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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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순간을 기억한다. 찰나였지만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 문장 앞에서.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을 함께 헤쳐나가는 것.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를 떠올리면 우리네 인생이란 참 단순하다. 그 단순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복잡할 뿐이다. 교차하는 곡선과 엉클어진 실을 풀면 결국 하나의 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생의 마지막은 어떤 선이 될까, 궁금해진다.

 

 소설은 요란한 자동차 경주로 시작한다. 자동차가 낯선 존재였던 시절, 그것은 기이한 풍경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어떤 순간이 되고 삶의 목표가 된다. 소를 팔아 정비소를 만든 울티모의 아버지 리베로 파르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아들에게 전해진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울티모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라는 운명과 마주한 것이다. 어린 시절 잠깐의 꿈이 아니라 생의 목적이다. 아름다운 서킷을 만들겠다는 울티모의 꿈은 한 번도 변모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곧게 뻗은 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워. 이 직선에서 온각 곡선과 위험한 굽이들이 갈려나가지. 그러면서 관대하고도 올바른 질서가 만들어지는 거야. 길들은 그런 것을 할 수 있지만,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은 곧게 나아가지 않아. 마음의 행로에는 질서가 없어. 115쪽

 

 꿈이 존재하므로 울티모는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된 아버지, 자동차 경주를 함께 관람했던 백작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피해 참전한 전쟁에서도 그는 길을 믿고 의지한다. 이제 그의 길은 확장된다. 단순한 서킷이 아니라 그 길에 함께 달리 사람들, 그 길에서 바라볼 풍경들로 채워진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만났던 길을 가슴에 품었지만 미국을 택한다.

 

 청년이라 불리기에도 어린 울티모가 전장에서 어떤 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 그에게 드린 금빛 그늘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우정을 배신한 전우를 어떻게 그의 길에서 제외했는지 말이다. 그렇다. 소설은 주인공 울티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사랑을 만난다. 발랄하고 도도한 러시아 아가씨 엘리자베타와 함께 피아노를 판매한다. 엘리자베타가 피아노 레슨을 하면 울티모는 피아노를 조립한다. 둘은 함께 지냈지만 엘리자베타는 거짓 일기로 울티모에게 사랑을 고백할 뿐이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의 내밀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전쟁, 가난, 그리고 둘 사이에 피아노와 길이 더해진다. 단 한 장의 편지도 남기지 않고 울티모는 떠나고 엘리자베타는 약혼자였던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다.

 

‘오래전,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에 내 아버지 옆에서 이런 것을 배웠어요. 인생살이의 핵심과 시간의 숨결로 우리를 이끄는 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요.’ 229쪽

 

 중년이 된 엘리자베타가 그의 고향을 찾아 아버지를 만났지만 둘은 그저 자동차, 자동차 경주,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이탈리어로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이 온전했던 울티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길에서 엘리자베타는 그를 그리워한다. 그녀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울티모를 그곳에서 느낀다. 울티모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여전히 서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모든 길은 순환적이고 어딘가로 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휘감고 있는 공포의 안개가 너무나 짙어서, 길들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265쪽

 

 어쩌면 울티모와 엘리자베타의 길이 만나는 교차점은 단 한 번뿐이었는지 모른다. 다시 만나기 위해 누군가 그 길을 되돌아가거나 찾아야만 했다. 엘리자베타의 사랑이 더 컸던 걸까. 그녀가 그 길을 찾아 나선다. 울티모의 서킷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베타는 그녀가 지나온 길이 결국엔 내부에 이르는 길이라는 걸 발견한 것이다. 신열과 방황으로 가득 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삶의 파편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모든 삶은 무한한 혼돈이며 그것을 단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더없이 정교한 예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책들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눈매나 들판에 홀로 선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감동하는지. 450쪽

 

 고백하자면, 나는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숨겨둔 감정의 문장들, 눈을 감고 소설 속 서킷을 그려본다. 아름답고 황홀한 서킷과 하나가 되어 달리는 그들을 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길, 그 위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선이 얼마나 유려할지. 상상만으로도 찬란한 기쁨을 안겨준다. 그러니 설사 그것이 완벽한 서킷이 아닐지라도 나는 이미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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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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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어느 산책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지, 어떤 곶(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한다.’ (10쪽)

