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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이은조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평점 :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한다. 모두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나의 불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의 행복은 당장이 아니라 한 달 혹은 일 년 뒤로 미뤄도 괜찮다고 여긴다. 그러다 켜켜이 쌓인 불편은 화가 되어 폭발한다. 이은조의 소설집 『수.박.』속 인물의 관계가 그렇다. 8편의 소설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가족, 연인, 친구의 관계가 어떻게 단절되는지 보여준다.
표제작 「수박」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을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난주’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는 오빠와 돈타령이 끊이지 않는 엄마를 위해 난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올케와 조카까지 돌봐야 할 지경이다. 남편 뜻대로 형편이 좋아지면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지만 8년 동안 한 번도 피임을 한 적이 없었다. 거리를 헤매던 난주는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남편과 사랑한 맹세한 도시로 향한다. 8년 전 가보지 못한 절 근처 노점에서 한 노파와 마주한다. 함께 수박을 먹으며 노파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치 고단한 난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노파의 목소리는 수박처럼 달콤하다.
“수박씨는 꼭 뱉어내야 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안에서 수박이 열린다고. 씨가 있다고 수박을 안 먹으면 미련한 거지. 씨앗은 뱉으면 돼. 그냥 툭, 툭……”
“수박이란 넘이 그래. 겉만 보면 이게 무겁기만 하고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속이 빨갛고 단맛이 있을 거란 상상이 잘 안 되지.” (「수박」, 91쪽)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수박뿐일까. 살을 맞대고 자는 남편, 나를 낳아준 엄마의 속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 맘에 수박씨를 키우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관계란 그렇다. 나와 상대가 모두 열려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통이 단절된 관계도 소멸할 뿐이다.
난주가 꿈꾼 행복은 「비자림」의 화자 ‘나’의 꿈과 닮았다. 나는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를 다시 찾는다. 함께 오기로 한 남편이 공항에서 사라져 혼자 제주도에 도착한다. 나는 비자림을 찾는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의 해설을 듣는다. 비자나무를 바라보면서 남편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돌아본다. 피아노 강사였던 나는 수강생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단란한 삶을 꿈꾸지만 남편은 달랐다. 자유롭게 자란 아와 달리 남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기한 그림이라는 꿈을 찾겠다며 떠나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비자림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 덩굴과 떨어질 수 없는 비자나무처럼 자신도 남편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설사 죽게 되더라도...
‘나무는 나무대로 덩굴은 덩굴대로 살고 있죠. 나무와 한길을 가면서도 한 몸이 안 되려고 버둥거리고 있수다. 저기 저 허연 가지를 좀 봐요. 비자나무 가지와는 좀 다르죠? 새들이 씨앗을 물어 와 나무에 똥을 싸고 해서 피어낸 가지랍니다. 비자나무는 자기와 습성이 다른 가지들도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조끄드레만 오라게(이리 와봐요). 비자나무와 덩굴이 기가 막히게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봐요. 쟤들은 서로한테 덤벼드는 게 없어. 덩굴이 제 속으로 파고들면 비자나무는 제 땅까지 내줄 거야. 그건 덩굴도 마찬가지야. 평행선은 결코 한 지점에서 만나지 않지. 선 하나가 기울이기만 해도 그건 평행선이 아니니까. 그래서 비자나무는 죽을 거야.’ (「비자림」, 141~142쪽)
어쩌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 끊어질까 회피하는 대신 인정하고 나면 노력에 대한 믿음도 싹트지 않을까. 그 믿음이 「가족사진」처럼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말이다. 소설의 화자 ‘나’는 초등학교 5학년으로 판타지 소설을 쓴다. 평소에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던 가족들은 작은언니의 결혼식에 쓸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놀이동산에 모인다. 처음으로 함께 온 놀이동산, 가족들은 역시나 자신의 취향을 고집한다. 작은언니가 도착해 은하열차에 탑승하고 사진을 찍게 된다.
‘나는 착각한다. 착각은 나의 행복이다. 아버지가 고급 양복을 입고 열대 과일을 사 들고 들어오는 착각, 엄마가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클래식을 듣는 착각, 큰언니가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는 착각, 작은언니가 매달 내게 용돈을 주는 착각, 오빠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는 착각, 내가 쓴 판타지 소설이 실재가 되는 착각. 착각은 멈추지 않는다.’(「가족사진」, 163쪽)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에 서로에게 소홀하게 대하는지도 모른다. 폰트 개발자라는 경쟁자이면서도 룸메이트인 「우리들의 한글 나라」속 정연과 나는 ‘친구’라서, 행복을 위해 재혼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선택하면서 딸이라는 관계를 버리는 「효녀 홀릭」에서는 ‘가족’이라서, 3년 동안 혼자 보스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는 「흐르는 물에 꽃은 떨어지고」속 나는 ‘부부’라서 괜찮다고 위장하는 것이다. 이은조는 그 위장이 얼마나 위태로운가「전원주택」에서 잘 묘사한다.
누구나 바라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지만 행복한 삶은 없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지인과 가족을 거부할 수 없어 그들을 위한 전원주택으로 전락한다. 집안을 청소하고 텃밭을 가꾸던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사는지 허무할 뿐이다. 가족, 친구가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주문을 외운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게 전부였던 것처럼,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텃밭이나 가꾸고 손님들 치다꺼리만 하려고 이사한 건 아니었다. 금세 사라지고 말 연기 속에서 나는 애써 위안을 찾았다. 그리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우리에겐 근사한 전원주택이 있다고. 나는 모두가 그리워하는 지상에 마지막 남은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전원주택」, 119쪽)
근사하게 보이는 전원주택은 행복한 삶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진짜 행복이 아니었다. 관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심이 아닌 가식과 의무라는 장치로 이어가는 관계는 무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서투르고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내밀한 관계를 발견하고 지속하기에 삶은 견딜 만하다.