보드라운 온기가 전해지는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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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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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는 가을이나 겨울을 원했다. 여름은 모두에게 힘들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작 그 해 여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리석게도 큰언니가 말한 가을이나 겨울에 담긴 진짜 의미를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니까 큰언니는 조금 더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이 모두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의 죽음으로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은 계획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는 일, 그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다는 건 축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할머니, 아버지와 다르게 큰언니의 죽음이 그러했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병행하면서 직장을 다녔던 큰언니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유언장을 남기고 장례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각종 서류를 변경하고 보험이나 은행 업무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연락처와 담당자의 이름이 있는 목록도 있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랐던 큰언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은모든의 소설 『안락』을 읽으면서 큰언니를 포함 돌아가신 가족이 생각났다. 가까운 미래 자율주행이 일반화되고 일정 조건에 부합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안락사의 법안이 통과되는 일이 현실이라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가족이 아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죽음을 계획할 수 있다면 차근차근 계획할 수 있을까. 친구랑 종종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소설은 화자인 ‘지혜’의 할머니가 그 법이 통과되기를 기다려 5년 후에 실행하겠다는 계획을 가족에게 알린다. 그에 따른 반응과 시간이 흐른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호사인 지혜의 언니 지경만이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상했듯 할머니의 계획에 엄마는 크게 반대한다. 지혜에게는 할머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가 아니던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이 있지만 죽음은 다르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미래에는 소설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인간의 수명만큼 삶의 만족도와 가치가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끝내 붙잡고 유지하고 싶은 이가 있는 반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 터. 소설에서 할머니는 당뇨와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떠나기 전에 남겨진 가족과 앙금을 풀고 서로를 더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소설뿐 아니라 우리네 생에도 마찬가지다. 병실에서 큰언니는 내게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울기만 했을 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큰언니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견했지만 나는 나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의 존엄과 삶의 마지막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148~149쪽)


지혜의 할머니는 자신이 계획대로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떠난다. 지혜와 같이 만든 자두주를 모두와 나눠 마신 후에 말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사실상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과 슬픔, 이별의 아픔으로 둘러싸인 죽음이 아닌 그런 죽음을 원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安樂)이란 제목처럼 우리 생의 마지막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원하는 죽음과 장례식을 그려보는 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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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6-13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을 한예리 배우 낭독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요. 대화로 맺음하는 죽음의 모습 덕분에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3-06-14 08:42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대화로 맺음하는 죽음, 우리가 바라는 죽음 가운데 하나의 형태가 아닐까 싶어요. 유수 님, 산뜻한 하루 보내세요^^

hnine 2023-06-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 읽으며 이게 소설 속의 인용문이길 바랐습니다.

자목련 2023-06-14 08:41   좋아요 0 | URL
죽음은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요.
나인 님, 환한 하루 보내세요^^

물감 2023-06-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자목련 님. 덤덤하게 쓰셨지만 과거의 아픔을 불러와 맹렬히 싸우셨을 테죠. 저도 가족들과 매우 친한 사이라서 죽음이 온다면 확 무너져버릴 거에요. 죽음이란 걸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참.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요 문장에 한 10초 쯤 머물다 갑니다.

자목련 2023-06-15 09:02   좋아요 1 | URL
가족들과 매우 친한 물감, 그 순간이 아주 멀리 있을 거예요. 죽음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죠. 죽음을 알아도 우리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요^^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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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소설에 대해 말하는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좋은 소설이 그러하다.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유는 뭘까. 나만 알고 싶은 좋음이라서, 시리고 아파서 꼭 끌어안고 싶은 소설이라고 하면 맞을까. 클레어 키건의 짧은 소설 『맡겨진 소녀』가 그랬다. 양 갈래머리를 한 소녀의 뒷모습이 아련해서,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이 왠지 슬퍼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소녀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진다. 소녀를 데려다준 아빠는 소녀와의 이별에 슬픔은커녕 안타까움도 없다. 심지어 소녀에게 필요한 짐도 내려주지 않고 트럭을 타고 떠나버린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걸까. 너무 아파서 그 모습을 딸에게 감추고 싶어서 도망치듯 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빠는 세심함과 다정함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빠로 살아가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소녀에게는 언니들이 있었고 동생도 있고 엄마는 태어날 아이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돌볼 여력이 없어서 잠시 딸을 맡긴 것이다. 다시 집으로 데리러 올 테니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나 이런 아빠라니.


낯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소녀. 킨셀라 부부는 그런 소녀를 극진하게 보살핀다. 극진하게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성을 다해 아이를 대하고 사랑을 준다. 잠자리에서 실수를 한 소녀를 혼내는 대신 부끄러울까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사소한 것까지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오는 사소한 심부름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와 지내면서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애정과 사랑을 받는다.


소녀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나하나 챙겨주는 킨셀라 부부. 처음에 소녀가 친척 집에 맡겨졌을 때 나는 소녀가 학대를 받으면 어쩌냐 내심 걱정했다. 그러니까 일손을 돕기 위한 하녀처럼 맡겨진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걱정 대신 다른 걱정이 생겼다. 소녀가 집으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방치와 무관심에 가까운 집이 아닌 그냥 여기 이곳에서 킨셀라 부부와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내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돈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69~70쪽)


그러나 소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라는 이유만 있을 뿐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은 찾을 수 없는 냉랭한 분위기의 집으로 말이다. 자매들의 반응도 마찬가지. 소녀의 부모의 마음을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애틋함을 찾을 수 없다. 물론 다자녀를 돌보는 일은 버겁다. 그러나 버거움과 사랑을 주고 표현하는 일은 다르다. 소설을 읽으며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5명의 자녀를 둔 내 엄마. 농사일로 바빠서 등교 옷차림이나 준비물을 꼼꼼하게 살피지는 못하셨지만 나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 큰언니가 그 역할을 해주었다. 마냥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힘든 직장 일을 안쓰럽게 여기고 아픈 동생을 위해 주말마다 병실을 찾았다. 엄마와 큰언니 모두 떠났지만 그들의 사랑이 나를 지켜준다.


이처럼 지난 시절의 따뜻했던 돌봄은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사랑을 받은 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처럼 소녀는 그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담담한 슬픔은 벅찬 아름다움이 된다. 차곡차곡 쌓아둔 소녀의 마음이 터지는 순간엔 나도 울컥하고 만다.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하며 초를 재던 시간,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배우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며 모든 걸 함께했던 포근했던 순간들. 부끄러움도 비밀도 없던 그 집에서 보낸 시간, 그 짧은 시절이 소녀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지켜줄 사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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