 

 돈을 주고 걷는 세상이다. 걷는다는 것 자체의 즐거움이 아닌 건강을 위해 걷는다. 그러므로 걷는 즐거움은 잊은지 오래다. 바쁜 현대인은 자동차, 기차, 전철 등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한다. 오로지 두 발을 이용해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걷는 행위로 암을 극복했거나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례를 접할 때 걷기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러니 유명한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걷기에 대해 소개하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은 좀 어렵고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 정말 산뜻하고 매력적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걸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걸어가는 몸은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태곳적에 시작된 생명의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두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짐승, 키 큰 나무들 사이의 순수한 힘, 한 번의 외침에 불과한 것이다.’ (17쪽)

 

 책은 오직 걷기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통찰과 철학자와 작가들에게 걷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들려준다. 걷기와 철학의 조합을 생각하면 칸트와 간디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이 왜 걷기를 고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저자는 그 외에 니체, 랭보, 루소, 소로, 프루스트, 벤야민 등의 삶과 걷기의 관계를 설명한다.

 

 건강이 악화할 때까지 걷기를 고집하며 그 안에서 글의 주제를 찾은 니체,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으로 걷고 또 걷었던 랭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자신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걸었던 칸트, 투쟁을 위해 걸었던 간디를 통해 걷기에 담긴 힘과 정신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진실된 삶을 위해, 누군가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걷는다.

 

 함께 걷는 게 아니라 혼자만의 걷기다. 이곳이 아닌 그곳을 향해 나가면서 마주하는 풍경들은 예전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멈췄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걷기는 최초의 여행 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깥, 느림, 고독, 침묵, 영원, 순례, 공원, 산책 같은 키워드로 만나는 부분이다.

 

 ‘산책을 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 (236쪽)

 

 걷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혹은 단순하게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이 책은 특별하고 귀하다. 문장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숲의 냄새와 바람의 온기를 느끼는 듯하다. 일상을 뒤로 한 낯선 곳으로의 걷기든 반복된 걷기는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걸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모든 이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물하는 책이다. 그러니 이제 랭보처럼 만나기 위해, 떠나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걷는 건 어떨까?

 

 ‘자, 길을 떠나자! 난 그저 걸어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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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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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도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보았다. 과거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를 아는 지인과 떨림을 공유하고 말았다. 혼자만 간직하기엔 버거운 비밀이라서, 가시처럼 아픈 사람이기에. 아니, 잠시라도 그에게 닿았다는 충만함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이별이 그러하다. 저마다 다른 이름의 가시를 품고 살아간다. 뽑아내야 할 가시라는 걸 알면서도 가시와 함께 살아간다. 가시를 숨긴 채 말이다.

 

 ‘가시는 살아 있는 선인장의 데드마스크라 할 수 있다.’ 31쪽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가시를 품은 생의 풍경들이다.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데스마스크를 통해 시작된 세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 비밀이라는 이름 아래 숨기기엔 너무도 벅찬 사랑이라 메아리로 돌아올지라도 토해내야 할 골짜기가 필요했다. 소설의 화자인 ㄱ에게 그것은 대학 시절 만났던 선생님이다. 편지처럼, 일기처럼 고백하는...

 

 ‘비밀이 없는 삶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져요. 사람들이 제일 숨기기 어려운 비밀은 기침과 사랑의 불꽃일 거라고 봐요. 누구든 기침을 하고 누구든 사랑의 불꽃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아침에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가면서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생의 기침과 찰나적이면서도 영속적인 사랑의 불꽃을 행여 누구에게 들킬세라 횡경막 아래 은밀하게 숨겨요. 효율성 중심으로 짜인 세상의 법칙과 그것은 도무지 맞지 않으니까요.’ 196~197쪽

 

 이혼 후 고향인 ‘소소’로 돌아온 ㄱ은 혼자 생활한다. 자유롭게 혹은 고독하게 생을 즐긴다. ㄱ 앞에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남자 ㄴ이 등장한다. ㄴ을 통해 죽음을 본 건 ㄱ의 내밀한 곳에 죽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ㄴ에게 방을 내주면서 ㄱ의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더플백 하나만 소유한 ㄴ은 ㄱ의 집에서 우물을 판다. 마치 자신의 관을 향해 나아가듯. 그럼에도 ㄱ과 ㄴ은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둘 사이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 촉매제 같은 ㄷ이 온다. 갓 소녀에서 벗어난 어린 여자. ㄱ이란 언니와 ㄴ이란 아저씨가 생겨 마냥 기쁜 ㄷ. 둘 사이를 끊고자 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 더 긴 끈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한 남자 ㄴ과 두 여자 ㄱ, ㄷ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사랑이었고 생에 대한 욕망이다. 설명할 수 없는 관계, 설사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받을 수 없는 관계다. 스스로 꼭지점이 되어 삼각형을 만들고자 했던 몸부림이라고 하면 맞을까.

 

 ㄱ, ㄴ, ㄷ의 이야기를 차례로 저마다 어떤 가시를 키우며 살아왔는지 들려준다. 가족을 잃고 온전한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언제나 목마른 사막처럼 살았던 ㄱ, 불행을 몰고 다니는 듯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며 부랑자로 살며 노래를 품었던 ㄴ, 죽음을 동경하지만 죽음이 아닌 생을 선택한 ㄷ은 자신의 가시를 통해 서로의 가시를 상쇄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셋으로 삼각형을 이룬 게 아니었어요. 셋으로부터 확장되어 우리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역동적이고 다정한 강강술래 같은 거요. 둘이선 절대로 원형을 만들 수 없잖아요. 셋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원형이지요.’ 209쪽

 

 기묘한 이야기다. 소설 속 표현대로 셋은 ‘덩어리’가 되어 사랑을 나눈다. 덩어리는 셋이 아닌 하나가 되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하나가 된 셋의 풍경은 곧 사라진다. 우물이 완성되고 그 우물에 ㄴ이 빠져 죽었기 때문이다. ㄷ이 곁에 있었지만 ㄴ스스로 우물 속으로 향했는지 알 수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부르지 못 했던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말이다. 우물은 메워졌고 ㄷ은 사라졌다. ㄱ도 집을 떠난다. ㄴ의 데스마스크가 발견되고 ㄱ은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ㄴ에게 대해 알게 된다. 그가 지닌 슬픔의 크기를, 가시가 박힌 깊이를, 그가 꿈꿨던 노래를...

 

 셋은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고 우리네 생이다. 박범신은 소설을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생이 존재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의 일부라는 걸 말할 뿐이다. 어쩌면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가시를 품은 나와 당신의 풍경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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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끝에 다시 - 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
함정임 외 지음 / 바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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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란 그런 곳이다. 가는 사람은 멀리 가고 오는 사람은 먼 곳에서 온다. 그날도 아마 서울 경기 지역에서 굳은 결심으로 가출하여 내려온 이들이 있었을 테고 그들처럼 친구도 올라간 거였다. 커다란 하천을 통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육지의 물과, 수평을 흐르는 해류의 바닷물, 그리고 철썩이는 파도가 만나서 뒤섞이는 곳이 항구인데 그런 탓에 이곳에서의 삶이란 수직과 수평의 이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여수 친구」173~174쪽)

 

 가끔 D 도시를 생각한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에서의 나를 그리워한다. 꿈과 사랑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소중한 인연을 만든 곳이다. 아니다, 꿈은 이루지 못했고 이별의 상처가 남아 나를 패배자로 만든 도시다. 그럼에도 그곳을 떠올리면 명랑해진다. 내 기억에 남은 모습은 실재의 그곳과 다르지만 말이다.

 

  『그 길 끝에 다시』속 소설에도 D 도시를 만날 수 없었다. 7명의 작가가 선택한 도시는 가깝고도 멀었다. 속초, 원주를 제외한, 부산, 정읍, 여수, 제주도, 춘천은 낯설지 않았다. 각각의 도시를 담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곳에 동행한 이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이도 있다. 문득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생각한다. 생이라는 직업에 최선을 다하느라 그랬을까. 안부를 전하는 일도 의무로 전락해버렸다. 

 

 뒤늦게 전 남편의 부고를 전해 듣고 결혼식을 했던 속초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백영옥의 「결혼기념일」, 파킨슨 병에 걸린 아내가 기억하는 정읍댁이 아기 때 폐렴으로 잃은 첫 딸이라는 걸 알게 되는 손홍규의 「정읍에서 울다」, 원주를 떠나지 못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의 소소하면서 특별한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 낸 이기호의 「말과 말 사이」,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벌어진 잔인한 살인사건을 들려주는 윤고은의 「오두막」, 정착과 부유의 삶에 교차하는 여수의 풍경을 담은 한창훈의 「여수 친구」, 관광지라는 화려함 뒤에 감춰진 쓸쓸한 도시의 뒷모습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함정임의 「꿈꾸는 소녀」, 여행자가 발견한 춘천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김미월의 「만 보 걷기」속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잠시 머문 도시에서 맺은 인연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에 쉼이라는 여유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고백하자면 이런 종류의 테마소설집을 좋아한다. 그에 반해 그에 대한 느낌을 전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렵다는 말이다. 백영옥과 손홍규의 소설은 사랑, 결혼, 이별, 죽음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고 이제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제주에 대해 숨겨진 진실을 밝히듯 범죄를 다룬 윤고은의 소설은 신선했다. 풍경화를 묘사하듯 담담한 한창훈과 김미월의 소설은 마치 작가의 이야기는 아닐까 착각을 불러온다.

 

 이 책이 인상적이었던 건 수록된 작가 인터뷰였다. 어떤 작가는 소설의 내용과 이어지는 공적인 느낌의 인터뷰였고, 어떤 작가는 작가 개인의 사적인 인터뷰였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내를 통해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는 「정읍에서 울다」의 작가 손홍규가 물음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단어가 그렇듯이 문장부호도 하나의 발화거든요. 단어는 마음에 안 들면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있지만 문장부호는 그런 호환이 어렵잖아요. 특히 이 소설에서는 물음표로 담을 수 없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고심했어요. 부부의 대화는 대부분 묻는 말과 대답하는 말로 이루어졌지만 묻는 말에는 물음 너머의 의미가 담겨야 하고 대답하는 말에도 대답 너머의 의미가 담겨야 해요. 물음표를 사용하면 삭제했을 때 마땅히 물음표가 있어야 할 자리였기 때문에 반쯤을 물음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또한 물음표가 없기 때문에 물음 너머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요.’ (작가 인터뷰 중에서, 221쪽)

 

 애착과 증오를 갖는 건 다르지 않다. 미련이란 공통점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작가들이 선택한 도시의 풍경은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아픔과 고통을 안겨준다. 현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다. 어디서든 각자의 삶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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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이은조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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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한다. 모두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나의 불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의 행복은 당장이 아니라 한 달 혹은 일 년 뒤로 미뤄도 괜찮다고 여긴다. 그러다 켜켜이 쌓인 불편은 화가 되어 폭발한다. 이은조의 소설집 『수.박.』속 인물의 관계가 그렇다. 8편의 소설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가족, 연인, 친구의 관계가 어떻게 단절되는지 보여준다.

 

 표제작 「수박」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을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난주’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는 오빠와 돈타령이 끊이지 않는 엄마를 위해 난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올케와 조카까지 돌봐야 할 지경이다. 남편 뜻대로 형편이 좋아지면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지만 8년 동안 한 번도 피임을 한 적이 없었다. 거리를 헤매던 난주는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남편과 사랑한 맹세한 도시로 향한다. 8년 전 가보지 못한 절 근처 노점에서 한 노파와 마주한다. 함께 수박을 먹으며 노파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치 고단한 난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노파의 목소리는 수박처럼 달콤하다.

 

 “수박씨는 꼭 뱉어내야 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안에서 수박이 열린다고. 씨가 있다고 수박을 안 먹으면 미련한 거지. 씨앗은 뱉으면 돼. 그냥 툭, 툭……”

 

 “수박이란 넘이 그래. 겉만 보면 이게 무겁기만 하고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속이 빨갛고 단맛이 있을 거란 상상이 잘 안 되지.” (「수박」, 91쪽)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수박뿐일까. 살을 맞대고 자는 남편, 나를 낳아준 엄마의 속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 맘에 수박씨를 키우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관계란 그렇다. 나와 상대가 모두 열려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통이 단절된 관계도 소멸할 뿐이다.

 

 난주가 꿈꾼 행복은 「비자림」의 화자 ‘나’의 꿈과 닮았다. 나는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를 다시 찾는다. 함께 오기로 한 남편이 공항에서 사라져 혼자 제주도에 도착한다. 나는 비자림을 찾는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의 해설을 듣는다. 비자나무를 바라보면서 남편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돌아본다. 피아노 강사였던 나는 수강생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단란한 삶을 꿈꾸지만 남편은 달랐다. 자유롭게 자란 아와 달리 남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기한 그림이라는 꿈을 찾겠다며 떠나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비자림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 덩굴과 떨어질 수 없는 비자나무처럼 자신도 남편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설사 죽게 되더라도...

 

 나무는 나무대로 덩굴은 덩굴대로 살고 있죠. 나무와 한길을 가면서도 한 몸이 안 되려고 버둥거리고 있수다. 저기 저 허연 가지를 좀 봐요. 비자나무 가지와는 좀 다르죠? 새들이 씨앗을 물어 와 나무에 똥을 싸고 해서 피어낸 가지랍니다. 비자나무는 자기와 습성이 다른 가지들도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조끄드레만 오라게(이리 와봐요). 비자나무와 덩굴이 기가 막히게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봐요. 쟤들은 서로한테 덤벼드는 게 없어. 덩굴이 제 속으로 파고들면 비자나무는 제 땅까지 내줄 거야. 그건 덩굴도 마찬가지야. 평행선은 결코 한 지점에서 만나지 않지. 선 하나가 기울이기만 해도 그건 평행선이 아니니까. 그래서 비자나무는 죽을 거야. (「비자림」, 141~142쪽)

 

 어쩌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 끊어질까 회피하는 대신 인정하고 나면 노력에 대한 믿음도 싹트지 않을까. 그 믿음이 「가족사진」처럼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말이다. 소설의 화자 ‘나’는 초등학교 5학년으로 판타지 소설을 쓴다. 평소에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던 가족들은 작은언니의 결혼식에 쓸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놀이동산에 모인다. 처음으로 함께 온 놀이동산, 가족들은 역시나 자신의 취향을 고집한다. 작은언니가 도착해 은하열차에 탑승하고 사진을 찍게 된다.

 

 ‘나는 착각한다. 착각은 나의 행복이다. 아버지가 고급 양복을 입고 열대 과일을 사 들고 들어오는 착각, 엄마가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클래식을 듣는 착각, 큰언니가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는 착각, 작은언니가 매달 내게 용돈을 주는 착각, 오빠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는 착각, 내가 쓴 판타지 소설이 실재가 되는 착각. 착각은 멈추지 않는다.’(「가족사진」, 163쪽)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에 서로에게 소홀하게 대하는지도 모른다. 폰트 개발자라는 경쟁자이면서도 룸메이트인 「우리들의 한글 나라」속 정연과 나는 ‘친구’라서, 행복을 위해 재혼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선택하면서 딸이라는 관계를 버리는 「효녀 홀릭」에서는 ‘가족’이라서, 3년 동안 혼자 보스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는 「흐르는 물에 꽃은 떨어지고」속 나는 ‘부부’라서 괜찮다고 위장하는 것이다. 이은조는 그 위장이 얼마나 위태로운가「전원주택」에서 잘 묘사한다.

 

 누구나 바라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지만 행복한 삶은 없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지인과 가족을 거부할 수 없어 그들을 위한 전원주택으로 전락한다. 집안을 청소하고 텃밭을 가꾸던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사는지 허무할 뿐이다. 가족, 친구가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주문을 외운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게 전부였던 것처럼,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텃밭이나 가꾸고 손님들 치다꺼리만 하려고 이사한 건 아니었다. 금세 사라지고 말 연기 속에서 나는 애써 위안을 찾았다. 그리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우리에겐 근사한 전원주택이 있다고. 나는 모두가 그리워하는 지상에 마지막 남은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전원주택」, 119쪽)

 

 근사하게 보이는 전원주택은 행복한 삶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진짜 행복이 아니었다. 관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심이 아닌 가식과 의무라는 장치로 이어가는 관계는 무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서투르고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내밀한 관계를 발견하고 지속하기에 삶은 견딜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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